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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와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기쁘고 반가우며,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만남 뒤에는 항상 따라다니는 이별을 어쩌란 말인가. 만남은 무엇이고 이별이란 무엇인가.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영원히 내 곁에 있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인가.
‘회자정리거자필반(會者定離去者必返)‘란 고사성어가 있다. ‘회자정리’란, 만난 자는 분명코 헤어진다는 말이 되겠다. 그렇지만 만남 뒤에 이별이 올지라도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속담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보다, 너무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야 하는 절박한 심정에서 그 아픔을 달래기 위해 ‘거자필반’이라 했다. “헤어진 사람은 언제가 반드시 돌아오게 된다.”라는 사자성어가 마음에 간다. 만난 자는 반드시 떠나고,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하였으니, 만남과 헤어짐에 너무 집착하거나 매달리지 말라는 뜻일 게다.
이러한 언어의 중심에는 누구나 태어나면 불가항력적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에서 오는 위안과 대책이라 보인다. 여기에 대한 역사적 근거가 있다. 이집트 고대 무덤 곧 4,300년 간 굳게 닫혀 있던 석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미이라의 모습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4,300년 간 사자(死者)는 금박으로 곱게 덮여 너무도 편안하게 수면(睡眠)에 들어 있었다. 발굴 당시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오랜 세월 동안 무덤 속에서 어떻게 하면 저렇게 단정하게 흐트러짐 없이 온전하게 잘 보존될 수 있을까?”란 의문이었다. 또 하나는, “무슨 연유로 시신을 그렇게 소중히 잘 간직하려 했던 것일까?”란 의문이었다.
하여 고고학자들이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면밀히 분석을 통하여 조사한 결과, 현대 과학으로도 따라가기 어려운 치밀한 방부처리와 보관 공법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한 가지 관심을 모았던 것은 “왜 시신을 소중하게 오래 잘 매장하려 했던 것일까?”였다. 이 또한 밝혀진 해답은 “사람이 죽으면 다시 돌아온다[幻生]”라는 철저한 믿음이 있었기에 사자(死者)를 정성스럽게 잘 보관하려 했던 것이고, 그 당시 관습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근거는, 미개사회의 풍습이나 믿음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 그 관습은 꾸준히 이어와 금세기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장례의식의 시발점이라 볼 수 있는 이집트 장례문화 속에는 다분히 환(생幻)生이란 의미를 담고 있어서 여러 종교의 신앙에서도 믿음의 핵심이 되어왔고, ‘재림’이나 ‘부활’, ‘환생’이란 동기부여의 단서가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사후 영생과 극락, 천국, 지옥, 구원도 이러한 맥락에서 발생하였을 것이다. 그 때문에 생(生)이 있다면 사(死)가 따르는 것은 분명한 일이고, 죽음 뒤에 모든 것이 소멸된다는 단멸론(斷滅論)이 있는 대신, 대부분 다시 새 생명으로 돌아오는 것이 형이상학적이긴 하지만 일반적 믿음이 되어왔다. 이것은 생물학적 근거나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아도, “우주 궤도 속에 인(因)과 연(緣)에 의하여 만물이 생성하고, 멸하고(흩어짐), 다시 생성의 반복 현상을 지켜보면서 어느 때고 체감하는 만유의 법칙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렇듯 만남과 헤어짐은 자연계에서 늘 벌어지는 현상들이건만 인간 사회에서의 생활 형태와 관념은 단순하지만은 않다. 자연의 순리에 벗어난 인위적 생성과 소멸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개인의 생각과 행동에서 일어나는 이념과 분별과 차별 속에서 사람 관계가 설정되어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고, 만났다가도 단숨에 인연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미봉책의 냉정함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기에 만남이라고 해서 큰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 또한 인간의 계략일 수 있다.
