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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의 집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오래된 벽시계 소리가 들린다. 똑, 똑, 똑.
꽃무늬가 희미하게 남은 나무 시계의 초침이 조용한 거실을 가로질러 움직인다. 먼지 한 톨 없이 닦인 탁자, 반듯하게 놓인 여러 액자, 벽에 걸린 북유럽 풍경 그림. 미국의 한 조용한 콘도였지만, 그 집에는 아직 노르웨이의 겨울빛과 공기가 남아 있었다. 고향은 떠나온 뒤에도 사람의 서랍과 벽과 말투 속에 오래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날은 헬렌의 아흔여섯 번째 생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문을 열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나는 문 앞에 서서 기다리며 안쪽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발소리를 들었다. 문고리가 조심스럽게 돌아가고, 헬렌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아흔여섯 살의 몸은 문까지 오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지만, 반가움은 늦지 않았다.
“방금 사촌하고 통화했어요. 내가 말했지요. 누가 나를 보러 온다고. 그랬더니 사촌이 그랬어요. ‘부럽다. 누가 찾아오기도 하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웃음 안에는 약간의 자랑도 섞여 있었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온다는 사실이, 그날 헬렌에게는 작은 자랑이자 큰 소식인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의자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는 늘 앉던 리클라이너에 몸을 내리고, 지팡이를 옆에 세웠다. 그 모든 움직임이 느렸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흐리지 않았다. 말도 또렷했고 기억도 선명했다. 몸은 세월에 많이 양보했지만, 마음은 아직 무언가를 꼭 붙들고 있는 사람 같았다.
나는 작은 생일 카드를 건넸다. 카드에는 풍선 그림이 있었다. 헬렌은 그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마치 그 작은 카드가 자신이 아직 누군가의 기억 안에 있다는 증거라도 되는 것처럼.
그날 나는 교회에서 헬렌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 집을 나설 때, 나는 헬렌을 생각하다가 자꾸 부모님에게로 마음이 옮겨가고 있었다. 헬렌의 느린 걸음과 조용한 집, 그리고 그녀가 끝내 붙들고 있던 노르웨이어가 아직 오지 않은 부모님의 시간을 미리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낯선 나라에서 늙어가는 사람에게 마지막까지 남는 말이 있다면, 언젠가 부모님에게도 그런 말이 한국어일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헬렌과 나 사이에는 닮은 점보다 다른 점이 훨씬 많았다. 그녀는 아흔여섯 번째 생일을 하루 앞둔 노르웨이 여성이었고, 나는 한국에서 온, 그녀보다 두 세대쯤 뒤의 사람이었다. 나는 노르웨이를 잘 몰랐고, 헬렌도 한국을 잘 몰랐다. 그러나 둘 다 태어난 나라를 떠나 다른 언어 속에서 살아본 사람이었다. 그 사실 하나가 우리 사이에 작은 다리를 놓았다.
이날은 내가 헬렌을 여섯 번째로 만난 날이었다. 처음 방문했을 때보다 집 안의 풍경은 조금 익숙해졌지만, 그 조용함은 여전히 나를 낯설게 만들었다. 깨끗하고 정돈된 집 안에서 헬렌의 세계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부엌과 거실, 리클라이너와 침실, 약통과 전화기. 바깥세상은 텔레비전 화면과 전화벨 너머에 있었다.
“이것 보세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일곱 알이나 먹어요.” 헬렌은 내 앞에서 손가락으로 약을 세어 보이며 웃었다.
“가끔은 내가 하루를 사는 게 아니라, 이 작은 알약들이 나를 하루 더 데리고 가는 것 같아요.”
약통은 노년의 작은 달력 같았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가 작은 알약의 칸으로 나누어지는 나이였다. 그래도 헬렌은 스스로 약을 챙기고, 집을 정리하고, 전화를 받고, 기억을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단정한 하루도 몸이 한순간 말을 듣지 않으면 쉽게 무너질 수 있었다.
한 달 전, 헬렌은 침대에서 나오려다가 넘어졌다. 신발 한쪽이 접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고치려고 허리를 숙이다가 중심을 잃었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그 일을 말하며 여러 번 자신을 탓했다.
“참 바보 같았어요. 정말 바보 같은 실수였죠.”
나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넘어짐은 바보 같아서 생긴 일이 아니었다. 신발을 고치는 일. 허리를 숙이는 일. 바닥에서 다시 일어나는 일. 그런 평범 한 일들이 어느 날부터는 더 이상 평범하지 않게 되는 나이가 있다.
헬렌은 바닥에 누운 채 한동안 몸을 바로 세워보려고 애썼다고 했다. 팔을 짚고 몸을 밀어보았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헬렌은 바닥에 누운 채 잠시 생각했다고 한다. 딸은 오늘 바쁠까. 사위는 집에 있을까. 다행히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순간에도, 헬렌은 먼저 딸의 시간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참 후 딸과 사위가 달려왔고, 사위가 그녀 곁에 몸을 숙였다고 했다. 그리고 으차, 하는 소리를 내며 헬렌을 두 팔로 들어 올렸다.“곰 같았어요. 아주 힘센 곰.”
