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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짓기와 글쓰기의 거리
-김만년, 《사랑의 거리 1.435미터》(지식과감성, 2022)-
方 旻
1. 글은 짓는[作文, composition] 것인가, 쓰는[書文, Write] 것인가? 필자가 ‘초, 중학교’에 다닐 땐, 성탄절 즈음 국군장병 위문편지와 유월 육이오사변 기념일 반공 글은 짓는 글이었다. 인생 체험과 거리를 둔 머리에서 만든, 논리와 개념 중심인 글로부터 글은 짓는 게 아니라 쓰기도 하는 것이란 걸 오랜 뒤에 깨달았다. 특히 수필은 써야 하지 짓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지닌 필자가 유사한 문제를 김만년 작가의 첫 수필집 《사랑의 거리 1.435미터》에서 발견한 건 우연이 아니다.
작금 우리나라 문단에서도 수필을 쓰지 않고 짓는 경우가 적잖다. 필자가 보기에 작문형 수필은 김진섭 ‘백설부’, 이양하 ‘신록예찬’, 민태원 ‘청춘예찬’ 등이라면, 서문형 수필은 피천득 ‘인연’, 목성균 ‘누비처네’, 윤오영 ‘방망이 깎던 노인’ 등이다. 작문형 수필은 작가 관념을 중심으로 개념적 추상적 한자어 단어를 주로 쓰면서 화려한 포괄적 이미지 중심 문장이 대세라면, 서문형 수필은 작가 체험을 줄기로 현장형 사실적 문체로 평이하게 실제 겪은 사연을 서술한다. 물론 이처럼 둘로 대조하여 개념화하는 건 차이를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지만 숨겨진 세부 진상을 간과하기 쉽다. 어쨌든 바람직한 수필은 작가 체험에 근거하되 이지理知로 만드는 게 아니라, 감성感性으로 쓰는 글이라는 게 필자 나름 수필관이다.
2. 김만년 작가 문단 이력은 꽤 특이하다. 작고한 모친을 회상하는 글로 2003년에 ‘공무원 문예대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후, 2010년, 2011년, 2014년, 2015년, 2017년을 거쳐 2019년에도 ‘김포문학상’을 받았다. 그 사이 그는 2015년에 ‘경남신문신춘문예’, 2018년에 ‘에세이문학’으로 정식 등단했다. 통상 문단에선 신춘문예나 잡지 추천을 거쳐 작가가 된다. 등단한 뒤에도 그는 유별나게 공모전에 투고한다. 공모전 수상은 상금 받고 등단도 인정받는 게 통례다. 한두 번 공모전에서 입상하면 그 뒤로는 오롯이 작품 활동에 치중하는 게 일반적이다. 김 작가는 이런 면에서 예외다. 상금 내건 공모전은 다양하나 공통점은 주최하는 곳(기관)의 홍보와 광고성이 주요 목적이다. 작가의 코레일 홍보실 근무 경력과도 관련 있는 듯 보이지만 그의 이런 행태는 글을 짓는 것과 연관되게 보인다.
공모전은 반공 글짓기처럼 작가 체험과 거리를 둔 홍보성 내용을 주요 참가 조건으로 내세운다. 비용 들여 글 공모하는 것은 주최기관 나름 공사公私 이익을 위한 일종 사업이다. 글의 수단화와 다르지 않다. 이데올로기를 위해 문학을 선전 수단으로 삼았던 카프 사례와 맥락은 동일하다. 그런 공모전에 그는 근년(2019년)까지 글솜씨를 자랑했다. 십수 년(2003-2019)에 걸친 다수 공모전 수상은 당연히 빼어난 글솜씨 덕이다. 아무나 공모전에서 수상하지 못한다. 그만한 능력을 갖추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공모전 외에 여러 잡지에서 우수작품상으로 선정된 경우도 여러 번이다. 마땅히 다른 작가보다 뛰어난 역량이라 그랬을 것이다. 그만의 남다른 탁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3. 다방면으로 도드라지게 활동하는 그가 《사랑의 거리 1.435미터》에서 수필을 만드는지, 또는 수필을 쓰는지 알아보자. 앞에서 다소 성급하게 일반화한 두 가지 축, 수필은 짓는 것인지 쓰는 것인지부터 시작한다. 