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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루페 성지순례 피정
동정 마리아의 묵주 기도
- ROSARIUM VIRGINIS MARIAE -
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 기도
- ROSARIUM VIRGINIS MARIAE -
1.0 서론
1.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는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 아래 제이천년기에 차츰 그 모습을 갖추었으며 많은 성인들의 사랑을 받고 교도권이 권장해 온 기도입니다. 단순하지만 심오한 이 기도는 커다란 효과를 지닌 기도로서 이제 막 시작된 제삼천년기에도 성덕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묵주기도는 그리스도 신앙의 영적인 여정에 잘 어울립니다. 그 신앙은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본래의 힘을 조금도 잃지 않고, 하느님 영의 인도로 “깊은 데로 가서” 온 세상에 그리스도를 외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요한 14,6) “인류 역사의 목적이시고 역사와 문명이 열망하는 초점” 이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또 구원자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묵주기도는 분명히 성모신심의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는 그 소박한 구조 속에 모든 복음 메시지의 핵심을 집약하고 있으므로 마치 복음의 요약과 같습니다. 묵주기도는 또한 당신 동정녀의 품에서 시작된 강생의 구원 활동을 두고 바치신 바로 성모님의 기도이며 성모님의 영원한 노래인 마니피캇을 반향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묵주기도를 통하여 성모님 학교에 앉아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그 크신 사랑을 체험 하게 됩니다. 바로 구세주 어머니의 손에서 받듯이, 믿는 신자는 묵주기도를 통하여 풍성한 은총을 얻기 때문입니다.
교황들과 묵주기도
2. 저의 많은 선임자들께서도 이 기도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교황 레오 13세를 특별히 언급 하여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1883년 9월 1일에 회칙 「최고 사도직」(Supremi Apostolatus Officio)을 을 발표하시고, 묵주기도가 사회악을 물리치는 효과적인 영적 무기라는 드높은 선언을 하셨습니다. 이는 또한 성모님의 이 기도에 관한 다른 많은 발언들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 묵주기도를 특히 장려하신 최근의 교황들 가운데에서 저는 교황 요한 23세 복자와 교황 바오로 6세를 언급하고자 합니다. 바오로 6세께서는 교황 권고 「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에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묵주기도의 복음적 특성과 그리스도 중심성을 강조 하셨습니다.
저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묵주기도를 자주 바치도록 권장해 왔습니다. 묵주기도는 어릴 때부터 저의 영성 생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 왔습니다. 최근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특히 칼바리아 순례지에서 이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저는 언제나 묵주기도를 바쳐 왔습니다. 저의 모든 근심을 묵주기도에 의탁하였으며, 그 안에서 저는 언제나 커다란 위안을 얻었습니다. 지금부터 24년 전인 1978년 10월 29일에, 제가 베드로 좌에 선출된 지 두 주도 채 안되어 제 마음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묵주기도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는 놀라운 기도입니다! 그 단순함과 심오함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묵주기도는 어떤 의미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의 마지막 장인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 계시는 천주의 성모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묵상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모송을 바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주요 사건들이 영혼의 눈앞으로 지나갑니다. 그 사건들이 환희와 고통과 영광의 신비의 요약 안에 모아지고, 우리는 이를 테면 성모님의 마음을 통하여 바로 예수님과 생생하게 결합됩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는 개인과 가정과 국가와 교회와 온 인류의 삶을 이루는 모든 사건, 곧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이웃들, 특히 우리에게 가까운 이웃들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겪는 일들을 마음에 담고 묵주기도 한단 한단을 바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묵주기도는 인생의 그러한 맥박을 드러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바로 이 말씀으로 저의 교황직 첫 해를 묵주기도의 일상 주기에 맞추었습니다. 오늘 저는 베드로 후계자의 직무 25년을 시작하면서 그렇게 하고자 합니다. 그 동안 저는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총을 받았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합니다!(Magnificat anima mea Dominum!) 저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의 말씀으로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자 하며, 저의 베드로 직무를 성모님의 보호에 맡겨 드립니다. 모두 님의 것!(Totus Tuus!)
묵주 기도의 해 : 2002년 10월 - 2003년 10월
3. 이러한 까닭에, 저는 대희년 경축을 마치며 하느님 백성에게 “그리스도에게서 새롭게 출발”하도록 권고하였던 교황 교서 「새 천년기」(Novo Millennio Ineunte)의 묵상에 이어, 마치 그 교서에 성모님의 화관을 두르듯이, 묵주기도에 관한 묵상을 풀이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깁니다. 모든 이가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과 일치하여 성모님의 학교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도록 권고하려는 것입니다.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은 바로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권고에 더 큰 무게를 두고 또 앞서 말한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발표 120주년을 계기로 삼아, 저는 앞으로 한 해 동안 여러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묵주기도를 특별히 강조하고 장려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저는 올해 10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한 해를 묵주기도의 해로 선포합니다.
저는 이러한 사목 제안을 각 교회 공동체의 주도에 맡깁니다. 이는 개별 교회의 사목 계획을 방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완성하고 공고히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제안을 즉각 기꺼이 받아들여지리라 믿습니다. 묵주기도가 그 충만한 의미를 되찾을 때 그리스도인 생활의 핵심에 이르게 됩니다. 묵주기도는 개인적 관상과 하느님 백성의 교육 뿐 아니라 새로운 복음화를 위하여 날마다 영성 훈련의 풍부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우리 시대의 교회에 마련해 주신 “위대한 은총”이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막 40주년(2002년 10월 11일)이라는 또 다른 기념일의 기쁨으로, 묵주기도를 강조하는 것이 더욱 기쁩니다.
묵주기도에 대한 반대
4.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볼 때 이러한 제안은 시기적절한 것이 분명합니다. 먼저, 묵주기도가 맞고 있는 일종의 위기에 시급히 대처하여야 합니다. 묵주기도는 오늘날의 역사적 신학적 상황에서 그 가치가 부당하게 평가 절하되어 젊은 세대에게 더 이상 가르쳐지지 않을 위험도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적절히 강조하였던 전례의 중심성은 필연적으로 묵주기도의 중요성을 축소시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황 바오로 6세께서 분명하게 밝히셨듯이, 묵주기도는 전례와 상충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전례를 뒷받침 합니다. 묵주기도는 우리를 전례로 훌륭하게 이끌어 주는 동시에 전례를 충실하게 반영하므로, 전례에 내적으로 충만히 참여하게 하고 일상생활에서 그 열매를 거두게 합니다.
묵주기도가 그 분명한 마리아 성격 때문에 일치 운동과 어긋나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분명히 묵주기도는 천주의 성모님께 대한 공경의 전망 안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공의회가 분명히 밝혔듯이 마리아 공경은 “어머니께서 존경을 받으실 때에 그 아드님께서 바르게 이해되시고 사랑과 영광을 받으시게 하도록”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으로 이끄는 신심입니다. 묵주기도를 바르게 활성화시킨다면, 묵주기도는 교회 일치 운동에 분명히 도움이 되며, 결코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관상의 길
5. 그러나 묵주기도 생활을 힘껏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가 교황 교서 「새천년기」에서 참된 “성덕의 훈련”으로 제시하였던,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를 관상하는 제 임무를 도와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성덕의 훈련에는 “기도가 앞서는 그리스도인 정신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영성의 요구가 현대 사회의 수많은 모순 속에서 흐려지기는 하지만, 다른 종교들의 영향 때문에도 영성에 대한 새로운 요구가 솟아오르고 있어,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 우리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참된 기도의 학교” 가 되어야 합니다.
묵주기도는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서방 세계에서 생겨나 발전한 이 기도는 전형적인 묵상기도이며, 어느 정도는 동방 그리스도교의 토양에서 피어난 ‘마음 기도’나 ‘예수님 기도’에 해당합니다.
평화를 위한 기도, 가정을 위한 기도
6. 지금의 역사적 상황이 묵주기도의 부흥에 커다란 효과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께 평화의 은총을 간청하여야 할 절박한 필요가 있습니다. 선임 교황들과 저 자신이 묵주기도는 평화를 위한 기도라고 거듭거듭 밝혔습니다. 2001년 9월 11일 저 가공할 재앙으로 시작되고 거의 날마다 세계 도처에서 새로운 폭력과 유혈 사태를 목격하는 이 천년기의 벽두에, 묵주기도를 다시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관상하는 일에 몰입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셨기”(에페 2,13 참조) 때문입니다. 따라서 평화 증진을 자신의 의무로 여기는 사람은 틀림없이 묵주기도를 명백한 의무로 알고 바치며,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땅, 아직도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나자렛 예수님의 땅인 성지의 평화에 마음을 기울입니다.
