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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31일 수요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44-46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4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45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46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나도 모르게 보물을 키우고 있을 것입니다.
진주조개가 진주를 만들어 냅니다. 진주조개는 학명은 Pinctada fucata GOULD라고 하는데 난해성(暖海性)으로서 수온이 8℃ 이상 되는 곳에서만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진주조개가 수온이 낮은 겨울에도 살 수 있는 곳은 우리나라의 제주도·거문도·거제도 남부 및 양산시 연안 등의 일부 수역뿐이라고 합니다. 진주조개는 해수 비중이 다소 낮은 내만이나 연안으로서, 자연산은 저조선(低潮線) 부근에서부터 수심이 10m 되는 곳까지의 저면에 있는 고형물에 부착하여 생활한다고 합니다. 원래 일본의 특산물이었으나, 1965년에 일본으로부터 진주조개의 모패(母貝)를 처음 이식하여 양식하기 시작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양식진주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진주는 패체(貝體) 내에서 만들어진 패각과 같은 것입니다. 즉, 진주는 패체 내에 진주주머니(pearl sac)를 만들고 그 표피세포에서 진주질이 분비되어 만들어진 패각과 비슷한 것이 진주입니다. 진주의 가치는 색깔이나 광택 및 모양이나 크기에 따라 정하여지기 때문에 우수한 진주질을 분비하는 종류라야 진주양식을 할 수 있습니다. 진주조개는 우수한 진주질을 분비하고, 만들어진 진주는 진주로서의 가치가 커서 진주양식 종류로서 알맞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양식용 진주조개의 모패를 매년 일본으로부터 이식하여 와서 양식용 채롱에다 수용하여 수하식으로 양식하고 있습니다. 그 양식과정은 늦봄에서부터 초여름에 모패를 수술하기 위한 준비를 마친 다음 수술을 하게 되는데, 수술은 핵과 세포를 진주조개의 장관우곡부(腸管迂曲部:소화관의 꼬불꼬불한 부분) 옆이나 소화맹낭(消化盲囊:연체동물의 中腸으로 열린다.) 부근에 인위적으로 넣어주는 일입니다. 수술이 끝난 수술패는 수확할 때까지 양성 관리합니다. 수확 시기는 10월부터 이듬해 2월 사이이나, 수확성기는 11∼1월이라고 합니다. 진주양식은 50%정도면 우수하다고 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주조개 [眞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참조)
진주조개는 몸속에 이물질이 들어와 있으니까 아플 것입니다. 그래서 진주질이라는 점액질을 계속 그 아픈 부위에 보내는 것입니다. 그 점액질이 굳어져 진주가 되는 것입니다. 진주조개는 자신이 보물을 키우는 것도 모릅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그렇게 아름답고 비싼 보물이 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아픔을 치료하기 위해서 진주질을 보내서 사람들이나 자연적으로 자신의 몸속에 심어진 아주 작은 알갱이를 에워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고통의 산물이 바로 우리가 그렇게 아름답게 여기는 진주입니다. 인생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렵게 견뎌내는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하여 자신과 싸우는 과정에서 우리가 만들어내는 그 모든 것들이 나도 모르게 보물을 키우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은총으로 그 보물을 키우도록 성령을 보내주시고 우리에게 시련을 이기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물을 발견하고 몰래 그 밭을 사는 사람이나 진주조개를 사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깨닫고 용기를 얻고 기쁨을 느끼며 어려움을 이겨내는 사람입니다. 지금 암으로 고생하는 환우들도 그 암 덩어리를 없애기 위해서 온몸의 기운을 모아 암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 안에 살아계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보물을 알아보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과 환호를 소리 칠 날이 올 것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그리고 살아계신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모든 것을 투자하십시오. 그 일은 가장 잘하는 일입니다.
<“어찌하여 제 고통은 끝이 없습니까?” “네가 돌아오려고만 하면 내 앞에 설 수 있게 하리라.”>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5,10.16-21
10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
16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제가 당신의 것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
17 저는 웃고 떠드는 자들과 자리를 같이하거나 즐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를 가득 채운 당신의 분노 때문에 당신 손에 눌려 홀로 앉아 있습니다.
18 어찌하여 제 고통은 끝이 없고 제 상처는 치유를 마다하고 깊어만 갑니까?
당신께서는 저에게 가짜 시냇물처럼, 믿을 수 없는 물처럼 되었습니다.
19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돌아오려고만 하면 나도 너를 돌아오게 하여 내 앞에 설 수 있게 하리라.
네가 쓸모없는 말을 삼가고 값진 말을 하면 너는 나의 대변인이 되리라.
그들이 너에게 돌아올망정 네가 그들에게 돌아가서는 안 된다.
20 그러므로 이 백성에게 맞서 내가 너를 요새의 청동 벽으로 만들어 주리라.
그들이 너를 대적하여 싸움을 걸겠지만 너를 이겨 내지 못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하고 건져 낼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21 내가 너를 악한 자들의 손에서 건져 내고 무도한 자들의 손아귀에서 구출해 내리라.”
