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LKl_OldKKmk
좋은 몫 누가복음 10장 38-42절
제가 지난주에 <증상이 아니라 독특함입니다>라는 뇌신경의 다양성에 대해 연구한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안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꽃들의 세상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장미가 정신과 의사인데 커다란 해바라기가 장미 정신과 의사의 진료실에 들어옵니다. 정신과 의사는 진단 도구를 꺼내고 30분쯤 뒤에 이런 진단 결과를 내놓습니다. “거대증을 앓고 계시네요. 조기에 발견하면 치료 가능한 질병이지만 아~~~참, 지금 환자분 상태에서는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게 많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환자분이 장애를 이겨내는 법을 배우게 도와드릴 방법은 몇가지 있습니다” 해바라기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눈부신 노란색과 갈색의 머리를 줄기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 진료실을 나섭니다.
그 다음 환자는 작은 수레국화입니다. 역시 몇가지 진단 검사와 함께 건강검진을 한 다음 정신과 의사인 장미는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립니다. “안타깝게도 환자분은 GD(growing disability)즉 성장장애가 있습니다. 유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어딘가 물이 잘 빠지는 사양토에서 생산적이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수레국화는 들어올 때보다 훨씬 더 작아진 기분을 느낍니다.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백합이 들어오고 정신과 의사는 5분 만에 무엇이 문제인지 결론을 내립니다. “환자분은 PDD즉 꽃잎결핍질환이 있습니다. 완치는 어렵지만 특별히 고안된 처방법을 이용하면 진행을 막을 수는 있습니다. 우리 동네 제초제 외판원이 무료 샘플을 몇 개 주고 갔는데 원하시면 한번 써보세요.”
매우 황당하고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이야기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이게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표준적인 인간의 기준을 만들어놓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뭔가 다양한 결핍의 꼬리표를 붙이면서 마치 그것을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꼬리표인양 포장하면서 결국은 보이지 않는 차별의 근거로 삼아갑니다.
자폐아라는 말도 사실은 그렇습니다. 관계를 닫고 자기 안에 갇혀 사는 사람을 자폐아라고 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제가 요즘 페북을 안하거든요. 그럼 페북 자폐아인가요? 그런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사람들은 어떤 영역에서는 전혀 닫고 살아가는데 저희 아내는 찬양 쪽으로는 아예 닫고 살아가는데 찬양자폐아고 어떤 사람은 수학 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데 수학자폐아고... 예술자폐아고, 독서 자폐아고 다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장애라는 말 자체가 사실 그렇습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걸림돌이라는 것입니다. 팔 한쪽이 불편한 사람이지 그게 걸림돌은 아닌 거지요. 걷기가 힘들어 휠체어가 필요한 사람이지 결핍은 아닌 거죠. 사람과의 대면적인 관계를 어려워하는 사람일뿐이지 자폐아가 아니죠. 특성과 기질상 오래동안 자리에 오래 앉아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일뿐이지 오히려 이런 친구들은 상상력이 뛰어납니다. 상상력이 뛰어난 친구들인 거지 주의력 결핍장애를 부각시킬 일은 아닌 거죠.