현대의 또 다른 위기와 관련해서도 투신과 기도가 요구됩니다. 바로 사회의 기초 단위인 가정의 위기입니다. 가정은 이념과 실제에서 날마다 점점 더 붕괴의 위협을 받고 있으며, 이 때문에 우리 시대의 필수적 근본 제도인 가정의 미래는 물론 사회 전체의 운명이 위험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가정 사목이라는 폭 넓은 영역에서 그리스도인 가정에 묵주기도를 되살린다면, 파멸로 치닫는 이 시대의 위기를 막아내는 데에 효과적인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7. 수많은 표징이 가리켜 주듯이, 오늘날에도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께서는 바로 이 묵주기도를 통하여 어머니로서 우리를 끝까지 돌보고자 하십니다. 구세주께서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를 가리키며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교회의 모든 자녀를 당신 어머니의 보호에 맡기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께서 하느님 백성이 이러한 형태의 관상 기도를 권고하시는 당신의 목소리를 똑같이 깨닫게 하시고자 당신의 현존을 보여 주셨던 19세기와 20세기의 여러 사건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고 또 교회 권위의 인정을 받은 루르드와 파티마의 발현을 그 이름을 들어 기억하고자 합니다. 이들 순례지에는 위안과 희망을 찾는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증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8. 묵주기도 안에서 성덕에 이르는 참된 길을 찾은 수많은 성인들의 이름을 다 열거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묵주기도에 관한 훌륭한 책을 쓴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 드 몽포르 성인과, 우리에게 더욱 친근하고 최근에 제가 시성의 기쁨을 누렸던 피에트렐치나의 비오 신부는 특별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바르톨로 롱고 복자는 묵주기도의 참된 사도로서 특별한 은사를 지녔습니다. 그분 성덕의 길을 “묵주기도를 전파하는 사람은 누구든 구원을 받는다!” 하는 마음 속 깊이 깨달은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 분은 기원 후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매몰되어 오랜 세기 뒤에 그 잿더미에서 고대 인류의 명암을 보여 주는 증거가 발굴되는 폼페이에, 그 전에 그리스도의 소식이 가닿지도 못한 이 고대 도시의 페허 위에 거룩한 묵주기도의 성모님께 성전을 봉헌하도록 부름 받았다고 깨달았습니다. 바르톨로 롱고는 평생의 모든 활동을 통하여, 특히 ‘15주간 토요 묵주기도’를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관상적인 묵주기도의 정신을 증진하였으며, ‘묵주기도의 교황’이신 레오 13세의 커다란 격려와 후원을 받았습니다.
1.1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태양처럼 빛나는 얼굴
9. “그 때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났다”(마태 17,2). 세 사도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구세주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변모 장면은 그리스도 관상의 한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켜, 그분 인성의 일상사와 고통스런 여정 안에서 그분의 신비를 깨닫고, 성부의 오른편에 앉으신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영원히 드러난 신적인 광채를 알아보는 것,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제자의 임무이며 따라서 우리 각자의 임무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생명의 신비를 받아들이도록 우리 자신을 열어, 늘 새롭게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하고 성령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바오로 성인의 말씀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2코린 3,18).
관상의 모범이신 성모님
10. 그리스도 관상에서 성모님께서는 그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탁월한 모범을 보여 주십니다. 성자의 얼굴은 특별히 성모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모님의 태중에서 자라시면서 인간적으로 그분과 닮은 외모를 물려받으셨는데, 이 닮음은 한층 더 돈독한 영적인 결합도 이끌어 냅니다. 그 누구도 성모님만큼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았던 사람은 결코 없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의 눈은 주님의 탄생 예고를 받아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을 때에 이미 예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 몇 달 뒤에 성모님께서는 그분의 현존을 느끼시고 그분의 모습을 마음에 그리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을 낳으시고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히시며”(루카 2,7)성모님께서는 당신 육신의 눈으로 아드님의 얼굴을 바라보실 수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언제나 흠숭과 경탄에 가득 찬 성모님의 눈길은 예수님을 떠난 적이 결코 없습니다. 때로는, 잃어버린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시고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루카 2,48)고 하셨을 때처럼 물어 보는 눈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처럼(요한 2,5 참조) 예수님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고 더욱이 드러나지 않는 감정을 깨닫고 그 뜻을 내다볼 수 있는 꿰뚫어 보는 눈길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때 그 눈길은 특히 십자가 아래에서처럼 슬픔의 눈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어느 모로 산고를 겪는 어머니의 눈길이었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아드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드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를 진정한 새 아들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요한 19,26-27 참조). 그리고 부활절 새벽에는 부활의 기쁨에 빛나는 눈길이었을 것이고, 마침내 오순절에는 성령을 넘치도록 받아 불타는 눈길이었을 것입니다(사도 1,14 참조).
성모님의 기억
11.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사시며, 그분의 말씀은 무엇이든 소중히 간직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루카 2,19; 2,51 참조). 성모님의 마음에 새겨진 예수님의 기억은 모든 일에서 언제나 성모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당신 아드님 곁에서 보내신 삶의 여러 순간들을 묵상하게 하였습니다. 그 기억들은 어느 모로 성모님께서 지상에 사시는 동안 몸소 끊임없이 바치셨던 ‘묵주기도’를 이루었습니다.
지금도 천상 예루살렘의 기쁜 노래들 가운데 성모님께서 감사와 찬미를 드리시는 연유는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그 연유들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지금도 순례하는 교회에 어머니로서 관심을 가지시며, 교회 안에서 복음 선포자로서 당신의 선포 여정을 계속해 나가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신자들에게 당신 아드님의 ‘신비’를 끊임없이 보여 주시며, 그 신비의 관상으로 그 모든 구원의 힘이 발휘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의 기억과 또 그 눈길과 일치하게 됩니다.
관상 기도인 묵주기도
12. 바로 성모님의 체험에서 시작된 묵주기도는 더 없이 훌륭한 관상 기도입니다. 이러한 관상의 차원이 없으면 묵주기도는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이를 분명하게 지적하셨습니다. “관상이 없는 묵주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신과 같아져 기도문만을 반복하는 위험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는 줄 안다.’(마태 6,7)고 하신 예수님의 권고를 거스르게 될 것입니다. 묵주기도는 본질상 고요한 운율과 생각을 할 수 있는 느릿한 속도로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께 가장 가까이 계셨던 성모님의 마음과 눈길로 기도하는 사람이 주님 생애의 신비를 더 쉽게 묵상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그 신비의 헤아릴 길 없는 부요가 드러나게 됩니다.”
묵주기도가 참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관상 기도라는 그 고유한 본질을 더 잘 드러내 주는 몇몇 측면들을 밝히자면, 교황 바오로 6세의 이 드높은 생각을 잠시 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기억하기
13. 성모님의 관상은 무엇보다도 먼저 기억이라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는 기억(zakar)이라는 말을 성서적 의미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기억은 하느님께서 구원 역사 안에서 이루신 일들을 현존하게 합니다. 성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정점에 이르는 구원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 사건들은 ‘어제’의 일만이 아니라 구원의 ‘오늘’입니다. 이러한 시간의 충만은 특히 거룩한 전례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수세기 전에 이룩하신 일들은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 은총의 선물로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러한 사건들에 대한 다른 모든 신앙적 접근에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신앙과 사랑으로 그 사건들에 대한 ‘기억’을 경축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삶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로 우리에게 얻어 주신 은총에 자신을 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확인하였듯이, 그리스도의 사제 직무의 수행이며 공적 예배 행위인 거룩한 전례는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라는 것을 거듭 확인하는 한편, 영성 생활은 “오로지 거룩한 전례의 참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은 공동으로 기도하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또한 자기 골방에 들어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아버지께 끊임없이 기도하여야 한다(1테살 5,17 참조).”는 것 또한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 고유한 특성으로 묵주기도는 “끊임없이”바치는 수많은 기도의 정점에 자리합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행위인 전례가 모든 것에 앞서 구원을 가져다주는 행위라면,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묵주기도는 구원에 도움이 되는 관상입니다. 묵주기도는 구세주의 삶의 신비들에 잠겨, 그분께서 하신 일과 전례가 재현하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여 우리 삶에 동화시켜 줍니다.
