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연 다섯번째 (11월 19일) 수업내용 요약
디오티마를 통해 소크라테스 에로스의 정수가 펼쳐지는 끝에 알키비아데스가 디오니소스를 상징하는 차림새로 출현한다.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는 연인관계지만,
알키비아데스는 아리스토파네스적 에로스를 추구함으로써
소크라테스의 에로스와 더불어
두가지 대조적 에로스형태를 관찰해볼 수 있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실레노스에 비유하되 모습뿐 아니라 성품까지 비슷하다고 표현한다.
실레노스는 디오니소스와 자주 함께 등장하는 목축의 신으로,
아폴론적 지혜와 질서,철학을 대표하는 소크라테스와는 상반된 이미지이다.
그리스신화에서 아폴론의 악기는 지성적 음색을 내는 리라(수금.다윗이 타는 악기로 사울을 괴롭히는 악령을 좇아낼 때 쓰기도 했다 (편집자주))
디오니소스의 악기는 팬플루트(판의 피리)다. 정서.도취.감정을 자극하는 악기로서 플라톤의 국가에서 추방된 악기다.
감정을 끓어올려서 이성을 마비시키는 악기이기 때문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선생님은 실레노스처럼 방자하다고 말한다.
(*방자하다 = 히브리스hybris: 자기분수를 넘어섬= 오만방자함.절제는 방자하지않은 것이 기본이다)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거기에 빠져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현상이 디오니소스신도들인 코뤼바스들의 광란과 비슷한 상태에 빠지게 한다는 뜻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소크라테스를 떠나면 사람들이 주는 명예에 굴복하게 된다( 즉, 대중들이 주는 가치를 받아들이게 된다)며 영혼이 혼란스러워지는 고통을 호소한다. 내면의 가치에 집중하지 못하고 세상이 주는 가치 (정치적 야심)에 굴복하는 것
- 바로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의 구애를 거부하는 이유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지칭할때 아네르 (Aner남자,남편)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안트로포스(신과 대비되는 인간,인류)와는 뉘앙스가 다른 표현이다.
또 218d에서 '살갑게 대하다'는 ' 자기몸을 준다 (동성애관계)' 의 점잖은 표현이다.
성인( 에라스테스)과 소년(에로메노스)가 동성애관계를 맺을때 비대칭관계가 형성된다.
¤ 소년이 기대하는 것- 좋은 품성을 교육받는것
¤ 성인이 기대하는 것- 쾌락
알키비아데스는 나이든 소크라테스를 쫓아다님으로써 전도된 에로스관계를 보여준다.
어쨌거나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는 서로의 자질을 알아보았기에 연애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 역시 아름다운 사람에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 무지를 고백햇지만 에로스에 대해서는 조금 안다고 고백했다.
'크세노폰의 향연' 서 소크라테스는 '나는 한순간도 사랑에 빠져있지 않은적이 없다' 고 말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에로스의 핵심은 아름다움의 생산에 있다.
말은 에로스지만 실질적으로 필리아다. (구태하다고나할까?ㅋ)
성적인 에로스에만 국한되서는 안된다
성적 에로스를 넘어서야 한다.
생명의 유지와 확장을 위해서 건강한 에로스가 필수.
모든 형이상학이론은 하늘에서 생각하면 안되고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경험적 세계에서 모델이 나온다.
플라톤이 추구하는 진선미의 삼위일체는 지극히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출발한다.
○진 - 존재. 영원불변 생명이 유지되게.
○미 - 아름다움은 심리적인 쾌로 나타남.
생존에 유리한것
○선 - 유용성. 생존에 유용한것
나의 생존을 지속적으로 보존하게 하는 것이 참이고 쾌락이고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의 등급은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지속성에 따라 나뉜다.
이런 등급은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 현상계(가시계) - 감각:
1. 영상(실물이 거울에 반사된것)
2. 모상(사물의 실물)
○ 가지계 - 사유:
3. 수학적
4. 이데아
- 선분의 비유-
※ 플라톤의 아름다움의 등급상승※
개별몸
< 일반몸:외모의 아름다움에 대한 일반화된 생각
<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지속성에 따라
< 행위 (몸+마음) : 그사람이 보여주는
기능.재주(덕)-->외연이 넓어짐
아름다움의 선택지확장:
덕 (아레테): 기능적 덕<품성적 덕
< 법과 제도
< 지식 앎
< 아름다움 그자체=지성.지혜
품성적 덕이 기능적 덕 보다 우위인 이유- 품성이 나쁘면 기능을 잘못쓰게 됨
장인(과학자) ,정치가, 시인(작가)가자기의 과학기술이 인류에 좋게 쓰일지 나쁘게 쓰일지 모른다는것 즉, good을 모름으로써 자기의 지식을 무익하게 만든다.
