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
한국 교회는 주교회의 1995년 추계 정기 총회의 결정에 따라, 해마다 7월 셋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고 있다. 이날 교회는 농민들의 노력과 수고를 기억하며 도시와 농촌이 한마음으로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맞갖게 살도록 이끈다. 각 교구에서는 농민 주일에 여러 가지 행사를 마련하여 농업과 농민의 소중함과 창조 질서 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오늘은 연중 제16주일이며 농민 주일입니다. 교회는 주일마다 함께 모여 주님의 파스카를 경축합니다. 말씀과 생명의 빵 안에 계시는 성자를 알아 뵙고, 그분을 참된 예언자요 목자로 모시어, 영원한 기쁨의 샘에 이르게 하여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제29회 농민 주일 담화
농촌과 도시가 함께 만들어 가는 생명 공동체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994년에 시작된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을 교회 전체가 더욱 책임 있게 수행하고자 1996년에 설정된 ‘농민 주일’이 올해로 스물아홉 번째를 맞이하였습니다. 농민 주일이 농사와 농민의 삶에 대한 관심과 인식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였다는 평가와 함께 농민 주일의 참된 의미를 되돌아봅니다.
우리 농촌은 전통적으로 곡물 중심의 식량 작물을 재배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자유 무역 협정(FTA)으로 점차 특용 작물 재배가 늘면서 농업은 변화하였습니다.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농촌의 삶은 더 어려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농가의 연평균 소득이 우리 나라 전체 가구의 연평균 소득보다 950만 원가량 적다는 통계가 이를 보여 줍니다(2023년 통계청 기준). 농사에 대한 동기 부여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농민들이 겪는 현실은 단순히 농민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고 대규모로 기업화된 농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불합리한 구조, 점점 나빠지는 토양 문제 등은 농민들의 삶을 더욱더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해외에서 생산한 먹거리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유해성과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먹거리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습니다. 이는 농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 다른 큰 문제는 기후 위기입니다. ‘코페르니쿠스 기후 변화 서비스’에 따르면, 지구는 지난해 6월부터 12개월 동안 연속으로 ‘가장 더운 달’을 기록하였습니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기후 학자들이 말하는 임계 온도인 1.5도를 넘는 달이 무려 11개월이나 지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후 변화를 가장 먼저 겪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농부들입니다. 한 예로 평년보다 비가 많았던 지난 겨울에는 너무 일찍 찾아온 이상 고온이 겨울 작물에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은 농민들이 겪는 어려움을 외면하거나 남의 일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동안 교회가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으로 이룬 성과도 있지만, 농민의 짐을 덜어 주기에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변화하는 현실에서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은 더욱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운동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하느님 창조 사업의 훌륭한 협력자인 생태 사도 농민들의 삶에 더 긴밀히 결합하고 실천하여야 합니다.
농민 주일은 농민을 위한 날이자 농민들의 열정과 노력의 결과를 소비하는 도시 생활인을 위한 날이기도 합니다. 서른 번째 해를 앞둔 지금 그 참된 의미를 다시 생각하여 봅니다.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회복하고, 생태적 회개의 삶을 살아가며,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갑시다. “주님은 우리의 정의”(예레 23,6), “어서 저를 도우소서”(시편 70,1)라고 외치는 농민들과 함께, 지금까지 가톨릭 교회가 이룩한 성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상생의 길로 나아갑시다.
2024년 7월 21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 박 현 동 아빠스
[내용출처 - https://cbck.or.kr/Notice/20242264?gb=K1200 ]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2,13-18
형제 여러분,
13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축일7월 21일 성 라우렌시오 (Lawrence)
신분 : 신부, 교회학자
활동 지역 : 브린디시(Brindisi)
활동 연도 : 1559-1619년
같은 이름 :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는 1559년 7월 22일 나폴리(Napoli) 왕국의 브린디시에서 상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나 율리오 체사레 루소(Giulio Cesare Russo)라는 이름을 얻었다. 신앙심 깊은 부모가 일찍 돌아가자 그는 교육을 위해 베네치아(Venezia)의 삼촌 집으로 갔다. 그리고 1575년에 그곳에 있는 카푸친회에 입회하여 라우렌티우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파도바(Padova) 대학에서 교회 학문을 공부한 그는 언어에 대한 특별한 재능을 보여, 히브리어 · 그리스어 · 독일어 · 스페인어 · 프랑스어에 대한 상당한 실력을 지니게 되었다. 1582년 사제품을 받는 그는 북이탈리아 지방과 알프스 너머까지 순회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가로 활동했다. 그는 강론 중에 성경 말씀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는데, 그의 강연과 강론을 주로 담은 “전집”(Opera Omnia)을 보면 성경에 대한 그의 해박한 식견과 다양한 언어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카푸친회의 여러 고위직을 맡아 봉사했는데, 히브리어에 능통했기에 유대인의 개종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많은 랍비들의 개종을 이끌기도 했다. 그리고 1599~1613년 사이에는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독일로 파견되어 그곳의 호전적인 프로테스탄트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며 선교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 나라의 주요 도시에 카푸친회 수도원을 설립한 그는 많은 개신교 신자들을 가톨릭으로 돌아오도록 했고, 그가 설립한 수도원들은 후일 각기 관구 수도원으로 발전하였다. 1601년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Rudolf II)의 요청으로 수석 군종신부로 임명되어 고전 중이던 터키인과의 전투에 직접 말을 타고 십자가를 높이 들고 나가 독일 군사들을 격려해 승리로 이끌었다. 1602년 카푸친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한 그는 1605년 이후 교황과 황제의 특사 등을 활동하며 노련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1610년에 가톨릭 연맹을 결성했다. 그리고 1614년에는 에스파냐와 사보이아(Savoia) 왕가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고, 총독의 학정에 시달리던 나폴리 사람들을 대표해 에스파냐의 펠리페 3세(Felipe III)를 만나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1619년 7월 22일 포르투갈의 리스본(Lisbon)에서 설교를 마치고 배를 타기 위해 이동하다가 선종했다. 그 후 그의 시신은 에스파냐 북부 아스토르가(Astorga) 교구의 비야프랑카(Villafranca)에 있는 클라라회의 성당 묘지에 안장되었다.
성 라우렌티우스는 언제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교회에 헌신했다. 또한 그는 저술가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특별히 성경 주석가로서 그의 능력은 강론과 강연, 성경 주해서(창세기와 에제키엘서),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와의 논쟁 등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반종교 개혁 과정에서 교회가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이었다. 그는 1783년 5월 23일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81년 12월 8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는 1959년 3월 19일에 그의 열렬한 활동과 폭넓고 조화로운 학식을 인정해 그를 ‘사도적 교회학자’(Doctor Apostolicus)로 선포하였다.♧
오늘 축일을 맞은 라우렌시오 (Lawrence)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