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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박 10 일 영산강 순례
1 일차 , 5 월 8 일
이번 아침은 여유로웠다 . 순례 갈 준비도 끝났고 남은 것은 물 뜨기 그리고 볶음 김치 만들어 가방에 넣기 하지만 여기서 만드는 것은 이미 엄마가 볶고 있었다 . 그래서 별 어려움 없이 출발을 했다 . 버스를 타고 먼저 광주 버스 터미널로 가는데 좌석 번호가 없을 줄 알았던 버스 표에 번호가 적혀 있었다 .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내 번호였던 30 번으로 이동했다 . 그런데 하필 창 쪽이 아니라 내 측 이었고 옆자리 , 창 측에는 모르는 여자 분이 앉아있었다 . 그리고 가다 보니 여자 분이 잠들어서 버스의 움직임에 따라 내 어깨 쪽으로 기울어져서 닿지 않으려고 자세는 불편하게 바뀌어 갔다 . 10 시 50 분에 타서 12 시가 넘도록 편한 자세는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 그리고 내려서 점심을 쌀국수를 시켜서 먹는데 양이 적어도 2 인분은 될 것 같은 많은 양이었다 . 그래서 다른 애들은 어찌어찌 먹은 것 같은데 나는 결국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 그리고 원래 1 시 10 분 차를 생각하고 왔는데 시간이 늦어져서 2 시 40 분 차를 타게 됐다 . 다행이 이번에는 고맙게 창 측 에다가 옆에 아는 사람이 타서 비교적 편하게 갈 수 있었다 . 그리고 다음은 후마 차와 빛나는 차를 타고 이동했다 . 차를 타고 이동해서 캠핑 장에 도착하니까 장 보러 갔다가 일찍 도착한 설린이와 재민이가 먼저 와서 탠트도 거의 다 쳐 놨고 생각했던 거 보다 훨씬 시작이 순조로웠다 . 피곤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영산강 순례의 첫발을 잘 땐 것 같았다 .
2 일차 , 5 월 9 일
오늘은 6 시 30 분에 기상해서 잠이 다 깨기도 전에 용소로 출발했다 . 이상하게 가면 갈수록 산책이라고 했던 길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 그래도 그렇게 오래 가진 않았고 2 키로 정도 걸었을 때 용소가 나왔다 . 거기서 별일 없이 다시 2 키로를 걸어 내려왔다 . 그리고 아침을 해 먹는데 1 조가 해 먹는 주먹밥 (오니기리 )가 거의 망해가기 직전 에다가 (특히 누구 )양도 적어서 결국 나가는 시간이 30 분 정도 늦춰졌다 . 그리고 출발해서 걷는데 가방이 몸에 안 맞는지 골반 뼈랑 어깨가 걷기 시작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파왔다 . 그리고 중간엔 일평이 길을 잘못 들어 조금 헤맸지만 다행이 도착은 했다 . 그런데 발 , 어깨 , 골반이 아팠다 . 후마에게 들어보니까 27 키로 정도 걸었다고 했다 . 심지어는 탠트를 친 곳 옆 화장실에 물도 안 나와서 물을 다른 곳에서 떠와야 했고 그래도 이번에는 산티아고를 앞두고 있는 마음가짐이 그대로 있어서 순레의 일상을 단순하게 해석해서 나 자신의 사기를 올리며 그래도 기분 좋게 생활할 수 있었다 .
3 일차 , 5 월 10 일
이번 아침은 덜 추웠던 덕분에 6 시에 일어났지만 많이 피곤하지 않았다 . 시리얼을 먹고 최대한 빠르게 탠트를 정리하고 가기 전에 다른 때보다 일정을 더 세세히 들을 수 있었다 . 먼저 후마가 말하기로 온천 (목욕탕 )에 갔다가 담양 에서 국수를 먹고 그 다음부터 걷기로 했다 . 일정대로 국수를 먹고 걸을 때 1 시간 정도 가서 쉬는데 상율이가 정말 부자연스럽게 넘어져서 뭐지 ? 하고 그냥 웃고 있는데 나중에 상율이가 머리가 아프다며 울고 얼굴이 빨개져서 약을 먹고 쉬다가 다시 출발해서 다음 쉴 때 상율이가 아까 재민이랑 짜서 장난 친 거라고 말했지만 그 말은 부작용이 되어서 상율이는 그 쓸데없는 일 때문에 시간이 늦어졌다고 원성을 받아 냈다 . 그리고 이번에 머무를 곳은 518 을 추모하러 학생들이 걸어왔다고 후마가 말했더니 좋은 속소를 내어주셨다고 해서 고마운 마음으로 머무는 장소에 도착했다 .
