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편, 본당의 날 터키로 도망을~
지난 10월 28일 본당의 날! 나는 소아시아의 수도이며 예루살렘과 안티옥과 함께 그리스도교 역사상 3대 중요 도시라는 에페소에 있었다.
년 초부터 연수 계획에 포함된 곳이라 부득이 하였으나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사목회 임원들을 뒤로하고 터키로 떠나는 심정은 미안함을 숨긴 쫒기 듯한 면구스러움과 함께였음임을 이제야 밝힌다.
화요일 레지오 2차 주회를 바쁜 척 사양하며 귀가하여 다음날 06:20 버스로 인천 공항으로 가는 시작 일정으로 이른 5시에 알람을 맞추었는데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일정 중 사도 바오로께서 한동안 선교 하셨다는 에페소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혼자 생각으로 바오로의 흔적을 찾아가 더듬으면 신앙생활에 큰 전환점이 될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가 들곤 하였다.
부푼 기대감으로 13:30 인천에서 이스탄불 행 비행기에 올랐으나 가끔 흘러 나오는 기내 방송으로 ‘중국 상공에 항로조정 문제가 있어...’하며 두 시간을 잡아둔 후에야 국제선 육중한 비행체를 이륙 시킨다.그래도 설래이는 기대감에 멀어지는 서해 바다가 정겨웠다.
그러나 바다가 끝나고 영화 두 편을 다 보도록 황량한 벌판이 끝없이 펼쳐진 중국 대륙을 한참 지나치며 지루함이 들 때 쯤 훤칠한 키에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낸 날쌉한 승무원들이 기내식을 날라 왔다. 신기하게도 비빔밥이다.
20.000m 상공에서 방금 지은 듯 한 하얀 밥에 소고기 다짐과 여러 야채에 튜브 고추장을 듬뿍 쳐서 쓱쓱 비벼먹는 맛이 희안하다고 옆 자리 동료에게 자랑했더니 촌놈처럼 굴지 마라며 핀잔을 준다.
창 밖에서는 붉은 노을이 계속되며 황량함이 끝없이 이어지던 중국 대륙의 끝자락 쯤 되는듯 형상과 계절이 바뀌어 이제 눈 덮인 험준한 산악 지형 위를 날고 있다.
아마 티벳 어디 이거나 에베레스트 산맥 쯤 인가 생각해 본다.
오랜 시간 이어지는 붉은 노을 현상이 동쪽에서 출발하여 서쪽을 향해 가니 계속 태양을 쫒아가는 상황이라 그렇다고 누군가 아는 체한다.
기내식 먹고 창밖은 어둠에 잠기고 스튜어디스 들이 마실 것 들을 권한다.
공짜면 어쩌고 저쩌고 한다는 속담처럼 거져 주는 비싼 와인을 아홉 잔 인가를 마시고 좋아하는 세계 각국의 유명맥주를 서너 가지 마시니 졸려서 한 잠 자고 눈을 떳더니 그래도 여전히 밤하늘을 날고 있다. 아무튼 긴 비행이다.
어두운 밤하늘을 한참 날아 에게해 아니면 지중해 인듯한 검은 바닷가에 몇 개씩 불빛이 보이더니 드디어 8.000km를 11시간 30분에 걸쳐 날아와 탑승 한지 13시간 반 만에야 불야성 같은 야경의 아시아와 유럽의 관문이라는 이스탄불 아타 투르크 공항에 도착했다.
아타 투르크 공항의 이름은 근세 터키 이슬람 왕조를 무너뜨리고 민주 국가 형태를 이룩한 터키의 국부 격인 ‘무스타파(성씨) 케말(완벽한) 파샤(장군) 아타(아버지) 투르크(터키)’의 이름에서 따왔는데 긴 이름답게 설명도 길다.
예정보다 두어 시간을 늦게 도착한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이하는 현지 가이드께서 우리나라의 역사에 빗대어 재미있게 설명 해주는데 터키어를 창제 하였으니 세종대왕이요, 영국 처칠의 함대를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격침시킨 이순신 장군이며, 이슬람 왕조에 대항하여 독립 운동을 하였으니 안중근 의사요, 민주주의와 경제를 살렸으니 김대중 선생 같으신 분이라고 침을 튀기며 자랑을 한다.
도착하니 서울 크기의 3배라는 세계적인 대 도시가 생각보다 한산한 듯 여유로웠다.
가이드의 안내를 듣고서 ‘크루만바이’라는 우리의 추석쯤 되는 명절 시즌임을 알았다.
