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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유로의 절망, 300유로의 기적
‘프랑스 파리에 산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의 눈빛이 먼저 달라진다. 그들의 상상 속에서 파리는 늘 낭만의 도시다. 에펠탑에는 조명이 켜지고, 센 강변 에는 샹송이 흐르며, 한 손에는 바게트, 다른 한 손에는 향긋한 커피가 들려 있다. 누군가는 우리 가족이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우아하게 살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유학생 가족에게, 그것도 한창 자라는 아이 둘을 키우며 제한된 장학금에 기대어 살아야 했던 우리에게 파리는 그렇게 낭만적인 도시만은 아니었다.
우리의 파리는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매일 통장 잔고를 확인해야 하는 도시였다. 예술과 자유의 도시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서, 우리는 늘 계산기를 두드렸다. 오늘 장을 보면 이번 주를 버틸 수 있을까. 아이가 먹고 싶다는 과일을 사도 될까. 환율이 오른 날에는 마트에서 신선한 고기나 과일을 집었다가 조용히 다시 내려놓곤 했다. 유로화가 조금만 올라가도 우리의 식탁은 곧바로 가벼워졌다.
남편의 학업을 위해 프랑스로 건너올 때만 해도 우리는 길어야 3년이면 모든 과정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적어도 안정된 자리로 이동하게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인생은 우리가 세운 계획표를 존중해주지 않았다. 코로나 팬데믹이 덮쳤고, 학업은 예상보다 길 어졌으며, 행정 절차와 비자 문제와 경제적 압박이 우리 삶을 천천히 조여왔 다. 처음에는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견디면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조금만 더’가 어느새 7년이 되었고, 다시 8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절약하는 법을 배웠다. 정확히 말하면, 절약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다. 동네 재래시장의 마감 시간이 되면 발걸음이 저절로 그곳 을 향했다. 상인들이 팔지 못한 채소나 조금 멍든 과일을 헐값에 내놓을 때가 있었고, 어떤 날은 그냥 가져가라고 손짓해주기도 했다. 상처 난 사과 몇 알, 시들어가는 상추, 조금 무른 무화과를 장바구니에 담아 돌아오는 길에는 이상하게도 부끄러움보다 안도감이 컸다. 오늘도 어떻게든 하루를 막아냈다 는 작은 승리감이었다.
아이들에게는 늘 미안했다. 파리에서 자라는 아이들이었지만, 파리의 풍요를 마음껏 누리게 해주지 못했다. 친구들이 다녀온 여행지 이야기를 할 때, 새 옷이나 장난감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아이들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아이들은 대체로 밝았고, 우리 형편을 눈치껏 이해해 주었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때로는 아이들이 원하는 작은 것 하나도 쉽게 사주지 못하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수없이 사과했다.
그런 날들 중 하나였다. 병원에 들렀다가 아이들을 데리러 가기 전, 애매하 게 시간이 남았다. 마음은 무거웠고 몸도 지쳐 있었다. 남편과 나는 두 정거 장 정도 떨어진 공원까지 걸어가며 머리를 식히자고 했다. 그런데 정류장을 지나치는 순간, 마침 버스가 도착했다. 걷기에도 힘이 부쳤던 나는 별생각 없이 남편의 손목을 잡고 버스 뒷문으로 올라탔다. 우리 손에는 이미 한 달 정기권이 충전된 교통카드가 있었다. 무임승차를 할 이유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버스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우리는 뒷문 근처에 서서 사람들이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카드를 태그 하려고 기다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한 여자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검표원이었다. 이제는 태그 할 수 없다고 했다. 순식간에 완장을 찬 검표원들이 나타나 우리 부부를 둘러쌌다. 그들은 우리가 뒷문으로 타고 바로 태그 하지 않았으니 벌금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1인당 150유로, 두 사람이니 300유로였다.
300유로. 누군가에게는 여행 중 한 번의 식사비일 수도 있고, 쇼핑 한 번의 금액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것은 한 달 식비가 넘는 돈이었다. 나 는 손에 교통카드를 들고 있었다. 이미 돈을 내고 충전한 정기권이었다. 우 리는 막 탔고, 태그 하려던 참이었다고 설명했다. 남편도 항의했다. 우리 말고도 뒷문으로 탄 사람들이 많았는데 왜 우리만 붙잡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차가웠다.