이런지식은 철학자 즉 정치가가 가져야 한다
좋음의 가장 낮은단계는 자기에게만 좋고 높아질 수록 가족 주변 등 점점 범위가 확대된다.
☆법과 제도는 사람들의 덕을 만들어낸다.☆
플라톤 국가는 공동체에서 왜 도덕이 중요한가를 가르쳐준다. 도덕의 정의는 인간관계를 잘 형성하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행복의 요인은 두가지로 귀결된다.
1. 자기 능력(에로스)발휘하는것
2. 도덕 (관계)
《아리스토파네스와 소크라테스 에로스론 차이》에 대해 더 생각해보기
●아리스토파네스 에로스(서로 상대방 바라보기)
소유-결핍-잃어버린 반쪽의 회복-너밖에 없어
프로이드 라캉으로 연결
바타이유로 연결 (금기.억압)
오디푸스컴플렉스 - 우리는 금기와 법이 내면화되면서 인간이 된다
●소크라테스 에로스(같은곳 바라보기)
자유
무조건 같은곳을 바라보면 행복한 에로스?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가 물질임면 잘안됨
도덕적인 가치를 핵심으로 해야 잘된다.
철학의 힘은 기존의 갖고있던 생각, 가치관을 흔드는데 있다. 이것이 무지의 자각이며 모든 종교와 철학적 사유의 바탕이다.
소크라테스는 당대 식자들의 가치관을 흔들어 놓음으로써 오히려 많은 적들을 만들었다.
그들은 무지를 자각하는 대신 자존심 상해하며 원인제공자인 소크라테스를 제거하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편집자 참고>
※히브리스(hybris)
그리스 신화와 비극은 이 히브리스의 의미를 묻는 이야기로 넘친다. 히브리스의 작용은 일상의 작은 일에서부터 공동체의 큰 일에까지 두루 미쳤다.
▶폭식. 과음·폭음으로 인사불성이 되는 것, 요컨대 쾌락에 빠져 욕망의 종 노릇을 하는 것, 이 과도함이 히브리스다.
▶히브리스는 다른 사람을 향해 나타나기도 한다. 타인의 인격과 명예를 훼손함으로써 수치심과 모욕감을 주는 것,
그리하여 자신을 과시하고 쾌감을 얻는 것, 이것이 인간관계에서 발동하는 히브리스다.
히브리스는 시민사회 차원의 문제가 되기도 했다.
솔론의 입법 이래 아테네는 시민 기본권 유린 행위를 재판에 부칠 수 있는 ‘히브리스 사건의 기소권’을 시민에게 주었다.
힘 있는 자의 오만이 시민의 권리를 침해할 때 히브리스 단죄법이 작동하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금언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쓰여 있었는데, 이 말은 우선 “너 자신의 한계를 알라”는 뜻이었다.
자기 한계를 잊어버리고 히브리스에 휘둘리면 그때 닥쳐오는 것이 네메시스(nemesis), 곧 응징과 복수였다. 사람들은 네메시스를 신으로 섬겨 경계했다.
첫댓글 부지런 하셔라, 수업시간에 대칭적 관계와 비대칭적 관계에 대한 정리를 못했던 것 같습니다. 시간도 없었고, 귀희님의 글에서 소크라테스와 크산티페 사례를 가지고 토론을 해 볼려고 했는 데 빠뜨렸어요. 중요한 문젠데, 정리 잘 하시는 유경님이 해 볼래요? 소크라테스와 대칭적 에로스 관계라면 크산티페는 어떻게 아름다움을 생산할 수 있을까? 비대칭적 관계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자유-소유의 문제로 정리해 보세요 쉬희님도 한번 해 보시고, 다른 분들도 소견을 말해 보세요
아이고~이 댓글만 보고 나름 소견써서
댓글달려고 카페들어온 순간...
샘께서 좌르륵 정답댓글 다신거 봤네욤~ㅋ
그래도 기왕에 쓴 거 올립니당^^
에로스는 무언가 결여된 상태에서 좋음을 향해 가는 것이니까 에로스 관계는 누군가는 그것이 있고 누군가는 그것이 없는 비대칭적인 상태에서 출발하게 되겠죠.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보편적인 에로스의 모습입니다.