그 나라도 명절에는 민족의 대 이동이 있으며 고향집에서 가족과 함께 양을 잡아 이웃과 축제처럼 지내는데 잡은 양고기의 3분의 1은 반드시 주변의 불우한 이웃에게 나누는 훌륭한 전통을 지키고 있다며 이때 소요되는 양의 숫자가 약 3.000만 마리 쯤 된다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피곤함 속에 들뜬 설레임으로 첫 잠자리가 뒤숭숭 하였으나 간신히 잠들었는데 새벽 4시에 전화가 울려 잠이 깨고 말았다.
동네의 친한 선배께서 광주 시각으로 오전 11시에 그냥 걸어 봤다는 안부 전화인데 뭐라 말도 못하고 얼버무려야 하는 나의 입장은 답답하고 복잡했다.
일단은 잠이 깨버려 창밖은 어두운데 잠이 안와 한참을 뒤척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우리 동네 이장님의 방송 소리 같은 요란한 스피커 음이 들려왔다.
아침 6시 터키 국민의 99% 라는 무슬림들의 아침 기도 알리는 소리였다.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해 엎드려 기도해야 한단다.
잠에서 깬 김에 이른 아침 식사를 위해 숙소 뷔페에 갔더니 이국의 식사는 역시 특이하다.목축업이 성한 나라라 오래된 행주 냄새가 나는 현지 치즈를 빵과 크래커에 발라 짭쪼롬 떫떨한 올리브 열매를 곁들여 먹는데 그 맛은 처음이라 입에 맞지 않지만 맛이 세계 공통인 계란과 감자가 있어 큰 문제는 없어 맛난 아침 식사를 잘 먹었다.
첫 일정으로 이스탄불의 과거사가 살아 숨 쉬는 히포드롬 이라는 벤허 영화에 나오는 타원형 전차 경주장 처럼 생긴 현재는 광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기장과 전승 탑 이라는 커다란 오벨리스크 근처 노점에서 특이한 쥬스를 팔았다.
보기만 하여도 침이 고이는 석류를 절반 쪼갠 후 우리가 흔히 보는 레모네이드 짜는 틀처럼 생긴 주물 기계에 쪼개진 석류를 올려놓고 윗 뚜껑 손잡이를 꾹 누르면 피처럼 붉은색 석류 즙이 주루룩 흐르는 것을 컵에 담아 파는데 서툰 영어 솜씨로 노점상과 거래 하려니 쉽지는 않았다.
현지인들의 화폐는 리라를 쓰는데 터키가 EU에 가입하며 유로를 사용하고 있고 나는 달러 밖에 없으니 환율에 따른 거래가 복잡할 수 밖에...
어렵사리 바디 렝귀지와 짧은 영어 실력을 동원하여 거래를 성사하였는데 약간 큰 종이컵 1잔에 6달러를 줘야했고 우리 일행들이 맛본 그 석류 쥬스는 생각보다 맛이 달콤하고 신맛이 거의 없었다.
그 쪽이 석류 주산지임을 설명을 듣고야 알게 되었고 거의 가는 곳 마다 석류 쥬스 노점을 만나고 점점 거래에 익숙해진 우리는 갈수록 가격이 내려가 한 잔에 2달러까지 싸지는 석류 쥬스의 값과 처음 접하는 맛에 익숙해지며 그곳만의 즐거움과 함께했다.
히포드롬 경주장 바로 옆에 세계 최대 최고의 이슬람 사원인 블루 모스크와 비잔티움 건축의 대표작이라는 아야 소피아(소피아 성당)가 있었다.
모스크에 이르는 택시 두 대가 서로 비켜가기 불편할 정도의 도로는 동 로마시대에 닦은 도로 인데 주먹 크기의 돌들을 심는 형태인데 지금까지 잘 쓰고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모스크에는 모서리에 미사일처럼 생긴 뾰쪽탑이 있는데 이슬람 지도자는 그곳에 올라가서 이른 아침 내가 듣고 잠에서 깨어야했던 기도시간을 알려주는 우리의 슬픈 장송곡 같은 소리를 육성으로 했는데 지금도 스피커는 통하지만 매 시간 하루 다섯 번을 직접 사람이 한다고 하며 그 뾰쪽탑의 갯수가 사원의 규모와 전통을 상징 하는데 블루 모스크는 세계 유일의 6개의 뾰족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계적으로 그 전통과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한다.
