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용어를 바르게 교회의 주보나 게시판의 교회이름 밑에 [당회장 목사]라고 쓴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예배 기도 때 당회장 목사님이라고 호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당회장은 노회에서 지교회의 치리권(治理權)을 위임한 [직무와 관련]된 칭호입니다. 원래 당회장이란 영어의 모더레이터(Moderator)로 토론이나 회의의 사회자 또는 중재자를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예를 들자면 성례, 당회, 조직과 임면(任免), 법적 대표권과 직위표현, 회의의 사회와 결재, 교회 부속기관의 지도와 감독, 권징 등에 관한 사무 또는 정치적 법적 행위자로서 직무를 수행할 때 이 호칭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담임목사]는 목회직무와 신분과 관련된 호칭입니다. 그 교회의 목회를 책임진 사람이라는데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기도, 설교, 심방, 상담, 전도, 인도 등의 직무를 책임진 사람을 말합니다. 따라서 당회장은 행정적 경우에만 쓰는 것이 좋고 그 외에는 [담임 목사]라고 함이 옳은 것입니다. 담임 목사라도 부목사와 구분해야 할 경우가 아니면 [우리 목사님]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가장 무난합니다. 이 호칭이 바로잡아지지 않으면 장로를 언제 어디서나 [당회원]이라고 불러야 하는 모순을 낳게 됩니다. 감리교에서도 담임목사로 호칭해야 할 때도 굳이 [감독](감독을 역임한 경우)이라고 호칭하는 것도 행정적인 표현을 할 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감독이 마치 목사보다 위치가 높은 것처럼 사용하는 것은 [명예추구]에 속합니다. 우리의 언어문화는 윗분들을 호칭할 때 [님]자의 사용을 엄격하게 가르칩니다. 특히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의 존재를 호칭할 때는 [님]자 또는 그 이상의 존칭어를 사용해야 할 것 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되 그 위(位)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성삼위는 동격이신데 어느 위에는 ‘님’자를 붙여 호칭을 하고, 어느 위에는 그렇지 아니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예수님’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호칭할 때도 ‘님’자를 사용함이 타당합니다.
이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희생’ ‘성령님의 역사’로 언어의 순화를 가져 올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라는 용어를 조심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말끝마다 [할렐루야] [주여 주여]하는 사람을 봅니다. '할렐루야'(HALLELUYAH)는 히브리어 음역으로 할렐루(hallelu, 찬양하다)와 예호와(YHWH)의 단축형인 야(YAH)의 합성어입니다. 그 뜻은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입니다. 이 말은 주로 시편의 처음이나 마지막에 나오며 예배의식에 사용되었습니다(시 106: 48). 할렐루야는 '예배'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절정의 환호성'입니다. 때문에 할렐루야를 사람들끼리 인사하는 말로 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는 사람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지 사람들끼리 하는 인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가 설교도중에 아멘을 유도하기 위해 '할렐루야!' 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역시 합당하지 않습니다. 설교는 오직 말씀선포입니다. 그리고 찬양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환호적 송축입니다. 따라서 그 전개에 있어서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 감화감동을 받은 성도가 자발적으로 '아멘'해야 그것이 정상입니다. 설교도중에 할렐루야를 돌발적으로 도입하는 것은 말씀의 선언적 측면에서 볼 때에도 맞지 않습니다. [제단]이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그 말 대신에 예배당 또는 교회당이라고 해야 합니다. 신약시대에는 '제단'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제단은 성전 뜰에 있었습니다. 제단에서 번제, 속죄제, 화목제, 속건제 등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소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짐승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셔서 단번에(히 10: 10) 영원한 제사(히 10 : 12)를 드리심으로 더 이상 '짐승'으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신약시대 성도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입니다(요 4 : 24). 그러니까 예배하는 장소가 예배당이지 제단이 아닙니다. [성전]이란 말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예배하러 가면서 성전에 간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배당(교회당)에 간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예배 드리는 곳을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성령께서 내주(內住)해 계시는 [성도의 몸]이 [성전]입니다.(고전 3: 16 고전 6: 19) 신약시대 성도들은 예배 드리는 곳, 즉 장소로서의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지 않은 것 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몸이 성전이기 때문이다. [평신도]라는 용어도 문제가 있습니다. [성도]라고 불러야 합니다. [집사님이세요?] 이런 질문에, [아니에요. 저는 평신도예요.]