이 비대칭적 관계를 상승시켜 대칭성을 회복시킨 것이 소크라테스의 에로스입니다. 대칭적 에로스관계란 그냥 막연히 물리적 힘의 균형상태를 말하는 것 같진 않습니다. 결핍을 상대로부터 채우고자 함이 아닌, 서로 상대방의 에로스가 상승하여 필로스로 갈 수 있도록 독려하며 함께 성장하지만 독립적이고 자유한 자아의 상태를 유지하는 관계 아닐까요?
상대에게 나를 채워줄 무엇인가를 요구한다는 의미에서 크산티페와 소크라테스는 비대칭관계인 셈이죠.
비대칭적 관계는 나의 결핍을 채워줄 상대의 무엇인가와 함께 상대방자체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테니 파열음을 예고하는 관계라고 생각됩니다.
소크라테스적 에로스관계의 완성(필리아)는 상대와 나의 자유를 온전히 대칭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가능해지지 않을까요?
...세상에 거져 얻어지는 건 없는 듯..
소크라테스도 결국 자기 사유의 온전한 자유와 독립을 지켜내기위해 목숨값을 치뤄야 했으니까요.
얽매임 없이 자유한 사람의 뒤편엔 타인이 모르는 수많은 가시가 꽃혀 있는거겠죠?
“나는 에로스에 관한 일들 말고 다른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터라서”(《향연》177d)
에로스에 관해서 안다는 것 = 자신이 철학자, 즉 지혜(=가장 아름다운 것)를 사랑하는 자임을 자각하고 있다는 뜻이죠. 지혜를 사랑하는 자 = 무지를 자각하는 자. 알키비아데스의 소크라테스 찬양 연설은 소크라테스의 연설에서 밝힌 에로스가 소크라테스 자신임을 말해주고 있어요.
플라토닉 러브는 인간이 인간과 만나서 어떻게 몸과 마음을 성숙시켜 나가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단면도와 같은 겁니다. 동성애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인간의 에로스가 성적인 에로스를 포함하면서도 단순히 생물학적 생산관계(자식의 생산)에 머물러 있지 않고, 보다 고차원인 아름다움(지성적 아름다움)의 생산으로 나아갈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생물학적인 생산(육체에 속하는 것)도 온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입니다.
플라톤이 이해하는 지성의 능동적 힘은 생물학적인 현상에서부터 사회와 공동체를 이루는 윤리와 도덕, 그리고 자연과 우주의 이치에 이르기까지, 즉 지상에서 하늘에 이르기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몸의 건강은 정신의 건강과 뗄 수 없고(절제는 정신이 육체를 컨트롤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죠. 절제 없이는 건강한 몸을 가질 수 없어요. 몸의 아름다움은 몸이 최상의 건강상태에 있을 때 발현됩니다. 절제는 지성의 컨트롤에 몸과 마음이 길들여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걸 그리스어로 아레테라고 하죠.), 개인의 정신 건강은 사회의 건강(윤리 도덕, 정의)과 떼어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움의 상승은 줄줄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게 플라톤이 이해하는 인간과 사회, 자연과 존재의 원리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지성의 힘,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에너지는 언제나 하늘을 향해 비상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고향이 그곳이니까요(《파이드로스》의 신화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범인들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듯이, 에로스도 모든 인간의 영혼 속에 깃들어 있는 생명의 힘, 지성적 에너지 같은 것이죠. 극히 소수이긴 하겠지만 불성을 갈고 닦으면 성불의 단계까지 이르듯이, 영혼에 깃든 에로스,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지성적 에너지인 에로스도 인간을 지상에서 영원으로 이르게 하는, 그래서 인간을 인간답게 할 뿐 아니라 인간 이상으로 고양시키는, 신적이며 영묘한 것이랍니다
남녀 관계든, 부모자식 관계든, 동료들 사이의 관계든, 몸과 마음의 아름다움을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을 때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보는 거지요. 그 관계의 핵심은 대칭적 관계(따로 함께의 관계)지요. 대칭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기능적인 덕이 아니라 도덕적인 덕입니다. 도덕적인 덕이 모든 인간관계의 바탕이고 이 바탕에서 기능적인 덕이 제대로 발현되는 것이죠.
알키비아데스는 아름다움을 생산할 수 있는 좋은 자질을 갖추었어나, 전통적인 에로스 관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지요. 몸의 아름다움으로 정신의 아름다움을 사겠다는 생각으로 소크라테스에게 구애를 했으니까요. 그는 도덕적인 덕을 갖출 준비가 되어
되어 있지 않았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