아야 소피아는 그리스 정교회 대성당을 이슬람이 점령하며 내부를 회벽으로 칠하고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터키 정부에서 관리하며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사정 속에는 카톨릭에서는 애초에 성당 이었으니 성당이라 부르고 이슬람에서는 사원으로 오랫동안 사용했으니 모스크라 하고 개신교에서는 기독교 문화이니 교회라 한다니 관광 자원이 큰 수입 부분 예산을 차지하는 터키 정부의 입장이 난처한 점도 있었다는 것이다.
1.700년 전 지어진 이처럼 성스러운 건축물이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지금까지 파괴 되지 않고 보존 되어진 것이 여러 번의 침략과 전쟁과 관련된 인력으로 만은 아니요 전능하신 신의 뜻이 깃든 듯 하였다.
소피아 성당 내부에 이르면 삼층 까지 관람이 가능한데 위쪽부터 보고 내려오기로 했다.
위로 오르는 나선형 복도 바닥이 머리 크기의 돌로 되어 있는데 매일 관광객들의 발길에 닳아서 매끈매끈 반짝반짝 하였다.
고개를 바짝 쳐들고 봐야하는 높은 천정의 돔 구조와 모자이크 창들을 통해 충분한 햇빛이 들어오게 만든 경이로운 건축물에 일행들 모두 경탄을 금치 못한다.
대표적으로 눈에 띠는 것은 모스크의 형상물들 이지만 기독교 신앙을 가리기 위해 벽면 대부분에 발려졌던 두터운 회칠이 떨어지고 기독교 벽화들이 표출되며 한쪽에는 휘어진 칼 모양의 이슬람 글자가 써진 커다란 현판들과 높은 벽과 천정에는 마리아께서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시는 그림과 미카엘과 가브리엘 천사 등의 벽화가 있어 묘한 대조를 이룬다.
1층 바닥 한 가운데에는 지름 5m 정도의 둥글고 검은 돌판을 중심으로 12개로 이뤄진 2m 정도의 붉고 푸른 돌판이 감싸고 있는데 예수님과 12제자라 한다.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가 옴파로스라고 하는 세상의 중심이며 이곳에서 황제의 즉위식이 거행 되었다고 하니 그 권위 또한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이 처럼 종교 사상 인종이 다른 민족이 점령 했는데도 파괴하지 않고 이교도 문화 위에 회벽을 칠하고 자신들의 종교적 성전으로 사용했음은 이슬람문화도 존중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편, 형제의 나라 터키
첫 번째 이동이 있었다.
최대의 도시 이스탄불을 출발하여 터키의 수도 앙카라를 향해 관광객 수송을 위해 안락하게 내부가 구성된 벤츠 버스에 올랐다.
오전 일정을 소화하고 하늘에서 보면 나팔 모양으로 생겼다는 황금 나팔의 전설이 있어 Golden horn이라 불리는 보스포러스 해협에 있는 골든혼 이라는 상호의 간판이 걸린 현지 전통 요리인 케밥 전문점에서 터키 최고의 인기 맥주인 Effes beer를 몇 병 곁들이고 난 후 이다.
터키의 전통요리 케밥은 1m 50cm 쯤 되는 쇠꼬챙이에 얇게 저민 닭고기를 계속 끼워서 불에 구워 낸 것 인데 불에 우선 익은 갓 쪽부터 썰어 내서 야채와 함께 먹는데 독특한 향료와 닭고기 맛이 어우러지며 훌륭한 맛이 났다.
캐밥은 주원료가 닭고기와 고등어가 있는데 결국 다음에 먹어 보기로 했던 고등어 캐밥은 못 먹고 말았다.
가이드께서 소개한 에페스 맥주는 명성처럼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여행은 보고 듣는 문화 체험도 즐겁지만 먹는 즐거움 또한 크다 생각한다.
이스탄불에서 앙카라 까지 6시간이 소요 되는데 골든혼 해협을 기준으로 서쪽은 유럽이며 동쪽은 아시아라 한다.
터키 국민들의 얼굴 생김새도 동서양의 구분이 뚜렷했다.
동쪽 사람들은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곱슬머리인 우리가 아는 동남아 스타일이고 서쪽 사람들은 얼굴이 하얀 유럽풍의 외모와 머리색 등 의상까지 세련된 맛이 풍긴다.