▲ 홀로 상념에 잠긴 청둥오리(사진, 일취스님)
보라! 우리가 60 평생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나와 뜻을 같이하고 살아온 동반자가 몇이나 될까? 그 가운데 내가 남에게 배신당하거나 버림을 받은 사례도 있겠지만, 나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일지라도 내 맘에 차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싫어지기 때문에 내친 사람이 한두 사람이겠는가. 이것은 너나 할 것 없이 이권이 아니면, 단순한 자기 위주의 주장이나 부정적 감정에서 발생하는 욕심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만남의 형태를 보면 극적인 만남, 천생연분이라고 하여 인생을 같이할 반려자, 그리고 서로 공존공생해야 할 교류 상대, 그다음 친구, 이웃, 직장동료 그리고 한번 스쳐 지나가는 만남을 포함한다면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만 이러한 소중한 만남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한 사람 한 사람 떠나가고 있다. 내 스스로 문을 닫고 손을 놓고도 있다.
늦가을 숲속 나무들이 나뭇잎을 한 잎 두 잎 떨구듯 말이다. 사랑하는 부모, 형제, 다정한 친구, 이웃할 것 없이 잡았던 손을 하나씩 놓고 기약 없는 이별을 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을 불가(佛家)에서는 인생팔고(人生八苦) 가운데 애별이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괴로움)라 하였다.
고려 시대 서정문학의 거장이자 대 문장가인 정지상은 이별의 슬픔을 시(詩)를 통해 이렇게 노래했다.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비 갠 언덕 위엔 풀빛 푸른데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남포로 님 보내는 서러운 노래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 물이야 언제 마르리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해마다 이별 눈물 보태는 것을.
사실 누구나 이별에 대한 슬픔과 애틋함을 시를 쓰거나 노래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어떤 쓰라린 이별일지라도 잠시 머물 뿐, 차츰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예사다. 그러기에 나 또한 언제 얽히고설킨 만남의 수림 속에서 내팽개쳐질지 모를 일이다. 이것이 인생사다. 또한 만남과 헤어짐이란 흐르는 물과 같기에 어느 때 어떤 사람과 만나고 어떻게 헤어질지 예측 불가한 상태에서 흘러가는 세월에 그저 몸을 맡기고 살아갈 따름이다.
이러한 인생사를 뭇사람들은 인생극장(人生劇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가 매일 보는 텔레비전 드라마 속에서도 만남과 이별이 거지반 차지한다. 이와 같기에 우리 삶은 연극(演劇)이라 표현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할지라도 어쩌다 의견과 생각과 방법이 다르면 불신과 대립으로,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여 끝내는 헤어지는 것이 예사다. 이러한 이별들의 형태가 한두 가지이겠는가. 이별은 어머니 배 속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시작되었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적으로 무수히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만남은 즐겁고 기쁜 일이지만, 이별만큼은 떠올리기도 싫은 슬프고 괴로운 일이다. 이러한 이별들이 살아오는 동안, 살아온 만큼 인생의 계급장이 되어 남게 된다. 곰곰이 헤아려 보아라. 내가 살아오는 동안 내 곁에서 떠나간 다정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러나 지금은 내 곁에, 진정 마음 터놓고 정을 나눌 수 있는 지인이 몇 명이나 되는지…. 흘러가는 세월 속에 모두 다 묻어져 가고, 나머지 눈엣가시가 된 사람마저도 끝내 떠나고 말 것이다. 나 또한 모든 인연 다 끊고 홀연히 사라져갈 것이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란 노래를 보면 이별이란 글이 애틋하다.
또 하루가 멀어져 간다. 매일 우리는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우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오늘 아무리 즐겁고 행복한 하루였을지라도 해가 저물면 어둠 속에 서서히 묻히고 내일 해가 뜨면 다른 모습으로 하루가 다가온다. 어제 그렇게 소중하게 아끼던 물건도 오늘 보면 다르게 보인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 것이 하나도 없다. 흐르는 시간 속에 모두 변해가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마저도 언제까지 잡아둘 방법이란 없다.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한다. 애써 붙잡아 두려는 생각은 부질없는 일이다.
오늘 아침 눈을 떠보니 어젯밤 툇마루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찻잔을 기울이던 도반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토록 다정한 도반들을 다시 또 얼굴을 못 보게 될지 모를 일이다. 만남도 헤어짐도 꿈과 같다.*
일취(一翠)❘철학박사
『해동문학』 (시). 『에세이포레』(수필) 등단. 해동문인협회 회원, 에세이포레운영이사,
청정심원 선원장
저서 : 《붓다와 108유희》,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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