“우리는 지금 저 사람들이 아니라 당신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유난히 날카롭게 들렸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표를 확인하지 않았다. 오직 우리 만을 바라보았다. 서툰 불어로 항의하는 우리 부부는 그들에 게 쉬운 상대였을지도 모른다. 다음 정류장에서 우리는 버스 밖으로 내려야 했다. 정류장 한복판에서 검표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우리는 계속 설명하고 사정했다. 정기권이 있고, 일부러 무임승차를 한 것이 아니며, 아이들을 데 리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규정만 반복했다. 당장 결제하지 않으면 경찰서로 가야 한다는 말도 했다.
나는 점점 작아졌다. 언어가 완벽하지 않은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그날따라 너무 아팠다. 억울함을 정확히 말할 수 없다는 것,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갈 수 없다는 것, 내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단어들이 목구멍 어딘가 에서 엉켜버린다는 것이 비참했다. 결국 그들은 선심을 쓰듯 300유로가 아니라 150유로만 내라고 했다. 우리는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내밀었다. 결제음이 들리는 순간, 속에서 무엇인가가 무너졌다.
전날 딸아이가 마트에서 20유로짜리 바지를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 던 장면이 떠올랐다. “엄마, 나 이 바지 사면 안 돼?” 나는 형편을 생각하라며 아이를 매몰차게 혼냈다. 그런데 다음 날 우리는 이렇게 길 위에서 150유로를 잃었다. 아이에게는 20유로도 아까워하며 상처를 주었는데, 어처구니없는 상황 앞에서는 150유로를 내야 했다. 그 사실이 너무 아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났다. 남편은 억울함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한 국어로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그 소리를 검표원들이 들었을 리 없었다. 들었다 해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허공의 외침은 우리 마음속에
쌓인 서러움의 소리였다. 파리에서 오래 살았지만, 그날 우리는 다시 처음 온 사람처럼 낯설어졌다. 낭만의 도시라는 이름 아래에 숨어 있던 차가운 아 스팔트가 우리 발 밑에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일이 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가까운 지인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녀는 조용히 들어주었다. 며칠 뒤, 그녀는 뜻밖의 말을 했다. 자 신에게 생각지 못한 여윳돈이 생겼는데, 6개월 동안 매달 300유로씩 월세에 보태 쓰라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거절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 도 매달 300유로는 큰돈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단호했다.
“나중에 돈이 생겨도 저에게 갚지 마세요. 그 돈은 주변에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데 쓰세요.”
나는 그 말을 오래 잊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약자의 빈틈을 파고들어 돈을 빼앗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여유를 나누어 무너진 사람을 일으킨다. 같은 세상 안에 그런 두 종류의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나를 다시 살게 했다. 그날 이후 나는 파리를 미워하기만 할 수 없게 되었다. 파리는 우리에게 차가운 도시였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따뜻한 손을 통해 우 리를 다시 일으킨 도시이기도 했다.
시간은 흘렀고, 우리는 마침내 프랑스 생활을 정리하게 되었다. 남편은 오스 트리아 비엔나에서 다시 공부를 이어가게 되었고, 우리 가족은 8년 가까이 살던 집을 떠나야 했다. 그 집은 우리에게 특별한 공간이었다. 처음 들어갔 을 때는 거의 새집이었다. 깨끗한 벽, 반짝이는 바닥, 아직 낯선 냄새가 남 아 있던 방들. 우리는 처음 몇 년 동안 정말 조심해서 살았다. 벽에 흠집이 날까 봐 가구를 옮길 때도 천천히 움직였고, 아이들에게도 조심하라고 자주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집에는 우리의 흔적이 쌓였다. 아이들은 자랐고, 장난감은 방을 넘어 거실까지 퍼졌고, 책과 종이와 가방과 신발이 늘어났다. 벽에는 지워지지 않는 작은 자국들이 생겼고, 바닥에는 생활의 흠집이 남았다.
처음에는 보증금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조심했지만, 나중에는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 이 집은 박물관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 살아낸 자리였다. 8년 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는 일은 불가능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보증금은 마음에서 내려놓자’고 생각했다. 대신 이 집에서 아이들이 편하게 숨 쉬고 웃으며 자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프랑스에서는 집을 나갈 때 집주인과 함께 집 상태를 아주 세세하게 확인한다. 벽의 작은 낙서, 바닥의 흠집, 부엌의 얼룩, 욕실의 물 때까지 하나하나 체크하고, 문제가 있으면 보증금에서 제하고 돌려주는 경우가 많다.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도 대체로 비슷했다. 어떤 집주인은 어떻게든 흠을 찾아내 보증금을 최대한 덜 돌려주려고 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 전부 터 긴장했다. 아이들이 남긴 작은 흔적들, 오래 살며 생긴 생활의 자국들, 버리기 애매한 큰 짐들까지 모두 마음에 걸렸다.