동서양을 가른다는 해협을 건너니 동쪽 해안가에는 해협 서쪽에서 돈을 많이 번 부자들이 살거나 별장처럼 이용 한다는 흰색 벽에 주황색 기와지붕에 유럽 어디 휴양지 사진에서나 봤음직한 고급 주택들이 언덕에 빼곡히 차지하고 있는 주택가를 지나 점점 한적해 지는 동쪽으로 동쪽으로 2차선 고속도로를 따라 긴 이동이 시작 되었다.
도시에서도 그렇지만 벗어난 한적한 시골에도 터키 국민들의 국기 사랑은 유별났다.
아파트, 상가, 가정집 가리지 않고 거의 집집마다 건물 마다 빨강 바탕에 하얀 초승달과 별이 그려진 크고 작은 국기들을 내 걸어 두고 곳곳의 국기 게양대 또한 국기가 펄럭인다.
건물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나 마찬가지 같은 풍경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슬람교도 99% 국가답게 도시, 시골 가리지 않고 가는 곳 마다 뾰쪽탑이 솟은 모스크가 자리 잡고 있다.
산들은 보이지 않고 끝없는 벌판에 적당한 언덕 그 아래에 있는 10여 호가 사는 작은 시골 마을에도 모스크가 있으니 터키 국민들의 신앙심에 존경심이 솟는다.
두 시간 쯤 달렸는데 드디어 점심에 곁들인 에페스 맥주가 아랫배에 소식을 보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허허벌판에서 차가 멈출 수 없으니 휴게소 까지 참으시라는 말만 들으며 버스에 설치된 모니터에서 방영되는 영상이 얼마 전 국내 방송에서도 방영됐다는 한국전쟁 터키 참전 용사인 슐레이만 대위와 아이라 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진 당시 7살짜리 전쟁고아 소녀의 인연에 관한 프로그램 이었다.
눈 덮인 전쟁터에 혼자 버려져 울고 있는 흰 저고리 검정 치마 차림에 헝클어진 단발머리 아이를 데려다 보살피고 정이 들어 정전 후 귀국 때 백방으로 데려가려 노력하다 안되니 화물 속에 숨겨 갈려고 까지 했으나 실패하고 꼭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하고 홀로 귀국 하였으나 35년이 지나 서울올림픽 중계방송 차 입국한 터키 방송국과 연결되어 도움을 받아 어렵게 찾게 되고 온통 눈물바다를 이루며 양국을 오가게 됐다는 내용이다.
위의 내용이 터키에도 방송을 타며 감동이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그 감동의 영향으로 터키 국민들의 자긍심이 고취되고 한국에 대한 우월적인 감정이 유발되며 터키와 한국의 우호관계가 깊어졌다 한다.
잠깐 옆 자리를 돌아보니 오광교 전 의장께서 눈물을 훔치고 계신다.
강직한 줄 만 알았더니 참 감성이 풍부하신 분이시다.
그러는 동안 3시간을 달려 드디어 조그만 휴게소에 도착 하였다.
다시 여유가 생기니 다시 에페스 맥주의 고소함이 떠올라 말이 안 통하는 판매점에서 냉장고를 여기 저기 살피니 맥주는 없고 비슷한 노란색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눈에 띄어 사들고 마셨더니 사과 쥬스 였다.
섭섭함을 뒤로 하며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그곳 역시 고속도로에서는 주류 판매가 금지란다. 홍차, 커피, 건과류가 주 품목이다. 비치파라솔 아래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 하였다.
그 지역은 우기가 시작 됐다 한다.
그런데 그 빗속에서도 허름한 차림의 나이든 남자가 버스를 세차하고 있었다.
이유인즉 그 지방에 사는 쿠르드 족 유목민 인데 가축이 없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범죄에 빠지지 말라고 세차를 시키고 그 돈으로 생계를 유지케 하는 정부 시책이라 한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날씨와 승낙을 불문하고 그냥 세차를 하고 기사 또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세차비를 주고 간다는 것이다.
참 여유롭고 너그러운 사람들이다.
다시 출발을 하여 한참을 달렸는데, 아뿔싸! 일행 중 한사람이 비싼 명품 썬그라스를 비치 파라솔에 두고 왔다 한다.
그러나 가이드는 냉정하게 자르며 말한다.
다중을 위해 한 사람이 희생 하시고 썬그라스 주은 사람에게는 한 달 치 월급을 보너스로 준 셈 치시라고 하며 되돌아가면 일정이 흐트러지고 그런 전례도 없다 하니 잃으신 분께서는 이내 체념 하고 만다.
창 밖에는 몇 시간째 끝없는 벌판과 구릉지대로 이어지는 추수 끝난 밀밭을 지난다.
