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 어머니의 그늘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1792년 9월 14일 프로이센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렉산더 게오르크 훔볼트는 군인이자 미래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어머니 마리 엘리자베트는 친정아버지로부터 많은 돈과 땅을 물려받았다. 그들은 베를린에서 큰 존경을 받았고 특권층 가정 교육을 받았음에도 알렉산더와 형 빌헬름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아들들에게 큰 애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따뜻한 모정 대신 가정 교사를 불러 진리, 자유, 지식에 대한 사랑을 주입했다.
두 형제와 가정 교사의 관계는 특이했다. 특히 오랫동안 교육을 담당하던 쿤트는 두 사람이 수학 계산이나 라틴어를 번역할 때 쿤트는 그들의 등 뒤에서 맴돌다가 어깨 너머로 잘못을 지적했다. 제자들의 실수를 발견할 때마다 ‘저 녀석이 선생을 해코지하거나 공격하려고 저러는군’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두 사람은 이 같은 반응을 볼 때 지팡이로 두들겨 맞는 것 보다 고통스러웠다. 빌헬름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항상 쿤트를 행복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늘 걱정이었다’
특히 알렉산더의 경우 마음고생이 더욱 심했다. 두 살 차이 나는 형과 똑같은 교육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빌헬름이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능숙한 솜씨를 보일 때 알렉산더는 ‘나는 능력이 부족해서 느린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알렉산더는 후에 친구에게 이렇게 털어놨다. “가정 교사들은 내 지능이 정상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의심했어.”
빌헬름은 공부에 몰두했지만, 알렉산더는 틈만 나면 공부방을 슬그머니 빠져나와 정원을 배회하며 식물, 동물, 바위를 수집하거나 그림을 그렸다. 호주머니에 식물과 동물을 가득 채워 오는 경우가 많아지자 가족들은 그를 꼬마 약재상이라고 부르기만 할 뿐 그의 관심사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는 훔볼트 행사에 참여한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렇게 물었다. “ 너와 이름이 똑같은 알렉산더 대왕처럼, 너도 세상을 정복할 계획이 있느냐?” 그러자 어린 훔볼트의 대답이 걸작이 되었다. “네, 폐하 그렇지만 저는 머리를 하겠습니다.”
친한 친구 말에 의하면 훔볼트는 소년기에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살았지만, 그중에서 그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마리 엘리자베트 폰 훔볼트의 가장 큰 관심사는 그들을 완벽하게 교육하는 것이었고, 그들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었다. 흥미나 기쁨은 훔볼트 가문에서 용납 되지 않았다.
두 형제의 성격과 태도는 정반대였다. 알렉산더는 모험심이 많고 야외활동을 좋아했지만, 빌헬름은 신중하고 학구적이었다. 알렉산더는 기분이 갈팡질팡했지만, 빌헬름은 자제력이 강했다. 그러다 보니 두 형제는 제각기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갔다. 알렉산더는 외국산 나무들 사이에 파묻혀 차츰 다른 세계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훔볼트는 잘생긴 청년으로 성장하여 헝클어진 머리, 표정 풍부한 입술 등 꽃미남 모습을 두루 갖추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자신만만한 자세로 허리를 굳게 펴고 다닌 탓에 실제보다 훨씬 커 보였다. 탐구심이 많아 눈망울은 항상 반짝거리며 경계심을 잃지 않았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재치를 연마하고 야망을 키웠다. 소년 시절에는 날카로운 멘트를 날려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래서 친구들은 그를 ‘작은 악마’라고 하는데, 이 호칭은 알렉산더의 영원한 별명으로 굳어졌다. 빌헬름만큼은 그의 악의를 인정하지 않고, 아마도 ‘약간의 자만심’과 ‘돋보이고자 싶은 욕망’이 섞여 있을 거라고 했다. 자신의 지적 능력을 믿으면서도 때로는 의심했기에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우월감 사이에서 시소를 탔다.
나폴레옹과 보나파르트와 같은 해에 태어난 훔볼트는 점점 더 글로벌해지고 왕래하기 쉬워지는 세상에서 성장했다. 그가 태어나기 몇 달 전에 여러 나라의 과학자들이 사상 최초로 공동 연구에 참여했다. 훔볼트가 일곱 살이 직전 미국의 혁명가들이 독립을 선포했고 1289년 스무 번째 생일을 맞기 직전 프랑스도 그 뒤를 이어 혁명을 일으켰다.
