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쾅 쾅".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선 전역에 걸친 50분 간의 공격준비사격. 그렇게 한국전쟁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춘천지구전투가 있었다. 춘천을 피로 물들이며 지켜낸 3일간의 전투는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전투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춘천에 거주하는 사람들마저도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밟고 서 있는 이 땅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 바쳐 싸웠던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적탄에 맞아 피흘려 죽어가던 그들의 마지막 말을 기억해야 한다. 조국통일, 그들의 마지막 말이 이뤄지지 않는 한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춘천에 들어온 것은 소련군이었다. 한반도를 미국과 소련이 분할점령한 상황에서 45년 9월 초순의 일이다. 춘천 북산면 추전리와 사북면 원평리의 교량을 경계선으로 하여 38선이 춘천을 직접 통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무력통일에 대한 집착과 1949년 8월 29일 소련의 핵무기 실험 성공, 그리고 1950년 1월 하순에 체결된 중소동맹계약 등이 스탈린으로 하여금 한반도에서 전쟁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스탈린의 결정은 얄타회담을 통하여 세계적 지도자로서 인정받고 있었고, 미국과의 합의에 의한 아시아에서의 세력권 분할선을 성공적으로 확보하여 한반도를 적화시켜 태평양과 동남아로 진출하는 전략적 공산기지로 활용하려는 남진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전쟁 집행자', 모택동이 성공적인 작전을 위한 '보증인' 역할을 하였고, 스탈린이 전반적인 계획과 결정권을 장악한 '주동자'역할을 수행한 6.25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북한의 주공격부대는 의정부와 문산을 거쳐 서울을 집중공격하고, 조공은 춘천과 이천, 수원을 거쳐 서울 후방을 공격하여 증원부대를 차단하고 서울의 주력부대를 포위하는 목표를 세웠다. 그들은 선제 기습공격에 따른 전략적 이점과 고도의 기동력, 그리고 거침없는 공격작전으로 부산에서 광복 5주년 행사를 거행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작전계획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해서는 서울의 후방을 차단할 부대가 하루만에 춘천을 점령하고 수원을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작전계획은 실패했다. 6월 25일 새벽 4시부터 6월 27일 18시까지 적의 진격은 춘천에서 3일간 지체되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전과였다. 개전 초기에 작전계획에 결정적인 타격을 받은 전쟁은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양1교 교각 여기저기에 남아있는 탄흔이 그 날의 격전이 어느 정도였는 지를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