헬렌은 두 팔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하며 크게 웃었다. 그 웃음에 나도 따라 웃었다. 그 곰 같은 사람이 폴란드계 사위라고 했다. 헬렌은 처음에 딸의 결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노년의 어느 토요일, 차가운 바닥에서 그녀를 일으켜 세운 사람은 바로 그 폴란드계 사위였다.
헬렌은 그날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했다.
그녀가 열 살이었을 때 독일군이 노르웨이에 들어왔다고 했다. 전쟁은 뉴스나 역사책 속의 단어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전쟁은 배고픔이었다. 열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 다섯 해 동안 늘 배고팠다고 했다. 그 배고픔 속에서 어린 남동생도 잃었다고 했다. 그녀는 말을 멈추고 잠시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말했다.
“잠들면 배고픈 걸 모를까 해서요.”
그 순간 거실의 시계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똑, 똑, 똑.
팔십 년이 지난 배고픔이 아직도 그녀의 눈꺼풀 안에 남아 있었다. 오래 산다는 것은 좋은 일만 많이 기억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어떤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몸 안에 남아 있다가 아주 조용한 오후에 다시 입 밖으로 나온다.
헬렌은 스무 살 무렵 미국에 왔다고 했다. 전쟁을 지나온 어린아이가 자라 바다를 건너온 것이다. 그러나 스무 살에 미국에 왔다고 해서 사람이 곧장 미국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영어로 장을 보고 병원에 가고 이웃과 인사하며 살아도, 마음의 깊은 곳에는 다른 언어가 계속 산다. 헬렌에게 그 언어는 노르웨이어였다.
젊은 시절 헬렌에게는 노르웨이어로 예배하고, 농담하고, 오래된 노래를 부 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국 땅에 살았지만, 그녀의 삶 안에는 노르웨이어로 된 방이 남아 있었다. 그 방에서는 영어 발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고, 어린 시절의 이름들과 전쟁 전의 마을이 설명 없이도 이해되었을 것이다.
그 방을 가장 오래 함께 지켜준 사람은 남편이었다. 그러나 그런 남편이 9년 전 세상을 떠났고, 함께 노르웨이어로 예배하고 삶을 나누던 사람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세대가 바뀌면서 노르웨이어 예배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같은 믿음 안에 있어도, 마음이 기대던 언어가 들리지 않으면 그 자리는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헬렌은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영어로 충분히 이야기했다. 웃기도 하고 농담도 했다. 자신의 몸 상태를 설명했고, 가족 이야기도 했다. 그러나 생활을 해내는 말과 마음이 기대는 말은 같지 않을 수 있다.
헬렌에게는 노르웨이에 여든여섯 살 여동생과 아흔 살 사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다시는 못 볼 거예요.”
그 말은 크게 울지도 않았고, 극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조용해서 더 무거웠다. 여동생은 미국에 올 수 없고, 헬렌은 노르웨이에 갈 수 없다. 비행기는 여전히 뜨고, 공항은 항상 열려 있지만, 헬렌의 몸 앞에서는 그 모든 길이 하릴없이 끊어져 있었다.
“한국에 자주 가요?” 헬렌이 내게 물었다.
“갈 수 있을 때 가요. 나중에는 가고 싶어도 못 갈 수 있어요.”
그 말은 조언처럼 들렸지만, 동시에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서 먼저 도착한 말처럼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은 늘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비행기표를 사고, 시간을 내고, 마음만 먹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헬렌 앞에서 그 모든 말이 조금 얕게 느껴졌다. 갈 수 있다는 것은 몸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때 나는 부모님을 생각했다.
헬렌이 미국에서 노르웨이어를 붙들고 늙어가고 있듯, 부모님도 말레이시아에서 한국어를 붙들고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말레이시아로 건너가 자랐고, 부모님은 지금도 그곳에 살고 계신다. 말레이시아는 부모님에게 오래 살아 익숙해진 곳이지만, 마음을 가장 편히 내려놓는 자리는 여전히 한국어일 것이다. 그래서 부모님의 한국어는 언제나 조금 먼 곳에서 들려왔다. 한국이 아니라 말레이시아의 집에서, 전화기 너머로 내게 건너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내가 가장 오래 기대어 온 말이기도 했다.
나도 영어가 모국어는 아니지만, 부모님에게 영어는 나보다 더 멀리 있는 언어다. 건널 수는 있지만 마음 놓고 뛰어다닐 수 없는 다리 같은 것. 그들은 그 다리를 건너 일했고, 아이를 키웠고, 길을 외웠고, 알아들은 척 지나간 말들도 견디며 살아냈다.
식당에서도 그랬다. 집에서는 엄마가 늘 온 가족의 입맛을 알고 음식을 알아서 챙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말레이시아에서 메뉴판을 앞에 두면 그 역할이 어느새 내게 넘어왔다. 메뉴판을 읽고, 동생들이 먹을 것을 고르고, 종업원에게 영어로 주문하는 일은 대개 첫째 딸인 내 몫이었다. 부모님은 내게 조용히 메뉴를 일러주었고, 나는 그것을 영어로 바꾸어 건넸다.