김만년, 그는 공모전에서 수필을 선보였는데 공모전은 어떤 제재나 주제를 미리 정해준다. 다시 말하면 그는 만드는 글, 짓는 글로부터 수필 문단에 들어왔을 거란 추정이다. 처음 등장한 2003년 수상작 <상사화는 피고지고>에서는, 짓는 글은 필연적 작위성과 추상적 관념성을 띤다는 전제의 타당성을 찾기는 어렵다. 그가 수필을 짓는다는 생각을 하게 한 글은 2015년 수상작 <독도, 닻을 내리다>를 읽고 나서다. 추정컨대 작가가 독도를 체험한 것은 관광 유람선을 타고 동도 앞바다에 마련된 선착장에서 독도를 바라보고 사진 몇 장 찍고 잠시 머물렀다 돌아온 게 전부일 듯싶다. 서도에서 집을 마련해 살았던 어부도 아니고, 동도 수비대로 근무한 경찰도 아니었을 것이다. 혹은 독도 근처에서 조업한 어부였을 리도 없다. 그가 몇 시간 독도 근처 해상을 오간 것일 테고, 그 외는 농사를 “원경으로만 보았던 사람들”과 “낭만적으로 보는” 수준에서 독도를 알 뿐 “겪어본 사람”(<민들레농장 열애기>)은 아닐 게다. 이 추론이 타당하다면 그는 결국 글을 만들 수밖에 없었을 터. 윗글에서도 추정 서술 어미인 “~으리라”, “~게다”, “~겠는가”를 자주 쓰고, 고대 역사를 언급하며 지리상 특징을 끌어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따위는 바로 이러한 작위성 글 때문이리라. 이건 역시 2011년 《대구일보》 수상작인 <탈>에서도 동일 궤적을 보인다. 그가 탈춤을 직접 추거나 탈을 만들거나 하는 체험은 없었을(?) 테고, 구경꾼으로서 탈춤판을 본 게 전부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앞글과 달리 결미에서 자성自省의 실마리를 보이는 게 조금 다르다. 글에 작가 삶의 어느 부분을 틈입시키지만 이것 역시 관념적 성찰일 뿐이다. 결국 글을 지었을거라는 판정을 벗어나긴 쉽지 않다.
4. <헛기침>을 보면 공모전 사냥꾼(?)이란 생각도 든다. 두 해 전에 지명도 높은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자가 그보다 격이 뒤진(?) ‘투데이신문’에서 같은 종목에 나선 것을 마주하면 그렇다. 그는 왜 이런 식으로 공모전에 집착할까? 얼마간 상금 욕심인가, 지명도 욕망인가, 문장 승부욕인가, 자기 확인 욕구인가, 아니면 순순한 수필 창작 열정인가. 이 중 하나에 속하거나 하나도 해당 안 되거나 몇이 섞인 것이거나 아니면 이 물음 자체가 빗나간 것일 수도 있다. 보통 문단 입문 자격을 갖추면 부지런히 글 써 다양한 지면에 발표하려고 열중한다. 등단 작품보다 더 향상된 글을 쓰려고 불철주야 애쓰는 것이 당연한 경로다. 그는 등단 과정(공모전과 신춘문예)에다 2018년에는 《에세이문학》 추천까지 거쳤는데, 또 익년에 ‘김포문학상’에 응모한다.
상인에게 상도가 있듯 문인에겐 왜 문도文道가 없겠는가. 그가 ‘경남신문신춘문예’에서 당선(2015)했다면 작가 길로 들어선 것인데, 2017년 ‘『투데이신문』 전국직장인신춘문예’에 또 응모한다. 이것도 의아하다. 왜냐하면 유수의 ‘경남신문’에 비해 ‘투데이신문’은 그렇지 못해 다시 응모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활동 지면을 얻기 위해 『에세이문학』에 천료(2018) 받은 것은 납득할 만하다. 그런데 그는 다음 해에 ‘김포문학상’에 응모한다. 잡지나 공모전에는 미발표작과 표절 금지와 신인 등의 제약 조건을 성문화하지만 불문률不文律도 있다. 기성 작가 참가를 허용하는 예외라서 아마도 그는 응모하였을 것이지만 2019년 ‘김포문학상’ 응모는 피해야 했다. 그 전에 훨씬 상급 응모전에서 수상한 바 있지 않은가? 일견 매문賣文(?)일 수도 있는 이런 행태는 일반 상식, 아니 필자 관점에는 어긋나 보이지만 김 작가를 비난할 권리는 필자에겐 없다. 다만 꽤 특이한 경우로 바라볼 뿐 어쩌겠는가.
