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 수필의 역할과 과제
方 旻
1. 지성 수필이라 명명할 때는 전제가 있다. 지성이란 개념과 수필이란 장르가 어울리는 단어 조합인가 하는 점이다. 지성을 확대하여 지성인이라 하면, 지성인 수필가란 호칭도 있을 법하다. 수필에 어떤 관형사를 붙였을 때 장점은 개념이 명확한 반면 그 기준의 객관성 확보가 어렵다. 가장 확실한 분별은 2분법과 4분법이 있다. 지성 수필 상대는 반지성 수필이거나 지성 상대어인 감성을 내세운 감성 수필이 있을 수 있다. 4분법으로 가면 지성 수필과 감성 수필, 감성이 약한 지성 수필과 지성이 미약한 감성 수필이다. 그러면 어떤 수필가를 지성 수필가라 칭하면 4분법을 따라서 감성이 약한 지성 강조형 수필가이다. 지성과 감성은 인간에겐 정도 차이는 있지만 두 성향이 존재한다. 지성이 충일하여 감성이 제로인 사람은 없다고 보면, 지성 우세 수필가와 감성 우세 수필가로 양분하면, 2분법과 4분법을 둘 다 만족시킬 수 있는 구분이다. 이런 도식화에는 지성 수필이란 명명이 작가 기준 구분인가. 작품 중심 기준인가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기준은 글에 우선 해당한다. 지성인이 아닌 사람도 지성 수필을 쓸 수 있고, 지성인도 감성 수필을 쓸 수 있다. 지성 수필이냐 감성 수필이냐의 판별 기준은 작가에게 두기보다 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욱 온당하다 하겠다.
2. 수필을 위에서 조촐하게 분류한 대로 보자면 민명자 작가 《가면과 거울의 이중주》는 지성 수필 계열로 꼽을 수 있겠다. 나아가 작가도 분명한 지성인인데다 그가 쓴 글도 지성 수필이라서 명명에 부합한다. 지성인 기준도 따져보면 모호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통상 기준으로 보면 대학 수료 여부로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민 작가는 대학원을 수료한 문학박사 학위자라 이 기준을 훨씬 상회하니 지성인이라 판단하는 게 한 치 오차도 없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쓴 수필이다. 왜 《가면과 거울의 이중주》에 실린 글을 지성 수필 계열로 볼 수 있는지 또는 지성 수필의 문학 역할이 무엇인지 나아가 지성 수필에 걸어보는 기대가 어떠한지 작품 안으로 들어가 보자.
<돼지가 꿈꾸다>는 영화 「옥자」 얘기다. 4개의 장면 표시 부호“#”로 분리한 옴니버스식 구성이다. 분리된 외형과 달리 내면 맥락은 세태 비판이다. “#돼지.1”에선 “반려견이나 반려묘만 있고 반려돈은 없으란 법이 있나요?”라고 인간의 동물 차별을 지적한다. “#돼지.2”에선 돼지에 대한 인간 편견을, “#돼지.3”에선 돼지의 색다른 이미지를, “#우리. 돼지들”에선 ‘황금돼지 해’를 맞이하며 “공인(公人)”의 비뚤어진 인식을 비판하며 희망을 말한다. 다음 <가짜 뉴스입니다>는 역시 같은 방식으로 5개 이야기로 구성한다. 소 제목을 보면 바로 이 글이 목적하는 주제를 알 수 있다. “#가짜 뉴스일까요? #진짜 뉴스일까요? #유행가 가사처럼 #가짜 뉴스면 좋겠습니다 #진짜 뉴스면 좋겠습니다” 반어적 풍자로 세태 여러 문제를 드러내 “진짜가 가짜로 둔갑하고 가짜가 진짜로 칼춤을 추”는 세상에 대해, 사회의 모진 악행에 대해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화자가 “정의와 진실이 살아 있고, 인간과 사회의 품격이 고양되고, 존엄한 가치가 구현되는 이상사회”를 희망하는 이야기다.
3. 이런 글은 소위 지성의 눈으로 보아야 알게 되는 것들이다. 사회 제 현상을 관찰하고 그 전후 맥락과 표리表裏를 분석하고 해석하여 나름 사유하여 결론을 짓는다. 이런 제반 과정은 지성의 힘을 쓰지 않으면 어렵다. 지성이 동반하지 않으면 표피 문제만 보거나 깊이 감추어진 진실을 밝혀내기 어렵다. 즉 진짜와 가짜를 판별하지 못하거나 그곳에 내재하는 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같은 사태를 보고도 다르게 해석하여 내면 진실을 파악하고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지성의 눈으로 가능하다. 지성의 특징은 무분별한 즉각 행동보다 사색하는 능력과 문제를 해결하는 논리에 근거한 결론을 유도하는 능력에 있다. 함부로 말하고 쉽게 행동하지 않지만 이런 논거에 기반한 결론을 얻으면 꾿꾿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지구력도 만만치 않다. 이런 특징이 수필이란 글을 만났을 때는 위와 같이 드러난다.
