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7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38-4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
인간은 사물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가치(value,價値)란 ‘주관 및 자기의 욕구, 감정이나 의지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쉬운 말로 값어치를 말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품(商品)은 모두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제적 가치 외에 육체적인 쾌적·건강도 가치 있는 것이며, 나아가 인간의 정신적 활동에 만족을 주는 가치가 있습니다. 즉 논리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 미적(美的) 가치, 종교적 가치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가치란 인간을 떠나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치를 감득(感得)하는 인간의 존재가 있어야 비로소 존재하는 것입니다. 또한 가치가 생기기 위해서는 대상에 관계하는 자기의 일정한 태도, 즉 평가 작용이 예상되며 그러한 평가 작용의 주체인 자기성격에 따라 가치 자체에도 개인적·사회적·자연적·이상적이라는 구별이 생길 수 있습니다.
철학이 추구하는 논리적·도덕적·미적·종교적 가치 자체는 각 사람의 주관을 넘어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입니다. 이런 보편타당성을 가진 가치의 객관성을 H.리케르트는 ‘타당성(Gültigkeit)’이라 하고 가치철학을 수립하였습니다. M.셸러는 실질적 가치윤리학을 전개하여 쾌적가치 보다는 생명가치가, 생명가치보다는 정신가치가 높으며 그 중에서 종교적 가치를 최고로 한다는 가치 서열(序列)을 주장하였습니다. 또 칸트는 각 사람의 인간성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내적이며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다고 하여 이 가치를 ‘존엄(尊嚴)’이라 하고, 도덕적 가치를 최고의 가치로 보았습니다. 이런 보편타당성을 가진 가치의 해명을 중심문제로 삼는 것을 가치론이라고 합니다.
또 쾌적 가치를 실용적 가치라고도 하고, 인격적 가치, 종교적 가치로 구분하고 서열을 두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실용적 가치로써 이방인들이 최고의 가치로 삼는 것들은 소유, 돈, 오락, 취미, 여가, 스포츠, 건강 등이 여기에 속하는데 이것들은 좋은 것들이고 우리들이 추구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인간에게 안정과 편리함, 즐거움, 쾌감을 어느 정도의 만족을 줄 수 있을 뿐 인간이 바라는 진정한 행복은 주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이 실용적 가치보다 한 단계 우위의 가치는 인격적 가치로 우정, 신뢰, 예의, 의리, 마음의 정(情) 등이 포함됩니다. 이것이 있을 때 인간은 더 행복하게 되고 더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높은 가치를 인간은 추구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더 충족하게 해 주고, 행복하게 해 주는 가치를 우리는 종교적 가치라고 부릅니다. 이 가치는 희생, 봉사, 기도(명상, 묵상), 선행, 자발적 가난(청빈), 자발적 순결(정결), 자발적 순종(순명) 그리고 아가페적 사랑 등을 말합니다. 이 종교적 가치들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기워주고, 메꿔주며, 사회를 정화하고, 썩지 않게 해 주고 더 행복한 세상으로 바꿔줍니다. 그러나 이 종교적 가치보다 더 큰 절대적 가치가 있습니다. 바로 종교적 가치를 있게 한 하느님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최고의 가치이신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인간은 행복에 대한 갈망은 끝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적 가치를 사는 사람들을 보고 우리는 ‘파스카의 삶을 산다.’라고 말합니다. 파스카의 삶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실용적 가치를 추구하던 사람이 인격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고, 인격적 가치를 추구하던 사람이 종교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고, 다시 종교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 온전히 최고의 가치인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이 바로 파스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파스카의 삶을 살 것을 말씀하십니다.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 냉정히 살펴보고 세상을 사는 지혜의 길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느님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기는 어렵습니다. 절대적인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하는 삶을 살기는 정말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파스카의 삶을 살기 위해서 가치를 실용적인 단계에서 인격적인 단계로, 인격적인 단계에서 종교적인 단계로 종교적인 단계에서 하느님과 일치하는 단계로 변화하는 그 노력을 기울이는 삶을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그 노력이 아주 미미하여 눈에 띄지 않을지라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뺨을 맞으면서 뺨을 대줄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해보자는 것입니다. 정말 피나게 노력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 노력이 가상해서 은총으로 더해 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21,1ㄴ-16
그때에 1 이즈르엘 사람 나봇이 이즈르엘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포도밭은 사마리아 임금 아합의 궁 곁에 있었다.
2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포도밭을 나에게 넘겨주게.
그 포도밭이 나의 궁전 곁에 있으니, 그것을 내 정원으로 삼았으면 하네.
그 대신 그대에게는 더 좋은 포도밭을 주지. 그대가 원한다면 그 값을 돈으로 셈하여 줄 수도 있네.”