그리고 중간에 일평이 딸기 서리함 ...
4 일차 5 월 11 일
오늘을 바쁘게 달려오다 조금은 쉰다고 할 수 있는 날이다 .
먼저 아침밥도 누룽지에 밑반찬 ! 게다가 잠도 잘 와서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다 . 빌려서 잠잤던 곳을 원래 모습 그대로 청소해 놓고 망월동으로 출발했다 . 7 학년 때 백일장을 처음 접하고 더는 해보지 않았는데 이번에 다시 백일장을 하게 됐다 . 거의 매년 망월동에 왔지만 이번에 느껴지는 망월동은 여태 까지의 망월동과는 천지 차이였다 . 전에는 아무 감정 없이 스쳐 지나갔다면 이번에는 감정이 조금 더 많이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다 . 여기에는 백일장 때문에 더 자세히 보고 생각도 많이 하며 봐서 그런 것도 한몫 했다 . 갔다가 돌아와서 바르게 밥을 먹고 , 짐 정리를 해서 1 시가 조금 넘어서 미나쌤 집 , 소피움으로 출발했다 . 그리고 이번 걷기는 조금 걷는다고 긴장감이 조금 풀어졌는지 , 볕이 강해서 그러는지 걷기가 조금 더 힘들었다 . 또 순례 가기 전에 연휴여서 망가져 가는 신발을 신고 왔더니 이제 덜렁거려서 신발이 이번 순례를 다 버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 중간에 물이 미지근 해져 있는데 쉬고 있는 정자 근처에 있는 집에서 어떤 분이 시원한 물을 가져다 주셨다 . 그리고 소피움에 도착해서 미나쌤 만나기 전에 미나쌤 드린다고 수국을 사서 소피움에 도착했다 .
5 일차 , 5 월 12 일
오늘은 버스를 타고 도산동 까지 1 시간 넘게 타고 가는데 잘 안 하던 멀미를 심하게 해서 버스에서 내린 뒤 1 시간이 다 되가도록 멀미가 잘 나아지지 않아서 뒤쪽에서 천천히 걸어갔다 . 걸으면서 또 하나 특별했던 일은 정말 오랜만에 억지로 쥐어 짜낸 시가 아닌 걷다가 갑자기 떠올라서 걸으면서 가방을 거꾸로 매고 공책에 휘갈겨 끄적끄적 해 놓고 점심 먹을 때 , 끄적 해 놓은 것을 정리했다 . 그리고 이상하게 순례 자체가 힘들긴 정말 힘들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고 즐거웠다 . 산티아고에 가기 전 순례가 이러니까 산티아고 느낌이 정말 좋다 .
6 일차 , 5 월 13 일
아침에 다른 때 보다 여유롭게 일어나서 여유롭게 지내다가 어느 순간부터 시간이 너무 늘어져서 나중에 보니까 몽피 집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꽤 많았다 . 그리고 오늘을 허리가 않맞는 가방 때문에 어깨에 가해진 부담이 누적 돼 서 실시간으로 어개가 뭉치는 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 목적지에 도착해서 저녁을 해 먹었는데 가장 맛있었다 . 또 내일은 30 키로를 걸어야 해서 여기까지 !
7 일차 , 5 월 14 일
오늘은 아침 5 시 20 분에 일어나서 밤에 가려워서 깊은 잠을 방해했던 머리를 감는데 자리도 불편하고 물도 많이 차서 망설였는데 막상 머리를 감으니 처음에는 차가웠다가 나중에는 그렇게 차갑지는 않았다 . 그리고 남은 20 분 동안 먼저 잠자리 +양말 같은 것들을 정리했다 . 그리고 마음과 생각도 깔끔히 정리한 뒤에 오늘 하루 30 키로를 걸어갈 준비를 했다 . 하지만 예정보다는 1 시간 늦게 출발했다 . 침낭 하나를 뺀 덕분에 훨씬 가벼웠다 . 그렇게 바르게 걷진 않았지만 속도를 늘리지도 줄이지도 않고 꾸준히 걸어갔다 . 7 일차쯤 되니까 애들이 하나 씩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 석영이는 발목 , 지안이는 발바닥에 물집 다섯 개와 발 뒤꿈치가 가졌고 재민이는 아주 작은 물집 하나 그리고 종아리에 풀독과 염증 같은 게 올라와서 고생했다 . 그래서 석영 재민 , 민재는 가방은 후마 차에 넣고 걸었다 . 25 키로쯤 걸었을 때 석영 , 재민 , 민재는 가방을 다시 매고 지안이가 가방을 넣었다 . 다행히 30 키로가 아니라 29 키로쯤에서 마무리 했다 .