독일은 아직 신성 로마 제국 아래에 있었지만,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가 말한 대로 신성로마제국은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 제국도 아니었다. 오스트리아는 왕가의 지배를 하에 있었는데, 이들 왕가는 지배권 및 영토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프로이센은 18세기 중반 프리드리히 대왕이 지배하는 동안 오스트리아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했다.
훔볼트가 태어났을 당시, 프로이센은 거대한 상비군과 효율적인 행정으로 유명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무용뿐 아니라 음악. 철학, 학문을 좋아한 것으로 유명했다. 프랑스와 동시대인들은 종종 독일이 거칠고 낙후된 지역이라고 했지만, 독일은 유럽 어느 나라보다 대학교와 도서관이 많았다. 출판물과 정기간행물이 증가하자 국민들의 문자 해독 능력이 향상했다.
영국은 경제적으로 앞서가고 있었다. 돌려짓기나 관개 시설 개선 같은 농협 혁신은 수확량을 증가시켰다. 공업 중심지가 된 도시들이 늘어났다. 그러자 영국의 농부들은 자급농업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심지에서 거주민과 노동자들에게 식량을 공급했다.
인간은 와트의 증기기관과 같은 신기술로 자연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천연두 백신을접종하자 의학으로도 자연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신의 분노의 표현’으로 간주되던 번개까지도 잠재우기 시작했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공포감을 상실했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서구사회를 지배해 온 것은 ‘자연은 복잡한 장치처럼 기능한다’라는 아이디어였다. 한 과학자는 그런 장치를 ‘거대하고 복잡한 우주 기계라고 불렀다.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신이 기계적 세상에 맨 처음 시동걸었다”라고 했다. 그러나 아이작 뉴턴은 우주를 ’좀 더 신성한 시계 장치‘로 “시계 장치를 만든 신이 계속 개입한다”라고 주장했다.
망원경이나 현미경과 같은 발명품들로 인해 세상이 새로워졌고, 그와 더불어 ’자연의 법칙은 발견될 수 있다는 믿음이 등장했다. 케임브리지에서는 뉴턴이 수학을 자연에 적용함으로써 우주의 메커니즘을 밝혀냈다.
서구세계에서는 수학, 객관적 관찰, 실험이 이성의 앞길을 환하게 비추었다. 과학자들은 자칭 서신 공화국의 시민이 되었다. 서신 공화국은 국경과 종교를 초월하는 지적 공동체를 말한다. 과학자들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과학적 발견과 새로운 아이디어가 전파되었다. 자연이 파괴될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여느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더와 빌헬름은 베를린 지식인 모임에 들어갔다. 테켈에서는 학습이라는 것이 외로운 활동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두 형제가 독서 클럽을 박차고 나와 베를린의 철학 살롱에 들어가자 외로웠던 활동이 사회적 활동으로 바뀌었다. 여름이 되면 어머니가 테켈로 가서 휴식을 취했는데 그때마다 두 형제와 가정 교사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종속되어있는 한 어머니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열여덟 살짜리 알렉산더를 프랑크푸르트안데어오데르로 보냈다. 학생이 겨우 200명밖에 안 되는 주립대학교가 있었다. 한 학기 동안 행정학과 정치경제학 공부를 마치자, 알렉산더는 빌헬름이 공부하고 있는 괴팅겐 대학교로 보내졌다. 빌헬름은 이곳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알렉산더는 과학, 수학, 언어학을 공부했다. 빌헬름은 열심히 공부했지만 알렉산더는 열대지방과 모험을 동경하며 독일을 떠나고 싶어 했다.
자기보다 나이 많은 게오르크 포스터라는 친구와 함께 4개월 동안 유럽 여행을 떠났을 때, 젊은 훔볼트는 방랑벽은 더 심해졌다. 포르스터가 남태평양의 섬들을 신나게 설명하자, 훔볼트는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1790년 봄, 포르스터와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에 갔는데,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런던이었다. 템스강을 가득 메운 선박들을 바라보는 순간, 세계 구석구석 실려 온 화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돛대로 뒤덮인 템스강은 검은 숲을 연상시켰다. 선박이 미어터지도록 가득 찬 템스강은 대영제국의 힘을 보여주는 거대한 풍경화였다.
