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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인문학 모임 "귀가쫑긋"
 
 
 
카페 게시글
서양철학 게시판 댓글미션 - 영화《잉글리쉬 페이션트(english patient) 》를 통해 본 아리스토파네스적 사랑과 소크라테스적 사랑의 모습
홍유경 추천 0 조회 333 15.11.14 14:29 댓글 1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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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11.16 08:16

    첫댓글 브라보! 유경님 영화 속 내용을 어쩜 이리도 환상적으로 쓸 수 있지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슬픈이야기임에도 감미롭게 느껴지네요.
    전 못 본 영화인데도 유경님의 글로 인해 영화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펼쳐지네요.
    시 같아요. 굿 ∼∼∼∼
    아리스토파네스적 에로스와 소크라테스적 에로스에 잘 맞는 내용같아요.
    제가 느낀 아리스토파네스적 에로스도 너무 강한 끌림이어서 오히려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다고 봤거든요.
    이 영화 꼭 봐야겠어요. 유경님이 시적으로 설명했던 부분들 상기하면서 …

  • 15.11.17 06:53

    빛나는 군요. 밝고 환한 기운, 열정의 숨소리 느낌으로 전해져 오는 군요. 이럴 땐 느끼고 감상해야지요. 잉글리쉬 페이션트, 비행기 추락만 기억나고 내용은 백지상태, 다시 봐야 겠군요. 보고 싶게 만들어요.

  • 15.11.17 06:53

    자유는 인간의 고유한 가치지요. 동물에겐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를 꿈꾸고 열망하지만, 자유롭지 못해요. 우리를 구속하고 우리로 하여금 자유로부터 도피하게 만드는 것이 있어요. 인간은 모순 덩어리죠. 자유를 원하면서도 자유를 무너뜨리고, 자유로부터 도피하죠. 대체 자유란게 뭐죠? 욕망의 문제에 도달하게 되는 군요. 결핍의 문제, 탐구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인간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게 뭘까요? 우린 그걸 위해 탐구하고 그곳으로 향해 가야 합니다. 낭비할 시간이 없어요. 인생은 짮으니까.

  • 15.11.17 08:04

    한 가지 질문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 즉 잃어버린 반쪽을 되찾는 것이 왜 파괴와 해체를 통해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라캉의 에로스는 프로이드의 리비도에서 출발합니다. 삶에의 충동이지요. 플라톤과는 하늘과 땅을 뒤집은 차이이긴 하지만, 생명과 존재의 원리로 보는 점에서는 같아요. 라캉은 욕망과 욕구를 구별하죠. 욕구는 생물학적 측면(충동)이고, 욕망은 문화적인 측면(억압에 의해 형성된 결핍)이지요.(프로이드와 라캉을 나중에 따로 공부합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와 프로이드-라캉의 에로스(욕망)과 일치하는 측면은 '결핍'으로 본다는 점에서죠. 원래 상태의 회복, 억압된 욕구(결핍)의 충족(직접적인 충족

  • 15.11.17 08:30

    은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차이나는 측면이 많답니다. 이건 바타이유 <에로티즘>을 읽으면서 비교해 보자구요.

  • 15.11.18 07:11

    아리스토파네스적 에로스와 소크라테스적 에로스의 특징을 ‘소유-자유’로 구별한 것은 훌륭합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적 에로스는 아름다움의 등급에 따라 자유의 등급도 달라진다는 걸 생각해야죠. 하급단계(몸의 아름다움에 끌리는 것)에 있을수록 자유롭지 않아요. 위(지적인 사랑으로)로 상승하면 할수록 자유가 확대되지요. 그렇다고 하급 단계가 아리스토파네스적 에로스와 같은 건 아니죠. 아리스토파네스적 에로스는 등급 같은 것이 아예 없어요. 이것저것 따지고 고를 것도 없는, 온리 유(only you)의 사랑. 나의 잃어버린 반쪽은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으니까. 그냥 좋은 거죠.

  • 작성자 15.11.19 01:16

    @김인곤 저는 아리스토파네스적 에로스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반쪽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불완전한 하나의 개인이 존재할 뿐이며, 그것은 다른 사람으로 채워지거나 완성되는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사랑안에서도 영원히 독립적이며 절대고독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죠.
    불완전한 두사람이 만나서 서로를 성장시키면서 각자 성숙해가는 것이 사랑의 길 아닐런지..

    만일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다'는 개념으로 상대를 대한다면, 그는 나와 하나가 되야합니다.
    본디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였던 그 혹은 내가 새로운 완전체가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과정이 파괴와 해체과정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 작성자 15.11.19 01:21

    @김인곤 상대방을' 나의 잃어버린 반쪽'이라고 확신했다는 것은
    바로 그사람이 '나의 톱니바퀴에 맞는 음각과 양각을 갖고 있는 맞춤형 반쪽' 이라고 판단했다는 뜻일진대,
    그 생각자체가 상대를 있는 그자체로 받아들이기보다 해체시켜 자기틀에 맞추는 생각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 15.11.19 06:47

    @홍유경 누구에게나 일생에 한 두번은 운명적인 만남 같은 것이 있다고 하잖아요? 의식적으로 아리스토파네스적인 에로스를 지지하든 하지않든 이건 내 반쪽이야 싶은 상대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십중팔구 실패로 끝나더라도 그건 또 다른 문제죠. 사람마다 자기 인연이 있다든가, 짚신도 짝이 있다든가 하는 말들은 아리스토파네스적 에로스에 가까운 생각이죠. 오늘 공부시간에 같이 이야기 해봅시다.

  • 15.11.17 09:09

    좋은 영화 & 지루하고 슬픈 영화, 라는 개평(일반적인 평) 때문에 안 봤는데 이 글을 읽고 나니 꼭 보고 싶어지네요!

  • 작성자 15.11.19 01:23

    그렇게 생각해주셨다니... 힘이 납니다~ 감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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