성모님께 그리스도를 배우기
14.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뛰어난 스승이시며, 계시하시는 분이시자 계시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분께서 가르치신 것을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보다 더 좋은 스승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 편에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충만한 진리로 이끄시는 내적 스승이십니다(요한 14,26; 15,26; 16,13 참조). 그러나 피조물 가운데에서 성모님보다 그리스도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으며, 그리스도의 신비를 깊이 깨닫도록 우리를 더 잘 이끌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첫 번째 기적을 이루신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라고 하인들에게 이르실 때에 분명히 스승의 모습으로 드러나십니다(요한 2,5참조). 또한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 제자들과 함께 성령을 기다리시며 최초의 사도파견에서 제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셨을 때에도 스승의 역할을 하셨다고 마음으로 그려 볼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 한단 한단을 성모님과 함께 건너가는 것은 성모님의 “학교”에서 그리스도를 읽고 그분의 신비를 깨닫고 그분의 복음을 배우는 것과 거의 같습니다.
성모님께서 친히 학교를 여시고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을 충분히 얻어 주시며 그 누구에게도 비길 수 없는 스승으로서 “신앙의 나그넷길”에서 모범으로 가르치신다고 여길 때에, 이 성모님의 학교는 매우 효과적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성자의 신비를 하나하나 바라보며, 당신께서 주님 탄생 예고 때 하신 것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는 질문을 하고 언제나 신앙의 순종으로 대답을 하라고 권유하십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닮기
15. 그리스도인 영성은 자기 스승과 더욱 완전히 동화되어야 하는 제자의 본분을 그 고유한 본질적 특성으로 삼고 있습니다(로마 8, 29 ; 필리 3, 10.12 참조). 세례 때에 넘치게 받은 성령으로 신자들은 그리스도이신 포도나무에 가지처럼 접붙여지며(요한 15, 1참조)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가 됩니다(1코린 12, 12; 로마 12, 5 참조). 그러나 이러한 처음의 결합에는 언제나 그분을 닮아 가는 동화의 여정이 응답을 하여야 합니다. 곧 제자의 삶이 갈수록 더욱더 그리스도의 “논리”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 하십시오”(필리 2, 5). 사도의 말씀대로 반드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어야”(로마 13, 14; 갈라 3, 27참조) 합니다.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얼굴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묵주기도의 영적 여정에서, 그리스도께 동화되려는 이 목표는 이른바 “우정”의 길을 통하여 추구됩니다. 이 길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 삶으로 들어가, 그분의 감각으로 “숨쉬게”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르톨로 롱고 복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마치 두 친구가 자주 함께 만나면 흔히 그 습관이 서로 동화되듯이, 참으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친밀하게 살고 동정녀와 함께 묵주 기도의 신비들을 묵상하며 영성체를 통하여 하나의 삶을 이룬다면, 비천한 우리도 그분들을 닮을 수 있고, 그 탁월한 모범으로 겸허하고 가난하며 드러나지 않고 인내하는 완덕의 삶을 배울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 동화되어 가는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맨 먼저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보호에 우리 자신을 의탁합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참으로 “가장 뛰어나고 유일무이한 지체”로서 교회에 속하시지만 또한 동시에 “교회의 어머니” 이십니다. 성모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신비체에 끊임없이 자녀들을 “낳아”주시기에 그렇습니다. 이는 자녀들에게 성령께서 끊임없이 내리시기를 간청하는 당신의 기도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교회 모성의 완전한 표상입니다.
묵주기도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나자렛의 가정에서 그리스도의 인간적 성장을 보살피시느라 여념이 없으신 성모님 곁으로 우리를 데려다 줍니다. 이렇게 하여 성모님께서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형성”되실(갈라 4,19참조) 때까지 예수님께 기울였던 것과 같은 관심으로 이제 우리를 가르치시고 교육하십니다. 성모님의 이러한 역할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역할에 근거를 두고 있고 그 역할에 철저히 종속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개를 절대로 흐리게 하거나 감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힘을 보여 줍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밝힌 이 훌륭한 원칙을 저도 제 자신의 삶에서 강력하게 체험하였고 이는 “모두 님의 것”(Totus Tuus)이라는 말씀을 제 주교문장의 바탕으로 삼은 까닭이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 드 몽포르 성인의 가르침에 따른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동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성모님께서 하시는 역할을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하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완덕은 예수 그리스도께 동화되고 결합되며 봉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완전한 형태의 신심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 동화되고 결합되어 우리를 그분께 더욱 완전하게 봉헌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께서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으신 분이므로, 모든 신심 가운데에서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께 대한 신심은 우리 영혼을 우리 주님께 바쳐 주님과 동화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 영혼을 봉헌하면 할수록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께 영혼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생애가 묵주기도에서만큼 깊이 결합되어 있는 곳도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십니다.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께 기도하기
16.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마태 7,7) 하고 말씀하시며 확신을 가지고 끈기 있게 하느님께 매달리라고 권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기도의 힘의 근원은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심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중개자이자(1요한 2,1참조) 하느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해 주시는”(로마 8,26-27 참조) 성령의 활동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며”(로마 8,26 참조), 때로는 “잘못 구하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불러일으키시는 기도를 뒷받침 하시며 당신의 자애로운 전구를 통하여 개입 하십니다. “성모님의 기도는 교회의 기도를 떠받쳐 줍니다.” 유일한 중개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기도의 길이시라면, 그리스도의 가장 뚜렷한 모상이신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 주십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의 활동에 유일하게 협력하신 사실을 토대로,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에서 드러난 그분의 위격에 초점을 맞춰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께 바치는 기도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복음 말씀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께서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요한 2,3)고 하시며 다른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알려 주시는 장면에서 성모님의 전구의 힘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는 묵상이며 간청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께 꾸준히 기도하는 것은 어머니의 전구가 당신 아드님의 마음에서 모든 것을 얻어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바르톨로 롱고 복자가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Supplicatio ad Virginem)에서 사용한 표현대로, 물론 이 말은 올바르게 이해하여야 할 필요가 있지만, 성모님께서는 “은총으로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는 복음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인 백성의 경험 안에서 더욱 확고해진 확신입니다. 뛰어난 시인 단테는 베르나르도 성인의 말씀을 빌려 이를 훌륭하게 표현하였습니다. “너무나 위대하고 힘 있는 여인이여, 누구나 은총을 바라지만 당신께 달아들지 않는 자는 날개 없이 날기를 바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묵주기도를 하면서 성령의 여인(루카 1,35 참조) 마리아께 간청을 드릴 때에, 성모님께서는 당신께 은총을 가득히 주셨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청하시며, 또 당신 몸에서 태어나신 아드님 앞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하여 전구하여 주십니다.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17. 묵주기도는 또한 선포와 탐구의 길로서, 그리스도의 신비를 여러 차원의 그리스도인 체험에 끊임없이 제시합니다. 그 특징은 기도와 관상으로서, 그리스도의 마음에 그리스도인 자신을 결합시켜 줍니다. 묵주기도는, 특히 본당과 순례지에서 이루어지는 공동 거행에서, 효과적인 묵상에 필요한 모든 요소와 결합될 때, 교리교육의 중요한 기회가 됩니다. 사목자들은 이를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묵주기도의 성모님께서도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 선포 활동을 하십니다. 묵주기도의 역사는 특히 이단의 확산으로 교회가 어려움에 빠졌던 시기에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이 묵주기도를 어떻게 이용하였는지를 보여 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를 앞서 간 사람들의 신앙과 똑같은 신앙으로 우리도 다시 한번 묵주기도에 의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묵주기도는 그 모든 힘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으며, 지금도 훌륭한 모든 복음 전파자 들이 활용해 온 사목 도구로서 커다란 힘과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1.2 그리스도의 신비 – 성모님의 신비
묵주기도는 ‘복음의 요약’
18.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유일한 길은 성령 안에서 아버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기(마태 11,27) 때문입니다. 필리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니 너는 복이 있다.”(마태 16,17) 하고 말씀하시며 당신께서 어떤 분이신지 베드로가 분명하게 꿰뚫어보게 된 근거를 알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높은 곳에서 오는 계시입니다. 그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주의 깊게 귀 기울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침묵과 기도의 체험만이 그 신비에 대한 진실하고 성실하고 일관된 지식이 무르익고 발전할 수 있는 적합한 배경이 됩니다.“
묵주기도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관상하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기도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이를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하셨습니다. “묵주기도는 강생의 신비와 인간 구원에 중심을 둔 복음적인 기도로서 명백히 그리스도를 향한 기도입니다. 묵주기도의 고유한 특징인 성모송의 연속적인 반복은 그리스도께 대한 끊임없는 찬미입니다. 천사의 인사와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루카 1,42)고 한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의 인사는 궁극적으로 모두 그리스도께 드리는 인사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저는, 성모송의 반복은 신비에 대한 관상을 엮어 주는 씨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각각의 성모송에서 가리키는 그리스도께서는 차례로 선포되는 신비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로 또 동정녀의 아들로 제시되는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보완
19. 그리스도 생애의 수많은 신비들 가운데 일부만이 교회 권위의 승인을 받아 폭넓은 신심 관행으로 바치는 묵주기도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한 선택은 지금까지 바쳐온 묵주기도의 형식이며, 이는 시편의 총수에 상응하는 150이라는 숫자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묵주기도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본질을 증진하도록 그리스도의 세례와 수난 사이의 공생활의 신비들을 보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기며, 이를 개인과 공동체의 자유에 맡깁니다. 이 신비들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결정적인 계시이신 그리스도의 중요한 측면들을 관상합니다.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로 선언되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을 알리시고 당신의 활동을 통하여 이를 증언하시며 그에 따르는 요구를 선포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요한 9,5) 하고 말씀 하신 것처럼, 공생활 기간 동안 그리스도의 신비는 바로 빛의 신비입니다.