이윽고 해질녘 쯤 되어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 도착하여 숙소로 가는 시내를 가로지르는 길은 대도시라고 하기에는 조금은 허전한 우리 주변으로 치면 담양 또는 곡성 쯤 되 보이는 느낌이다.
고층 빌딩이나 아파트 등은 눈에 띠지 않고 높아 봐야 7,8층 쯤 되는 건물이 늘어서 있는 모양이 땅이 넓어 건물을 높이 지을 필요가 없나 보다.
사실 주변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터키의 수도가 이스탄불로 알고 있지만, 실은 중앙 아나톨리아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는 앙카라이다.
1922년 터키 공화국이 성립될 당시까지 오스만 제국은 술탄(왕)이 존재했고 이슬람 세계의 수장인 칼리프직도 계속 가지고 있었다.
술탄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여전히 큰 힘을 가진 상징적 존재였던 것이다.
때문에 술탄과 옛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터키의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파샤 아타 투르크” 대통령은 수도를 이스탄불에서 차로 6시간 떨어진 곳 앙카라로 천도 했던 것이다.
빗속에 도착한 숙소는 4성급 호텔이라고는 하나 여느 동네 오래된 모텔 쯤 될 성 싶다.
방에 있는 TV가 옛날 80년대 자취생 들이나 썼을법한 15인치 쯤 되는 퇴색한 회색이 인상적 이다.
여장을 풀고 저녁 식사 시간이 좀 여유로워 우리 일행은 비가 내리고 있는 시내 같지 않은 대도시의 뒷골목 구경을 나섰다.
그곳 역시 우리 동네처럼 몇 개의 pc방과 미장원, 허름한 주막 같은 술을 파는 음식점, 크지 않은 잡화점, 작은 슈퍼 등으로 이어지며 건물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들은 입구 마다 반라의 여성 사진들이 붙어 있는 걸로 보아 우범지대인 듯한 인상을 풍기며 그렇게 보아서 인지 주변에 서성이는 남자들의 인상 또한 곱지 않았다.
가게들이 끝나고 가로등도 없는 좁고 어두운 길로 막 접어들자 건너편에서 누가 우리에게 소리를 질렀다.
서툰 영어였는데 내용 중 몇 단어가 익숙했다.
No enterance(출입금지), dangerus(위험) 등이 섞인 경고였는데 그 사내가 나오던 침침한 건물에 써진 영어를 보니 police office(경찰서)였다.
그때야 정신이 번쩍 들어 뒤돌아 나오며 생각하니 그곳은 아마도 우범지역이고 그러니 그곳에 경찰서가 있었던 것이다.
직전에 가이드에게 이곳은 불법 무기가 많으며 특히 총기류 또한 많으니 개별 행동과 낮선 사람을 따르지 말라는 주의를 들었던 기억과 함께 뒷머리가 쭈볏 거리며 등짝이 시원하였다.
혹시 계속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누군가가 총을 들이대면 아무리 숫자가 많고 힘이 장사이면 뭐 하겠는가, 꼼짝없이 여행가방과 지갑 빼앗기면 돈이나 카드도 문제지만 여권 잃어버리면 아주 최악의 낭패를 당한다고 현지 가이드의 신신당부에서처럼 여행은 중지되고 대사관에 찾아가 본국과 연락하여 여권 재발급, 형사적 문제 등 수속 하고 나면 여행일정 끝난다고 이미 들었던 터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터키의 정치력을 현장에서 체험하게 된 것이 소득이라면 큰 소득이듯 민원이 자주 발생하는 현장에 그에 해당하는 공공시설이 있음은 참 잘하는 행정이라는 이야기가 2년 전 연수 차 방문한 싱가폴 이야기로 이어졌다.
6대 지방의회에 첫 등원하여 국민의 세금으로 해외 연수에 참여 한 것이 본인은 첫 해외여행이라서 퍽이나 설레었고 기대감과 각오가 큰 일정으로 방문한 곳이 싱가폴이다.
