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이민 시절, 우리 가족은 LA에서 30분 정도 북쪽에 있는 Burbank라는 동네의 작은 아파트에 자리를 잡았다.
한국에 비해서 늘 하늘은 푸르고 날은 덥고, 힘없는 나무들은 여기저기 늘어져 서 있고, 땅이 너무 넓어서 걸어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곳.
뭔가 풍요로운데 외로운 곳.
보이는 곳마다 시야가 확 트여 있는데도 가슴 한구석이 늘 답답한 곳.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웃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소외감을 안겨 주는 곳.
나에겐 California가 그랬다.
엄마, 아빠는 liquor store를 여셨다.
이런저런 식품들과 생필품과 술도 함께 파는 작은 마켓이었다.
한국에 편의점이라는 개념이 들어서기도 한참 전, 그보다 훨씬 큰 미국의 리 쿼 스토어는 커다란 대형 냉장고의 소음과 캐셔 뒤로 빽빽하게 정렬되어 있는 각종 양주들, 이민자들의 대표적인 생계 수단, 그리고 권총 강도의 이미 지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위험한 비즈니스의 상징이기도 했다.
나는 고등학교에 등록을 했다.
미국의 고등학교 2학년으로 전학을 했고, 현재 아이들이 듣는 고2 수업을 같이 들었다.
전혀 들리지 않는 그 자리에서 알아듣는 몇 가지 단어를 유추해서 수업을 따라가려, 열심을 포장한 억지의 학습을 반복하던 시간들.
수업이 마치면 선생님께로 가 오늘의 숙제를 다시 한번 물어보고, 오늘 이해 못 해서 내지 못한 class 과제물을 받아 적어 수업 후 독서실로 들고 갔다.
그리고 문을 닫는 9시까지 모든 숙제와 내지 못한 클라스의 과제물을 그곳에서 해결했다.
질보다 양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던 나만의 방식들. 각종 과목의 정리와 요약
은 대부분 방대한 양의 관련 자료들을 찾아 수십 페이지를 정성스럽게 베껴 갔다.
발췌한 책의 원본 제목, 지은이와 함께 제출을 하면 선생님은 무엇보다 나의 노력을 가상히 여겨주셨던 것 같다. 내가 기댈 수 있는 것은 당시에 그것 밖에 없었다.
내 생각을 담아 써야 하는 에세이 수업은 서투른 영어로 쓴 후에 독서실에 서 만나는 친절한 할아버지나 할머니들께 어렵게 부탁을 하면 그들이 문법 을 고쳐주곤 했던 기억이 있다.
어떻게든 정해진 시간 안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숙제를 제출하는 게 나 에게는 매일의 높은 고비를 넘는 것처럼 힘겨운 사투였다.
그렇게 간신히 과제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10시가 넘어 엄마, 아빠가 가 게 문을 닫고 들어오셨다.
미국에서 우리 가족에게 새롭게 정해진 일상은 부모님의 퇴근 후에 온 가족 이 마루 구석에 있는 작은 식탁에 앉아 엄마, 아빠가 하루 벌어온 현찰을 세 는 일이었다.
당시는 거의 100% 현찰 거래였기 때문에 종이봉투에 담아서 품속에 꽁꽁 숨겨 가지고 온 그 현찰을 가족 네 명이 단위별로 나누어 세어서 기록했다.
하루의 끝에 식탁 위로 던져진 낡고 구겨진 달러 더미에서는 미묘하게 역한 악취가 났다.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땀에 절고 구겨진 채 던져진 1불짜리 지 폐, 어느 싸구려 모텔방에서 바닥을 굴렀을지 모르는 5불짜리 지폐, 시커먼 기름때가 묻은 20불짜리 지폐.
그것들 하나하나를 손바닥으로 쫙쫙 눌러서 피면 지독한 현실의 무게와 함 께 불쾌한 기운이 내 연약한 손가락 사이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엄마, 아빠가 하루 종일 땀 흘린 노동의 대가였고, 이민자들 이 지불해야만 하는 아메리칸드림의 본질이었다.
