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철학의 제1원리인 ‘코기토 에르고 숨(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여러 철학자들에 의해 다르게 변형됩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코기토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라캉은 말합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여기서의 욕망은 ‘인정 욕망’입니다. ‘사랑의 대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죠.
‘타자(Other)’는 기존 질서입니다. ‘나(me)’는 타자의 욕망에 따라 ‘이상적인 나(ego-ideal)’가 되고자 노력합니다.
근대철학의 핵심인 ‘주체’란 과연 무엇일까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곳(타자)에서 생각하고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저 역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가장 주요한 타자는 부모님이죠. 부모가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 그래서 부모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 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또 부모의 욕망이란 결국 사회의 가치관을 반영한 거죠.
(펌 : http://lightnlife.or.kr/zeroboard/view.php?id=koinonia&no=397)
철학자이자 정신분석가인 라캉은 우리의 욕망은 모두 타자의 욕망이라고 하였다. 현장에서 청소년들을 상담하다보면 이 말이 어떤 말인지 공감하게 된다.
"어떻게 생각해?" "잘 모르겠어요"
"그때 기분이 어땠어?"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고 싶어?" "잘 모르겠어요"
생각과 감정을 묻는 질문에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계속해서 듣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대부분 학생들의 고민 중 하나는 성적이 잘 나와서 좋은 학교로 진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또 어떤 아이들은 화장을 하고 틀에 박힌 교복이나마 나름대로 멋을 부려보려 애쓴다. 아이돌 스타나 유명한 배우들을 닮고 싶어 한다. 예쁜 배우들이 인기가 있고 멋져 보이기 때문이다. 예쁘고 멋져 보인다는 것은 다시 말해 타인의 시각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서..."라는 대답의 이면에는 거대 상업주의와 소비주의가 모습을 숨긴 채 움틀고 있음을...
이렇게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타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애쓰다(욕망하다)보면 진정 나의 욕망은 무엇인지 망각하게 된다. 지금 원하는 욕망이 나의 욕망인지 타인의 욕망인지도 헷갈리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체"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과연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끝이 없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다 보면 그 끝없음에 지치게 되고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와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나" 만 남게 된다.
(펌 : http://cafe.daum.net/counstory/GfpM/3?docid=1OV3m|GfpM|3|20111024165232&q=%C5%B8%C0%DA%C0%C7%20%BF%E5%B8%C1%C0%BB%20%BF%E5%B8%C1%C7%D1%B4%D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