훔볼트는 런던에서 식물학자, 탐험가, 예술가, 사상가들과 어울렸다. 그중에 호지스는 2차 세계여행에 참여한 화가였는데, 그가 가져온 그림과 스케치는 묘한 매력을 풍겨 훔볼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훔볼트는 자신의 꿈을 떠올리며 종종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내 마음속에는 어떤 욕구가 숨어있어, 종종 뭔가를 사무치도록 열망하게 된다.”
슬픔을 찾을 수 없을 때 훔볼트는 런던 이곳저곳을 혼자 정처 없이 걷곤 했다. 한번은 북쪽 핸스테드 교외를 걷던 중, 나무에 걸린 선원 모집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내가 바라던 게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머니의 엄한 얼굴이 떠올렸다. 그는 너무나 착한 아들이어서, 어머니를 차마 거역할 수 없었다.
서서히 미쳐 간다는 느낌이 들자, 훔볼트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고향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한 친구에게 쓴 편지 내용은 이러했다. “불행한 환경이 나에게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하게 만들고, 하기 싫은 행동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훔볼트는 어머니의 기대를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귀국하여 집에 돌아오자, 훔볼트의 고통은 폭발적 에너지로 변해갔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만 마리 돼지한테 쫓기는 것처럼, 끊임없는 강박적 충동에 이끌렸다. ‘나는 지적 능력이 없고, 형보다 뒤떨어진다’라는 생각을 버리고, 자신과 친구와 가족들에게 자신의 똑똑함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포스터는 ‘슬프게도 훔볼트의 뇌가 혹사되고 있구나’라고 확신했다. 알렉산더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거론하며, “말을 얼마나 빨리하는지, 경주마의 속도를 능가할 정도야”라고 수군거렸다.
1790년 늦여름, 훔볼트는 함부르크 경영학 아카데미에서 재무관리와 경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훔볼트는 남는 시간에 과학 논문과 여행 서적을 뒤지고 덴마크 어도 공부했는데, 뭘 공부하든 경영학 공부보다 재밌었다.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항구에서 배를 구경하면 마음이 편안해져. 왜냐면 그것들은 내가 품고 있는 꿈과 희망을 상징하기 때문이야.” 그는 어머니에게서 빨리 독립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함부르크에서 공부를 마쳤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다. 1791년 6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프라이크베르크에 있는 일류 광산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그것은 경력을 쌓기 위한 타협책으로, 한편으론 어머니를 달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과 지질학에 대한 호기심을 마음껏 충족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그곳은 과학계의 본산이기도 해서 유럽 각지에서 뛰어난 학생들과 교수들이 몰려들었다.
베르크에 있는 일류 광산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그것은 경력을 쌓기 위한 타협책으로, 한편으론 어머니를 달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과 지질학에 대한 호기심을 마음껏 충족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그곳은 과학계의 본산이기도 해서 유럽 각지에서 뛰어난 학생들과 교수들이 몰려들었다. 프라이크 함부르크에서 공부를 마쳤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다. 1791년 6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프라이 베르크에 있는 일류 광산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훔볼트는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였다. 다른 사람들은 3년 걸리는 과정을 8개월도 안 돼서 수료했다. 매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프라이베르크 주변의 광산 중 한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들어가 광산의 구조, 작업 방법, 암석 등을 살펴봤다. 정오가 되면 아카데미로 달려가 광물학 및 지질학에 관한 세미나와 강의를 참석했다. 자유 시간에는 빛이 식물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며 수천 개의 식물 샘플을 수집했다.
프라이베르크에 머무른 지 불과 몇 주 되지 않았을 때, 훔볼트는 형과 카롤리네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훔볼트는 사교 모임이나 가정 행사마저 공부의 기회로 활용했다. 형의 결혼식에 참석만 하고 오는 대신, 그 뒤에 튀링겐 지역을 순회하는 여정의 지질학 탐사 여행을 다녀왔다. 카롤리네는 훔볼트에게 “당신은 성격이 별나기는 하지만 존경받아야 마땅한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면서도, 그의 고독한 심리상태를 은근히 걱정했다.
프라이베르크에서 훔볼트는 진정한 친구라곤 학생 한 명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밤낮을 지내며 공부와 토론을 함께 했다. 훔볼트는 친구와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되었음을 기뻐하면서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질책하기도 했다. 왜냐면 공부를 끝내고 프라이베르크에 떠난 후에는 외톨이가 되어 큰 외로움을 느낄 게 뻔했기 때문이다.
