새해 전야에 지하철로 42번가에 갈 때였던가요/아니 돌아올 때였을 겁니다 나는 덩치 큰/젊은 흑인 노동자와 객실 문 안쪽에 끼어들어서 가려던/아이들을 기억합니다 사내는 큰 어깨로/문을 열어젖힌 채 아이들과 농담을 하고 있었습니다/그의 바지는 기름에 절었고 한쪽의 겹주머니엔/줄자가 클립으로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나는/그 어린 소년 소녀와 그들 아버지의 눈을 잊지 않을 겁니다/그 외에 이 지상에서 중요한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상징학연구소」(2024년 여름호) 전문
유리탈베는 “숲과 호수와 강의 나라 에스토니아”의 작가다. 특이하게도 그의 시에는 제목이 모두 ‘*’로 표기되어 있다. 제목이라기보다 제목의 대리물이다. 제목이 시의 장식에 지나지 않거나 관례적인 장치에 불과하냐는 의견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니, 여기서는 시에 관한 시인의 고민을 확인하는 걸로 만족하자. 또 하나 주목하고 싶은 건 “시는 우리의 사상과 철학을 드러냅니다”라는 잡지 표지에 박힌 문구다. 인용한 유리탈베의 시를 읽노라면 이 문구의 의미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시에 등장하는 ‘42번가’는 맨해튼을 동서로 횡단하는 거리로, 뉴욕의 가운데 주요 거리 중 하나다. 미드타운의 지리를 파악하려면 이 거리를 기준으로 하면 위치 관계를 알기 쉽다고 한다. 길이는 총 2.0 km이다. ‘42번가’하면 뮤지컬 영화 <브로드웨이 42번가>가 떠오르고, ‘뮤지컬’해도 역시 떠오르는 건 <브로드웨이 42번가>의 이미지다. 화려한 무대와 의상, 현란한 춤과 흥겨운 음악, 단순하면서도 비현실적인 해피엔딩의 스토리… 이 모든 조건을 갖춘 뮤지컬의 대표적 작품이 바로 <브로드웨이 42번가>이기 때문이다. 뉴욕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는 필자가 42번가를 경박하고 현란한 곳, 범죄에 노출되기 쉬운 거리라 치부한다고 해서 편협하다고만 이야기할 수는 없는 이유다. 대중문화의 역기능 중 하나가 객관적 판단이 배제된 주입식 이미지이니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42번가의 기적』이란 책도 널리 알려져 있다. 저자는 20여 년을 뉴욕의 학교와 범죄, 정치와 정책에 관해 쓰는 데 소비한 도시 저널리스트로, 이 책은 타임스퀘어에 대한 저자의 사색에서 비롯한다. 타임스퀘어는 의식적으로 재설계한 도시 공간을 일컫는 말이고, 대중문화와 함께 진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하튼 우리는 다시 시로 관심을 돌려 화자가 탄 새해 전야의 지하철 안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집중해서 볼 건 “그 어린 소년 소녀와 그들 아버지의 눈”이다. ‘사내’의 농담이 진정 농담이었다면 저들의 눈빛은 흥미진진한 호기심으로 반짝였으리라. 반대로 사내의 농담이 저들에게 ‘희롱’으로 다가왔다면 그 눈빛은 공포와 불안으로 달리는 전철처럼 내내 흔들렸으리라. 그러니 그들의 눈빛 외에 “이 지상에서 중요한”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