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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기도로 자라나는 신앙
우리를 당신과의 친교로 초대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 초대에 응답하기를, 바꿔 말하면 신앙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하나 되어 사는 것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으면 기쁨과 행복을 느낍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는 사랑은 조건적이고 지속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곧 깨어지거나 식어서 실망과 상처를 안겨 주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지속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성부께 기도하셨고(루카 23,24 참조), 위기의 순간에 스승을 저버린 못난 제자들을 부활 후에 다시 부르셔서 사도로 삼으셨습니다.(요한 20,21 참조) 또한 당신을 세 번이나 배반했던 베드로에게 교회를 이끌어 나갈 목자의 직무를 맡기셨습니다.(요한 21,15-19 참조) 이렇게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 상황과 기분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는 항구한 사랑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과 하나 되어 당신의 참된 사랑 안에서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당신과의 친교로 초대하십니다. 신앙은 그 초대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번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했다고 해서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은 그 응답이 흔들림 없이 굳건해지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애써야 합니다. 결혼식에서 서로 사랑하고 신의를 지키겠다고 약속함으로써 부부의 연을 맺은 두 남녀는 일생 동안 그 약속에 충실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신앙인도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후에는 그 응답에 충실하게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만남을 통해서 돈독해진다면 하느님과의 관계는 기도를 통해서 돈독해집니다.
누구보다도 성부와 깊은 친교 속에 사셨던 예수님께서는 꾸준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밤늦게 외딴 곳에 가셔서, 혹은 제자들이 아직 잠자고 있는 이른 아침에 홀로 깨어나 기도하셨습니다. 식사할 틈도 없이 바쁘게 사셨지만 자주 아버지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시간을 마련하셨지요. 또한 중요한 순간마다 기도하셨습니다. 열두 사도를 뽑기 전에도 밤새워 기도하셨고, 수난을 앞두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루카 22,39-44 참조)
기도는 예수님 삶이 원동력이었습니다. 기도 덕분에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복음을 선포하고 몰려드는 아픈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바쁜 일상을 견디실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제자들의 지속적인 이해 부족과 나약함에 낙담하지 않으시고, 반대자들의 비난과 저항에도 굴하지 않으시면서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굳건히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실 수 있었던 것도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셨으니 그분을 믿는 이들도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는 마음이 서서히 약해집니다. 그런 가운데 점점 영적인 귀가 닫히고 마음이 메말라 가면서 하느님의 말씀이 따분하게 여겨지고, 세상의 목소리에 솔깃하게 됩니다. 물을 주지 않으면 화초가 시들어서 말라 죽듯이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은 생기를 잃고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우선 기도는 매일, 꾸준히,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성 요셉 수도원의 이수철 원장 신부님은 바로 이런 점을 강조합니다.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 기도하지 말고 좋든 싫든, 기쁘든 슬프든 의지적으로 매일, 꾸준히, 규칙적으로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기도 생활의 기본입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은 요령이나 지름길도 없고 도약이나 비약도 없습니다. 기도는 이론이나 기술이 아니라, 삶이요, 실천이요, 수행입니다. 잘하고 못하고가 없고 지금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기도 생활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와 같습니다.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기도 생활에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나무가 며칠 사이에 부쩍 자라는 게 아니라 꾸준히 보이지 않게 자라듯 기도 생활의 성장도 그러합니다. 꽃이 피었다 하여 당장 열매를 기대할 수 없고 열매가 익어 가기를 기다려야 하듯 기도의 열매도 그러합니다. 그러니 열매의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쉬지 않고 꾸준히 하면 마침내 이룰 수 있다는 믿음으로 소처럼 한 걸음 한 걸음 항구하게 기도하십시오.”
이 신부님의 권고대로 우선 기도는 “의지적으로 매일, 꾸준히,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고 명하셨습니다. 운동도 의지적으로 매일, 꾸준히, 규칙적으로 해야 효과가 있듯이 기도도 그렇습니다. 한국의 순교자들이 바로 그렇게 기도하셨지요. 그들은 신부님을 만나서 성사의 도움을 받을 기회가 매우 적었지만, 꾸준히 아침기도, 저녁기도, 묵주기도 등을 바치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도 생활에서 힘을 얻어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웃으면서까지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일상 기도를 꼬박꼬박 바치다 보면 기도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간혹 기도가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더라도, 때로는 분심과 졸음이 섞인 기도라도 매일, 꾸준히, 규칙적으로 바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러면 비록 특별한 느낌, 위로의 목소리, 뜨거운 감정은 없더라도 하느님께서 내 곁에 계신다는 든든함을 느끼면서 마음의 평화와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캐나다의 오블라티 선교 수도회의 로널드 롤하이저 신부님은 <聖과 性의 영성>이란 책에서 자신의 기도 체험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깊이 있는 기도란 하느님과 특별히 가까이 있었던 체험의 시간이 아니며, 신적 신비에 깨어 있는 시간도 아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는가! 기도는 분심으로 가득 찼고, 내적 방황과 졸음과 혼란과 지루함이었다. 그러나 드물게 기쁠 때가 있다. 주님의 현존 안에서 머무르거나, 느끼고, 생각하고, 감지하고, 체험한 것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주님 앞에 보여 드릴 때 그 사실은 주님을 기쁘게 해드린다. 주님이 어떤 식으로든 어디에서든 나를 사랑하심을 나는 알고 있다. 사람에게 안기는 느낌을 받지 못할지라도, 위로의 목소리 같은 소리를 듣지 못할지라도, 누군가의 얼굴에 가득한 미소를 보지 못할지라도,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비록 내가 알아채지 못할지라도 하느님은 여전히 내게 말씀하시고 나를 보시고 껴안고 계신다.”
