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거리 문협에 오니
모두들 아호가 있고 거침없이 아호를 부르는
풍토가 있어 문인들의 모임이 실감되어 몇 해 전
'아호' 수필을 보내주셔서 ~~
"호가 있으면 좋겠어요" 하는
말을 귀담아 들으시고 '일초헌' 이란 호를 지어
주시고 친필로 쓰신것 <아호> 한 편의 수필을
보내주셨다.
<꽃 피면 달 생각하고>수필집에 이 수필이 자리하고
있어서 글은 생활 속에서 나온 글이어야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구나 확인하며 감사하며 이 수필을 나눕니다.
아호/이동렬
내 호는 도천이다. "안동 도산 사람" 이라는 말. 서울에 올라와서 일중 김충현 여초 김응현 선생
서숙에서 연수생으로 있을 때 일중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동방연서회 회원전에 처음 출품할 때
라 아호가 필요해서 지은 것. 아호는 보통 서화가의 첫 전시회나 시인의 첫 시집에 갑자기 나타
나는 것이 관례다.
민중서관에서 펴낸 <국어대사전>을 보면 아호는 "예술가들이 시문<사전에는 사물이라 돼 있으
니 사전이 틀렸다.>이나 서화 등에 쓰는 본명 외의 풍아한 별호"로 되어 있다. 고향을 다녀오는
길에 사온 안동소주의 독한 주향과 담배 연기가 뒤섞여 다다미방 서실 공간을 가득 메운 주연 석
상에서 일 중 선생이 내 아호를 내릴 때 "나도 이제 일류 서예가가 되겠구나"하는 시건방진 생각도
들었다.
조선 때는 아이가 커서 20살 전후의 성년식을 할 때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했다. 본 이름은
가급적 피하고 또 하나의 이름을 지어 부르기 위해 아호가 생겨났다. 말하자면 출입복은 옷장 안
에 걸어 두고 또 한 벌의 막 입고 막 빨아 입을 수 있는 옷을 장만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 조선 초.
중기까지 호를 사용한 사람들은 주로 문필가들이었는데 조선 말기에 와서는 신분상승을 지향하
는 평민들도 아호를 지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요사이는 예술가는 물론 정치인, 콩나물 배달원,
작가, 호떡이나 떡볶이 판매원, 배우 등 누구나 아호를 지어 이름 대신 쓰는 게 유행이다.
한 사람이 2개 이상의 호를 가진 사람도 있다. 조선 말의 금석학자요 서예가인 김정희는 젊었을
때 쓰던 아호 추사, 중년을 들어서서 쓰던 아호 완당 말고도 수 백 개가 넘는 아호가 있다. 아마
추사 자신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 싶다.
아호는 어떻게 지을까? <청장관 전서>에 아호 짓는 방법에 대해서 조선 정조 때의 실학과 선비
박제가와 이덕무의 문답이 나온다. 아호를 짓기 가장 쉽고 편리한 방법은 자기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지명이나, 산 이름,강 이름을 따 오는 것이다. 조선 왕조 500년을 통하여 문명을 날리던 사
람 중에는 지명을 아호로 삼은 사람들이 가장 많다. 예로 퇴계 이황은 자기가 살던 토계리의 계자
를 따서 '토계리에 물러나 앉는다'는 의미로 퇴계라 했고 율곡 이이는 그의 고햐 율곡리에서, 화담
서경덕은 그가 제자를 가르첬던 곳의 연못 이름에서, 송강 정철은 전남 담양군 창평의 송강에서
고산 윤선도는 그가 가끔 살았던 경기도 양주의 고산촌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 나라 전직 대통령
거산 김영삼과 후광 김대중은 모두 고향의 지명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던 나는 큰 실
수를 한 적이 있따. 대구에 있는 D대학을 드나들던 때다. 한 번은 사람들 앞에서 아호에 관한 얘기
를 할 경우가 생겼는데 아호는 겸손의 미덕을 살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 이를테면 치옹(바보 같은
늙은이 )이지 현옹(지혜로운 늙은이)은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다.그런데 앞의 두 정치인들은 자기
를 거창하고 화려하게 꾸민 아호를 지었으니 대단히 무식한 짓이라고 한창 아는척 까불대고 있는
데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그 호가 자기네들 고향에 있는 지명인데요" 하고 일러주는 게 아닌가.
쥐구멍이라도 있었으면 그리로 기어들어 가려고 머리를 쳐박았을 것이다.
자기의 인생관이랄까 평소 이상과 신념을 나타내는 몇 글자로 호를 만드는 사람도 있다. 예로
백범(모두가 평등함을 주장함) 김구 화가 최북의 호생관(붓으로 생계를 이어갈 사람) 같은 호는
자기의 신념이나 직업에 알맞은 문자들이다.
호를 가지는 또 한가지 방법은 그 사람 주위에 있으면서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이 그 사람의 특
징적 기질을 잡아내서 호를 지어주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중.말년의 호 완당은 추사가 25살
청년으로 청나라 갔을 때 추사의 재주에 매료된 당시 청의 석학 완원이 추사에게 내린 아호이다.
1999년 내가 한국 E대학교로 가던 해에 서울대학교 교구로 간 지구물리학의 문우일에게는 무
심헌이라는 호를, 경북대학교 교수로 있따가 은퇴한 심리학자 김보경에게는 일무거사, 한국 기
업은행장으로 있던 심종린에게는 운촌이라는 달콤한 호를 지어 불렀다. 요사이 컴푸터를 보니
무심헌 이라는 이름이 자주 눈에 띄는 것으로 보아 문교수는 그 아호를 애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요사이 젊은 사람들은 사시나무, 떡갈나무 등 나무 이름이나 쏘가리, 가물치 등의
물고기 이름, 백합, 해송화 등의 꽃 이름, 아니면 두더지 고슴도치 등의 동물 이름을 별호로
지어 컴푸터에 올린다. 문제는 나 같은 분별력 없는 노인에게는 이 사람이 쏘가리인지 가물치
인지 영 혼란스러운 때가 많다는 것이다. 남과 구별되는 개성이 있는 한글 아호면 좋으련만......
나는 작품에 낙관을 할 때 도천노옹과 같은 맛을 잔뜩 부려보고 싶으나 아직 그런 호를 쓰기엔
약간 젊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 벼슬은 한 적이 없으니 도천 처사나 도천 도인은 써도 될 나이
인데 어딘지 시건방져 보인다.
아참, 또 하나 있는 나의 아호. 청현산방주인이 생각나네. 생가 역동 집에서 강 건너 훤히
내다 보이는 꿈에도 그리워하는 불망의 그 고개를 아직까지 깜빡 잊고 있었구나!
첫댓글 아호에 대해 새롭게 배우게 되어 감사합니다
저도 캘문에 들어와 서로 이름 대신 아호를 부르시는 모습을 보고
문인으로 금세 마음으로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