하고 대답하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평신도를 깨운다'느니, '평신도 훈련'이니 하여 '평신도'라는 말을 보편화하여 쓰고 있는데 과연 여기에 문제는 없는 것일까? [평신도]라는 말은 주후 2세기 경 클레멘스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에서 처음으로 장로, 집사, 평신도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성직자와 평교인을 [갈라놓았는데]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에서는 지금도 성직자와 평신도를 엄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평신도의 위치를 되찾으려는 노력이 1954년 WCC 에반스턴 회의에서 제기되었으며 1958년 헨드릭 크래머가 'A Theology of Laity'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평신도신학'이라는 전문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평신도신학]은 성직자의 개념을 없앨 뿐 아니라 성직자를 평신도의 위치로 끌어내리려고 시도하였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만인제사장설에 근거하여 기능상 직분자와 평교인을 구분하고 있을 뿐 계급상의 구분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굳이 평신도신학을 도입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평신도]란 말 자체가 성직자라는 개념과 구분을 지으려는 의도에서 생긴 말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표현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평신도' 대신 그냥 [성도]라는 말을 사용하면 무난할 것입니다. [종님]이라는 용어, 이 용어도 문제입니다. 더러 기도인도자 가운데 기도하면서 "오늘도 주의 종님께서"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문법상 '종' 다음에 '님'자를 붙이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냥 '종'이라고 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를 '종'으로 표현한 곳이 여러 군데 있음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마 25: 14-31절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에 우리가 '종'인 사실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우리를 종이라고 한 것은.. 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해야 할 자라는 뜻이고 ② 모든 것(생명을 포함한 모든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③ 우리는 다만 맡은 자요 관리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이렇듯 [종]이면 종이지 [님]이란 말을 붙일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붙인다면 [종]이니까 [종놈]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성서]라는 용어도 [성경]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성서"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성경"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요 5 : 39, 딤후 3 : 16).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스스로를 나타내신 문자 계시이고 신앙과 행위의 표준입니다. '성서'라는 말에 이러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성서'는 분해적이며 주석적이고 설명적인 내용을 문서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속(俗) 문자에 대한 대칭적인 종교 문헌적 총칭입니다. 광의적으로 주석류와 설교문도 성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書(서)'는 ① 책 ② 글 ③ 편지 등의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문자로 쓰여진 책이라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글자 한 자 한 자를 감동하시어서 성경을 기록하도록 하시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글자 하나 하나가 다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서]는 신적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과는 구분됩니다. 성경을 어원적으로 보면 '기록된 문서'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의 '비블로스'에서 '책'이라는 뜻을 가진 '비블리아'가 유래되고 이로부터 영어의 '바이블'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바이블'을 거룩한 정경(正經, Canon)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성경]은 '영감'(유기적, 완전축자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딤후 3: 16, 벧후 1: 21) 무오하고(시 119: 140) 불변하는(마 5: 18) 진리입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진리파수를 생명으로 하는 교회라면 반드시 '성서' 대신에 '성경'이라고 해야 합니다. 끝으로 설교 도중이나 설교 끝에 사용하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는 사용하면 안되는 말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는 한 인간이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를 위하여 어떤 사실이나 바람을 주님의 이름으로 빌고 원하는 뜻을 표현한 말입니다. 이러한 표현이 [설교]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 [타당한가]를 연구 검토시킨 바 있는 장로교단 총회는 1981년 65회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연구보고서를 채택한 바 있습니다. "먼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기에 설교에 인간의 기도식 기원이나 기도 등의 형식을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둘째, 설교는 설교대로, 기도는 기도대로, 축도는 축도대로 하는 것이 좋다. 셋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의 사용은 회중에게 자극을 주고 흥분시켜 “아멘”으로 응답하지 않고는 안 되게 만들어 설교의 질서를 문란케 하고 미신적 기복 사상을 키워 줄 우려가 있다. 넷째, 설교의 근본 목적이 흐려지고 회중들에게는 설교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아멘”을 하게 하는 식으로 유혹되기 쉽다." 연구위원회는 이상과 같은 내용을 보고하면서 설교시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를 하지 않도록 건의하였고 총회는 이를 아무 이의 없이 통과시킨 바 있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매우 적절한 것으로서 한국교회의 설교 사역을 바로잡는 일이라 여겨져 설교 할때 이 말의 사용을 억제함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죠지 오르웰(George Orwell)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But if thought corrupts language, language can also corrupt thought. [생각이 말을 타락시킬 수 있듯이, 말이 생각을 타락시킬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