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는 대조적인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는 두커플의 연인이 등장합니다.
이들에게 아리스토파네스와 소크라테스의 사랑을 적용해보려 합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원래 신이 두려워할만한 완전함을 가진 하나가
둘로 나뉨에 따라 생긴 결핍감을 다시 하나가 되어 채우고자 하는데 본질에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너와 내가 하나되는 묶임이 필요하고,
이 묶임은 어떤 의미에서 상대의(혹은 두 당사자의) 파괴와 해체를 통해서만 이룰수 있는 것 아닐런지...
전에 어설프게 라캉관련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에서 에로스를
'죽음충동에 뿌리내린 사도매조키즘적 지배와 복종이 인간내부에 가장 깊숙히 자리잡은 소망' 이라고 표현하더라구요.
에로스를 아리스토파네스의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수긍이 갑니다.
한편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는 상승하고 확장하고 초월하고자 하는 소망이 가득한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통해 사랑의 주체는 '나보다 더 나은 나' 즉 더 높고 넓고 고귀한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이데아로 서로를 이끌어 준다고나 할까요.
이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english patient) 》는 인도를 지배한 영국의 제국주의를 사랑의 패턴으로 전환시켜 표현하여,
지배.억압의 식민주의가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랑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남을 잘 보여줍니다.
제국주의적 본성을 경계하고 역사적.본질적타자 -여자.유색인.그늘.어둠.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감독의 시선이 영화 곳곳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집니다.
영화는 고대동굴벽화와 그 벽화를 종이에 모사하는 여주인공 캐서린의 손이 오버랩되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아프리카 사막한가운데 동굴이건만 묘하게도 벽화에는 수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곧, 종이는 물결치듯 풍만한 사막 모래언덕으로, 수영하는 사람들은 모래언덕 골로 바뀝니다.
지금은 사막이지만 오래전엔 강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벽화와
바람에 의해 물결진 모래언덕의 뚜렷한 음양 대비는 제국이 있으면 무너짐이 있고
밝음과 어두움은 뗄수없는 하나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무너진 제국의 자리를 음지였던 타자가 차지하는 자리바꿈이 바로 역사라는 사실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음지에 관심을 갖고 그 위력을 알려주는게 바로 인문학과 예술아닐까요.
그 막막한 사막위를 비행하던 경비행기 한대가 폭격으로 화염에 휩싸여 추락합니다.
그 비행기에는 죽은 캐서린과 그녀를 프랑스에 묻어주고자 했던 연인 올마시가 타고 있었죠.
이 사고로 치명적인 화상을 입고 죽어가는 올마시 커플과
올마시를 간호하는 간호사 한나 커플을 중심축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진행됩니다.
............................
이야기는 다시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서.......
사막에서 지도를 만들던 헝가리인 올마시가 처음 캐서린을 만나는 장면.
어느날 밤, 모닥불앞에서 '가이우스왕의 일화'를 풀어내는 동지( 영국 첩보원) 클리프튼의 아내 캐더린을 보고 사랑에 빠집니다.
칸돌리스왕의 왕위와 아내를 빼앗아 왕이 되어 리비아를 28년간 통치한 가이우스왕의 일화에서 무의식적 영향을 받은 올마시.
그리고 올마시의 열정에 얽혀들면서도 아내의 위치를 지키려는 캐더린의 의지사이에서 고통스런 사랑이 잉태하게 되죠.
경계선을 넘나들며 위험한 사랑에 탐닉하는 두사람.
마침내 남편 클리프튼이 이사실을 알게 됩니다. 질투에 휩싸인 남편이 조종하던 비행기사고로 큰부상을 입는 캐서린.
아무도 없는 사막한가운데서 캐서린을 살릴수 없었기에,
올마시는 그녀를 동굴에 두고 사막을 건너 겨우 영국군을 만나 구조를 요청합니다.
