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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용서하는 삶
1. 찬송 436장에 주님을 믿어 영생을 얻은 자가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기쁨과 평화와 은혜가 넘치며, 그래서 어려운 길이라도 찬송하며 주님을 따르고, 죄인과 원수라도 친구로 대하게 되었다는 고백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으로 증명될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용서’라는 것이 중요한 한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2. 구약성경에 나오는 가장 중요한 동사 중 하나가 “기억하라”라고 합니다.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신 24:18) 이 말씀은 중요한 명령을 주실 때마다 반복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어떤 구원을 받았는지를, 즉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크신 은혜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가 죄와 노예의 상태에서 구원을 받고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남을 용서하기 위하여서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것을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3.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0-47)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마지막 말씀을 자주 생각합니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기독교 역사를 보면 바울은 자기가 큰 죄를 지었음을 깨달았고, 그 죄를 용서받은 것을 놀라워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으며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 1:13-17), 그 주님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4. 그리고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하신 선교사님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가난하기 짝이 없고 더럽기 짝이 없고 위험하기 짝이 없던 조선 말기에 많은 선교사님들이 와서 선교하다가 아내가 죽기도 하고, 자녀들이 죽기도 하고, 자신이 죽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크신 사랑과 용서를 전해 주려고 먼 나라에 와서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그분들의 헌신과 용서로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받게 되어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슬람 국가나 공산주의 국가에서 선교하시는 분들은 많은 공격과 모욕을 당하면서도 오직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기 위하여 그런 것들을 기쁘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집과 재산을 빼앗기고, 구타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심지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중에도 미움을 나타내거나 복수하려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을 듣고 읽을 때 놀랍기만 합니다. 어찌 사람의 능력으로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용서가 그들의 마음에 부어져서 예수님처럼, 스데반처럼 죽어가면서도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5. 우리는 자신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그럼에도 그 죄를 모두 용서받은 자인지를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남이 나에게 한 말이나 행동을 크게 생각하고, 오래 기억합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주차를 하시려고 하는데 굉장히 어려웠으나 다행히 한 자리가 생길 때 그쪽으로 갔더니만 어떤 사람이 잽싸게 먼저 와서 주차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당장에 자신이 목사님인 것을 잊고 화가 나서 한마디 외쳤다고 합니다. 그 순간에는 자기가 배우고 가르치던 헤르만 바빙크나 벌코프의 조직신학도, 성경의 명령이나 기도하며 아뢰었던 내용도 모두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참으로 진실한 고백이고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사실입니다. 새벽기도도 열심히 하고, 가끔 철야도 하면서도 누가 옆에서 한마디 하면 그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연약한 우리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교회의 새 며느리에게 “왜 성경 말씀은 그렇게 들어도 다 잊어버리면서 시어머니 말은 한 번 듣고도 가슴에 꼭 새기고 원한을 품느냐?”고 말씀했다고 들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상처를 준 말이 달갑지는 않았겠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나 큰 용서를 받은 것을 깨달을 때는 어렵지 않게 시어머니를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6. 어떤 목사님께서 “밤에 잠자리에 누울 때는 절대로 사람 말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라”고 하신 말씀이 너무 좋아서 열심히 실천하고 있습니다. 하루의 삶 중에 사람들로부터 들은 말이나 겪은 일들이 상처를 주고 모욕을 주고 분노를 일으킬 만한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괴로움과 슬픔과 분노 중에 잠이 들기보다는 하루 동안에 읽고 듣고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든다면 참으로 복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 기억해야 할지를 말씀해 주셨지요.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4-9)
7. 항상 “내가 누구이기에”를 기억하려고 합니다. 제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다 주님께서 주신 것인데 마치 ‘내 것인 것처럼’, ‘당연하게’ ‘권리로 생각하니까’ 조그만 어려움에도 불평을 하게 되고, 작은 상처도 분노로 갚으려 하고, 하찮은 실수도 크게 복수하려고 합니다. 나의 자존심은 결국 “내가 누구이기에”를 잊어버린 결과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본받으라”는 명령을 거부한 죄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가까운 가족과 친구, 그리고 교인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자로 알고, 예수님께서 위하여 피 흘려 죽어 주신 자들로 안다면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그들이 한 말과 그들이 한 행동을 감싸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8. 찬송 436장의 가사를 생각하면 너무나 좋습니다. 3절에서는 “산천도 초목도 새것이 되었고 /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 새 생명 얻은 자 영생을 누리니 / 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로다”라고 고백하는데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씀(고후 5:17)이 생각납니다. 미워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멀리하려고 하는 옛 사람은 벗어버리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사람들과도 새로운 관계, 산천 초목과도 새로운 관계, 자기 자신과도 새로운 관계를 가져와서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이 볼 때에 “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로다”라는 고백을 인정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삶을 여기에서도 이미 맛보게 됩니다.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1-4) 사망도 애통함도 눈물도 아픈 것도 없으리니 서로에 대해 미워하고 한을 품는 일 또한 없을 것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오직 감사만이, 오직 찬송만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1)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 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후렴: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 /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2) 주 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 / 찬송과 기도로 주 함께 살리라
(3) 산천도 초목도 새것이 되었고 /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새 생명 얻은 자 영생을 누리니 / 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로다
(4) 주 따라 가는 길 험하고 멀어도 / 찬송을 부르며 뒤따라 가리라
나 주를 모시고 영원히 살리라 / 날마다 섬기며 주 함께 살리라
9.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굽어 살피시고, 우리가 진실하게 믿고 행하기를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와 찬송이 정직한 고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배운 하나님의 말씀이 주변 사람들의 어떤 말보다도 더 강력하고 무거워서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가끔 찬송 323장을 부를 때에 부끄러움과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 가사대로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3절의 가사를 보면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집니다. 진정으로 존귀 영광은 주님 홀로 받기를 원할까? 나도 자존심을 상하지 않아야 하겠고, 나의 의견도 존중을 받아야 하겠고, 나의 행동도 인정을 받아야 하겠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진정으로 멸시 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오리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일까? 가장 가까운 배우자에게도, 자식들에게도, 그리고 교인들에게도 작은 멸시와 실수를 용납하기 꺼려하면서 오래오래 그것을 기억하고 묵상(?)하지는 않는지 돌아보고 돌아봅니다.
1. 부름 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2.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 소돔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3.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아 - 멘
10.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를 다시 생각합니다. 과연 큰 죄를 용서받은 나로서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면서 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인가? 그들이 한 말, 그들이 한 행동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이 기도를 드린다면 그것은 바른 기도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의 본성으로는 용서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새 사람이 된 자는 하나님께서 새 생명의 발휘로,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본성으로 사랑도 하고 용서도 하고 감사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인지 다시 한번 돌아다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학생 시절에 “믿음으로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강의를 들었는데, 그 강의를 듣고 나서 저도 그렇게 미워하던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본성이 아니라 참된 믿음으로 할 때에 용서가 어렵지 않았습니다. 용서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감사의 삶도 어렵습니다. 기쁨의 삶도 어렵습니다. 그의 삶 속에 참된 기도의 삶도 어렵습니다.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용서(pardon)를 경험한 사람은 참 평안(peace)을 누리고, 삶의 목적(purpose)이 달라지며, 그 새로운 삶을 살아갈 능력(power)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시기와 탐욕, 분노와 원망을 다 버리고 성령님이 주시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풍성히 드러내며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