어릴 때 나는 그 일이 싫지만은 않았다. 내가 조금 어른스러워진 것 같았다.
가족을 대신해 바깥세상과 말이 통하는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뿌듯함 한쪽에는 늘 마음이 무거운 구석이 있었다. 말이 바뀌는 순간, 우리 가족 안의 자리도 잠시 바뀌었다. 부모님은 여전히 내 부모였지만, 낯선 언어 앞에서는 나에게 먼저 기대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이인 내가 어른의 말을 대신 들고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때 나는 음식만 주문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이 낯선 언어 안에서 앉을 자리를 대신 마련하고 있었다.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부모님의 앞으로 올 시간으로 이어졌다.
부모님은 아직 건강하고, 아직 스스로 많은 것을 해내신다. 그러나 언젠가 부모님도 낯선 전화, 병원 서류, 약 이름, 보험 설명 앞에서 더 자주 멈춰 서게 될지 모른다. 그때 부모님에게 필요한 것은 정확한 설명보다 한국어로 천천히 건네는 안부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미국에서 다른 언어를 빌려 하루를 살아간다. 영어로 일하고, 책을 읽고, 장을 보고, 사람들을 만나며 산다. 때로는 영어로 웃고, 위로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주 피곤한 날, 마음이 무너지는 날, 두려움이 목까지 차오르는 날이면 나는 여전히 한국어 안으로 돌아간다.
혼잣말은 항상 한국어로 나온다. 엄마를 부르는 말도, 아빠에게 화를 내는 말도, 내 아이를 걱정하며 혼자 중얼거리는 말도 그렇다.
그렇다면 아주 늙은 어느 날의 나는 어떤 언어로 아플까. 기억이 흐려질 때, 내 입술에 남는 기도는 어떤 언어일까.
그날 방문을 마치기 전, 나는 헬렌과 함께 기도했다. 우리는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주기도문 앞에서 헬렌은 말했다.
“영어로는 이상하게 다 잊어먹었어요.”
헬렌은 꽤 오랫동안 영어로 예배를 드리고, 영어 찬송을 부르고, 영어로 기도해 왔다. 그러나 그날 주기도문 앞에서 헬렌은 노르웨이어로 돌아갔다.
헬렌은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거의 혼잣말처럼 낮고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작은 목소리에서 그녀는 조금씩 힘을 되찾는 것 같았다. 얼굴이 편안해졌고, 입술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길을 다시 찾아가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나는 그녀의 기도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이 그녀에게 얼마나 오래된 집 같은 말인지는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마음 한쪽이 서늘해졌다. 이 방 안에는 그녀의 노르웨이어를 함께 따라 외워줄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가장 깊이 기대고 싶은 말을, 혼자 붙들고 있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낮고 느린 음절들이 조용한 거실을 채웠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기도는 낯설기만 하지 않았다. 영어 안에서는 조심스럽게 걷던 사람이, 노르웨이어 안에서는 잠시 자기 집에 돌아간 사람 같았다. 그 말 안에는 전쟁 전의 어린 헬렌과 배고파서 눈을 감던 아이, 바다를 건너온 젊은 여자와 노르웨이어로 하루를 내려놓던 아내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기도가 끝난 뒤 헬렌은 천천히 일어났다. 나는 그녀가 일어나는 것을 도우려 했지만, 그녀는 잠시 스스로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내게 다가와 나를 안았다. 그녀의 몸은 작고 가벼웠다. 그러나 그 포옹은 이상하게 무거웠다. 한 사람의 긴 생애가 잠시 내 어깨에 기대는 것 같았다.
“와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집을 나와 차에 앉았다. 시동을 걸기 전에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헬렌의 집 안에서 들리던 시계 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똑, 똑, 똑.
시간은 모두에게 같은 속도로 흐르는 것 같지만, 어느 나이가 되면 더 이상 앞으로만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시간은 노르웨이의 열 살로 돌아가고, 어떤 시간은 스무 살의 이민자에게 머문다. 또 어떤 시간은 바닥에 누워 딸의 전화를 기다리는 아흔여섯 살의 몸 안에 멈추고, 오래전에 죽은 남편의 목소리와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여동생에게 가 닿는다.
나는 그날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특별히 할 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엄마, 별일 없지?” 내가 물었다.
“별일 없지. 밥은 먹었니?”
전화기 너머에서 돌아온 말은 너무 익숙해서, 그동안 나는 그 말을 자주 흘려들었다. 부모님의 한국어에 오래 기대어 살았으면서도, 정작 그 말이 들려올 때는 바쁘다는 이유로 짧게 지나칠 때가 많았다. “별일 없지?”라는 말이 얼마나 많은 걱정을 눌러 담은 말인지, 나는 헬렌을 만나기 전까지 충분히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헬렌의 노르웨이어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기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던 말. 함께 읊어줄 사람이 없어 더 외로웠던 말.
사람이 마지막에 기대는 말은 꼭 가장 유창한 말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마지막까지 남는 말은, 아무 일 없기를 바라며 매일 건네던 가장 평범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별일 없지.
밥은 먹었니.
나는 오래전부터 그런 말들에 기대어 여기까지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