따라서 묵주기도가 더욱 완전한 ‘복음의 요약’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강생과 드러나지 않은 생활(환희의 신비)을 묵상한 다음, 그리스도의 수난의 고통과(고통의 신비) 부활의 승리(영광의 신비)를 묵상하기 전에 그리스도의 공생활에서 특별히 중요한 몇몇 순간들(빛의 신비)을 묵상하여야 합니다. 묵주기도의 전통적인 형태의 본질적 측면을 훼손하지 않고 이러한 새로운 신비를 추가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환희와 빛과 고통과 영광의 심연인 그리스도의 깊은 마음에 이르는 참된 길인 묵주기도에 새로운 열성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입니다.
환희의 신비
20. ‘환희의 신비’ 인 첫 꿰미는 참으로 강생 사건에서 빛나는 기쁨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는 주님의 탄생 예고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여기서 가브리엘 천사가 나자렛의 동정녀께 드리는 인사인 “마리아님, 기뻐하소서.”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뻐하라는 권고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구원 역사 전체,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 역사 전체가 이 소식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라면(에페 1,10참조), 온 세상은 어떤 면에서 하느님의 지극 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러한 사랑으로 성모님을 바라보시고 그분을 당신 아드님의 어머니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뜻을 기꺼이 따르신 성모님의 순종 안에 온 인류가 담겨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엘리사벳과 만나시는 장면도 환희입니다. 성모님의 목소리와 그분의 태중에 계시던 그리스도의 존재는 요한을 “기뻐 뛰놀게”(루카 1,44 참조) 하였습니다. 하느님이신 구세주 아기의 탄생을 천사들이 노래하며 목자들에게 “큰 기쁨”(루카 2,10)이 될 소식을 알리는 베들레헴의 광경도 환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지막 두 신비는, 이러한 환희의 분위기를 간직하면서도 앞으로 다가올 비극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을 바치심은 아드님을 봉헌하는 기쁨과 나이 든 시므온의 환희를 표현하는 한편,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 이 되시고 성모님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는 예언을(루카 2,34-35 참조) 담고 있습니다. 열두 살의 예수님을 잃어버렸다가 성전에서 찾은 사건도 기쁨과 비극이 뒤섞여 있습니다. 성전에서 예수님께서는 학자들의 말을 듣기도 하시고 질문도 하시면서 실질적으로는 이미 ‘가르치시는’ 분으로서 당신의 신적 지혜를 드러내십니다. 성부의 일에 완전히 봉헌되신 성자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계시는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도 하느님 나라의 절대적인 요구와 부딪히게 되는 복음의 근본적인 특성을 선포합니다. 성모님과 요셉은 두렵고 걱정이 되어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50).
‘환희’의 신비를 묵상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지닌 궁극적인 이유와 그 심오한 의미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는 강생의 신비가 지닌 구체적인 사실성을 바라보며, 구원을 위한 고통의 신비를 어렴풋이 내다보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비결을 깨닫도록 이끄시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그 무엇보다도 “기쁜 소식(evangelion)"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이시며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가르침이 바로 그 기쁜 소식의 핵심입니다.
빛의 신비
21. 우리의 관상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나자렛 생활에서 공생활로 옮겨 가면서, 특별히 ‘빛의 신비’라고 부를 수 있는 신비들로 우리를 이끕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는 빛의 신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빛”(요한 8,12)이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공생활 동안에 특별히 드러납니다. 저는 이 기간의 그리스도 생애에서 다섯 가지 중요한 순간들, 곧 “빛의 신비”를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제시하고자 하며, 이를 다음과 같이 지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믿습니다. 1.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심, 2.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당신을 드러내심, 3. 회개의 촉구와 결부된 하느님 나라의 선포, 4. 예수님의 변모, 그리고 마지막으로 5. 파스카 신비의 성사적 표명인 성체성사의 제정입니다.
이 신비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느님 나라의 계시입니다. 요르단 강에서 받으신 세례는 무엇보다도 빛의 신비입니다. 여기에서, 죄를 모르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죄 있는” 분이 되신(2코린 5,21 참조) 그리스도께서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실 때, 하늘이 열리고 그분을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로 선언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한편(마태 3,17과 다른 복음서들의 병행 구절), 성령께서 그분 위에 내려오시어 그분께 영원한 임무를 부여하십니다. 가나에서 행하신 첫 기적이 빛의 신비입니다(요한 2,1-12 참조). 첫 신자인 성모님의 전구로, 그리스도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시고 제자들의 마음을 신앙으로 열어 주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선포 자체가 빛의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고 알리시고 회개를 촉구하시며(마르 1,15) 겸손한 믿음으로 당신께 다가오는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마르 2,3-13; 루카 7,47-48 참조). 이렇게 시작하신 자비 활동을 그리스도께서는 특히 당신 교회에 맡기신 고해성사를 통하여(요한 20,22-23 참조)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하여 수행하십니다. 가장 뛰어난 빛의 신비는, 전통적으로 다볼 산에서 있었다고 여겨지는 저 변모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느님의 영광이 빛나고, 하느님께서 놀란 제자들에게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와 다른 복음서들의 병행 구절)하시며 성령으로 변모된 삶과 부활의 기쁨을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의 고통을 겪을 준비를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마지막 빛의 신비는 성체성사의 제정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음식으로 내어 주시며, 인류 구원을 위하여 이제 곧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실 “극진한”(요한 13,1) 인간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이러한 신비들에서, 가나의 기적을 제외하면, 성모님의 모습은 그늘에 가려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설교하실 때에 성모님께서 이따금 함께 하셨음을 간단하게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며(마르 3, 31-35; 요한 2, 12 참조), 성체성사가 제정될 때에 다락방에 함께 계셨다는 암시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나에서 성모님께서 해내신 역할은 어느 모로 그리스도의 여정 내내 함께 하였습니다. 요르단 강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직접 선포하시고 세례자 요한이 되풀이하였던 그 계시가 가나에서 성모님의 입으로 드러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하신 이 계시는 모든 시대의 교회에 당부하시는 어머니의 위대한 권고가 되었습니다. 이 권고는 공생활 동안 그리스도의 말씀과 기적들을 이끌어 내며, 마치 성모님을 바탕에 그린 것처럼 ‘빛의 신비’ 전체의 밑그림을 이룹니다.