그래서 토마스 암스트롱이라는 의사는 표준적인 꽃도 표준적인 문화나 인종 집단도 없는 것처럼 표준적인 두뇌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고 말합니다. 뇌의 다양성은 생물다양성이나 문화와 인종의 다양성만큼이나 풍요롭고 그 스팩트럼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생명이든 모든 생명은 반드시 장점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이해하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의 결을 찾아 존재할 수 있도록 함께 할 수 있는 사회,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기질상 한 곳에 오랫동안 앉아있지 못하고 머물지 못하는 친구들은 대체적으로 대립유전자(새로움을 추구하는 유전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지속적인 이동을 시도한다는 거지요. 이런 특징을 지닌 사람들이 옛날 공동체 사회에서는 담당하는 역할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남태평양 제도에는 수없이 많은 섬들이 있는데 이들은 500개의 섬들에 흩어져 살기 때문에 한 섬에서 다른 섬으로 항해하는 능력을 높은 문화적 가치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항해할 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늘의 별자리를 외우라고 가르친다는 겁니다. 수시로 변하는 별자리, 수평선 위에 이는 작은 돌풍들, 물속의 어둡고 밝은 부분을 식별하는 능력 이런 섬세한 것들을 배우게 한다고 합니다. 이런 문화권에서 살아갈 때 대립유전자가 발달한 아이들의 능력 즉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항상 움직이고 끊임없이 지각 대상을 바꾸는 일들을 훨씬 잘 감당한다는 겁니다. 공동체 사회에서 다양한 결들의 능력이 필요한 시대, 그들은 어떤 결핍의 대상으로 몰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장점으로 공동체의 다양한 욕구를 채워가는 저마다의 능력자들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모든 삶의 능력을 기계나 자본에 외주화하고 오로지 책상에 앉아서 집중을 잘하며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학력과 시험으로 사람의 서열을 세우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결핍된 사람으로 여기는 우리 사회의 문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전통적인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은 언제나 손님을 맞는 역할이기보다는 손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음식을 준비하고 차를 내오는 주방의 자리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 일행을 집으로 맞이하고는 손님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기 위한 음식장만에 한창입니다. 그런데 너무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 면전 앞에 앉아서 말씀 듣기에 바쁩니다.
처음 결혼을 했는데 주로 제가 주방 담당을 하다 보니 제 손님이 와도 제 아내 손님이 와도 제가 주방으로 들어가요. 그러다 보니까 어떤 현상이 나타나냐면 제가 자리에 앉기 까지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질 않아요. 아내가 주방에 있으면 그냥 진도가 팍팍 나가는데 그렇지가 않은 거예요. 특히 손님이 여자인 경우는 안절부절을 못해요. 아내는 그냥 자리에 앉아 있는데 손님이 안절부절을 못하고 부엌엘 들어와요. 태생적으로 뭔가 음식을 장만하는데 여자가 부엌으로 들어가면 몹시 자연스러운데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매우 불편한 게예요. 본문도 그럴 수 있는 상황인 겁니다. 마리아가 남자였다면 이런 불평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제 아내 같은 여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부엌으로 들어가는 순간 모든 것이 복잡해지고 스트레스가 쌓이고 뭐부터 해야 할찌 모르지만 앉아서 토론을 하고 공부를 예기하고 재미난 일을 모색하라고 하면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생기가 돌고 활력이 넘치고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예수님이 그걸 봤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우리 모두가 함께 아름답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어디가 불편한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그리고 어떤 것으로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느끼고 어떤 것을 통해 에너지를 받는지... 그리고 그사람이 가장 아름답게 존재할 수 있는 적제 적소를 발견하고 찾아갈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도와주는 보다 넓은 품을 만들어주는 일입니다.
노자의 도덕경 2장에 보면 가짐도 못 가짐도 관계에서 생겨나고, 어렵고 쉬움도 서로의 관계에서 성립되고, 길고 짧음도 높고 낮음도, 앞과 뒤도 서로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법이라고 나옵니다. 본래 긴 것도 짧은 것도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존재 자체만이 있을 뿐이지요. 존재 자체의 비교적 상을 만들지 말고 그 존재가 그 존재로써 가장 적절한 곳에서 알맞게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존재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결들이 다양합니다. 하나의 기준으로 보면 넘치고 모자람이 있을 수 있지만 생명의 그물망은 존재의 차이와 다양함, 서로 다른 넘침과 모자람의 네트워트로 서로를 살려갑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를 위한 열린 마음과 함께 공존하기 위한 넓은 품입니다. 최근에 저희 교회에도 다양한 손님들이 방문하기 시작했고 그 다양한 사람들안에는 몸과 신체 뿐 아니라 신경 세포, 정신세계까지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시설을 만들고 그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격리해나가는 세상이 아닌 독특한 결대로 공존할 수 있도록 공존을 위한 공간, 공존을 위한 이해, 공존을 위한 생태적 노력으로 생명의 아름다운 질서를 잘 찾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