프랑이베르크 광산 아카데미에서 연마란 실력은 큰 자산이 되었다. 아카데미를 이수한 다음 겨우 스물두 살 나이에 광산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수많은 연장자를 감독하게 되었다. 성층권에 오른 듯한 느낌에 당황하면서도, 친구와 가족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자신의 지위를 과시할 정도로 자부심이 강했다.
훔볼트는 여러 곳을 여행하는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좀처럼 마음을 열지는 않았다. 업무도 만족스럽고 편지 쓸 정도의 여유는 있지만, 외로움은 여전했다. 그러나 어느 날 밤에는 너무 외로운 나머지 어떤 방식으로든 대화를 나눔으로써 피로감을 이겨내야만 했다. 그럴 때면 펜을 들어 신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은 광산학에 대한 상세한 설명, 과학적 관찰, 감정적 폭발, 사랑과 우정에 대한 맹세 등이었다.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려면 지난 2년간의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외로움에 겨워 밤늦게 편지를 쓰다 보니 솟아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다음 날 광산이나 출장지에서 업무에 집중하다 보면 모든 걸 까맣게 잊어,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편지를 쓰지 않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지위도 올라가고 관심의 범위도 무척 넓어졌다. 이제는 광부들의 작업 조건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광부들의 안전을 위해 램프와 호흡용 마스크를 개발했다. 광부들이 지식이 부족하다는데 놀라, 교제도 만들고 광부학교를 설립했다. 역사 문서들은 과거의 발견을 기록하고 있어 유용하다는 것을 깨닫고, 몇 주 동안 16세기 문헌들을 해독하는 데 전념했다.
하지만 간혹 고열과 신경쇠약증이 재발하기도 했고, 고강도의 연구와 여행을 하다 보면 몸이 견뎌내지 못 하는 일도 있다. 질병과 빡빡한 작업 일정에도 불구하고, 훔볼트는 생애 최초에 저서를 두 권 출판할 수 있었다. 하나는 현무암에 대한 전문 지식이 담긴 논문이었다. 또 하나는 지하식물 군에 관한 이상한 곰팡이와 스펀지 비슷한 식물을 다룬 책이었다.
오늘날에는 ‘자연과확’이라는 불리는 자연과학은 형이상학, 논리학, 도덕철학과 함께 철학의 하위 분야로 존재하다가 18세기에 자체적인 접근 방법과 방법론을 사용하는 독립적인 분야로 진화했다. 자연철학의 등장에 이어, 식물학, 동물학, 지질학, 화학 등의 독특한 하위 분야들로 등장했다.
이 시기에 훔볼트는 소위 동물전기학에 사로 잡혔다. 동물전기학은 갈바니즘이라고도 하는데, 갈바니는 동물의 근육과 신경에 다양한 금속들을 부착하여 경련을 일으키고는, 동물 신경에 전기가 포함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같은 아이디어에 매혹되어 자그마치 4,000가지 실험했는데 구체적인 방법은 개구리, 도마뱀, 쥐의 몸을 자르고 찌르고 감전 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동물 실험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몸을 생체실험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훔볼트는 18세기 후반 과학계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이슈 중 하나에 몰두했다. 그것은 유기물과 무기물의 개념, 그리고 힘, 활동 원칙의 존재 여부였다. 과학자들은 혼돈에 질서를 여부라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지 ‘생물은 무생물과 다른 법칙에 따라 지배될지도 모른다’라는 아이디어에는 무관심했다.
18세기 후반, 일부 과학자들은 이 같은 기계적 모형을 의심하며, ‘그런 모형으로는 유기물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훔볼트가 동물전기 실험을 시작할 때쯤, ‘물질이 부활성이라는 주장을 틀렸으며, 활성을 유도하는 힘이 분명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과학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여러 의사는 새로운 생명 이론을 만들고 있었다. 블루멘바흐는 자신의 저서 ‘형성과 충동에 관하여’ 개정판을 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식물이나 동물 같은 생명체 속에는 다양한 힘들이 존재한다’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가 ‘형성충동’이라고 부르는 힘인데, 그것은 ‘신체 구조를 형성 하는 힘’을 말한다. 블루멘바흐는 곰팡이에서 시작하여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는 이 같은 형성충동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생명이 탄생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했다.
이처럼 훔볼트가 실험을 통해 해결하고자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생명과 정에 뒤얽힌 매듭을 푸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