고통의 신비
22.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고통의 신비에 큰 중요성을 둡니다. 처음부터 그리스도교 신심은, 특히 사순 시기의 십자가의 길 기도는 수난의 각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어 왔는데, 이는 수난이 사랑의 계시의 절정이며 우리 구원의 원천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묵주기도는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몇몇 순간들을 선택하여, 신자들에게 이를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다시 체험하도록 초대합니다. 묵상의 순서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 앞에서 깊은 번민의 순간을 겪으시는 겟세마니에서 시작됩니다. 연약한 육신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온갖 유혹에 직면하시지만 인간의 모든 죄에 맞서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카 22,24와 다른 복음서들의 병행 구절). 이러한 그리스도의 ‘순종’은 에덴 동산에서 우리의 첫조상들이 보여 주었던 ‘거역’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뜻에 충실함으로써 치르는 대가는 뒤이은 신비들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매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며,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주님께서는 극도의 고통 속으로 내던져 지십니다. “보라, 이 사람을!”
이러한 비참한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만이 아니라 인간 자체의 의미도 드러납니다. “보라, 이 사람을!” 인간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필리 2,8)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낮추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의미와 기원과 완성을 찾아야 합니다. 고통의 신비는 신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다시 생생하게 체험하고, 십자가 아래 성모님 곁에 서서, 성모님과 함께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알고, 생명을 주는 그 모든 힘을 깨닫도록 이끌어 줍니다.
영광의 신비
23. “교회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모습에 그치지는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묵주기도는 언제나 신앙의 이러한 인식을 표명해 왔으며, 신자들에게 수난의 어둠을 넘어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이유를 다시 찾고(1코린 15,14참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뵈었던 사람들, 곧 사도들, 막달라 여자 마리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기쁨만이 아니라 영광스럽게 되신 당신 아드님의 새 생명을 그분만큼이나 강렬하게 체험하셨을 성모님의 기쁨도 다시 체험합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도 그와 똑같은 영광을 받으셨을 것이며, 유일한 특권으로, 죽은 이들의 부활 때에 모든 의인을 위하여 마련된 운명을 앞서 누리셨을 것입니다. 영광의 신비 마지막 단에서 보듯이, 마침내 천사들과 성인들이 모후로서 빛나는 영광의 관을 쓰신 성모님께서는 교회가 종말에 누리게 될 지위를 미리 보여 주시고 성취하십니다.
묵주기도는, 아드님과 어머니의 영광이 나란히 펼쳐지는 한가운데에, 세 번째 영광의 신비인 성령 강림을 우리 앞에 제시 합니다. 이 신비는 교회의 모습을 성모님과 함께 모여 있는 가족, 성령을 가득히 받아 활기가 넘치고 복음화 자세를 갖춘 가족으로 제시합니다. 이 신비의 관상은 반드시, 다른 영광의 신비들에 대한 관상과 마찬가지로, 신자들이 교회 한가운데에서 누리는 그리스도의 새 생명, 성령 강림 사건이 그 생명의 위대한 “표상”이 되는 그러한 삶을 언제나 더욱 생생하게 의식하도록 이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의 신비는 신자들이 역사 안에서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으로서 지향하는 궁극 목적에 대한 희망을 더욱 키워 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러한 희망은 신자들에게 그들의 모든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기쁜 소식”을 용감하게 증언하도록 재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비들’에서 ‘신비’로 : 성모님의 길
24. 거룩한 묵주기도에서 하는 이러한 묵상의 순환이 모든 주제를 다 다루지는 않지만 필수적이고 본질적은 것을 일깨워, 사람들의 영혼이 그리스도를 앎에 맛들이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 맛은 복음이라는 순수한 원천에서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은, 복음사가들이 말하듯이, 온갖 지식을 초월한 신비로(에페 3,19 참조) 빛납니다. 그것은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로서, 그분 안에 “하느님의 완전한 신성이 깃들어 있습니다.”(콜로 2,9). 그러므로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크게 강조하며 이렇게 가르칩니다. “예수님 생애의 모든 것은 그분 신비의 표징이다.” 제삼천년기의 교회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는’일은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의 심오한 진리인 그리스도를 완전한 이해력을 가지고 깨달을(콜로 2,2-3참조)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바오로의 편지는 세례 받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이러한 진심어린 기도를 합니다.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가 사실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써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 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에페 3,17-19).
그리스도를 깊이 알게 되는 방법이나 그 “비결”을 가르쳐 주는 묵주기도는 이러한 목적에 이바지합니다. 우리는 그 방법을 성모님의 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을 가지고 말없이 주의 깊게 귀 기울이신 나자렛의 동정녀께서 보여 주신 모범적인 방법입니다. 성모 신심은 또한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깨닫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어느 모로 성모님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그 신비가 성모님과 직접 연관되어 있지 않을 때에도 그러합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성모송에 담긴 가브리엘 천사와 엘리사벳 성녀의 말씀을 우리 것으로 삼아, 우리는 성모님 안에서, 성모님의 품과 마음 안에서 “태중의 복되신 아드님”을(루카 1,42참조) 찾도록 재촉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비, 인간의 신비
25. 제가 1978년에 묵주기도를 가장 좋아하는 기도라고 증언하면서 밝혔던 생각으로 되돌아가고자 합니다. 저는 그때, “단순한 묵주기도는 인생의 맥박을 드러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비에 관하여 지금까지 드린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묵주기도의 이러한 인간학적 의미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이 관계는 처음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합니다. 그리스도 생애의 여러 사건들을 묵상하며 그분을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 안에서 인간에 대한 진리를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단언한 것으로서, 저도 회칙 「인간의 구원자」(Redemptor Hominis)를 발표한 이래 저의 가르침에서 이 사실을 자주 언급하였습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 안에서만 참으로 인간의 신비가 밝혀집니다.” 묵주기도는 이러한 빛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때에 인간의 길이 “재창조되어” 열리고 구원을 받아, 믿는 이는 참된 인간의 모습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생명의 거룩함을 알게 됩니다. 나자렛 가정을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른 가정의 본모습을 알게 됩니다. 그분의 공생활의 신비들을 통하여 스승께 귀 기울임으로써,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빛을 발견합니다. 또한 해골산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그분을 따르며, 구원에 이르는 고통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영광에 싸이신 그리스도와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성령께 치유를 받고 변모되도록 자신을 내맡길 때에 각자가 가야 할 우리의 목표를 내다봅니다. 묵주기도의 신비는 그 하나하나가 바르게 묵상할 때 인간의 신비에 빛을 비추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구세주의 거룩한 인성을 마주하면서 우리 삶의 모든 어려움과 걱정과 수고와 노력을 그분께 맡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됩니다. “네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 드려라. 주님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 54{55},23).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은 우리의 근심을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에 맡기는 것입니다. 벌써 24년이 지난 뒤, 베드로 직무의 수행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돌이켜보며, 저는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몸소 체험하도록 다시 한번 열렬히 권고하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참으로 묵주기도는 “인생의 맥박”이 우리 삶의 목표이자 염원인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이루는 기쁨의 친교 안에서 하느님 생명의 맥박과 일치를 이루도록 해 줍니다.
1.3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묵주기도는 신비와 동화되는 길
26. 묵주기도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하며 바로 그 신비의 본질과 동화되도록 도와주는 적절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이 방법은 반복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각 신비에서 열 번 씩 반복되는 성모송이 그러합니다. 이러한 반복을 겉으로만 보면, 묵주기도를 무미건조하고 따분한 행위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묵주기도를, 내용은 비슷하지만 그 느낌은 언제나 새로운 표현들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쏟아 붓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 기도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인간의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비와 용서가 흘러넘치는 하느님의 마음을 가지셨을 뿐 아니라, 온갖 감정들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의 마음도 가지셨습니다. 복음서의 증거가 필요하다면, 부활하신 다음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나누신 감동적인 대화에서 이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 이렇게 물으시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하고 대답합니다(요한 21, 15-17참조). 베드로의 사명에 매우 중요한 이 구절의 구체적인 의미는 제쳐두더라도, 누구나 이 세 번의 반복이 주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반복 속에는 끈질긴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 인간의 보편적 사랑의 경험에서 우러난 친숙한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이해하려면, 사랑의 고유한 심리적 역동성을 알아야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반복되는 성모송은 직접적으로는 성모님께 바치는 것이지만, 사랑의 행위는 궁극적으로 성모님과 함께 또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을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성모송의 반복은, 진정한 그리스도교 생활 “양식”인 그리스도와 더욱 완전히 동화되려는 의지를 키웁니다. 바오로 성인은 이러한 생활양식을 열정적인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필리 1,21). 또 이렇게도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묵주기도는 우리가 성덕의 목표에 이를 때까지 이러한 동화를 도와줍니다.