그러나, 영국군은 올마시라는 그의 헝가리 이름때문에 그를 독일군스파이로 오해하고,
'독일군 올마시의 아내'인 캐서린에 대한 구조요청역시 거부합니다.
영국인 '클리프튼의 아내'라고 했던들 캐서린은 구조되어 살 수 있었을텐데.
올마시의 환상속에서 캐서린은 나의 여자, 나의 아내였던거죠.
올마시의 사랑은 소유하고 소유당하기를 갈망하는 제국의 사랑이었기에, 캐서린을 살릴 수 없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도, 제국의 흥망도, 올마시의 사랑도 모두 동일한 "결핍과 소유" 라는 관점에서 비극입니다.
아리스토파네스적 사랑의 결말이라고나 할까요.
사실 두사람은 누구보다 소유로부터 자유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이러니죠.
두사람은 서로가 좋아하는것과 싫어하는것에 대해 이야기나눕니다.
캐서린이 좋아하는것은 물, 물고기, 수영, 목욕..(주로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것들)그리고 ...망설이다가
내남편이라고 말하고는 곧장 싫어하는것은 ..거짓말이라고 말합니다.
이번엔 올마시가 말합니다. 싫어하는것은 "소유.....소유하는것.소유당하는것" 이라고.
그러나 올마시의 대답의 의미는 소유하기를, 소유당하기를 강렬히 원하지만 두렵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동료 매독스의 "전시엔 사막지도를 소유하는 것이 사막을 소유하는것"라는 말에
"사막을 소유한다고?" 하며 비웃었던 올마시이지만
개인적 사랑앞에선 이념도 이상도 사라져버립니다.
알마시는 캐서린의 '쇄골'부분을 '알마시해협'으로 명명하고 소유하길 원했습니다.
점점 욕망과 집착에 빠져드는 올마시. 드디어 자신의 욕망앞에 무릎을 꿇게됩니다.
"전시의 배신은 평화시의 배신에 비하면 유치하다..."
헝가리국적때문에 영국군으로부터 적취급당한 올마시는 포로가 되어 이송되던 중 탈출하여,
사막지도를 독일군에게 넘기고 캐서린이 있는 사막의 동굴로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
매독스의 영국비행기에 아이러니컬하게 독일의 기름을 넣어서 말입니다.
수천명이 목숨을 잃는다해도 캐서린 하나를 위해 사막을 건넙니다.
그러나 도착했을땐 캐서린은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해있었죠.
올마시와 그녀의 추억이 담긴 헤로도투스의 <역사>책에 유언같은 편지를 남긴채.
동굴에서 나와 캐서린의 시체를 안고 바위산계곡을 따라 걸으며 하염없이 눈물흘리는 올마시.
죽어서야 온전히 그의 것이 된 캐서린.
아리스토파네스적 사랑의 아주 극단적 결말은 이러하리라 생각됩니다.
비행사고로 중화상을 입고 신분확인이 불가능해진 올마시는
영국비행기를 조종했다는 이유로 영국인환자(English patient )로 분류됩니다.
비로서 그토록 염원했던 ' 영국인'이 된거죠.
한나의 배려로 수도원에서 임종을 맞게된 올마시는 비로소 고백합니다.
"어쩌면 내가 캐서린을 죽였을지도 모르지...
내가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에...
내 이름때문에..."
올마시의 사랑은 아리스토파네스적 사랑(결핍을 소유로 채우고자 하는 사랑=제국의 사랑)이었고 결국 죽음으로 완성됩니다.
죽음은 해체이지만 그 길외에 둘을 하나로 묶을 길은 없었으니까요.
이 영화의 서사에는 올마시의 사랑과 대조되는 한나와 킵의 사랑이 등장합니다.
저는 이 두사람의 사랑을 소크라테스적 사랑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킵은 제국이 파묻은 지뢰를 찾아 해체하는 임무를 맡은 인도인 지뢰전문가 중위입니다.