시와 소설은 허구가 핵심이므로 이 작위성을 용인한다. 하지만 작가 인생을 걸고 쓰는 수필에선 기예보다 체험 진정성을 높이 산다. 왜 수필이 중년 이후에 쓰는 거란 말이 있는가. 삶의 숙성, 자기 인생을 응시할 충분한 경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기 고백과 반성이 소금처럼 수필에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글을 짓는 경우에는 화려한 문장과 기발한 상상 이미지에 감탄할 순 있지만, 진솔한 체험을 쓴 글에서처럼 감동하진 않는다. 수필에선 빼어난 문장 기예技藝보다 어둔하고 더듬거리는 진정성이 더욱 앞서야 한다. 누구라도 영화 ‘아바타2’를 보고 감탄할 수 있지만 ‘영웅’처럼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 어렵다. 이 차이가 바로 글짓기와 글쓰기 거리다. 그래선가 김만년 글에는 자성 장면이 드물다. <가재, 꼬리를 내리다>는 그에게 몇 편 안 되는 짓지 않고 쓴 글이다. 가재와 작가 처지를 비교하여 퇴직 전후 자신을 돌아보지만 끝내 진솔한 자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 제재에선 반성할 맥락과 정황은 충분해 보이지만 그는 담아내지 못한다. 그보단 “가재처럼 강바닥을 휘젓고 다니던 시절”과 “당당한 퇴근길”에서 “발걸음이 까치발이 되”고, “동병상련, 저 신세가 내 신세 같”아 “꼬리를 내리”고 “납작 엎드린다.”는 어느새 변화한 입지에 비감 어린 자기 연민을 하소연한다. 자기반성 장면이라기보다 세월 따라 바뀐 몰락 처지에 대한 체념과 한탄, 자작自作 위안을 읽는다. 그에겐 살면서 자연스레 성숙한 인생에서 스르륵 쓰는 글보다 유려한 문장 기교를 앞세워 공들여 짓는 글이 더욱 익숙해 보인다.
5. 주로 짓는 글 특징은 다음의 것들. 우뚝한 화려한 문장이다. 화려체 문장에서 경계할 일은 외화내빈이다. 익히 잘 알려진 건 김진섭 <백설부>다. 번화하게 눈발 퍼붓듯 쏟아지는 추상 관념어에 빠져들다가 문득 말들의 잔치를 벗어나면 공허함을 느낀다. 어느 원로 수필가는 이런 것을 “쓰고 읽는 말맛”으로 강조하기도 하나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언어유희가 난무하는 것은 짓는 글에서 보게 되는 일종 이태준식 미문美文주의 특징 중 하나다. 이런 글은 스토리성-서사 구조(플롯)가 없거나 빈약하다. 각 문단은 주로 병렬 구성을 선호한다. 제시한 관념 나열은 문단 간 상호 연결성이 미미하다. 너른 상에 다채롭게 늘어놓은 잔칫상을 보듯 화려하지만 실상 깍두기 옆에 피어오르는 구수한 김발 속 국밥 한 그릇의 포만감에도 미치지 못한다. 김만년 작가의 화려체 문장 대표격인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노을을 읽다>는 오브제에 대한 다채로운 상념을 엮어낸 글이다. 원관념을 보조하고 이미지화하려는 과장된 수사가 다채롭다. 미문으로 치장한 화려한 이미지 뒤에는 체험 서사의 개운한 맛을 느끼기 쉽지 않다. “수평 금반 위에서 은빛 무희들이 왈츠를 추는 듯 비상하는 선율”, “주홍빛 휘장 너머로 파리보광 칠보사원이 층층구름”, “서천 구만리가 광배光背에 쌓인 듯”, “중천에 이글거리던 욕망의 스펙트럼이 점점 노을빛으로 응집” 등에서 보인다. 이런 수필 작법은 그의 다른 글에서도 자주 만난다. 2019년 김포문학상 수상작 <기적소리, 그 멀고 아련한 것들에 대하여>도 그가 살아보지도 못한 ‘일제 때’나 ‘전쟁 시기’ ‘머나먼 메콩강’을 동원하는 등의 추상적 작위성과 기관사로 체험한 ‘80년대 기적 소리’에 공시적으로 병렬하여 글을 만들어 낸다. 수필에서 스스로 체험하지 않은 것을 마치 겪은 듯 상상의 허상으로 지을 때 진정성을 의심하게 된다. 시나 소설에서 가능한 이런 작가와 무연성無緣性은 수필에선 위험한 줄타기다. 이처럼 문장 작위성은 짐짓 작가 신조어(네이 버사전 기준)도 거침없이 쓰게 한다. <철의 향기>에서 “고소무리”, <탈>에서 “고묘히”, <사랑의 거리 1.435미터>에서 “곡정曲情”, <상사화는 피고 지고>에서 “등열登熱하는”, “토질하고” 등등.
