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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의 실체와 이단문제
발제 : 장성산 선교사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태복음 13:27~30)
수확을 기다리는 중국
지금 중국이라는 복음밭에는 가라지도 자라고 있으며, 알곡도 자라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에게 알곡과 가라지에 대한 분명한 정의가 성립되어 있지 않다면 어떠한 결과가 초래될 것인가? 우린 그 밭에 일꾼으로 부름 받아 그들을 돕기 위해 달려간다 할지라도 그곳에서 수고하는 일꾼들을 제대로 돕기는 커녕 오히려 복음밭을 망쳐 놓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급속도로 변화하는 중국에서 중국교회에 대한 분명한 정의 성립은 밭에 나가 일하는 선교사들에게는 물론 그들을 후원하고 함께 동역하는 한국교회에 있어 무엇보다 선결되어야 할 과제인 것이다.
특별히 중국교회는 그 성장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고, 장차 21세기를 통해서 그 변화와 성장은 더욱 급속화 될 양상을 띄고 있기에 중국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동반자적이며 지리적 사명을 안고 있는 한국교회는 그 역할 완수에 있어 개별적이며 소규모적인 전술만으로 사역을 감당할 것이 아니라 전략적 차원의 네트워크를 형성한 체계적이며 다원화된 선교사역을 펼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한국교회는 중국선교에 있어 전술은 있었으나 전략은 부족한 실정이었으며, 무엇보다 선교지의 교회와 선교현황에 대해 단편적인 정보와 자료만을 수집 참고함으로 인하여 구체적인 전략을 시행함에 있어 주관적 사역과 관점만을 강조한채 오히려 파송되는 선교사 개인에게만 의존하였기에 전략적 차원의 사역은 뚜렷한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중국교회는 범국가적 개혁개방정책을 통한 경제,문화,사회 등 다변화된 발전과 더불어 변화하고 있으며 그 외면적 모습은 물론 내면적 상황까지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오늘 중국선교의 최일선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야 할 한국교회가 중국교회의 올바른 실체와 그 속의 독소인 이단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재삼 확인하고 적절한 선교전략 수립을 위한 토론의 장을 갖는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국교회의 두 얼굴
먼저 중국교회의 외형적 형태를 보도록 하자. 중국교회는 그동안 중국 국내는 물론 해외에 두가지 형태로 알려져 있었다.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그것은 바로 중국삼자애국운동위원회와 중국기독교협회에 소속된 속칭 ‘삼자교회’와 중국 정부는 그 존재 조차도 부인하는 ‘가정교회’이다.
그렇지만 중국교회를 분류하는 방법은 그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정부 등록 유무가 아닌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차원에서의 해석법이 있고, 또한 중국 정부가 기독교 탄압용으로 사용하는 국가체제, 사회질서 및 윤리 도덕적 차원에서 해석하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중국적 형편이 아닌 선교하고자 하는 국가의 신앙 및 신학형태, 선교적 차원에서 본 분류법이 있다.
한국교회는 국내 형편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교파와 교단문제에 관련된 신앙 및 신학형태에 맞추어진 선교적 차원, 즉 한국교회가 선교하기에 무리가 없고 문제 발생 소지가 적은 주관적 업적과 주도적 위치 선점이 가능한 대상을 중국선교를 위한 교회로 분류시켜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기준은 상대하는 중국교회가 삼자교회이건 가정교회이건 상관없이 해당 교회를 인도하는 중국인 사역자의 성향 혹은 해당 교회가 가지고 있는 집회 분위기 그리고 이 교회를 가장 근접 접촉하는 한국인선교사의 판단에 의해 선교대상교회로 선정되어 왔던 것이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그동안 실질적인 중국선교를 감당할 수 있는 선교사 양성과 전략적 노하우 축적의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고 단지 단시간내에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사역이나 겉으로 드러날 수 있는 사역에만 이끌리어 수많은 인적,물적,영적 지원을 약속 시행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린 가라지가 아닌 알곡을 제대로 관리해 오고 있는 것인가? 만일 알곡을 돌봄이 가라지를 돌보는 사역으로 진행되고 있다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예수께서는 비유로 분명히 말씀하셨다.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중국선교에 있어 선택적 사역은 이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행하는 사역을 결정키 위해 행하지 말아야 할 사역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지혜를 가지고 듣게 되면 행하여야 할 사역지에 모든 것을 행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고, 행하지 말아야 할 사역지에도 반드시 행하여야 할 사역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알곡과 가라지를 동등시해도 된다는 뜻은 분명히 아님을 알아야 한다.