축일7월 31일 성 이냐시오 (Ignatius)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 지역 : 로욜라(Loyola)
활동 연도 : 1491-1556년
같은 이름 ; 이그나티오, 이그나티우스, 이냐시우스, 이니고
성 이냐시오는 1491년에 에스파냐 기푸스코아(Guipuzcoa) 지방의 아스페이티아(Azpeitia) 읍 위쪽의 로욜라 성에서 아버지 벨트랑 아녜스 데 오네스 이 로욜라와 어머니 마리아 사엔스 데 리코나 이 발다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이니고이다. 그는 1506년에 당시 귀족 집안의 관습대로 에스파냐의 왕실 재무상인 후안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의 집에서 위탁 교육을 받았다. 그는 후에 이때부터 자신이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명예를 얻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머리와 옷 등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며 허영과 사치를 일삼았다. 벨라스케스가 사망한 후인 1517년에 성 이냐시오는 군에 입대하였다.
1521년 나바라(Navarra)의 팜플로나(Pamplona)에서 프랑스군과의 교전 중에 다리 부상을 입고 그의 생애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성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그를 치료해 주었고, 로욜라의 가족들에게 후송해 주었다. 부상으로 인한 치료를 마치고 회복기에 접어들자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그는 평소 즐기던 낭만적인 기사 이야기를 실은 책을 읽고 싶어 하였다. 하지만 성 안에 그러한 책은 없었고, 대신 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삶에 관한 책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책을 읽어 가면서 기사로서의 공상들이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하는 반면,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삶 속에 참된 기쁨과 평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내면적인 체험을 할 즈음에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체험하였다. 이 환시에서 그는 크나큰 위안을 받았고 지난날의 생활 전체, 특히 육을 따르던 행실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이후 그는 회심의 길로 들어섰다. 회심 후 로욜라를 떠난 성 이냐시오는 1522년 3월 25일 몬세라트(Monserrat) 산에서 약 15km 떨어진 만레사(Manresa) 마을 근처의 동굴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기도와 극기와 명상에 몰입하였으며, 구걸로 생계를 꾸려갔다. 평화를 얻으려던 그는 오히려 자신의 지난 죄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 고행을 하였다. 그의 저서로 유명한 “영성수련”(Exercitia Spiritualis)은 바로 이 시기에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다. 이 당시 성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기도와 보속을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1523년 2월에 시작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은 그가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예루살렘 순례 후 1524년 3월에 바르셀로나(Barcelona)로 되돌아왔다. 회심 이후 약 11년 간 그는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526년에는 알칼라 대학, 1527년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1528년 여름에 파리(Paris)로 학교를 옮겼다. 그곳에서 1535년 3월 14일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1535년 봄 에스파냐로 돌아가 요양하였다.
성 이냐시오의 연학 시기는 수많은 시련도 있었지만 동시에 동료들을 규합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동료들을 파리에서 만났다. 즉 사부아 출신인 성 베드로 파브르(Petrus Faber, 8월 2일), 나바라(Navarra) 출신인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우스(Franciscus Xaverius, 12월 3일), 에스파냐 사람인 라이네스(J. Laynez)와 살메론(A. Salmeron)과 보바디야(N. Bobadilla), 포르투갈인 로드리게스(S. Rodriguez) 등이다. 이들은 성 이냐시오처럼 외적 고행, 구걸, 단식, 맨발로 다니기 등으로 단련하였다. 1534년 8월 15일 그들은 몽마르트르(Montmartre) 수도원의 순교자 성당에서 가난과 정결 그리고 공부가 끝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세 가지 서약을 하였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고향으로 돌아온 성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1537년 1월 베네치아(Venezia)에서 9명의 동료들과 모였으나, 당시 터키와의 전쟁으로 가지 못하고 1537년 6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그곳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37년 겨울 성 이냐시오는 동료 성 베드로 파브르와 라이네스와 함께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Roma)로 갔다. 로마 근교의 라스토르타(La Storta)라는 마을의 경당에서 성 이냐시오는 환시를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는 성부께서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한 자리에 있게 해주시는 환시를 보았는데, “내가 로마에서 너희에게 호의를 보여주리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성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자신들을 ‘예수회’(예수의 동반자라는 뜻)라 불렀으며,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는 이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사실 그때까지 장상, 규칙, 전통 없이 열심히 생활하던 성 이냐시오와 그의 동료들은 1540년 9월 27일 예수회 창립을 확인하는 교황의 교서를 통해 정식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 4월 성 이냐시오는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4월 22일에 그와 동료들은 로마의 바오로 대성전에서 장엄서원을 하였다.
예수회는 즉시 선교 지역으로 나갔고, 수도원과 학교, 대학교, 신학교 등을 전 유럽에 세웠으며, 교육과 지적인 분야에서 그들의 탁월한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에 성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세운 세 가지 목표는 교육과 자주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개혁하고, 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며 이단과 싸운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회 활동의 뿌리가 되었다. 성 이냐시오는 1555년 여름 로마에서 열병에 걸려 7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이냐시오는 1609년 12월 3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하여 시복되었고, 1622년 3월 12일에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그의 시신은 로마에 있는 예수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피정과 영성수련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이냐시오 형제들과 예수회에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