4. 이런 방향의 글은 소위 신문과 잡지 칼럼에서도 만날 수 있다. 칼럼니스트 대부분은 지성인이다. 그러나 그들은 수필을 쓰지 않고 산문 방식으로 다룬다. 여기서 칼럼도 수필 범위에 포함시키도 하지만 필자는 엄연히 다른 것으로 인식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수필은 문학 장르의 하나이지만, 칼럼은 신문 기사와 같은 산문이란 점이다. 수필은 산문과 다른 구조와 구성을 지니고 목적하는 바와 지향하는 방향 모두 다르다. 당연히 표현과 전달 방식도 수필은 산문과 다르다. 대표적 차이는 수필은 독자에게 공감과 감동을 지향하나 산문은 동의와 설득을 목표로 한다. 때문에 동일한 제재라도 다양한 측면에서 다른 방식으로 구성하고 표현하며 전달한다. 혹간 이런 점에서 이어령은 지성 칼럼을 주로 썼고, 유안진과 신달자는 감성 산문을 많이 썼다. 모두 지성인이지만 지성 수필을 쓰지 않았다. 이어령은 타자 중심(화자 배제)의 지성 산문을 쓴 반면, 민명자는 자아 중심(화자 포함)의 지성 수필을 쓴다.
5. 지성 수필의 특징 중 하나는 체험 스토리를 쓰는 글이 아니라 관찰과 사색의 결과를 글로 짓는다는 것. 이것을 대표하는 글, 소위 글자와 단어 수필을 보자. <단어의 무게>, < 하필과 아직>, <기역을 기억하다>, <기역을 기역하다(2)>, <니은과 노닐다>, <디귿과 돌고 돌아>, <농담과 진담 사이> 등이다. 이 7편은 민명자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시를 공부하고 쓰기도 하는 작가로서 언어에 대한 남다른 인식이 있다. 그 예리함과 깊이를 글로 다루어서 지성 수필의 한 장을 연다. 주요 내용은 인간과 언어의 본질 관계에 대한 문학인의 깨달음과 인식(<단어의 무게>)을 보여주며 대사회적 대타적 의식의 세계(<하필과 아직>)를 펼친다. 말하자면 언어의 미세한 그물로 세상과 인생 의미를 낚아내는(<기역을 기억하다>) 일이다. 단어를 콕 집어 끝없는 상상 여행(<기역을 기억하다2>)에 나서거나 말놀이하고 눙치며 자아비판과 자기 응시에 이어 체념하고 처지를 수긍(<농담과 진담 사이>)하기도 한다. 이런 말 놀이식 글자 유희 저변에는 세상 비판 시선의 흐름이 있다. 지성인다운 사고의 흐름을 보여준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한 지식과 그로 얻은 통찰로 세상을 바라보며 문제를 발견하고 그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을 풀어 보이는 식, 소위 지성인의 상식선 행위다. 지성인은 한 사회의 안테나이며 일반인에겐 보이지 않는 문제를 찾아내는 더듬이를 가진 특수한 존재다. 다만 이것을 산문으로 쓸 것인가, 수필로 풀어낼 것인가 차이가 있을 뿐이다. 민명자는 후자다. 그녀는 문학자이고 수필가이기 때문이다.
6. 문학계에서 지성 수필가에게 기대하는 바는 이중적이다. 앞에서 살핀 바에 맞게 지성 수필가는 지성의 힘으로 일반인이 보지 못하는 진실을 밝혀내 주길 바란다. 이에 대한 성실한 반응은 이미 앞에서 살핀 바대로 민 작가는 훌륭히 제 역할을 감당했다. 다음에 기대하는 바는 문학의 본질 기능에 관한 것, 쾌락 효용에 관한 기대다. 문학의 양대 기능으로는 교시와 쾌락을 꼽는다. 지성 수필은 교시 기능은 충분하여 제 역할을 완료한다. 여기에 쾌감을 주기 위한 오락적 재미를 갖추는 것 또한 문학의 한 갈래인 수필로서 요구하는 본질 기능적 과제다. 그렇다면 민명자의 지성 수필이 과연 이것을 담보한 것인지에는 아직 확답하기 조금 이르다. 만일 이 양면을 융화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완전체가 될 수 있다. 《가면과 거울의 이중주》가 남기는 과제가 아닐까 한다.(네이버 블로그- 방교수의 수필 강의, <수필 평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