중국교회는 바로 그러한 밭이다. 그러므로 그 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알곡과 가라지를 선별해야 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선결과제가 되는 것이다. 과거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중국교회에 대한 정보와 자료는 우리에게 그것을 선별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를 가질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그러나 문제는 오늘의 중국교회가 과거처럼 잠자는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재 국내외 선교단체에서 가지고 있는 중국 기독교인 수를 통계적으로 종합해 보면 삼자교회를 포함한 전체인원이 자그만치 1억을 초과하고 있다. 이 수치는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앞으로 10년 뒤에는 중국의 전체인구 20%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수치는 최근 20년 동안에 급속도로 성장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중국교회 실태만을 가지고 그들을 이해하고, 중국 정부가 주도하는 종교정책에 의해 언제나 변수가 발생할 수 있는 선교현장에서 개별 선교사나 단체의 전술만으로 이 영적전쟁의 승리를 기대하려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업적과 체면을 중시한 형식적 선교에 빠져들게 되어 중국복음화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면 현재 중국교회 내부에는 어떠한 일이 발생하고 있는가. 중국교회에 대한 선교적 차원의 분류를 알아보고 구별된 시기와 원인을 분석하면서 그 틈새에서 파생된 중국교회 이단문제를 면밀히 검토해 보도록 하자.
중국교회의 제3세력, ‘三自不三自,家庭不家庭’
그동안 중국교회를 정부에 등록된 정부의 공식적인 교회인 삼자교회와 비등록교회인 가정교회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중국 가정교회와 삼자교회 사이에서 발견하게 되는 새로운 부류가 한가지 있다. ‘三自不三自,家庭不家庭’(삼자교회이면서도 삼자원칙은 없으며, 가정교회이면서 순수함을 잃은 교회들) 이들은 중간노선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쪽에 그들의 무게중심이 걸려있는지를 분명히 나타내지 않는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가정교회와 삼자교회 양측으로부터 모두 인정받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며, 때론 삼자측에 있으면서도 상대방인 가정교회에 대해 결코 부인하거나 비방하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가정교회 측에 있으면서도 전혀 정부나 삼자로부터 해를 받지 않고 오히려 협력과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력은 외면적으로는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중국교회 즉 가정교회와 삼자교회 내부에 존재하고 있기에 해외교회나 일반 중국인 신도들에겐 오히려 개방적이며 신실한 교회들로 오도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러한 세력이 존재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중국의 개혁개방정책 이후 중국교회 역시 대외적으로 해외 기독교계와 접촉이 그만큼 쉬워졌기 때문이며, 상대적으로 해외교회들은 중국교회의 실체에 대해 어둡거나 단편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변화는 중국 정부에 있어서는 미리 예견되어지고 장래를 대비한 문제였지만 외부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갑작스럽고도 놀라운 정책의 변화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종교정책 또한 나름대로의 준비와 요건을 갖추는 작업을 마무리한 상태였지만 해외교회는 그렇지 못하였다. 중국 정부가 통제된 언론 매개체와 정보망을 가지고 제공하거나 흘러보내는 정보와 자료 외에는 중국교회를 이해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정은 지금에 와서 많은 부분이 보완되어지고 개선되어졌지만 그럼에도 아직 전문적이며 구체적인 연구와 분석은 미흡한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중국교회를 접촉하게 된 해외교회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중국교회에 대한 시각을 바꾸게 되었고, 또한 삼자교회에 대한 오해(?)를 걷어내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막상 간절한 도움과 협력을 원하는 가정교회는 오히려 기회가 차단되고 정부나 삼자가 매도하는 이단이나 사이비집단으로 전락하여 해외교회가 교류하기엔 경계할 수 밖에 없는 종교집단으로 전락하였다.
일정 기간 동안 중국 가정교회는 해외교회와의 교류에 있어 완전히 봉쇄되어 있었다.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의 효과를 교회도 누릴 수 있도록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삼자교회를 겨냥한 것이지 결코 정부가 불법집단으로 간주하는 가정교회에 어떠한 이익을 만들어 주기 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교회가 외부적으로 봉쇄된 가운데 자체적인 능력만을 가지고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중국교회 지도자는 아무도 없다. 이러한 바탕은 교계의 인물들 뿐만 아니라 현재 중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도 일치한다.