사실 냄새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무거운 공기였다. 익 숙지 않은 육체노동과 처음 접해보는 장사라는 일, 생존을 위해 외국인 손님 들을 상대로 하루 종일 긴장에 절어 있던 부모님의 지친 표정. 그리고 알아듣지 못했던 수업과 교묘한 차별에 시달려 바닥을 치던 나의 자존감. 누가 더 힘들었는지 내기라도 하듯 굳은 표정으로 마주 앉아야만 했던 저녁 식탁.
한국과는 확연하게 다를 수밖에 없는 곳. 집안의 공기마저 나를 이방인 취급 하는 것 같은 불편한 현실과 싸우며 입을 닫은 채 우리는 묵묵히 돈을 세었 다. 입을 여는 순간, 나 오늘 너무 힘들었다고 말해버리는 순간 모두가 무너 져 버릴 것 같은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조용히 돈을 세고, 더하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마지막으로 그 모든 돈을 다 한 방향으로 정리해야 했다.
돈에 나와 있는 숫자가 뒤죽박죽되지 않아도록, 얼굴 모양이 뒤집어지지 않도 록.
하나라도 잘못되어 있으면 아빠는 예민해지시며 화를 내셨다. 미국은 이걸 다 제대로 정렬해서 가지고 가야지, 안 그러면 은행원이 돈을 세다가 아주 짜증을 낸다고 하셨다.
초기 이민자들이 힘든 건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이곳에 살아본 경험이 없으니 누가 뭐라고 말을 하든 여기는 원래 이런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따라야 한다는 강박.
거의 은행에 매일 가서 현찰을 입금하셨던 아버지는 은행 입장에서는 오히 려 우수고객이었을 텐데, 적은 돈이라도 손님한테 어떻게 감히 돈을 같은 방 향으로 맞춰서 가져오라는 갑질을 할 수 있는지.
그게 인종차별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무지함과 절박함 때문에 어 느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 불평조차 제기하지 않았다.
이곳은 한국과 다르니까.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당시 우리 스스로 철저한 '을'을 자청하고 있었다.
아빠는 한국에서 높은 학벌을 가지셨고 대기업에서 오래 일을 하셨던 분이 다. 어디 가서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를 해보지 못한 분이시고, 그 어떤 한국 인 1세보다 영어를 잘하셨다.
하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이민자 신분인 아빠는 왜라는 의문 없이 은행에 가 기 전에 늘 돈뭉치의 방향을 몇 번이고 확인하셨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아빠는 우리보다 더 긴장을 하고 사셔서 그랬는지도 모 르겠다.
영어를 못해서도 아니고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다.
다만 모든 것이 낯설고 무언가 앞서 있는 이 나라에서 자존심 강한 이방인 이 행여나 실수라도 해서 얕보이는 상황이 되는 걸 스스로 용납을 못하셨던 것 같다.
돈의 방향을 맞추는 건 단지 정리가 아니었다. 이 나라의 규례에 맞게 살고 있다는 확인이었고, 내가 일한 노동에 대한 예의였고,
나와 우리 가족이 떳떳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증거였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도 그때의 그 긴장감이 미국에서의 어려운 학업을 지탱할 수 있는 근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룹 프로젝트 때마다 조 편성을 하게 되면 마지막으로 늘 남게 되는 나.
수십 번 수백 번 연습을 하고도 막상 앞에서 발표할 때가 되면 더듬고 버벅 거릴 수밖에 없는 영어.
그 와중에 일부러 어려운 표현과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질문을 하며 당황하는 내 모습을 보며 올라가는 누군가의 입꼬리.
못 알아들었어도 시험은 봐야 하고
이해가 안 되어도 과제물은 제출해야 했다.
그룹 프로젝트에 나를 끼워주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완성해야 했고,
버벅거리는 영어로 학생들이 못 알아들었다고 하면 알아들을 수 있을 때까 지 반복해서 이해시켜야 했다.
집에 돌아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통곡을 할지언정 class 안에서 그들 앞에 서는 절대로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나는 오히려 당당해야 했고, 서툰 외국 어로 공부하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었다. 약함을 인정하는 순간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친절이 아닌 약점으로 작용한다는 걸 나는 꽤 일찍 배 웠다.
무엇보다, 힘들어서 못 하겠다, 때려치우고 싶다, 수십 번 나오는 말이라도 다른 유학생들처럼 나에게는 돌아갈 수 있는 고국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절망이지만 또 다른 편에서는 버틸 수밖에 없는 확고한 이유가 된다.