유효한 방법
27. 우리는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데에 어떠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에 놀라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인간적 본성과 생명의 박동을 존중하시면서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영성은 하느님과 강력하고 형언할 수 없는 일치를 이룸으로써 말하자면 모든 형상과 말과 행동이 필요 없게 되는 가장 숭고한 형태의 신비주의적 침묵에 익숙하면서도, 대개는 전 인격체가 육체와 정신과 대인 관계의 복잡한 실재와 연루됩니다.
이것은 전례에서 두드러집니다. 성사와 준성사들은 인간의 모든 차원을 이용하는 일련의 예식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전례적 기도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것은 동방 세계에서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말을 중심으로 하는, 매우 독특한 그리스도 묵상 기도가 전통적으로 허파의 호흡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로도 확인됩니다. 이 기도는 끊임없는 간청을 북돋아 주며, 마치 숨결이시고 호흡이신 그리스도께서 삶의 ‘전부’가 되기를 바라는 열망에 육신의 건강을 결합시키는 것 같습니다.
개선의 여지
28. 저는 교황 교서 「새 천년기」에서 서방 세계는 지금 묵상에 대한 새로운 요구가 일고 있으며, 이는 흔히 다른 종교들에서도 중시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형태의 기도에 끌리기도 합니다. 그러한 기도들은 긍정적이고 때로는 그리스도교 경험과 양립할 수 있는 요소들을 많이 포함 하고 있지만, 흔히는 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전제들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들 가운데 크게 유행하고 있는 것은 정신 수양적이고 반복적이며 상징적인 방법들을 사용하여 높은 수준의 정신 집중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방법들입니다. 묵주기도는 이러한 광범한 신앙 현상 안에 놓여 있지만,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요구에 부합하는 그 나름의 특징들로 구별됩니다.
묵주기도는 진정한 관상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묵주기도는 목표에 이르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며 그 자체가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수세기 동안 축적된 경험의 소산인 이 방법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무수한 성인들의 경험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방법에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 교서에서 전체적인 신비의 순환을 새로 빛의 신비(mysteria lucis)로 보완하고 묵주기도의 방식에 관하여 몇 가지 제안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안들은, 묵주기도의 기존 구조를 존중하면서도, 신자들이 그 고유한 상징 속에서 일상생활의 요구와 조화를 이루어 묵주기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묵주기도가 본래 의도하였던 영적 효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묵주가 한갓 부적이나 주술 도구로 여겨지게 되어 근본적으로 묵주기도의 의미와 역할을 왜곡할 위험이 있습니다.
신비의 선포
29. 각 신비를 낭독하고, 나아가 각 신비를 표현하는 적절한 표상을 사용하는 것은, 말하자면 줄거리를 전개시켜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신비를 낭독함으로써 우리의 상상력과 마음은 그리스도의 생애의 특별한 사건이나 순간을 향하게 됩니다.
교회의 전통적인 영성에서,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이 「영성 수련」에서 제안한 기도 방법은 물론 인간의 감각에 호소하는 여러 신심들과 성화상 공경은 시각적이고 상상적인 요소들을(장면 설정, compositio loci) 사용하며, 이는 마음을 특정한 신비에 집중시키는 데에 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바로 강생의 논리 구조에 부합하는 방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형상을 입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신적 신비들과 만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분의 육체적 실재를 통해서입니다.
이러한 구체성에 대한 요구는 묵주기도의 여러 신비들을 선포함으로써 더욱 잘 표현 됩니다. 분명히 이러한 신비들은 복음을 대신할 수도 없고 그 내용을 속속들이 담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묵주기도가 성서 봉독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묵주기도는 성서 읽기를 전제로 하고 또 장려해야 합니다. 묵주기도에서 관상하는 신비들은, 빛의 신비를 새로 추가하더라도, 그리스도 생애의 근본 요소들을 요약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신비들은 복음의 나머지 부분들에 대해서 더욱 폭넓은 묵상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특히 오랫동안 묵상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친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기
30. 성서적 토대를 제공하고 묵상에 깊이를 더하려면, 각 신비를 선포한 다음, 상황에 따라 길거나 짧게, 그 자리에 어울리는 성서 봉독을 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어떠한 말도 영감을 받아 쓰여진 성서 말씀에 비할 수가 없습니다. 귀 기울려 들으며, 우리는 그 말씀이 지금 “나를 위하여”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받아들일 때, 하느님의 말씀은 묵주기도에서 사용하는 반복의 방법의 일부가 되어, 이미 잘 아는 어떤 것을 단순히 묵상하는 데에서 오는 지루함을 막아 줍니다. 이것은 알고 있는 것을 떠올리는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도록 하는 문제입니다. 공동으로 장엄하게 묵주기도를 마칠 때에는 이 말씀을 간략한 해설과 함께 적절히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침묵
31. 말씀의 경청과 묵상은 침묵으로 더욱 풍요로워 집니다. 신비를 낭독하고 말씀을 선포한 뒤에는 제시된 신비에 얼마동안 관심을 집중한 다음에 소리 기도로 넘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침묵의 중요성을 발견하는 것은 관상과 묵상을 실천하는 비결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술과 대중 매체가 지배하는 사회의 한 가지 단점은 고요함을 얻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입니다. 전례에서 침묵의 순간이 권고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묵주기도를 바칠 때에도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인 다음, 잠시 머물러 특정 신비의 가르침에 마음을 모으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의 기도’
32.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신비에 집중한 다음에, 마음을 하느님 아버지께 들어 높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신비 안에서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품안에 계시면서(요한 1,18참조)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마 8,15; 갈라 4,6)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느님 아버지의 내밀한 친교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 들이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아버지와 맺는 관계의 힘으로 우리를 당신의 형제자매로 삼으시고, 우리도 서로 형제자매가 되게 하시며, 당신의 영이시자 성부의 영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십니다. 성모송을 반복하며 그리스도와 성모님을 묵상하는 토대로 놓인 주님의 기도는, 따로 바치더라도, 신비에 대한 묵상 전체가 교회의 경험이 되게 합니다.
열 번의 성모송
33. 묵주기도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인 성모송은 또한 묵주기도를 탁월한 마리아의 기도가 되게 합니다. 그러나 성모송을 바르게 이해할 때에만 우리는 묵주기도 의 마리아 성격이 그리스도 특성에 배치되지 않으며 실제로 이를 들어 높이고 고양시킨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성모송의 전반부는 가브리엘 천사와 엘리사벳 성녀가 성모님께 드린 말씀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자렛의 동정녀 안에서 이루어진 신비를 흠숭하며 관상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말하자면 하늘과 땅의 경탄을 드러내며, 하느님께서 당신의 ‘작품’, 곧 동정 성모 마리아의 태중에서 이루어진 성자의 강생을 바라보시면서 느끼시는 경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창세1,31) 기뻐하신 것을 생각한다면, 여기서도 “하느님께서 창조의 새벽에 당신 손으로 만드신 작품을 보시고 품으셨을 그러한 희열”이 되풀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묵주기도에서 성모송을 반복하며 하느님의 경탄에 동참합니다. 우리는 기쁨과 놀라움 속에서 역사의 가장 위대한 기적을 깨닫습니다. 여기에서 성모님의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라”(루카 1,48).
성모송의 가장 중요한 핵심, 이를테면 성모송의 축은 전반부를 마무리 하는 ‘예수님’의 이름에 있습니다. 때때로 급하게 성모송을 외우다 보면 이를 놓치기 쉬우며, 성모송과 함께 관상하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관계도 잊지 쉽습니다. 그러나 묵주기도를 의미 있고 효과 있게 바치는 표시는 바로 예수님의 이름과 그분의 신비에 대한 강조입니다. 바오로 6세께서는 교황 권고 「마리아 공경」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상하고 있는 신비의 내용을 덧 붙여 그 이름을 강조하는 일부 지역의 관습에 주목하셨습니다.