중국교회가 재개방된 이유
중국 정부가 대외적으로 종교에 대한 문을 열게 되었을 때 그 속에 담겨진 의미를 분명히 인식해야만 한다. 중국은 1980년 화국봉이 실각한 이후 정치적으로 더욱 사회주의 체제 강화를 실시하게 되는데 그 예로 1977년이래 중단되었던 정치학습이 재개되고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과 노동자계급 체제 및 공산당 지도체제 견지와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을 목표로 공산당을 혁신시켰다. 이러한 바탕 위에 개혁개방정책은 펼쳐지는데 그 목표는 바로 공업, 농업, 과학기술, 국방의 현대화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을 펼침에 있어 대외관계 개선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이며, 종교문제는 덮을 수 없는 상처였다. 결국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종교는 제한적으로 개방되고, 통제된 제도 가운데 교회는 다시 문을 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였던 가정교회라는 커다란 장벽 앞에서 중국 정부는 강경과 유화를 병행한 특별한 정책을 펼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 속에서 ‘제3의 세력’이 탄생하고 성장케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력은 가정교회가 삼자교회로 흡수되는 관문 역할을 하면서, 해외의 선교자원을 훔쳐 먹는 거짓과 탐욕의 가라지떼로 보아야 한다. 물론 예외는 있다. 그러나 지금은 적은 수의 예외가 아닌 전반적 흐름과 형태를 이야기 하고자 하기에 그 부분은 제외시키도록 한다.
제3의 세력들이 추구하는 교회는 세속화, 관료화, 조직화, 금전과 명예를 중시하는 교회, 복음주의를 가장한 사회주의 이념과 이데올로기적 사회주의 중국교회이다. 중국 정부는 그것을 알고 있다. 교회가 쓸모없는 황무지로 변한다 할지라도 사회주의는 남으며, 교회를 통해 거두어 들인 수많은 자원과 후원의 몫은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귀하게 쓰이는 물적 인적 자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교회 개편을 위한 정부의 대책
1995년 상해시 인민정부가 <상해시종교활동장소관리규정>을 발표하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도록 하자. 중국 정부의 가정교회 탄압정책은 이 배경을 가지고 1995년 10월 9일 安徽省 인민정부가 시행한 <사이비조직 및 불법조직> 검거로 이어졌다. 반면에 중국 정부는 1996년 신화사 통신의 보도를 통해 <기독교와 민주운동>의 상호 연결문제에 대해 회의를 실시하여, 기독교에 대한 본격적인 정부 통제방식을 강화하게 되는데 그것은
첫째, 종교활동 장소의 등록실시 강화,
둘째 각종 종교적 문제에 대한 해결을 일괄적으로 공안이 맡아서 시행할 것,
세째 적극적으로 중국종교를 선전할 청년단을 구성하는 일이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또 다른 곳에서는 기존의 교회를 통한 해외관계 개선전략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부적으로는 지하에 존재하는 가정교회 문제해결을 위한 유화정책이기도 하며, 정부에 등록하여 운영되고 있는 삼자교회를 대내적으로 더 구체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중국에서의 종교실태와 현황을 더욱 긍정적으로 포장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해외교회 특히 중국이 관계개선을 우선적으로 시도하고자 하는 나라는 바로 미국이었다. 그리고 미국 기독교계 역시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을 통해 선교적으로 중국에 접근하기를 몹시 열망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해외의 다른 단체는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중국 정부의 배려를 받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 가운데 문고리를 잡고 있던 중국이 먼저 기선을 제압하였다. 그것은 이미 계획된 것이었고 계산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중국기독교협회에서는 미국의 유명한 복음주의 사역자 Billy Graham목사를 초청하여 중국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단기훈련을 시행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을 아직도 종교사무조례에 의한 등록 절차에 대해 구체적인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던 가정교회 지도자들에게도 확대해 주었다. 또한 교육내용에 있어서도 성경?기본적인 가르침을 중심으로 교회 지도자들에게 꼭 필요한 내용을 전달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으며, 중국애국삼자운동위원회와 중국기독교협회를 통해 전국의 모든 가정교회와 聚會點(처소교회, 그러나 실은 홍콩을 포함한 상해, 광주, 온주, 절강, 복건성 지역이 중심이 되었다.)에 전달되어졌고, 참석자들 중에는 실제 가정교회 지도자들과 삼자교회의 통제 아래에 있는 聚會點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은 역시 빌리그래함 목사의 후원으로 세워진 절강신학원에서 1997년부터 1998년까지 진행되어졌다. 모든 교육과 훈련은 매번 2주씩의 시간이 배정되어 집중교육 형태로 진행되었고, 참여한 이들에게는 고급 호텔에서 숙박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으며, 일체의 비용은 해외로부터 지원되었다. 그 교육내용을 간략히 보면, 성경의 기본 가르침과 기초신학, 제자훈련방법, 성경공부, 교회사 등 해외로부터 초청된 명강사들에 의해 중국어와 영어로 강의가 진행되어졌다.