킵은 유색인이고 제국의 위협적 흔적을 제거하는 타자인 셈이죠.
한나를 사랑하지만 그녀를 자신과 하나로 묶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 두사람의 대화를 들어봅니다.
" 당신은 낮엔 폭탄을 찾아 다니니까, 밤엔 누군가 당신을 찾아와 주길 바라는 걸 거에요. 그러니 내가 찾아주길 원해요?"
- 나를 찾아주길 원해. 한나 당신이 나를...
"킵. 오늘밤 내가 당신을 찾아오지 않는다면?"
- 안 기다리려고 애쓸거야...
" 밤 늦게까지 내가 킵 당신에게 안 온다면?"
- 무슨 일이 있어 못 오겠거니 생각할거야...
킵은 한나에게 전쟁 중 버려진 성당의 아름다운 벽화를 보여주기위해, 기구를 만들어 그녀를 높이 들어올려줍니다.
벽화의 아름다움에 즐거워하는 한나를 보며 행복해하죠. 그러나 때가 되자 떠납니다.
킵의 사랑은 대상을 자기에게 묶어버리거나 소유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를 고양시키고, 삶을 향해 떠나보내는 사랑입니다.
이미 전쟁의 비극을 겪고, 자신이 간호하던 올마시로부터 사랑의 비극적 종말을 들은 한나 역시 킵의 마음을 이해하고 떠나보내죠.
손아귀에 움켜쥐지 않음으로 사랑은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삶으로 확장되고, 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삶의 다음 계곡으로 흘러갑니다
소크라테스적 사랑에서 말하는 절제와 상승과정을 통해
이 두사람은 자신들이 꿈꾸는 참된 이데아, 아름다움의 이데아, 선한 이데아를 향해 각자의 길을 가는거죠.
마지막으로 ....
캐서린이 부상당한 채 죽어가던 동굴속에서 올마시에게 유서처럼 남긴 편지를 소개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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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지금 난 너무 추워요.
밖에 나갈수만 있다면 따뜻한 해가 있을텐데..
우린 죽어요.
죽어가고 있어요.
많은 연인들이, 사람들이, 우리가 맛본 쾌락들이..
우리가 들어가 강물처럼 유영했던 육체들이...
두려움이...
이 무서운 동굴처럼 우리가 숨었던 육체들이...
두려움이...
이 모든 자취가 내 몸에 남아 있다면 우린 진정
국가에요.
강한 자들의 이름으로 지도에 그려진 선이 아니에요.
당신은 날 바람의 궁전으로 데리고 가겠죠.
그게 내가 바라는 전부에요.
그런곳을 당신과 함께 걷는것.
친구들과 함께..
지도에 없는 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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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브라보! 유경님 영화 속 내용을 어쩜 이리도 환상적으로 쓸 수 있지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슬픈이야기임에도 감미롭게 느껴지네요.
전 못 본 영화인데도 유경님의 글로 인해 영화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펼쳐지네요.
시 같아요. 굿 ∼∼∼∼
아리스토파네스적 에로스와 소크라테스적 에로스에 잘 맞는 내용같아요.
제가 느낀 아리스토파네스적 에로스도 너무 강한 끌림이어서 오히려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다고 봤거든요.
이 영화 꼭 봐야겠어요. 유경님이 시적으로 설명했던 부분들 상기하면서 …
빛나는 군요. 밝고 환한 기운, 열정의 숨소리 느낌으로 전해져 오는 군요. 이럴 땐 느끼고 감상해야지요. 잉글리쉬 페이션트, 비행기 추락만 기억나고 내용은 백지상태, 다시 봐야 겠군요. 보고 싶게 만들어요.