다음은 <막걸리애愛>에서처럼 실재에서 접하는 리얼리티가 부족하다. 개념화와 요약화에 해설까지 붙여 체험 스토리의 서사가 부재하다 보니 관념적 개괄성은 필지必至하게 되는 약점이다. 여기에 작가 관념을 펼치기 위한 사전 작업이 필요해 서두가 대체로 길고 전제가 경직된다. 관념으로 접근하는 개괄성 글이기 때문이다. <불임의 계절>도 체험적 구체성이 부족하여 내용을 개괄하고 요약하여 제시하고 서술 대상과 거리를 두면서 타자화에 따른 개념적 접근을 보인다. <마지막 벌초 시대>는 성묘 유감을 다룬 글인데 작위적 글의 특징인 해설식 내용에다 개념적 의미를 삽입하여 산문적 계몽성을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욕구를 보인다. <탑골애상>은 대상을 바라볼 뿐 작가 내면 시선은 없거나 미미하다. 관찰자 시점에서 독백 시점으로 해설하며 관념을 의미화하는 데 몰두한다. 선지자 목소리처럼 거리를 띄어 두고, 대상과 대화를 피한다. 이것들은 글을 쓰지 않고 만들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다. <두부야 미안해>는 스토리 따라 전개하는 확산 전개형 글쓰기가 아니라, 건축 담장 블록을 쌓듯 관련 사례를 모아 짓는 병렬 산개형 글이다. 그러다 보니 문단 간 연결은 유기체적 관계라기보다 물리적이다. 이런 글은 부가적으로 점잖은 호통이나 세상 어른으로서 선지자적 계몽성마저 풍긴다. <개나리꽃 단상> 역시 공감하는 눈물 흘리기가 아니라 명문名文 조사弔辭를 읽는 느낌이다. 공유 체험이 부재한 상황에서 언어 치장만으로는 진정성을 위태롭게 해 화려한 조사 너머로 말의 형해形骸만 찬연할 뿐이다. 차라리 명문 조사보다 진실한 공감 눈물 한 방울이 더욱 값지다. 왜냐하면 공감 눈물은 짓지 않고 쓴 것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6. 공모전에서 수상한 김만년, 그는 재능이 우등한 작가임은 분명하다. 이건 글을 짓든 쓰든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다만 수필은 짓기보다 써야 좋다는 개인 편견으로 그의 수필집을 섭렵했다. 그가 주로 글을 만드는 작가에 속한다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모든 글을 짓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수필집에서 진솔한 체험을 바탕으로 쓴 글을 만날 수 있어 반갑다. 몇 편을 들면, <양치기 개와 춤을>, <아내의 그림>, <두 켤레의 운동화>로서 비교적 최근작이다. 그가 이제 글을 짓는 데서 쓰는 데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 내심 환영한다. 그가 애초부터 글을 짓는 습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2011년 작인 <아내의 붓다>는 짓지 않고 쓰려고 했다.
김만년 글로 장황하게 살펴보았듯 글은 짓기도 하고 쓰기도 한다. 수필이라고 오로지 쓸 수만은 없다. 당연하게 짓기도 한다. 짓기보다 쓰는 게 좋긴 하지만 모두 쓰기만으로 수필을 완성할 순 없다. 어느 글에서건 짓기도 하고 쓰기도 한다. 어느 부분이 더 많은가의 분량과 비율 문제다. 좋은 수필은 짓기와 쓰기가 적당 비율로 앙상블을 이룰 때 탄생한다. 독백 강의형 짓기와 신변 수다형 쓰기를 공감 대화형으로 조율할 때 읽기 좋은 감동형 수필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글에서 짓기와 쓰기 문제를 두루두루 다뤄볼 수 있는 김만년 《사랑의 거리 1.453미터》는 어쨌든 필자에겐 문제작인 건 틀림없다.(<<좋은수필>>, 2023-4, 179-18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