그 마음으로 방문하는 곳, 시설 어디에서나 긴장하고 귀 기울이며 하나라도 더 배우고 얻어 오려 했던 기억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 중 싱가폴 시내 차이나타운을 방문 하였는데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노인 복지 시설 방문 중 그곳이 소형 영구임대 아파트이며 취약 계층인 서민, 독거노인, 장애인 등이 주로 거주하는 곳 이라고 설명 들으니 본인의 지역구인 상무2동과 비교 하며 견학을 하였는데, 특이 하게도 아파트 단지 내에 우리로 말하면 동사무소 격인 복지센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처럼 처음 보는 현장에 대해 나는 당연히 가이드에게 왜 동사무소 건물이 따로 있지 않고 아파트 단지에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가이드의 대답에 우리 일행들은 깜짝 놀라게 되는데, 민원이 많고 그 대상자가 장애인 또는 노인 등 취약계층 들이 대부분인데 당연히 주민에게 필요한 시설이 필요한 곳에 있어야 되지 않겠냐고 하는 반문에 모두가 싱가폴의 행정에 경의를 표했던 기억들과 그 한참 후 서구청의 업무 보고 때 두 개의 대단위 영구임대 아파트 단지 옆에 위치하고 있는 상무2동 사무소가 낡고 여러 문제점 들이 발생하여 다른 곳으로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고에 대해 본 의원이 싱가폴의 민원 현장 설명을 예로 들며 그곳 영구임대 아파트 단지 내에 진출해 있던 복지센터를 설명하고 이보다 더 좋은 접근성 등 입지 조건이 있는 곳이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동사무소의 이전을 재고해야 한다는 본 의원의 지적에 대해 관계 공무원들도 수긍하였고 지금까지 이전 안이 재론되지 않고 있음은 해외연수에서 보고 배워온 것 들이 적지만은 않으며 소수의 이론이 있는 의원들의 해외연수 지만 많은 것을 배워옴 또한 사실이니 이에 대한 사고를 긍정적으로 전환 함직하다는 생각과 지난 해외연수에서 보고 배운 많은 기억들은 본인의 의정활동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때 싱가폴 차이나타운 노점상에서 서툰 영어 솜씨로 구입하여 지금도 자랑스레 차고 다니는 넥타이에 대해 노점 리어카 주인이 내게 말했던 ‘three peace ten dollor' 즉, 세 개에 만 원짜리 중 하나는 검정 바탕에 노란 용 무늬와 두 개는 빨간 바탕에 흰색 한문 글씨 써진 멋진 넥타이의 추억처럼 알찬 쇼핑 등 재미있는 기억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빗길을 되돌아 걸어오며 몇 군데 가게를 들려 보았다.
그 이유는 숙소에 돌아가면 잠을 청하는데 이런 여행의 특성상 낮선 곳에서 설레는 마음에 시차 까지 감수하기에는 큰 부담이며 전편에 기술한바 처럼 전날 밤 아니 오늘 새벽 격어야 했던 불면의 공포에 나는 개인적으로 이를 극복하는 방편으로 그곳만의 토속적이며 전통적이거나 유명한 술을 마셔보는 것이 나만이 느끼고 즐기는 여행의 묘미라 할 수 있다.
도착 전에 나는 이미 가이드에게 터키의 유명한 술을 알아보았고 그 술이 ‘라키’라고 들었고 그 술을 사는 목적 이었다.
첫 번째 가게에 들러 서툰 영어로 주인과 대화를 시도하였으나 라키를 사지 못했다.
국민의 99%가 무슬림이라 대부분의 국민들은 신앙이 치열하지 못하다 설명 들었으나 그 가게 주인은 진정한 무슬림이었다.
그는 단호하게 자기는 무슬림이며 자기 가게에서는 술을 팔지 않노라고 말해서 우리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 가게를 들르니 러시안 이미지의 젊은이 몇 명이 먼저와 있었는데 이들의 도움으로 영어가 도통 안 되는 주인에게 12$ 짜리이며 'LAKY'라고 쓰인 두 홉 조금 못 되 보이는 하얀 술병을 받아들게 되었다.
숙소로 돌아와 처음 대하는 술에 대한 기대감으로 일행 몇 명과 하얀 액체를 마셔보았는데, 같이 자리한 두 사람 모두 첫 잔에 한 모금 마셔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술을 조금은 좋아 한다는 나도 그 독특한 향에 코가 역겹고 넘기는 목구멍은 화끈 거리는데, 느끼는 상상력에 의하면 중국 비싼 향기 나는 고량주에 독한 보드카를 섞어 마시는 맛이랄까?