중국기독교협회에서 이러한 정책을 실시한 이유를 분석하면, 그것은 전세계에 중국의 종교자유 현황을 선전하고, 중국의 기독교인들이 중국 양회의 지도 아래 하나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또 한가지는 중국 삼자교회가 가진 영향력을 가정교회에 미치게 하기 위함이었으며 이러한 방법을 통해 삼자를 인정하게 하고 또한 삼자와 하나가 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 훈련에 참여한 인원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있어서 수치적인 의미는 필요없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중국에 와서 누구를 가르쳤냐는 사실이었다.
결국 이 시도를 통해 중국 양회는 두가지 소중한 결과를 얻게 되었는데, 한가지는 해외선교단체가 제공하는 인력과 재정 통로를 만든 것이며, 또 한가지는 삼자교회가 추구하고 있는 임무를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비록 참여한 가정교회 지도자는 극소수였지만 중국의 정보망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정부나 삼자측 입장에서는 최대의 효과를 얻을 있는 기회가 되었다.
중국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기독교의 사회주의 사회적응이란 4단계의 계획과 절차를 가지고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정부가 사회주의 사상과 이념을 바탕으로 모든 분야에서 실시하고 있는 정책중심으로 단결, 교육, 통제, 소멸과 생성이다. 소멸이라 함은 사회주의체제에 적합하지 못한 부분들이며, 생성이라 함은 사회주의 국가건설에 적합한 새로운 형태의 정의(조직, 사상, 신학)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 삼자교회와 빌리그래함 목사가 진행한 성경교육과정은 예측하였던 것보다 큰 영향과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전세계 교회로 하여금 중국에 시선을 집중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삼자교회의 가장된 모습을 선전하는데 최대의 공헌을 하였고, 무엇보다 내부적으로 중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준 영향이 가장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중국 삼자교회에 가입하지 않고 있던 중국 가정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의 2세대 지도층으로부터 압력을 받기 시작하였고, 심지어 2세대 지도층으로부터 일선에서 밀려나야 하는 경우도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유는 두가지로 나타났는데, 첫째는 이 사역을 통하여 정말 수준 높은 지도자 훈련이 무엇인지를 이제 알게 되었기 때문이며, 이 교육을 받은 지도자들은 이전보다 더욱 구체적이며 활발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이러한 교육을 통한 삼자와 제3세력의 안정적 교회역할은 순수 신앙만을 요구하던 가정교회에 새로운 변혁과 리더쉽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가정교회 지도자들과 신도들의 욕구불만은 삼자교회 가입을 고려하게 되었고, 이전에 가졌던 삼자에 대한 경계심조차 상실케 되었다.
결국 중국 가정교회는 내부적으로 지도자 간에 갈등 요소가 형성되었고 교회는 분리되기 시작하였으며, 가정교회를 공격하던 삼자교회와 함께 비난의 목소리까지 함께 외치는 결과를 양산하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 지도층이 원하던 바요, 또한 삼자교회가 목적하는 바였다.
그러나 이러한 세력이 왜 다시금 가정교회 형태를 고수하고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단순히 그들이 해외로부터의 인식을 오해시키기 위함이라고 대답해서는 안된다. 여기에 중국복음화를 위한 선교전략의 귀한 열쇠가 한가지 숨겨져 있다.
중국교회는 지난 195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기까지 가정교회 모습으로 부흥 성장해왔다. 그런 연유로 그들은 중국 땅에서 일하시는 주님이 어떻게 중국교회를 다시 일으키고 계신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중국교회는 제도화되고 집회와 의식을 중시여기는 예배당 형태의 교회보다 오히려 작은 규모이면서 가족적 분위기에서 드려지는 가정교회 예배가 더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중국 가정교회를 경험하였던 지도자들은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중국교회 역사를 통해서 증명되고 있는 것으로, 중국 가정교회는 이미 사도시대의 초대교회를 회복한 교회 형태이며, 비록 환경이 바뀌어 가고 있다 할지라도 예배당 형태의 교회로 전환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분명?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중국교회가 1998년을 기점으로 새롭게 변화된 모습이다.