이는 특히 공적으로 묵주기도를 바칠 때에는 더욱 칭찬할 만한 관습입니다. 이러한 관습은 구세주의 삶의 여러 순간들을 향하고 있는,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신앙을 힘차게 표현합니다. 그것은 신앙 고백인 동시에, 성모송의 반복에 내재된 그리스도의 신비에 동화되는 과정을 촉진함으로써 우리의 묵상을 받쳐 주는 도구 입니다. 마치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시키신 것처럼,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 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인(사도 4,12 참조) 예수님의 이름을 우리가 성모님의 이름과 함께 되풀이하여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삶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동화의 여정이 됩니다.
성모송의 후반부에서 우리가 우리의 삶과 죽음의 순간을 성모님의 전구에 맡기며 드리는 간절한 호소는 성모님께서 그리스도와 맺으시는 독특한 관계, 곧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가 되게 하는 그 관계에서 힘을 얻습니다.
영광송
34.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송은 모든 그리스도인 관상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성령 안에서 성부께 이끌어 주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길을 끝까지 가는 동안, 모든 찬미와 경배와 감사를 받으셔야 할 성삼위의 신비를 여러 번 만나게 됩니다. 묵주기도에서 관상의 정점인 영광송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적으로 묵주기도를 바칠 때에는 영광송을 노래로 불러 모든 그리스도인 기도의 고유한 구조에 다가서는 것이 매우 바람직합니다.
성모송에서 성모송으로 이어가며 그리스도와 성모님께 대한 사랑으로 각 신비를 생생하게 깊이 묵상하는 그만큼, 각 단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형식적인 마무리가 아니라, 마치 우리 마음을 하늘 낙원으로 들어 올리고 어느 모로 다볼 산의 경험을 다시 재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미래 관상의 예고입니다.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루카 9,33)
짧은 마침 기도
35. 오늘날의 묵주기도에서는, 영광송 다음에 짧은 마침기도가 이어집니다. 이 마침 기도는 지역 관습에 따라 다양합니다. 그러한 기도의 가치를 조금도 해치지 않으면서 신비의 묵상이 고유한 열매를 맺도록 그 신비를 기도로 마무리 한다면, 신비의 관상이 더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하여 묵주기도가 그리스도인 생활과 갖는 관계를 더 잘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전례기도 하나가 우리에게 묵주기도의 신비들을 묵상함으로써 “그 안에 담긴 것을 본받고 약속된 것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권고 합니다.
그러나 마무리 기도는 당연히 다양성을 지닐 수 있으며, 이미 그렇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묵주기도는 다양한 영성 전통과 여러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더 잘 적응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절한 기도 형태를 사목적으로 충분히 식별하고, 가능하면 묵주기도에 특별히 봉헌된 장소와 순례지 등에서 실험적으로 사용한 다음에, 널리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여 하느님 백성은 참된 영적 부요의 풍요로움에서 이득을 얻고 개인적 관상의 자양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묵주
36. 전통적으로 묵주기도에 쓰이는 도구는 묵주입니다. 지극히 피상적인 차원에서만 보면, 묵주는 흔히 반복되는 성모송을 세기 위한 단순한 도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묵주는 관상의 실체를 더욱 충만하게 하는 상징성을 보여 주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하여야 할 것은, 묵주알들이 십자고상에 모여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고상에서 기도의 순환이 시작되고 끝납니다. 신앙인들의 삶과 기도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되며, 그분을 지향합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이릅니다.
기도의 진행을 표시하며 세는 도구인 묵주는 그리스도인 관상과 완덕의 끝없는 길을 가리킵니다. 바르톨로 롱고 복자는 묵주를 하느님과 우리를 묶어 주는 ‘사슬’로 여기기도 하였습니다. 사슬, 참으로 아름다운 사슬입니다.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를 묶어 주는 결합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종”(루카 1,38)이신 성모님과, 또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같은 분이셨지만 우리를 사랑하셔서 “종”(필리2,7)이 되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도록 하는 “효성”의 사슬입니다. 묵주의 상징을 우리의 상호 관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모두 하나 되게 하는 친교와 우애의 유대로 펼쳐 가는 것이 좋습니다.
시작과 끝맺음
37. 현재, 각 지역 교회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묵주기도를 시작합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겸손하게 인정하도록 일깨우는 의미에서, 시편 69{70}의 첫 구절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오사 저를 도우소서.” 로 묵주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신앙 고백을 관상 여정을 시작하는 토대로 삼을 수 있도록 신경을 바치면서 묵주기도를 시작합니다. 이러한 관습들과, 이와 유사한 관습들이 관상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시킨다면 모두 똑같이 정당한 것입니다.
또한 묵주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이 시야를 넓혀 교회의 모든 요구를 끌어안을 수 있도록, 교황의 지향을 위한 기도로 끝맺습니다. 교회가,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묵주기도를 하는 사람들에게 대사를 주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해 온 것은, 바로 묵주기도의 이러한 교회적 차원을 들어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끝맺을 때에 묵주기도는 참으로 어머니이시고 스승이시며 인도자이신 성모님께서 당신의 힘찬 전구로 신자들을 뒤받쳐 주시는 영적인 여정이 됩니다. 묵주기도를 드리며 성모님의 모성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 성모 찬송가(Salve Regina)나 성모 호칭 기도와 같은 뛰어난 기도문으로 동정 성모님을 찬미할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어찌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이것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신비와 성모님의 신비를 생생하게 체험하는 내적 순례 마침입니다.
요일 배분
38. 묵주기도는 날마다 전체를 다 바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묵주기도는 수많은 관상자들의 나날을 기도로 채워 주고, 시간이 많은 병자나 노인들에게 맡겨집니다. 그러나 분명히 많은 사람들은 한 주간의 어떤 순서에 따라 하루에 묵주기도의 일부밖에 바칠 수 없으며, 이는 빛의 신비가 새롭게 포함된다면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이러한 요일 배분은, 전례가 전례주년의 다양한 시기를 여러 색으로 채색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요일마다 영적인 ‘색깔'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공통적인 관습에서는, 월요일과 목요일에는 ‘환희의 신비’를, 화요일과 금요일에는 ‘고통의 신비’를, 수요일과 토요일과 주일에는 ‘영광의 신비’를 바칩니다. 그렇다면 ‘빛의 신비’는 어디에 들어가게 될 까요? ‘영광의 신비’를 토요일과 주일에 모두 바치고 있으며, 토요일은 주요 전통에 따라 마리아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성모님의 현존이 특별히 드러나는 토요일로 ‘환희의 신비’에 대한 두 번째 묵상을 옮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계획은 개인이나 공동체 기도의 합법적인 자유를 제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과 공동체의 기도에서는 영적 사목적 요구는 물론, 적절한 적응이 요구될 수 있는 특별한 전례 거행을 고려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묵주기도를 언제나 관상의 길로 여기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묵주기도를 통하여, 전례에서 그러하듯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인 주일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의 한 주간은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들을 거쳐 가는 하나의 과정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제자들의 삶 안에서 시작과 역사의 주님으로 드러나십니다.
1.4 우리를 하느님께 묶어 주는 아름다운 사슬인
복되신 성모님의 묵주기도
39.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이러한 전통적인 기도의 풍요로움을 아주 잘 보여 줍니다. 묵주기도는 대중 신심의 단순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더욱 깊은 관상의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적합하도록 신학적 깊이도 갖추고 있습니다.
교회는 어려운 일들을 묵주기도, 특히 공동으로 바치는 묵주기도와 그 끊임없는 실천에 의탁하면서 이 기도의 특별한 효과를 늘 믿어 왔습니다. 때때로 그리스도교 자체가 위기에 놓인 것처럼 보일 때에도, 묵주기도의 힘에 의지하여 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어 왔으며, 묵주기도의 성모님께서는 구원의 중개자로 찬미 받으셨습니다.
오늘 저는, 처음에 말씀 드렸듯이, 세계 평화와 모든 가정의 문제를 묵주기도의 힘에 기꺼이 의탁하고자 합니다.
평화
40. 이 새 천년기를 시작하면서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도전들은, 갈등 상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하늘 높은 곳에서 오는 개입만이 더욱 밝은 미래를 희망하게 한다고 믿게 합니다.