그러나 나는 자리를 시작한 주빈 체면에 한잔도 못 마실 수는 없어 내 잔을 비우고 남은 반 잔짜리 두 잔 또한 내가 마셔야 했는데 억지로 마셔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고 술은 즉시 고국에서 가져온 PT병 4홉 소주로 교체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외국에서 소주는 그냥 소주가 아니라 귀한 대접을 받는데, 식당에서 사 마시면 우리 돈으로 6만 원쯤 줘야 하니 보통 상식으로 불가능하고 차라리 쉽게 못 마셔본 양주를 마신다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며 맥주도 가게에서 산 것과 두 배 이상 차이가 났다.
점심에 골든혼 캐밥집에서 우리 일행은 내가 권유하여 반주로 맥주 여섯 병 시켰다가 사실은 나올 때 일행들 눈치를 봐야 했고 그 이유는 가게에서 3$짜리 에페스 비어가 8$였고 처음 두 병 마신 후 추가로 네 병을 더 주문하자 스페인 미남처럼 매꼼하게 생긴 주인이 연방 웃음을 터트리고 엄지손가락을 곧추세우며 나를 'big boss'라고 불러주는 모양세가 좋은 손님에 대한 칭찬인줄 알았더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이렇듯 술이 비싸니 그나마 입에 까지 맞는 국산 소주가 후한 대접을 받는 것인데 몇일 후 나는 그리스 령 히오스 섬 교포 식당에서 양주 값하는 소주를 두 병이나 주문해야만 했던 이야기는 다음에 밝히도록 하겠다.
이러한 이유와 이국인들이 비위상해 하는 냄새 때문에 공개적인 곳에서 먹고 마시지 못하고 숙소 방에서 몇 명만 모여 김치와 깻잎에 마시는 쐬주(?)맛이란 안 마셔 본 사람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모를 것이다. 아무튼 여행은 여러 가지를 재미있게 가르치고 깨닫게 해준다.
다음날은 동이 트기도 전에 일정이 시작 되었다.
첫 화제가 당연히 어젯밤 마시다 만 락키 이야기 였다. 가이드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그냥 마시면 어떻게 하느냐며 물에 타서 마시라고 가르쳐 주더니 슬쩍 묻는다 “그게 넘어 갑디여?”라고...
이윽고 앙카라 시내에 있는 대한민국 방문객 필수 방문지 한국전쟁 참전 기념 공원에 도착 하였다.
우선 공원에 도착하여 주차장으로 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보이는 공원에 창살로 둘러 처진 울타리에 매달려 있는 청사초롱 형 가로등이 몇 개 걸려 있고 그 아래에 나란히 걸려 았는 태극기와 터키 국기가 우선 눈에 띈다. 반가웠다. 이국에서 만나는 국기에 대한 작은 애국심에서 나오는 경외감이랄까?
이윽고 이른 새벽 관리인 인듯 한 노인이 쇠 체인으로 감아 잠궈 놓았던 정문 열쇠를 끄르고 체인을 벗겨내고 삐그덕 고음의 비명을 지르는 정문을 열어 졌혔다.
귀찮은 듯 잠이 덜깬 노인의 표정에 대해 명절 연휴에 쉬고 있었을 텐데 이른 새벽 불러내니 저런 것이라 설명 한다.
저 분 또한 참전 용사라 하니 더 미안한 마음이 드는데 일행 중 한 분이 수고비라도 좀 넉넉히 드리라 조언한다. 전에는 소액의 입장료가 있었다 한다.
많은 한국 관광객들의 필수 방문 코스였고 푸짐한 한국 인심 덕택에 넉넉한 재정으로 유지관리가 잘 되었으나 내부에서 갈등이 생기며 부정사건이 터지자 터키 정부에서 입장료를 무료화 시키고 자원봉사자에게 관리를 맡겼다하니 저 분 또한 자원봉사자이실 것이라고 하는 생각에 존경과 감사의 마음으로 변한다.
정문 안으로 불국사의 석가탑을 베낀 듯한 5층 석탑이 보였고 저곳에서 참배를 하라고 설명 한다. 가까이 가보니 석탑이 아니라 시멘트 탑이다.
우리 일행은 나란히 도열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63년 전 머나먼 이국의 어려움을 돕고자 분연히 참전하여 젊은 생명을 바치신 영령들의 영원한 안식을 진정으로 기원하였다.
묵념 후 고개를 드니 오른편에 이태리 풍의 대리석에 특이한 필체의 서예 글씨로 “한국참전토이기기념탑”이라 써져있고 그 위에 전사자의 명단이 옆으로 길게 쓰여 있는데 자세히 살피니 터키어는 모르지만 간단한 영어와 숫자의 기록은 알 수 있어 가슴이 애잔 하여왔다.