자유는 인간의 고유한 가치지요. 동물에겐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를 꿈꾸고 열망하지만, 자유롭지 못해요. 우리를 구속하고 우리로 하여금 자유로부터 도피하게 만드는 것이 있어요. 인간은 모순 덩어리죠. 자유를 원하면서도 자유를 무너뜨리고, 자유로부터 도피하죠. 대체 자유란게 뭐죠? 욕망의 문제에 도달하게 되는 군요. 결핍의 문제, 탐구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인간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게 뭘까요? 우린 그걸 위해 탐구하고 그곳으로 향해 가야 합니다. 낭비할 시간이 없어요. 인생은 짮으니까.
한 가지 질문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 즉 잃어버린 반쪽을 되찾는 것이 왜 파괴와 해체를 통해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라캉의 에로스는 프로이드의 리비도에서 출발합니다. 삶에의 충동이지요. 플라톤과는 하늘과 땅을 뒤집은 차이이긴 하지만, 생명과 존재의 원리로 보는 점에서는 같아요. 라캉은 욕망과 욕구를 구별하죠. 욕구는 생물학적 측면(충동)이고, 욕망은 문화적인 측면(억압에 의해 형성된 결핍)이지요.(프로이드와 라캉을 나중에 따로 공부합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와 프로이드-라캉의 에로스(욕망)과 일치하는 측면은 '결핍'으로 본다는 점에서죠. 원래 상태의 회복, 억압된 욕구(결핍)의 충족(직접적인 충족
은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차이나는 측면이 많답니다. 이건 바타이유 <에로티즘>을 읽으면서 비교해 보자구요.
아리스토파네스적 에로스와 소크라테스적 에로스의 특징을 ‘소유-자유’로 구별한 것은 훌륭합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적 에로스는 아름다움의 등급에 따라 자유의 등급도 달라진다는 걸 생각해야죠. 하급단계(몸의 아름다움에 끌리는 것)에 있을수록 자유롭지 않아요. 위(지적인 사랑으로)로 상승하면 할수록 자유가 확대되지요. 그렇다고 하급 단계가 아리스토파네스적 에로스와 같은 건 아니죠. 아리스토파네스적 에로스는 등급 같은 것이 아예 없어요. 이것저것 따지고 고를 것도 없는, 온리 유(only you)의 사랑. 나의 잃어버린 반쪽은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으니까. 그냥 좋은 거죠.
@김인곤 저는 아리스토파네스적 에로스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반쪽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불완전한 하나의 개인이 존재할 뿐이며, 그것은 다른 사람으로 채워지거나 완성되는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사랑안에서도 영원히 독립적이며 절대고독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죠.
불완전한 두사람이 만나서 서로를 성장시키면서 각자 성숙해가는 것이 사랑의 길 아닐런지..
만일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다'는 개념으로 상대를 대한다면, 그는 나와 하나가 되야합니다.
본디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였던 그 혹은 내가 새로운 완전체가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과정이 파괴와 해체과정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김인곤 상대방을' 나의 잃어버린 반쪽'이라고 확신했다는 것은
바로 그사람이 '나의 톱니바퀴에 맞는 음각과 양각을 갖고 있는 맞춤형 반쪽' 이라고 판단했다는 뜻일진대,
그 생각자체가 상대를 있는 그자체로 받아들이기보다 해체시켜 자기틀에 맞추는 생각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홍유경 누구에게나 일생에 한 두번은 운명적인 만남 같은 것이 있다고 하잖아요? 의식적으로 아리스토파네스적인 에로스를 지지하든 하지않든 이건 내 반쪽이야 싶은 상대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십중팔구 실패로 끝나더라도 그건 또 다른 문제죠. 사람마다 자기 인연이 있다든가, 짚신도 짝이 있다든가 하는 말들은 아리스토파네스적 에로스에 가까운 생각이죠. 오늘 공부시간에 같이 이야기 해봅시다.
좋은 영화 & 지루하고 슬픈 영화, 라는 개평(일반적인 평) 때문에 안 봤는데 이 글을 읽고 나니 꼭 보고 싶어지네요!
그렇게 생각해주셨다니... 힘이 납니다~ 감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