묵주기도는 그 본질상 평화를 위한 기도입니다. 평화의 임금님이시며 “우리의 평화”(에페 2,14)이신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를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나 평화의 비결을 알게 되고 이를 자기 삶의 목표로 삼습니다. 이는 또한 묵주기도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또한 묵주기도는 성모송을 조용히 반복하면서 묵상하는 특징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며, 부활하신 주님의 특별한 선물인 참된 평화(요한 14,27; 20,21 참조)를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서 받아들이고 체험하며 주변에 전파하게 합니다.
묵주기도는 또한 그 기도가 맺는 사랑의 열매 덕분에 평화의 기도입니다. 관상 기도인 묵주기도를 올바르게 바치면,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고 형제자매들에게서, 특히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찾게 됩니다. 환희의 신비에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아기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어찌 생명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수호하며 증진하려는 열망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며, 온 세상의 고통 받는 어린이들의 짐을 떠맡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빛의 신비에서 계시자이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어찌 일상생활에서 그분의 ‘참행복’을 증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관상 하면서, 어찌 고통에 짓눌리고 절망에 빠진 모든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스스로 ‘키레네의 시몬’처럼 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하늘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어찌 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고 더욱 정의롭고 하느님의 계획에 더욱 맞갖은 곳으로 만들려는 열망을 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그리스도께 마음을 모아 묵주기도를 바치는 동안 우리는 세계 평화의 일꾼이 됩니다. 묵주기도는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공동으로 바치는 그 특성으로,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라.”(루카 18,1) 하신 예수님의 권고에 따라 우리가 오늘날에도 평화를 위한 힘든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해 줍니다. 묵주기도는 세상의 어려운 문제들에서 도망치게 하기보다는, 그 문제들을 책임감과 헌신적인 도량으로 직시하게 하며,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문제들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주고 모든 시대에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하는 사랑”(콜로 3,14)을 증언할 수 있는 굳은 의지를 줍니다.
가정, 부모들
41. 평화의 기도인 묵주기도는 또한 언제나 가정의 기도, 가정을 위한 기도입니다. 한 때 그리스도인 가정들은 특별히 이 기도를 소중하게 여기며 가족들의 화합을 도모하였습니다. 이 귀중한 유산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묵주기도를 바치며, 가정을 위한 가정 기도의 실천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저는 교황 교서 「새 천년기」에서 평신도들도 본당 공동체와 다양한 그리스도인 단체의 일상생활에서 성무일도를 바치도록 장려하였습니다. 저는 이제 묵주기도에 대해서도 그렇게 권고하려고 합니다. 이 두 가지의 그리스도교 관상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상호 보완적 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가정 사목 활동에 헌신하고 계시는 모든 분에게 묵주기도를 진심으로 권장하도록 요청합니다.
함께 기도하는 가정은 하나가 됩니다. 거룩한 묵주기도는 오랜 전통에서 가족을 하나로 묶어 주는 기도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가족들 각자 한분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또 서로 돌아보고 대화하며 함께 느끼고 서로 용서해 주며 하느님의 성령으로 새로워진 사랑의 계약에서 다시 출발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발전된 나라들에서 이 시대의 가정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의사소통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가족들이 함께 모이기가 어려워지고, 어쩌다 한 자리에 모여도 텔레비전만 보고 맙니다. 가정에서 묵주기도를 다시 바치기 시작하면, 구원을 가져다주는 여러 모습들, 곧 구세주와 성모님의 모습으로 일상의 삶을 채울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함께 바치는 가정은 어느 모로 나자렛 성가정의 모습을 재현합니다. 예수님을 한가운데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가족들의 형편과 계획을 그분의 보살핌에 맡겨 드리며, 그분에게서 희망을 길어 올리고 앞으로 남은 여정을 살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자녀들
42. 자녀들의 성장 과정을 이 묵주기도에 의탁하는 것도 즐겁고 풍요로운 일입니다. 묵주기도 또한 잉태에서부터 죽음 그리고 부활과 영광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생애를 따르는 여정이 아닙니까? 오늘날 부모들은 자녀들의 삶을 따라가기가 점점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기술 발전과 대중 매체, 세계화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에서 모든 것이 급속히 돌아가고, 세대 간의 문화 격차가 날로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 보다 더 다양한 메시지들과 예측할 수 없는 경험들이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삶에 빠르게 침투하며, 부모들은 자녀들이 직면하고 있는 위험을 매우 걱정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부모들은 자녀들이 마약의 유혹, 무절제한 향락주의의 손짓, 폭력의 유혹, 온갖 형태의 의미 상실과 절망으로 잘못 될 때에 몹시 낙담하기도 합니다.
자녀들을 위하여, 더 나아가 자녀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며 어린 시절부터 날마다 가정 ‘기도 시간’을 갖도록 가르치는 것은, 물론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아니겠지만, 절대 과소평가할 수 없는 영적인 도움이 됩니다. 묵주기도가 오늘날의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는 아마도 묵주기도를 바치는 방법이 빈약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묵주기도의 기본 틀을 해치지 않으면서, - 가정 안에서든 단체에서든 - 청소년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을 적절하게 활용한다면 그들이 묵주기도를 바치지 않을 까닭이 없습니다. 왜 시도해 보면 안 됩니까?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 세계청년대회에서처럼 긍정적이고 열정적이며 창조적인 청소년 사목 방법을 활용한다면 매우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지혜롭게 제시해 주면 저는 청소년들이 이를 자기네 기도로 삼고 젊은이다운 열정으로 열심히 바쳐 다시 한 번 어른들을 놀라게 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묵주기도는 다시 찾아야 할 보화
43.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토록 쉽고도 풍요로운 이 묵주기도는 참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다시 찾아야 할 드높은 가치가 있습니다. 특히 올해에 그렇게 합시다. 교황 교서 「새 천년기」에서 이미 밝힌 방향을 확인하는 도구로서 묵주기도를 다시 찾습니다. 많은 개별 교회들은 이 교서에 따라 사목 계획을 세우고 앞으로 이를 실천해 나갈 것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형제 주교들과 사제들과 부제들에게, 그리고 여러 직무를 맡고 있는 사목 종사자 여러분에게 특별히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각자가 묵주기도의 아름다움을 몸소 체험하고 묵주기도의 열렬한 후원자가 되십시오.
또한 신학자 여러분에게도 기대를 겁니다. 하느님 말씀에 뿌리를 박고 그리스도교 백성의 산 체험에 관심을 기울이는 치밀하고도 지혜로운 토론을 통하여, 신자들이 이 전통적인 기도의 성서적 토대와 영적 부요, 그리고 사목적 가치를 발견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바랍니다.
또한 성모님의 학교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관상하도록 특별하게 부름 받은 남녀 봉헌 생활자들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온갖 생활 신분의 모든 형제자매들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인 가정, 병자와 노인, 젊은이 여러분에게 기대합니다. 확신을 가지고 손에 다시 묵주를 드십시오, 성서에 비추어, 또 거룩한 전례와 부합되고 일상생활에 어울리는 묵주기도를 다시 찾으십시오.
아무쪼록 저의 이러한 호소를 흘려듣지 마십시오! 저의 교황직 25년으로 들어서며, 저는 그러한 마음으로 묵주기도의 사도인 바르톨로 롱고 복자가 성모님께 지어 바친 빛나는 순례 성당의 성모상 앞에 엎드려 이 교서를 동정 성모님의 지혜로우신 손길에 맡겨 드립니다. 저는 바르톨로 롱고 복자의 저 유명한 ‘거룩한 묵주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의 감동적인 말씀을 기꺼이 제 말씀으로 삼아 이 교서를 마치고자 합니다.
“복되신 성모님의 묵주는 저희를 하느님께 묶어 주는 아름다운 사슬이며, 저희를 천사들과 결합시켜 주는 사랑의 끈입니다. 묵주기도는 지옥의 공격을 물리치는 구원의 보루이며 모든 난파선이 찾는 안전한 항구 입니다. 저희는 묵주기도를 결코 멈추지 않겠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묵주는 저희에게 위안이 될 것입니다. 삶을 마치며 묵주에다 마지막 입맞춤을 할 것입니다. 묵주의 모후이신 성모님, 저희는 마지막 순간까지 감미로우신 성모님의 이름을 부를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죄인들의 피난처, 슬퍼하는 이들의 위로자이신 성모님, 오늘 또 영원토록 하늘 땅 어디에서나 찬미 받으소서.”
바티칸에서
교황 재위 제25주년 첫날
2002년 10월 1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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