[참고도표 보기] : 본 자료에는 1994년부터 1998년까지의 중국교회 기록과 이단자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국교회 속의 이단문제
그렇다면 중국 정부와 삼자측의 강경유화정책에는 물론 제3세력과도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가정교회 신앙을 고수하고 있는 교회와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방법을 적용시켰는가?
1992년 등소평은 중국의 국가정책 목표를 새롭게 조정하게 되는데 그 요점은 이러하다. 『經濟反左,政治反右』,『經濟要放手,政治要管住』. 경제적으로는 개방화 정책을 적용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체제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 중국 기독교계에서는 1992년 제5회 기독교전국회의를 통해 정부가 주도하는 종교정책에 대해 충분히 협조할 것이라는 뜻으로 <법에 의거한 종교사무 관리의 강화>라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가정교회에서는 정부의 삼자교회 가입을 유도하기 위해서 실시하였던 강경유화 정책에 대해 1995년 華北지역을 중심으로 가정교회 연합이 시도되기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단순한 형식적,조직적 연합이 아니라 성경을 기초로 한 진정한 영적연합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1996년 10월 4일 河南省에 위치한 두 계통의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서로 마음과 뜻을 하나로 하여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이 기도운동은 다시 1997년 1월 16일 전중국 가정교회 지도자들의 연합기도회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에서는 1996년 7월 29일 <宗敎活動年度檢査辦法>을 통과시켰으며, 1996년 9월 21일 국무원 종교사무국의 명으로 <認眞作好宗敎活動場所登記工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1997년 1월을 기점으로 河南省, 河北省, 遼寧省 가정교회가 공안의 피습을 받기 시작하고 이어서 수많은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涌“?종교법 위반은 결코 엄벌로 다스릴 수 없었기에 중국 삼자교회는 이러한 세력들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중국판 마귀사냥을 시작케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단과 극단문제이다.
그리고 중국 정부는 삼자교회의 이러한 변론을 통하여 강경한 방법으로 연합운동에 참여한 가정교회의 지도자들과 신도들을 불법종교활동에 관여한 자들 그리고 사이비 이단집단으로 정죄한 후 체포하고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해외교회에서는 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자 중국 가정교회의 연합운동에 가담한 단체들을 이단으로 오해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해외교회는 이미 중국교회 제3세력들과의 협력사역을 시작한 상태였으며, 그들은 이미 삼자교회는 물론 가정교회 내부 깊숙한 곳까지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에 동참치 않는 가정교회 세력은 대부분 이단과 사이비 문제에 휩쓸려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부와 삼자교회의 핍박 가운데서도 중국 가정교회는 1998년 11월 26일 『중국가정교회신앙고백』과 『중국가정교회의 정부종교정책 및 삼자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게 되었다.
가정교회 연합은 함께 차세대 지도자들을 교육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통해 영적 성장은 물론 가정교회의 외적 발전과 성장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것은 정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반정부적인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들의 순수신앙을 견지하고 더욱 더 복음을 중국 땅에 전파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중국 가정교회에 있어서도 이 시기는 삼자가 제3의 세력을 출현시켜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려 한 것처럼 놀라운 성장과 발전의 시기로 기록되어졌다.
중국교회의 이단을 분류할 때 우린 세가지 각도에서 이단을 구분시켜야 한다.
첫째, 해외로부터 중국으로 들어온 이단. 둘째, 중국 정부와 삼자에 의해 만들어진 반정부 반사회적 이단 (이 속에서는 첫째와 세째도 포함되어 있다.) 세째, 중국에서 자생한 이단.
세가지 경우 중 첫째와 세째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중국교회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이단이며 사이비라는 것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도록 한다.