8 일차 , 5 월 15 일
어제에 비교해서는 모든 게 여유로웠다 . 그리고 후마가 어렵게 얻은 숙소라고 해서 주인 분이 엄청 조용하고 불편하다는 느낌을 드러내실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엄청 친절하시고 신경을 많이 써주셔서 엄청 잘 자고 교회 목사님 따님이 빵과 주스를 사주셔서 아침으로 그걸 먹었다 . 그리고 영산강 하구둑으로 출발했다 . 어제 많이 걸어서 발바닥을 좀 걱정했는데 어제 많이 걸으면서 발이 길이 들었는지 오히려 더 몸이 가볍게 앞으로 가는 느낌이고 마음은 더 여유로웠다 . 그리고 영산강 하구둑에 도착하고는 어제 잠깐 왔다 가셨던 조은호 목사님이 차를 태워주셔서 편하게 이동했고 점심도 목사님이 사주셨다 . 그리고 저녁도 밖에서 먹고 스엘 쌤 요트에서 자기로 해서 요트로 이동했다 .
9 일차 , 5 월 16 일
일어나니까 요트의 기우뚱거림 때문에 비몽사몽한 상태가 오래갔다 .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시계를 찾다보니 그 참낭의 부스럭 거리는 소리 때문에 재민이가 깼다 . 시계를 보니 7 시까지 자도 되는데 6 시 20 분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 아직 다 자고 있을 까봐 대기하고 있다가 50 분쯤 화장실을 갔다가 짐을 챙겨서 나갔다 . 배 멀미 때문에 사무실에서 잤던 석영 , 선민 후마가 짐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 아침을 먹고 먼저 탠트를 깔끔히 닦아 전보다 가지런히 개어 차에 넣었다 . 9 시가 되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 노밸상 기념관에 가서 천천히 둘러보고 영상도 보았다 . 그 다음 일정으로는 점심을 먹으러 시장에 있는 백반 집을 갔다 . 근데 하필 오늘이 장날이어서 사람들이 너무 북적였다 . 문제는 밥을 먹고 나서부터였다 . 시간이 많이 남아서 후마가 시장에 30 분이 넘게 애들을 풀어놨는데 햇빛이 너무 강하고 온도도 높아서 나 포함 애들이 얼마 돌아다니지 못하고 더위 +여러 명의 사람들 +소음 대문에 지쳐서 하나둘씩 차 앞으로 모였다 . 그 다음 일정은 근대사 전시관 이었는데 도착하기 전부터 애들을 기운이 없었다 . 1 관 , 2 관 등을 둘러보고 숙소로 가는 버스 안에서 무거운 가방을 매지도 않고 오랬 동안 , 많이 걷지도 않았는데 깊이 잠이 들었다 .
10 일차 , 5 월 17 일
오늘을 바로 옆이 버스 정류장이어서 7 시에 일어날 수 있었다 . 그리고 일평 , 나 , 지안이 , 선민이를 제외한 다른 애들은 어제 오신 두더지 차와 후마차를 나눠 탔다 . 8 시 50 분 차를 타고 순천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아랫장 에서 애들과 배움 지기를 만났다 . 그리고 밤은 먹고 걸어갔다 . 걸어가면서 애들도 빨리 가고 싶은지 말이 없어서 내 생각에 집중이 잘 됐다 . 그리고 그중 가장 깊이 들어갔던 생각을 구체적으로 풀어보자면 일단은 7 학년 때 처음 간 순례에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과 , 지금의 내가 순례에서의 시간을 쪼개는 방법을 정리했다 . 일단 7 학년 때는 9 박 10 일 순례 한번을 한 덩어리로 봤었는데 8 학년 때는 하루를 단위로 쪼개고 더 나아가 그날 있었던 굵직한 사건 몇 개를 기준으로 한 순례에서 총 3~40 개로 쪼개졌다 . 그리고 지금은 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생각 중에 쓸만한 생각을 잡아 생각하는 것을 한번으로 순례 한번이 천 개 가까이 쪼개지고 더 나아가 한발 한발 , 그리고 걷기가 끝나고는 내가 하는 동작하나 , 내가 말하는 단어 , 문장 하나 단위로 쪼갤 수 있게 되었다 . 이렇게 생각하면 어릴 때 내가 놀고 있는데 엄마가 가자고 하면 내가 했던 말이 있다 .“1 초는 짧지 ? 그러면 한 시간도 두 시간도 1 초를 합쳐 놓은 거니까 짧은 거겠네 ”하고 말하고 다음에 엄마가 하는 말을 듣지도 않고 “조금만 놀다 올게 ”이렇게 말하고 뛰어가 버린 일이 더러 있다 . 이렇게 생각하면 어릴 때는 단순히 바보 같은 시절이 아니라 나의 무의식 속의 지혜가 가장 밖으로 많이 나와있는 때인 것 같다 . 정리해 비유하자면 7 학년 때는 그냥 시작과 끝밖에 없는 선분 이었다면 8 학년 때는 수백각형 , 지금은 순례 한번에 샐 수 없이 많은 각 이 만들어졌다 . 그래서 지금의 나는 원으로 향해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는 나의 움직임에서 각 이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 뭔가 에세이 같아졌지만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은 원을 찾아 점으로 가는 여정인 것 같다 .
