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나왔지만, 공기업에서 퇴직한 후 외제차를 몰고 다니는 이웃은 텃밭에 심은 식물들의 얼굴에 마른버짐이 피려 하면 영양제에 칼슘을 타서 먹입니다.
그런데 서울의 K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에서 국어 선생까지 한 저는 겨우 2010년형 경차를 타고 다닙니다. 하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저는 제 꼬마차의 목에 고삐를 씌워 말뚝에 묶어두고 기름 냄새만 맡으면 움직이는 짜장면 배달용 오토바이를 타고 다닙니다.
제 육신의 빈 주머니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제 마음의 내비게이션은 마트만 보이면 경로를 이탈했다는 경고음을 울리며 다른 길로 피해 가게 합니다. 따라서 저는 제가 키우는 작물들에게 저도 먹어본 적이 없는 영양제나 칼슘을 먹일 수 없고 녀석들도 영양제를 떠먹여 주는 주인을 선택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웃의 사내가 할아버지의 미소를 흘리며 그의 애완식물들에게 영양제와 칼슘을 떠먹여 줄 때마다 제가 키운 식물들의 얼굴을 바로 볼 수가 없어 오토바이의 시동을 걸고 장맛비 징징거리던 어린 날 아침의 우수憂愁 속으로 달아납니다.
밤새 장맛비 뒤척이던 초등학교 6학년 때였습니다. 반골反骨의 피가 농濃한 아버지는 연중행사처럼 실직을 했고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야 하는 저와 동생에겐 살 부러진 우산 한 개밖에 없었습니다.
무능의 속살까지 벗겨버리는 아침이 두려워 이불로 얼굴을 가려버린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와의 인연이 질겼는지 전당포로 가지 않은 아버지의 팔목시계가 어둠의 장막을 걷으며 아침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수심愁心을 지우려고 밤새 줄담배를 피우며 폐肺 속 깊이 담배 연기를 밀어넣었습니다. 니코틴을 품은 담배 연기와 담배 연기 때문에 각혈하듯 기침을 뱉어내는 어머니의 수심이 수명을 다해 삭아버린 경첩의 헐거운 틈을 비집고 머리를 밀고 들어왔습니다.
물에 젖은 솜이불 같은 아침이 노크도 없이 관절이 닳아버린 대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어머니는 보리밥에 왜간장과 참기름뿐인 찬으로 저와 동생의 아침상을 차려놓고 부엌으로 숨어버렸습니다. 세 살 아래 동생이 숟가락으로 밥을 헤쳐 보았지만, 아버지의 실직이 길어질수록 밥 속에서 쌀알을 찾는 것은 강에서 사금砂金을 찾는 것 같았습니다.
메밀껍질 씹듯 밥을 먹은 후 동생과 저는 샴쌍둥이처럼 몸을 붙인 채 살이 부러진 우산 속으로 몸을 구겨 넣은 후 학교에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벽을 향해 타다 만 등신불처럼 돌아앉아 있었습니다.
어린 자식들을 배웅하려고 어머니가 대문을 열었습니다. 대문의 관절이 거위처럼 울었습니다. 그것이 신호였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앞집에 사는 친구 엄마가 장승처럼 서서 저와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미가 짙은 어머니의 얼굴을 굽어보는 그녀의 살찐 얼굴엔 조롱의 빛이 번지르르했습니다.
한글이라고는 겨우 당신의 이름 석 자만 상형문자처럼 그려놓는 여자였습니다. 군인 간 동생에게서 군사우편이 올 때마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눈이 나쁜데 서른 조금 넘은 나이에 돋보기를 쓸 수도 없고…”라는 말로 자신의 문맹에 연막을 치며 어머니께 편지를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존심의 명치 끝을 쓸어내리며 돌아가곤 했습니다.
어머니의 머리를 빌린 다음 날이면 그녀는 언제나 문 앞에 서서 한 손에는 원기소 통, 다른 손으로는 제 손목을 잡고 저보다 한 뼘은 키가 큰 그녀의 아들과 키를 재게 했습니다. 수치심에 달아나려고 손목을 빼려 할 때마다 통뼈로 된 그녀의 손아귀가 제 뼈를 조각낼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아들 입에 원기소 두 알을 넣어주며 원기소를 먹여야 키가 큰다고 어머니의 자존심에 염산을 뿌리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겨울에 태어났기 때문에 나중에 클 것이라며 저를 향한 위로인지, 조롱에 대한 항변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말을 하려 했지만,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입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살찐 그녀는 어머니께 편지를 들고 왔고 다음날 그녀는 또 원기소 통을 들고 대문 앞을 막았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어머니의 손에도 원기소 통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아버지의 팔목에서 시계를 보지 못했습니다.
보름 전 양평 산골 텃밭에서 고구마를 캐어 일산에 사는 큰딸 집에 내려다 주고 손주 녀석들에게 용돈 몇 푼 쥐어주고 돌아오는 길에 밤섬이 눈앞에 보이는 어릴 적 살던 마포나루 동네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일이 잘 풀릴 땐 저와 동생을 밤섬으로 데려가 지갑 마구리를 열고 장어구이를 사주던 아버지, 이제는 고인이 된 아버지가 밤섬 앞에 서서 손목시계도 없는 손을 흔들고 계셨습니다.
첫댓글 결국 우리는 어머니의 염려와 아버지의 헌신으로 성장하여 또 되물림의 사랑을 심습니다.
선생님, 감동적인 단편소설 한편 잘 읽었습니다,감사드립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소설을 썼어요. 이 글은 문학이 언어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쓴 글입니다.
문명이란 속도에 최대한 가속 페달을 밟지 않으려고 길을 걷는 선생님의 모습엔 어떠한 결기가 있습니다
작은 스쿠터를 타고서 험한 준령을 넘어와 동해에서 바람이 되었다가
또 바람처럼 아무일 없듯 떠나시는 모습은 때론 요원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결기 는 문명의 속도 앞 에 자존감 마저 잃어가는 우리에게 내미는 저항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부디 건강 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