집주인 부부는 우리가 이사를 떠나기 3일 전에 집으로 방문했다. 그들도 우리처럼 오래전 타국에서 프랑스로 온 아시아계 이방인들이었다. 우리는 긴장 한 마음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아마 집안 곳곳을 살펴보며 메모를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집을 둘러보려 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파리에서의 삶은 어땠는지, 앞으로 어디로 가 는지, 남편의 공부는 어떻게 되는지, 아이들은 잘 지내는지 물었다.
우리는 어리둥절했다. 집 상태를 보지 않아도 되는지, 큰 짐은 버리고 가야 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편하게 두고 가라고 했다. 청소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대충 해놓고 가면 된다고 했다. 우리가 다시 물었다. “집 체크는 안 하시나요?” 그들은 웃으며 말했다. 괜찮다고, 볼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 면서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삶에는 많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 말 앞에서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보증금을 얼마나 잃을지 계산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의 삶을 먼저 물었다. 우리는 벽의 흠집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아이들의 안부를 궁금해했다. 우리는 오 래 산 세입자로서 평가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를 한 가족으 로 대해주었다. 떠나기 전 그들은 우리에게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 새로운 곳에서도 하는 일이 잘되기를 바란다고 축복해 주었다. 그리고 정말로 집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돌아갔다.
사실 그 집주인 부부의 배려는 이사를 앞둔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그 집에 사는 8년 동안, 그들은 월세를 단 1유로도 올리지 않았다. 파리의 집값과 월세가 해마다 오르고, 주변에서 재계약 때마 다 월세 인상 이야기를 듣던 우리에게 그것은 조용하지만 큰 배려였다. 그들 이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월세를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빠듯한 형편 속에서도 최소한의 예측 가능한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집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래 살다 보니 몇 차례 누수가 생 긴 적이 있었다. 벽이나 바닥에 물 자국이 번질 때마다 우리는 혹시 큰 수리 비를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그러나 집주인은 늘 직접 기술자를 데려와 상황을 확인했고, 필요한 수리를 처리해 주었다. 우리에게 단 한 푼의 수리비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것은 타국에서 세입자로 사는 우리에게 결코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행정과 언어와 제도 앞에서 늘 긴장해야 했던 우 리에게, 그들의 태도는 드문 안정감을 주었다. 우리는 그 집에서 단지 월세를 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누군가의 신뢰 안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두 달 뒤, 보증금이 돌아왔다. 약간의 청소비를 제외하고 거의 전부가 그대로 입금되었다. 나는 그 금액보다 그 마음이 더 크게 다가왔다. 프랑스에 서 그런 집주인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를 긴장과 계산의 관계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들은 달랐다. 그들은 우리가 자기 집에 살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다고 말했다. 우리 가족이 아름다웠다고 말해주었고, 새로운 출발을 응원해 주었다.
그들의 친절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오스트리아로 이사 온 지 며칠 뒤, 딸아이가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렸다. 자기가 몇 년 뒤의 자신에게 쓴 편 지를 방 창문 높은 곳에 붙여 놓았는데, 그것을 두고 왔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그 편지를 꼭 찾고 싶어 했다. 그 편지에는 몇 년 후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 좋아하는 것들, 미래에 대한 작은 기대들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혹 시 아직 그곳에 편지가 남아 있는지 확인해 줄 수 있느냐고 집주인에게 이메 일을 보냈다.
사실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이미 우리는 이사를 나왔고, 그 집은 더 이 상 우리의 공간이 아니었다. 집주인이 바쁘다며 그냥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뒤 그들은 그 편지를 찾아서 오스트리아까지 등기로 보내 주었다. 봉투를 열어 딸아이의 편지를 손에 쥐었을 때, 나는 이상하게 눈물 이 날 것 같았다. 그것은 종이 한 장에 불과했지만, 우리 가족의 시간이 담 긴 작은 유물이었다. 그리고 그 종이 한 장을 소중히 여겨준 집주인의 마음 이 고마웠다.
나는 그때 다시 생각했다. 타국 생활은 사람을 자주 작아지게 만든다. 언어가 서툴 때, 제도를 잘 모를 때, 경제적으로 약할 때, 이방인은 쉽게 불안해진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사무적인 표정 하나에도 마음이 흔들린다. 파리의 버스 정류장에서 우리는 그런 약자의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러나 같은 프 랑스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얼굴도 만났다. 어려운 시기에 조건 없이 도와준 지인, 우리 가족의 흔적을 흠이 아니라 삶으로 보아준 집주인 부부, 딸아이의 편지 한 장을 국경 너머로 보내준 사람들. 그들은 이방의 땅에서 우리에 게 인간에 대한 믿음을 다시 돌려주었다.