이렇게 생각하며 학교에 도착했지만 1 주일 뒤 산티아고가 남아서 그런지 별 감흥이 없었다 . 오히려 손목에 생긴 경계선이 더 신경 쓰였다 .
백일장 &시
민주주의란 무었일까 ?
일반적으로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란 말인데 얼핏 들으면 그냥 좋은 말이네 ... 하고 넘겨버릴 것 같은 말이다 . 하지만 백성이 주인이란 말은 아마 다수가 좋아하는 나라인것같다 . 아무래도 특권을 누리는 계충은 소수이고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수이니까 말이다 . 하지만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만 보더라도 인구가 5 천만이 훌쩍 넘어가는데 모두가 만장일치로 의견이 통일되는 건 불가능하다 . 그러니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겠지만 소수에 속한 사람들도 엄연한 시민이자 나라의 국민이다 .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진짜 민주주의는 소수의 의견은 이루어주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존중해 주고 지도자는 소수의 의견마저 마음 한 쪽에 넣어두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 이다 .
5 월에 광주에서 목숨걸고 투쟁했던 사람들은 , 그곳에서 목숨을 , 그리고 일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모두 민주주의 같은 정치적인 문제를 확실히 인지하고 하나의 정확한 목표를 가지고 싸웠던 것일까 ? 아마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 어린애들은 당연하고 그 당시 각자의 사정대문에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뜻은 당연하고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 그렇다면 그들을 목숨걸고 투쟁하게 했던 원동력은 무엇이엇을까 ?
그게 뭐라고 당신들의 목숨보다 중요했을까 ?
시
돌덩어리
온몸이 바위에 짓눌린 듯
나올랑 말랑 애매하게 걸쳐있는 ,
차마 꺼내지 못한 말들이 돌덩어리가 되어 자리잡았다 .
이제 우리는 당신의 흔적이 남은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그 돌덩어리를 부수고 헤집어
당신이 끝내 말하지 못한 것들을 대변하는 일뿐
광주
광주라는 두글자 안에
정말 많은 , 말하기 힘든
수많은 단어가 담겨있습니다 .
이 글자를 꺼내 하나 연결해 보지만
우리는 그날을 , 광주를 전부를 알 수 없습니다 .
발걸음
등지고 ,
그러니까 앞장서서 우리를 이끌어준 발걸음
누군가에겐 그 발걸음이
고통에서 벗어나려 도망치는 발걸음 ,
누군가에센 그 발걸음이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발걸음 ,
하지만 나에겐 최전선에서 나를 이끌어준 발걸음
뒤따라서 ,
그러니까 앞장선 사람을 믿고 묵묵히 따라와준 발걸음
그러나 그 발걸음은 누구에겐 귀찮음
누구에겐 내편이있다는 증거
그리고 나에겐 버팀목
내 앞의 길
다른 사람은 걸을 수 없는 길
오직 나만이 걸을 수 있는 길
뒤로 갈수도 없고
멈출수 없고
앞으로 가야만하는
나의 길
첫댓글 도착 첫날 올린 일지와 순례, 경원의 생명력이느껴지네요..고마워요...잘 쉬시고..또 출발해보시게요♡
경원이의 원을 적절하게 잘 찾기를 응원할께.
옴~
마치 하나의 에세이를 본 느낌이네요. 아주 어린시절의 순간에서 지혜를 보았다니, 멋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