그러나 이단을 정의함에 있어 반드시 짚어야 할 중요한 사항 한가지는 언급하여야만 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단이란 기독교 기본교리에 문제가 있거나 혹은 그 궤도에서 벗어나 사람들에게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구원관을 제시할 때이며, 교회적으로는 교회를 분열시키거나 무질서를 조장할 때 그 해당 교파나 교단은 이단시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단을 정죄하는 교회가 과연 어떤 교회냐 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를 위한 마르크스 유물론에 기초를 두고 신앙보다는 사상과 체제를 더 중시여기고, 교회가 마땅히 가져야 할 선교적 사명보다는 사회주의 체제 건설과 인민의 사상적 단결을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냐 하는 것이다. 또한 만일 그러한 교회가 정죄하는 이단에 대한 정보나 자료를 우리가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타종교가 기독교를 이단시하는 것과 같은 차원이며, 또 한가지는 중국 정부가 이단문제를 교리적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교회의 이단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선적으로 보편적이며, 교리적 차원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이단이 무엇인지를 분류시키고, 왜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杉쩝嗤?분명히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나 분석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너무나 미약한 입장에 놓여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비록 어느 특정인이 그 분야에 대해 연구하였다 할지라도 그 자료는 주관적 평가에 불가하다고 도외시 될 수 밖에 없는 형편에 처해 있고, 이미 한국 선교계에는 중국 정부와 삼자교회에서 얻었던 검증되지 않은 기준이 그 앞을 먼저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중국교회 속의 이단을 분별해 낸다는 것은 마치 알곡과 가라지를 분별키 위해 오곡이 풍성히 익어가는 들녁을 이리 저리 뒤적이며 오히려 가라지로 인하여 알곡을 다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우선적으로 한국교회는 중국교회에 대한 분명한 인식변화를 시도하여야 한다. 그리고 가정교회와 삼자교회, 그리고 이러한 사역 자체를 혼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제3의 세력들과의 교류에 대해 신중을 기하고 진정 중국교회를 위해 한국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동역해야 할 것인지를 연구해야 하며, 현행의 선교사 개인에게만 의존하던 각개전투가 아니라 한국교회적 중국선교전략을 수립하여 구체적이며 다양한 각도에서의 사역을 진행하여야만 할 것이다.
중국에는 지금 상처 입은 두 형태의 교회와 교회보다는 나 자신의 목적과 수단만을 정당화시키고 명예와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주의 체제가 탄생시킨 제3의 세력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진정한 중국선교를 위한 연구와 분석 그리고 전략적 사역을 진행하지 않을 때 우리가 행하는 중국선교는 오히려 상처 입은 두 형태의 교회를 향해 돌을 던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며, 장차 하나님께서 중국을 완전히 개방시켜 주실 때 오히려 더 큰 무질서를 야기시킬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먼저 중국교회와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
중국 가정교회를 대표하는 몇몇 지도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정규신학을 공부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부분 1960년대를 전후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에서 지도자로써 전도자로써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00년 반기독교운동인 義和團運動이 발생하여 수많은 선교사들과 신도들이 피살되고 교회가 불태워졌다. 그 후 50년 동안 수많은 선교사가 중국으로 왔고 13개의 대학과 6,000여 개의 중ㆍ소학교 900여 개의 병원을 세웠다. 중국기독교인 수도 이전보다 10배나 증가하였다.
그러나 1949년을 기점으로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공산 정부는 기독교 선교사역을 제국주의 문화침략으로 간주하고 서방선교사들을 추방하였으며, 중국 전도자들을 회유하고 대대적인 무신론교육을 추진함은 물론 강경책을 동원하여 교회를 정부의 통제 하에 두었다. 결국 1954년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공산당 치하의 형식적 교회만이 잔존하게 되었고, 1966년부터 1976년에까지 이르렀던 문화혁명은 모택동 숭배사상을 제외한 모든 종교를 중국 땅에 묻어 버렸다. 교회당은 파괴되거나 압류되어 다른 용도로 사용되어졌고, 종교지도자들은 체포되거나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또한 1978년 12월 중국에 개혁개방정책이 실시되어져 이데올로기적 모택동 노선이 실용주의적 등소평 노선으로 선회하게 되고, 1980년대 이르러서는 통일전선부와 종교사무국, 삼자회가 다시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것이 중국 사회주의가 종교정책에 있어 본격적인 이중노선을 걷기 시작한 첫 발걸음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1980년 4월 다시금 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에서는 전국대표회의를 통해 중국기독교협회를 설립하고 삼자교회를 怜낱戀臼눼?/SPAN>. 또한 삼자회의 잡지인 天風이 재발간되기 시작하였으며, 지난 30년 동안 완전히 문을 닫았던 신학교가 삼자회 소속으로 처음으로 학생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곳이 바로 금릉협화신학원(金陵協和神學院)이다. 그 결과1980년부터 2000년에 이르기까지 聚會點을 포함한 종교활동장소 2만여곳이 문을 열었으며, 3천여명의 신세대 교역자들이 배출되었다.
