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사의재와 이태원 할로원 참사
신유사옥(辛酉邪獄)을 신유교난이라고도 한다. 정조는 천주교와 남인에 대하여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했으나, 1800년 순조 즉위 후 벽파가 정권을 잡자 천주교와 남인을 탄압했다.
1801년 정순왕후는 천주교에 접한 사람들을 일컬어 군신의 관계를 부정하여 인륜을 무너뜨림으로써 백성들을 오랑캐나 금수의 상태에 빠지게 한 패륜으로 규정하고 반역죄를 적용하였다. 실학의 중요성을 신봉했던 다산 정약용도 천주교를 접했다는 죄명을 받아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流配生活)을 했다.
다산 선생이 처음 강진에 도착했을 때 이곳 사람들은 서울에서 벼슬을 하다가 '대역죄'를 짓고 귀양 온 선비라는 소문이 돌았다. 주민들 대부분은 겁을 먹고 멀리할 뿐 아무도 다산을 상대해주지 않았다.
오고 갈 곳이 없는 선생의 딱한 사정을 알고 나그네에게 밥을 지어 파는 할머니(주모)가 골방 하나를 내어 주었다.
강진읍 동문 밖 주막집에서 겨우 거처할 방 한 칸을 얻은 정약용은 그 오막살이 주막의 뒷방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지극히 선비다운 당호를 붙이고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1801년 겨울부터 1805년 겨울까지 이곳에서 만 4년을 지낸다.
이 집에서 4년을 수양하며 지낸 후 고성사의 보은산방과 목리의 이학래 집을 전전하다가, 1808년 귤동의 강진 다산 초당에 자리 잡은 후 1818년 유배가 풀릴 때 까지 이곳에서 지냈다.
2015년 내가 사의재(四宜齋)를 방문했을 때만 해도 다산의 유배생활이 얼마나 초라했는가를 알 수 있는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강진을 방문했을 당시 나는 청자(도자기)에 대해 좀 더 알아볼 욕심이 있었을 뿐 사의재(四宜齋)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다.
얼마 전 방학을 맞아 귀국한 딸과의 대화중에 비범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내가 우리나라의 천재 3명을 꼽으라면 나는 김시습, 율곡, 다산을 들겠다. 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할 때 그 세 사람은 천재였음이 분명하다.
특히 다산은 유배기간 중에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른바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를 통해 국가를 바로세울 수 있는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 했다. 자연과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홍역과 천연두의 치료법에 대한 책을 내기도 했고, 도량형과 화폐의 통일을 제안했으며 건축기술인 거중기를 고안하기도 했다. 그 외에 한문의 경전에 대한 해석도 독창적으로 기술한 주석도 많이 달았다. 아마 조선의 학자 중에서 저술의 분량이나 내용면에서 단연 으뜸일 것이다.
다산이 유배생활을 처음 시작한 당호 사의재(四宜齋)는 네 가지(四) 마땅히 하여야 할(宜), 집(齋)이라는 의미다.
그 네 가지는 맑은 생각, 단정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행동이다.
원문은 이러하다.
四宜齋記(사의재기)
四宜齋者, 余康津讁居之室也,
(사의재자, 여강진적거지실야),
思宜澹, 其有不澹, 尙亟澄之
(사의담, 기유불담, 상극징지)
貌宜莊, 其有不莊, 尙亟凝之,
(모의장, 기유부장, 상극응지,)
言宜訒, 其有不訒, 尙亟止之
(언의인, 기유불인, 상극지지)
動宜重, 其有不重, 尙亟遲地
(동의중, 기유부중, 상극지지)
於是乎名, 其室曰 四宜之齋, 宜也者, 義也
(어시호명, 기실왈 사의지재, 의야자, 의야)
義以制之也, 念年 齡之遒邁 悼志業之頹廢, 冀以自省也
(의이제지야, 염년 영지주매 도지업지퇴폐, 기이자성야)
時嘉慶八年冬十一月辛丑(初十日)
(시가경팔년동십일월신축(초십일))
日南至之日, 寔唯甲子歲之攸起也
(일남지지일, 식유갑자세지유기야)
是日 讀乾卦(시일 독건괘)
사의재기
사의재는 내가 강진에 유배 와서 사는 방의 이름이다.
생각은 담백해야 하니 담백하지 않은 점이 있으면 부디 빨리 생각을 맑게 해야 한다.
용모는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않은 점이 있으면 부디 빨리 의젓하게 해야 한다.
말은 참아야 하니 참지 않은 점이 있으면 부디 빨리 말을 그쳐야 한다.
행동은 진중해야 하니 진중하지 않은 점이 있다면 부디 빨리 느긋하게 해야 한다.
이에 이집을 사의재라 이름 하였다. 宜(의)는 마땅히 義(의)이다.
마땅함으로써 스스로를 바로잡는 것이다.
빠르게 먹어가는 나이를 생각하고 뜻과 학업이 무너진 것을 슬퍼하면서 스스로 반성하기 바란다.
때는 가경(嘉慶)8년 (1803, 순조 3년) 겨울 11월 신축일(초십일) 동짓날이니 사실상 갑자년(1804년, 순조 4년)이 시작되는 날이다.
나는 이날 주역 乾卦(건괘)를 읽었다.
이태원 참사 때 남자보다 젊은 여성들의 희생이 많았다. 그 안타까운 주검을 정략적으로 이용하여 정권퇴진 운동으로 몰고 가려는 세력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기도가 국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이슈가 점점 외면을 당하는 모양새인 것 같다.
정보가 없었을 때는 주검에 대한 연민이 컸는데 카톡으로 떠도는 사진을 보니 정말 이런 차림을 하고 백주 대낮을 활보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반신이 노출된 아가씨, 팬티 차림에 이상한 물건을 걸친 여성, 가면에 아슬아슬한 차림 모두가 기성세대의 눈에는 별세계 사람들처럼 보였다.
거기에는 다산의 사의(四宜)는 어느 한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생각은 사악했음이 분명했을 것이고, 용모는 천박하게 보였으며, 말은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행동은 난잡했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좁은 골목으로 토끼몰이 식으로 몰아넣어 왜 밀어밀어를 외쳤는지 짐작이 간다.
국민들은 현명하다. 일시적으로 속일 수 있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진실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수사가 더 진행되고 국정조사가 더 깊게 이뤄지면 드러나지 않은 사진이나 CCTV영상이 더 많이 노출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사자에 대한 나쁜 이미지만 더 부각되리라 본다.
당사자들의 아픔은 크겠지만 추모는 이쯤해서 끝내는 것이 오히려 사자를 위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