나는 어떻게든 미국이라는 거대한 땅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어차피 치러야 하는 시험이라면,
어차피 내야 하는 리포트라면,
어렵다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일단 덤벼서 해보는 걸로.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내가 오래전부터 무용을 전공해 왔다는 사실은 오히려 위안이 되었을까?
무용에는 언어의 장벽이 없으니 훨씬 수월할 거라 여겼던 나의 기대는 처음 에는 조금은 충족되는 듯하기도 했지만, 그 역시 전공자들끼리 모여 있는 대 학에서는 철저한 생존 경쟁의 장일뿐이었다.
보여주기 이전에 알아들어야 했고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해야 했고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점을 피력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학문과 다른 점 이 없었다.
나보다 훨씬 뛰어난 신체 조건과 거기에 비례해 몇 배 좋은 체력을 가지고 있는 그들과 경쟁하려면 그들의 연습량을 따라잡아야 했고, 무엇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한결같은 여유를 유지하며 춤을 추는 그들 특유의 문화적 정서는 감히 노력만으로는 따라잡기 버거운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열심히 그저 또 열심히 나의 20대를 무용실에서, 반복되는 동작과 남들이 하지 못한 생각으로 수업에 또 리허설에 집중하는 것.
연습을 마치고 땀에 절어 무용실을 나올 때면 늦은 밤 리쿼 스토어 불을 끄 고 문을 잠근 후 피곤한 발걸음으로 차에 오르는 부모님의 모습이 보였다.
기숙사에 돌아와 텅 빈 좁은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을 때는 낡고 더러운 달 러 뭉치들이 쌓여 있던 작은 테이블, 그 익숙하고도 미묘한 악취가 나의 땀 냄새 사이로 섞여 나오는 듯했다.
악센트 강한 영어와 스패니시로 가득하던 아빠의 리쿼 스토어. 그곳에서 온몸으로 부딪히며 노동으로 하루를 보내시던 아빠의 사업장이나,
서툰 영어 대신 흘러나오던 음악 소리에 모든 걸 걸고 연습과 공연 준비에 매진하던 나의 하루.
모두 살아남기 위해 매일의 루틴을 반복한다는 건 같았다.
그리고 그 정해진 루틴을 반복하는 그때의 시간들 속에는 구겨진 지폐를 정 리하고 있는 내 모습이 있었다.
지폐를 모아 같은 방향으로 가로와 세로의 결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정렬 (alignment)시킨다는 건, 발레에서 온몸의 기운을 가운데로 모아 발끝으로만 중심을 잡고 호흡으로 그 밸런스를 유지한다는 것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
무용수로서 몸의 정렬이 무너지면 밸런스가 깨지는 것처럼, 아빠에게는 지폐의 방향이 흔들리면 이민자로서의 삶이 깨진 것 같은 아슬아슬한 규칙을 세 우셨던 걸까?
아빠가 늘 손끝으로 맞추던 그 엄격한 정렬은 훗날 내가 무용을 할 때 왜라 는 질문 없이 내 몸을 통제하는 데 중요한 동기를 제공했다.
살면서 생각지 못한 일을 당했던 순간, '이게 뭐지?' 분명 일상은 돌아가는데 내 귀에는 아무것도 안 들리는 것 같은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일상의 루틴을 해내는 것.
그 어떤 순간에서도 지폐를 세던 손을 멈추지 않는 것.
더 나아가 나 스스로가 구겨진 지폐가 되어버린 날,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가치가 다한 사람처럼 취급받았을 때에도 나를 놓을 수가 없었다.
정해진 스케줄대로 해야 할 일을 먼저 마쳐야 했고, 기다리고 있던 레슨을 모두 끝내야 했다.
강박일지언정 루틴대로 해오던 일을 왜라는 질문 없이 하는 것. 의외로 그런 습관이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구겨진 지폐는 빳빳하게 펴야 한다. 그리고 방향을 맞춰야 한다.
더럽고 역한 냄새가 나고 이물질이 묻어 있는 지폐라도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사실을 난 어린 시절, 무겁고 불편한 공기와 싸우던 그 작은 식탁에 앉아 배웠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