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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여덟 가지 사과 이야기'라는 부제의 이 책은 역사 교사인 저자가 '사과'라는 소재를 통해, 서양의 역사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내용이다. ‘실제 일어났던 역사가 아닐 수도 있는, 아니면 아무런 의미 없이 지나칠 수 있는 사과를 역사적 사과로 만들어낸 이들의 의도’를 궁금하게 여긴 저자가 그 의미를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낸 것이라고 하겠다. 즉 사람들의 상식에서 '사과'로 대표되는 이야기들이, 역사에서 실존했다기보다 대체로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기도 했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는 모두 8개의 에피소드가 서술되고 있는데, 단순히 그 내용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의 역사적 맥락을 함께 설명하고 있다. 각각의 항목들은 종교(이브의 사과), 신화(파리스의 황금 사과), 자유(윌리엄 텔의 사과), 과학(뉴턴의 사과), 여성(백설공주의 사과), 예술(폴 세잔의 사과), AI(앨런 튜링의 사과, 그리고 혁신(애플의 사과) 등이다. 각 항목에 거기에 배치된 소재들을 보면, 서양 역사에서 사과가 등장하는 소재들이 참 다양하고도 적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는 '미시사'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면서 ‘사과’라는 소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그 소재는 '미시적'일 수도 있으나 이 책의 내용만큼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첫 번째 '종교'라는 항목에서 소개하는 사과는 <성경>에 나타난 '선악과'에 관한 내용이다. 성경 어느 구절에도 '선악과'가 사과라는 기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람들에게 그것이 사과라고 알려져 있다. 기독교가 유입되기 이전의 북유럽에서는 사과가 오히려 '불멸'의 상징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저자는 북유럽의 다신교적 문화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기독교적인 시각이 개입하여 선악과를 사과라고 논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중세의 성경을 정리했던 '히에로니무스'에 의해 사과라고 지칭된 이래, 밀턴의 <실락원>에서 그러한 관념이 확정된 것으로 논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남성 중심의 관습에서 이브로 상징되는 여성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강조한다. 저자는 '선악과'가 '사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유럽에서 기독교가 주류적 위치를 차지하는 역사적 흐름을 함께 조망하고 있다.
두 번째의 '신화'에서는 최고의 미인만이 먹을 자격이 있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파리스의 황금사과'에 대해서 논하면서, 그리스 신화가 유럽 사상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기술하고 그 시대적 전개 과정까지 논하고 있다. 이 역시 여성들의 질투심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여신들의 행동을 하나의 코드로 삼아 이야기의 의미를 풀어내고 있음을 강조한다.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소개하면서도 저자는 하나의 주제를 통해서, 서양의 역사적 흐름과 접맥시켜 설명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번째 항목의 '빌헬름 텔의 사과'는 '자유'라는 키워드로 허구적 인물이었던 그가 프리드리히 쉴러의 작품으로 역사적 인물로 환치되며, 마침내 스위스 독립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게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만유인력을 발견했다고 평가되는 '뉴턴의 사과'를 다룬 네 번째 ‘과학’ 항목 역시 서양철학사에서 자연과학이 정립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그것이 한 순간의 발견과 통찰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 근대 과학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지만, 뉴턴은 실제 연금술과 신학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단지 사과라는 소재에 국한하지 않고, 전후 서양사의 흐름을 폭넓게 서술하여 그에 대한 저자의 깊이 있는 관심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으로 전반부에 제시된 4개의 항목에서 사과는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반드시 사과일 필요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후반부에 제시된 4개 항목에서 사과는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예컨대 다섯 번째 ‘여성’이라는 항목에서는 <백설공주>라는 제목의 설화에서 '마녀의 사과'는 그 서사를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유럽에서 이야기 문학(메르헨)이 끼친 영향을 전반적으로 짚어내기도 한다. ‘예술’ 항목에서는 서양 미술사에서 인상파로부터 추상파를 이끈 역할을 한 폴 세잔의 사과 정물 역시 그럴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암호체계인 에니그마를 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이후 컴퓨터의 역할을 개척한 앨런 튜링의 죽음의 현장에 등장하는 사과는 다소 뜬금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수학자로서 튜링의 역할을 상세히 소개하면서, 그들의 노력이 오늘날 AI(인공지능)의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 항목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혁신’을 상징하는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원래 비틀스의 음반을 만드는 회사였던 ‘애플’의 브랜드를 인수하고, 여러 번의 로고를 변경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는 과정이 혁신의 아이콘으로 소개되어 있다.
저자는 ‘사과’를 주요한 소재로 취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서술에서 주요 소재인 사과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사과라는 소재로 촉발된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는 하지만, 그와 연관된 방대한 서양 역사의 흐름을 서술하는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항목들이 사과라는 소재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광대한 시대의 신화와 역사를 하나로 엮어 서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들이 단순한 소재거리에 그치지 않고, 서양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전체적인 서술 체계나 책의 내용을 통해서, 역사교사로서 저자의 폭넓은 식견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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