3 그러자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제가 제 조상들에게서 받은 상속 재산을
임금님께 넘겨 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4 아합은 이즈르엘 사람 나봇이 자기에게, “제 조상님들의 상속 재산을 넘겨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한 말에
속이 상하고 화가 나서 궁전으로 돌아갔다. 아합은 자리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음식을 들려고도 하지 않았다.
5 그의 아내 이제벨이 들어와서 물었다. “무슨 일로 그렇게 속이 상하시어 음식조차 들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6 임금이 아내에게 말하였다. “실은 내가 이즈르엘 사람 나봇에게 ‘그대의 포도밭을 돈을 받고 주게.
원한다면 그 포도밭 대신 다른 포도밭을 줄 수도 있네.’ 하였소.
그런데 그자가 ‘저는 포도밭을 임금님께 넘겨 드릴 수 없습니다.’ 하고 거절하는 것이오.”
7 그러자 그의 아내 이제벨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에 왕권을 행사하시는 분은 바로 당신이십니다.
일어나 음식을 드시고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제가 이즈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밭을 당신께 넘겨 드리겠습니다.”
8 그 여자는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그의 인장으로 봉인하고,
그 편지를 나봇이 사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냈다.
9 이제벨은 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단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의 첫자리에 앉히시오.
10 그런 다음, 불량배 두 사람을 그 맞은쪽에 앉히고 나봇에게,
‘너는 하느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다.’ 하며 그를 고발하게 하시오.
그러고 나서 그를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이시오.”
11 그 성읍 사람들, 곧 나봇이 사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은
이제벨이 보낸 전갈 그대로, 그 여자가 편지에 써 보낸 그대로 하였다.
12 그들이 단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의 첫자리에 앉히자,
13 불량배 두 사람이 들어와서 그 맞은쪽에 앉았다. 불량배들은 나봇을 두고 백성에게,
“나봇은 하느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습니다.” 하고 말하며 그를 고발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나봇을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인 다음,
14 이제벨에게 사람을 보내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고 전하였다.
15 이제벨은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합 임금에게 말하였다.
“일어나셔서, 이즈르엘 사람 나봇이 돈을 받고 넘겨주기를 거절하던
그 포도밭을 차지하십시오. 나봇은 살아 있지 않습니다. 죽었습니다.”
16 나봇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아합은 일어나, 이즈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곳으로 내려갔다.
축일6월 17일 성 라이네리오 (Raynerius)
신분 : 순례자, 고행자
활동 지역 : 피사(Pisa)
활동 연도 : +1160년경
같은 이름 : 라니에리, 라이네리우스
성 라이네리우스(Rainerius, 또는 라이네리오)는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부유한 상인이자 선주인 간둘포 스카체리(Gandulfo Scacceri)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 그는 여러 도시를 다니며 연주하는 음악가로서 세상의 즐거움을 쫓았다. 여행 중에 그는 산양 같은 동물 털로 짠 망토를 걸친 알베르토(Alberto)라는 거룩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코르시카 출신의 귀족이었다. 알베르토의 권유로 그는 피사에 있는 성 비투스(Vitus) 수도원에 가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며 그들을 위해 일하는 수도자들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죄에 물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동안의 삶을 뉘우치는 뜻에서 먹기를 거부한 채 3일 동안 눈물을 흘렸는데, 그 후로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날마다 주님께 기도한 결과 하느님께서 기적을 베푸시어 영혼과 함께 육신의 눈도 다시 밝혀 주셨다.
1146년에 그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상인으로 변신했다. 그는 사업을 위해 여러 항구를 방문하고 선원들과의 무역을 통해 많은 재물을 얻게 되었다. 그의 여정은 어느덧 성지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부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모든 재물을 포기하고 완전한 가난 속에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성지에서 7년을 마치 거지처럼 지내며 예루살렘과 팔레스티나(Palestina) 곳곳의 주님의 성지를 방문했다. 그는 타보르산에서 십자가를 그어 맹수를 쫓은 적이 있고, 빵을 많게 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기적도 행했다고 한다.
1153년 성 라이네리우스는 고향인 피사로 돌아와 성 안드레아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다시 성 비투스 수도원에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설교가로서 명성도 얻었지만 계속해서 엄격한 생활을 하다가 선종하여 피사의 주교좌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즈음에 이미 사람들로부터 성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기적의 성수로 치유의 은사를 베풀고 악령을 쫓아내 ‘데 아콰’(de Aqua)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에 의해 시성되었고, 피사의 수호성인이자 여행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라니에리(Ranieri)로도 불린다.
오늘 축일을 맞은 라이네리오 (Raynerius)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