우리 가족은 이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산다. 도나우강의 바람은 파리의 바 람과 다르다. 새로운 언어, 새로운 학교, 새로운 행정, 새로운 관계 속에서 우리는 다시 적응하는 중이다. 국경을 넘었다고 해서 삶이 갑자기 쉬워지지 는 않았다. 여전히 장학금에 기대어 살고, 여전히 월세를 걱정하며, 여전히 아이들의 미래 앞에서 마음을 졸인다. 그러나 내 안의 어떤 부분은 프랑스를 떠나며 조금 달라졌다.
나는 이제 고난만을 기억하지 않으려 한다. 물론 150유로의 벌금은 여전히 억울하다. 그날의 차별적인 시선과 모욕감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기억만으로 프랑스의 시간을 닫고 싶지는 않다. 우리에게는 300유로의 기적도 있었다. 지인의 따뜻한 손길이 있었고, 집주인 부부의 믿음과 축복이 있었다. 딸아이의 편지를 끝까지 찾아 보내준 섬세한 마음도 있었다. 어떤 상처는 오래 남지만, 어떤 친절은 그보다 더 오래 마음을 지탱한다.
재외동포로 산다는 것은 낯선 땅에서 계속 설명해야 하는 삶인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지, 어떤 언어로 말하고 어떤 꿈을 꾸는지 자꾸 설명해야 한다. 때로는 설명해도 이해받지 못하 고, 때로는 설명할 힘조차 없어진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 는 뿌리를 조금씩 내린다. 한국에서 가져온 기억과 언어, 프랑스에서 배운 인내와 감사, 오스트리아에서 다시 시작하는 용기가 우리 안에서 함께 자란 다.
나는 아직 넉넉한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를 크게 도울만큼 형편이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언젠가 내게 여유가 생긴다면, 나는 그 지인이 내게 말했 던 것처럼 살고 싶다. 나에게 갚지 말고 더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던 그 말을 기억하며, 나도 누군가의 막막한 하루에 작은 숨구멍이 되고 싶다. 그리고 집주인 부부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처럼, 사람을 흠집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 가 살아낸 시간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가 떠난 파리의 집에는 이제 다른 가족이 살고 있을 것이다. 벽은 다시 칠해졌을지도 모르고, 바닥의 흠집은 가려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집 어 딘가 에는 우리 가족이 웃고 울며 버틴 시간이 보이지 않는 결처럼 남아 있을 것만 같다. 아이들이 자라던 소리, 밤늦게 공부하던 남편의 불빛, 시장에 서 사 온 채소로 끓인 국 냄새, 보증금을 걱정하면서도 결국은 편하게 살아 내기로 했던 우리의 결심. 그 모든 것이 그 집의 조용한 기억 속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
삶은 때로 우리에게 차가운 벌금 고지서처럼 다가온다. 이유를 설명해도 들 어주지 않고, 억울함을 말해도 규정만 내세운다. 그러나 삶은 또 다른 순간에 생각지 못한 편지처럼 도착한다. 국경을 넘어, 등기 우편 봉투에 담겨, 잊고 온 마음 하나를 다시 우리 손에 쥐여 준다. 나는 그 두 얼굴을 모두 기 억한다. 그래서 오늘도 원망만으로 살지 않으려 한다. 절망의 기억을 지우지 는 않되, 그 옆에 기적의 기억을 함께 세워두려고 한다.
프랑스에서의 8년은 우리 가족에게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우리를 낮추었고, 단단하게 했으며, 감사할 줄 아는 사람으로 조금씩 빚어주었다. 우리는 낭만의 파리에서 화려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대신 그 도 시의 시장 바닥과 버스 정류장과 오래된 아파트 안에서, 인간이 얼마나 차가 울 수 있는지와 동시에 얼마나 따뜻할 수 있는지를 배웠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안다. 우리가 잃어버린 150유로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누군가가 건네준 300유로의 마음이다. 우리가 걱정했던 보증금보다 더 귀한 것은, 우리 가족을 믿어준 집주인의 축복이다. 우리가 두고 온 편지보다 더 소중한 것은, 그 편지를 찾아 보내준 사람의 손길이다.
그 모든 기억을 품고, 우리는 다시 살아간다. 낯선 도시에서, 낯선 언어 속에서, 그러나 조금 더 깊어진 마음으로.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자라 자신들의 삶을 돌아볼 때, 프랑스의 시간을 가난과 서러움으로만 기억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곳에서 우리가 받은 상처도 있었지만, 그 상처 사이로 들어온 빛도 있었다고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빛을 따라, 우리도 누군가에게 작은 기적이 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조용히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