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24주일 091326 가해 강론
이사 50:4ㄷ-9ㄱ; 야고 2:14-18; 마르 8:27-35
창세기에는 한 전사(戰鬪士)의 노래 구절이 나오는데, 그 구절은 카인의 후손, 즉 카인의 증손자인 라멕의 노래입니다.
이런 노래 내용은 죄의 권세가 커짐에 따라 세상의 폭력성 또한 어떻게 증폭되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내용이 됩니다.
“나는 내 상처 하나에 사람 하나를, 내 생채기 하나에 아이 하나를 죽였다.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 (창세 4:23-24)
이처럼 처절한 복수심은 인류의 오래된 본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라멕의 방식을 거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490번의 복수 대신에 같은 수의 용서를 요구하십니다. 즉 주님께서는 일곱 번을 일흔 번 까지라도 용서하라 (마태 18,22)고 말씀하시며 완전히 다른 길을 제시하십니다.
가톨릭 교의적 관점에서 용서의 반대말은 단순한 참음이 아니라 내면의 분노와 원한 Resentment 입니다.
따라서, 용서한다는 것은 단순히 보복 행동을 삼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용서하는 화해의 신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원리를, 비록 일부만이라도, 이해한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의 본질은 용서의 한계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부터 정당하게 복수할 수 있는가’ 즉 ‘언제까지 복수를 유예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만약 베드로가 진정한 사랑으로 매번 형제를 용서했다면, 그 횟수를 세는 셈법은 언제나 ‘처음’ 혹은 ‘첫번째’에서 다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타인들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상처를 받아왔습니다. 가족, 친구, 원수, 그리고 낯선 이들까지도 저를 번거롭게 하고, 실망시키고, 해를 입히거나 분노하게 만드는 일들을 저질렀습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저는 그 상처들 대부분은 잊었고, 많은 이를 용서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용서하지 못했거나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상처들도 적지 않게 남아 있습니다. 어떤 죄업은 너무나 커서 용서하고 잊기가 불가능해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에 나오는 이 채무자에 대한 비유 말씀 이야기의 핵심은 임금이 그 종에게 내릴 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신하와 그 가족을 모두 다 노예로 팔아 넘긴다 해도 그 엄청난 빚을 다 갚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 말씀 이야기의 본질은 바로 임금이 보여 준 ‘용서의 비할 데 없는 대범함’에 있습니다. 측정할 수 없을 만큼 큰 죄는, 측정할 수 없을 만큼 거룩하고 넉넉한 용서와 마주하게 됩니다.
여기서 임금은 당연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그 신하는 누구일까요? 그 신하는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내용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제가 하느님께 가공할 만큼 엄청난 죄를 지었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제가 남들을 용서할 수 없거나 용서하려 하지 않는 죄 중 일부는 정작 가해자의 마음속에서는 그리 크지 않거나 심지어 잘못조차 아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저 역시 깨닫지 못했거나 의도하지 않은 채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음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제가 하느님께 지은 죄도 스스로 깨닫지 못할 뿐, 그 죄로 인한 빚은 만 달란트에 달하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비유 말씀의 핵심은 죄의 거대함이 아니라, 용서하시는 사랑의 위대함에 있습니다.
저에게 얼마만큼의 용서가 필요하든지 간에, 저에게는 무한히 사랑 가득한 용서가 이미 마련되어 있다는 내용이 바로 오늘 비유 말씀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 말씀의 내용은 임금의 용서로 끝나지 않습니다. 무한한 용서를 받은 그 신하가 자신에게 고작 몇 달 치 봉급에 해당하는 돈을 빚진이와 마주쳤을 때, 그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내용은 바로 저에 대한 이야기 내용입니다. 나를 향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은 곧 내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저의 유한한 사랑은 이웃을 향해 제한된 용서만을 건네거나, 때로는 단 한 조각의 용서조차 내어주지 못한다는 내용인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의 갈등과 고뇌가 시작됩니다.
이 비유 말씀이 전하는 최종 메시지는 하느님의 무한히 용서하시는 사랑을 제한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바로 그 사랑을 닮으려 하지 않는 ‘저 자신의 완고한 마음’ 뿐이라는 사실에 경종을 울려주는 메시지입니다.
심지어 저는 주님의 기도를 올릴 때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청하며, 제 스스로 그 한계를 정해 달라고 기도하곤 하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이렇게 올리는 저의 기도는 마치 빠져나갈 수 없는 딜레마 (Catch-22)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용서를 받았기에 남도 용서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정작 내가 먼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나도 용서를 받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역설을 벗어나는 길은, 용서하는 것과 용서받는 것이 순서대로 일어나는 두 개의 별개 행위가 아님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시고, 그 다음 제가 용서하고, 다시 하느님께서 용서하시는 식의 단계적 진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하심과 내가 타인을 용서함은 하나의 흐름 안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일방적인 순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교감하는 영적 체험이 존재할 뿐입니다. 하느님의 용서와 나의 용서는 마치 아름다운 춤과 같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용서하시는 손길과 나의 용서하는 마음이 거울처럼 서로를 영조(映照)하며, 거룩한 조화 속에서 함께 움직이는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신부님 이번달 등산 21일 가능할까요?
28일은 행사가 있어서요.
아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아멘 🙏
신부님
은혜로운 말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응원합니다 신부님
신부님♡
감사합니다 ~♡
아멘. 🙏
아멘!아멘!
하나의 흐름 안에서~~
아멘
신부님
감시드립니다
환절기에 건강하세요
율리아 올림
아멘!
감사합니다 신부님
건강하세요 (스타)
안녕하세요?
어느듯 시원한 바람이
부네요
환절기에 건강조심하세요
늘 행복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늘감사합니다 오늘도주님과함께건강하시고행복하세요
삼성산성령기도에 다녀왔습니다 1박2일
감사합니다
신부님
항상 영육간에 건강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정희욱 신부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영육간에 건강하시길 기도 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기쁨뿐 만 이니라
슬픔도 사랑의 일부입니다
마치 우리의 삶이 그런것 처럼~~~
내게 주어진 모든것들을 사랑할수 있는
하느님 맘에 드는 하루되길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