반면에 중국 가정교회는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조직화되고, 구조적인 제도화를 추구하였고, 70년대 후반부터는 복음전파를 위한 유랑전도자들이 전국 각지역으로 복음을 전파하면서 가정교회를 계속 세워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1980년대 초에 접어들면서 복음이 가장 많이 전파된 河南省 지역에서 가정교회의 새로운 지도자들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1980년대의 개혁개방정책은 가정교회 부흥에도 영향을 미쳐 교회수가 증가하고, 연합운동 역시 가속을 더하였다. 지도자 양성에 있어서도 각 계파간의 연계를 통한 제자훈련이 강화되면서 安徽省, 山東省 일대에 복음이 골고루 전파되었다.
또한 浙江省 溫州지역을 중심으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삼자교회에서 이탈하여 가정교회를 세웠고, 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상업적 이유로 전국 각지역 도시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복음 역시 도시지역으로 골고루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비록 짧지만 이렇게 중국교회의 근대사를 돌아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중국교회, 더 자세히 말하면 삼자교회를 제외한 가정교회가 오늘과 같은 놀라운 성장 기반을 갖게 된 시기가 바로 1950년부터 1980년대까지이며, 1980년대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정부와의 갈등과 삼자교회의 견제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기간동안 중국교회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었고, 복음은 오히려 과거 선교사들이 정열적으로 활동할 때보다 더 놀랍게 전파되었다. 그런가하면 삼자교회가 다시금 문을 열었을 때도 1천만이라는 기독교인이 그곳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신학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복음전파를 향한 뜨거운 열정 때문인가? 아니다. 인위적 수단이나 방법의 결과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친히 중국교회를 인도하시고 주장하신 연고 때문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상처 입은 중국교회의 문제에 대해 중국의 역사적 배경만 가지고 그것을 해석해도 안되며, 오늘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가지고 그들을 평가해서도 안된다. 우리가 아무런 손을 쓸 수 없고, 그 어떤 것도 행할 수 없을 때 그들은 오직 우리의 기도와 자신들의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그들을 불러주시고 감싸주셨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장시켜 주셨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우리 앞에 다가왔고, 시대적 과제가 우리 가운데 놓인 것이다. 중국선교를 향한 새로운 도전은 시작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중국 땅에 편만히 증거되어지고, 저 땅 너머에 있는 이슬람권과 힌두교권, 그리고 더 나아가 예루살렘까지 전파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시대적 사명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각성하고, 중국선교를 향한 우리의 열정과 사랑을 하나로 뭉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중국교회의 형편을 바라보면서 한국교회가 풀어야 할 몇가지 과제가 있음을 직시할 수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한국교회의 중국복음화에 대한 역할 분담은 분명한 무게중심을 맞출 수 있으리라 본다.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를 향한 걸음은 서로 다른 수고와 열정 가운데 오히려 중국교회의 미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첫째, 13억 인구의 중국복음화를 위해서 한국교회는 하나로 견지된 선교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여야만 한다. 주관적이며 독립적 사역에 필요한 것이 전술이라면 13억 중국인 복음화를 위한 사역은 탐쳄?안목의 전략이 수립되어야만 한다.
둘째, 사회주의 국가 건설과 마르크스유물론 사상만을 선전하는 중국 정부가 종교정책을 통해 나아가는 방향성에 이끌리는 사역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사역자세를 회복하여야 한다.
세째, 주관적이며 단편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중국선교전략을 수립함에 있어 정확하고 현실성 있는 자료와 정보를 토대로 분석과 연구가 병행될 수 있는 미션네트워크가 형성되어 미래지향적인 중국선교정책이 진행되어지도록 해야 한다.
네째, 목회자 중심의 선교사 파송은 물론 개혁개방정책을 통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중국에 대해 다양한 전문인력 발굴과 육성 및 파송을 시행해야만 한다.
다섯째, 한국교회가 시대적 사명감을 가지고 모든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중국선교에 동참할 수 있도록 다양한 중국선교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주께서 한국교회에 허락하신 은혜를 중국을 건너 땅 끝까지 전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일하시고 계심을 믿습니다. 주님, 한국교회가 오직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세로 중국교회와 동역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