둘째, 매일 꾸준히 규칙적으로 기도하되, 항상 하느님의 뜻을 앞세워야 합니다. 기도에는 개인적인 감사, 청원, 탄원, 호소 등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포함시켜야 하는 것은 내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모범을 보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라고 하셨습니다.(마태 6,10 참조) 그리고 수난을 앞두고 당신 스스로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수난의 잔이 비켜 가는 길을 허락하지 않으셨고, 당신 뜻대로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류를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구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장 눈앞의 즐거움이 아니라 궁극적인 행복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청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출세하고 싶어서 탁월한 능력을 청했는데 순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시기도 합니다. 많은 일을 하고 싶어서 건강을 청했는데 보다 큰 선을 이룰 수 있도록 병고를 주시기도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해지기를 청했는데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시기도 합니다.
셋째, 개인적인 기도만이 아니라 교회가 마련한 기도 또한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나자렛 예수>라는 책에서 우리의 기도는 어떠해야 할지 알려 주셨습니다. 우선 기분은 개인의 관심사를 기도 내용으로 삼을 수 있고, 삼아야 한다고 역설하셨습니다. “기도는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에서, 우리의 아쉬움에서, 희망에서, 기쁨에서, 우리가 당하는 재난에서, 죄에 대한 부끄러움에서, 그리고 좋은 것을 받고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올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래야 기도가 온전히 개인적인 기도가 될 수 있다.”(요제프 라칭거, <나자렛 예수>, 바오로딸, 2012)
일상생활에서 겪는 희로애락에서 진솔하게 우러나오는 개인적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에게 가장 가까이 데려가는 형태의 기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런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기도는 생생한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자칫하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위험도 있습니다. 자신의 원의에 집중한다 보면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것을 청할 수 도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기도문은 이런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면서 기도를 배우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래서 베넥딕토 16세 교황님은 교회 기도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문에 기댈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문은 온 교회와 각 사람이 하느님을 만나는 가운데 형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문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 각자의 기도와 하느님상像은 주관적인 것이 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이라기보다 우리 자신을 투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기도문은 기도를 가르쳐 주는 학교로써, 우리가 자신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하느님과 이웃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가톨릭교회는 이런 기도문을 기도서와 전례서에 수록해 놓았습니다. 때로는 기도서에 글로 고정된 기도나 미사 중에 반복되는 기도문이 따분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목숨 바쳐서 지킨 참된 신앙과 지혜가 배어 있는 기도입니다. 교회의 기도문에 맛 들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건강에 좋은 음식과 자극적이지 않고 다소 심심하듯이 영신 건강에 좋은 기도 역시 자극적이지 않고 다소 심심합니다.
우리는 매일, 꾸준히, 규칙적으로 그리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교회와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느님과의 ‘채널’이 계속 열려 있게 되어, 그분의 부르심을 더 분명하게 듣고 그분의 손길을 더 확실하게 감지하게 됩니다. 달리 표현하면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튼실하게 지속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지속될 때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우리 존재의 내밀한 곳에 계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영이 우리를 건강하게 살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의 도움으로 신앙에 위협이 되는 요소들을 밝은 눈으로 식별할 수 있고 그것을 이겨 낼 힘도 얻게 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하여 그분과의 친교 안에 머무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기도 없이는 그 안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혹시 성사 없이는 구원될 수 있을지 몰라도 기도 없이는 구원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구원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항구한 기도로써 신앙이 성장하면 하느님과의 친교가 돈독해집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 안에 살기 때문에 뭔가 다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높은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는 중에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9,29)라고 전합니다. 꾸준한 기도로써 신앙이 성숙한 사람에게서도 역시 밝은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요? 어느 인터넷 카페에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이 이렇게 실려 있더군요.
기도하는 사람은 참 신비한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큰소리치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하느님 손바닥 안에 있는 일이라는 것을 믿고,
조용히 하느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참 잘 참고 기다립니다.
물론 해야 할 일은 하지만,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너무 쉽게 자신하지 않고,
그저 하느님이 직접 일하실 것을 기다립니다.
이러한 기다림은 위대한 행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겐 실망이란 없습니다.
아무리 앞길이 캄캄해도,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지 않고 나날이 더 힘들어지기만 해도,
기도하면 길이 열립니다.
기도하면 하느님이 결코 내버려 두시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은근함을 느낍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 자신도 어려운 가운데 있지만,
그를 만나면 괜히 힘이 납니다. 희망이 솟구칩니다.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신앙인은 “세상의 소금과 빛”(마태 5,13-14 참조)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명은 혼자 힘으로는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수행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며 신앙이 무르익은 신앙인은 위의 글이 잘 표현하듯이 겸손, 인내, 확신, 희망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성숙한 신앙인들이 많아질 때 교회가 쇄신되고 정화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치 눈에 보이듯이 제시”(사목헌장 <기쁨과 희망>, 21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주님이 어떤 식으로든 어디에서든
나를 사랑하심을 나는 알고 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아~멘.
감사합니다
참으로 소중하고 절실히필요한 내용입니다
많은 힘을 받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실천하겠습니다
아멘~~
매일 꾸준히 규칙적으로...
소중한 말씀 맘에 새겨 기도에
힘쓰겠습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기도는 이론이나 기술이 아니라,
삶이요, 실천이요, 수행입니다.
잘하고 못하고가 없고 지금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