맨 왼편 윗줄부터 아랫 칸으로 읽어보니 이브라힘, 핫산, 알리, 무스타파, 하비브, 미카엘 등등 누가 봐도 성씨이다.
다음 칸은 1929, 1931, 1930, 1928... 등등 반복되는 숫자 다음은 아~ 아! 그 옆에 써진 숫자가 1952,11,04 1950,12,06 1953,05,29... 등등. 바로 두 숫자가 대입 되었다. 두 번째 칸의 핫산이라는 1931년생이 1050년 12월 6일에 전사 했다면 그 당시 그 분의 나이 19살...
어린 나이에 어딘지도 모르고 따라왔을 만리타국 최전선 어느 골짜기, 이름 모를 고지에서 장렬하게 전사했을 진정한 무슬림 전사가 떠오르며 애잔한 경외심으로 등에 전율이 흘렀다.
그 옆에 같은 글씨가 옆에는 연번이 쓰여져 있었다.
전사자 순서 또는 숫자이리라.
위로 올라가 보니 탑신의 전면에 사각형 대리석에 다음과 같은 띄어쓰기 없는 서예체가 쓰여 있었다.
“이탑은토이기군이자유를수호하기위하여한국전에참전혁혁한전공을세운바를영원히기념하기위하여건립되다안카라시의적극적인협력을얻어세워지게된이탑은토이기공화국건립제50주년기념일을기하여한국정부가토이기국민에게헌납하다 1973 10 19”
기념탑을 뒤로하고 고마운 분 들을 오래 기억하기 위하여 기념 촬영을 마치고 희미하게 동이 터오는 이른 아침 아랫배에서 뭉클뭉클한 뭔가의 끓어오름과 함께 생전의 북한 김일성 주석이 그토록 닮고자 많은 따라하기를 했다는 터키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 파샤 아타 투르크 대통령”의 시신이 투명한 유리관에 첨단 방부 처리되어 안장 되어있고 국민들이 성지로 여긴다는 묘지건물을 차창 밖으로 스쳐보며 터키의 수도 앙카라를 떠나 내륙에 있는 광활하고 신기한 소금호수를 견학하기 위하여 출발 하였는데, 그 묘지건물이 많이 본 듯 눈에 설지 않아 생각하니 북한의 만수대 궁전의 모습이 떠올랐다.
살아서 그토록 닮고자 했다더니 김일성이 결국 죽어서까지 똑같이 흉내를 냈었구나 하며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좋은 부분만 좀 많이 닮았었더라면 한국전쟁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역사의 아이러니와 함께 쓴웃음이 지어지며 차창 밖 앙카라는 멀어져 갔다.
외국에 나가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더니 아침부터 솟아나는 애국심 때문 이었을까나 엉뚱한 상상이 떠오른다.
피는 물 보다 진하다는데 전 세계에 퍼져있는 엉덩이 위쪽에 몽골반점이 있는 범 몽골리안(한국인, 몽고인, 알레스카 원주민, 남미 원주민, 오세아니아 원주민, 헝가리 마자르족, 터키 투르드족 등)들이 대연합을 해보면 어쩔까?
우선 같이 향유하는 문화교류를 시작으로 체육교류 등의 스킨십으로 신뢰를 쌓고 경제협력과 공동 기술개발 등으로 자국의 국익에 기여케하는 윈윈전략으로 시너지 효과를 낸 뒤 굳건히 뭉친다면 우리를 얕잡아 보던 대국들이 예우를 갖추고 조심스레 대할텐데...
세계 불변의 이치로 개인이나 국가나 힘이 있어야 한다.
모든 역사도 승자의 위치에서 승자를 위한 기록으로 남지 않는가?
한 사람이 꾸는 꿈은 꿈이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라지 않는가?
터키인의 15% 정도를 차지하는 몽골반점이 있는 쿠르드족은 조상이 중앙아시아의 훈족이므로 우리나라와 터키는 한국전쟁이 아니더라도 진즉부터 “형제의 나라” 아니던가?
비온 다음날 아침에 차창을 뚫고 들어오는 찐한 햇살을 받으며 우리 몽골리안이 세계를 지배하는 유쾌한 상상에 빠져본다.
첫댓글 장문의 글을 쓰느라 고생하셨겄소.
이번 대건회 6본당 체육대회 글 써달라고 하셔서 올리다 보니 작년에 써놓은것 있어서 걍 같이 올렸네ㅎㅎ
끝까지 읽었다니 젊은이가 인내력이 대단 하구만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