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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story 8
칠흑 같은 밤에도
19세기에 살았던 아주 신심이 깊은 그리스도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말년에 중병에 걸려 곧 죽을 날이 임박했는데도 불구하고 주변 친구들을 아무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가 누워 있는 곳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는데, 유독 법률가이자 정치가였던 한 친구는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그 친구가 중병에 걸려 있는 그를 찾아가 안쓰럽게 바라보면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만나지 않으면서 꼭 나만을 만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은연중에 자신이 그 시대의 힘 있는 법률가요, 정치가여서 만나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곧 죽는다네. 그러면 이전까지 만나온 수많은 친구들은 천국에서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모르고 하느님도 모르는 자네는 이제 헤어지면 영원히 만날 기회가 없지 않나. 그래서 만나자고 했네.”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그 친구는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오해를 깨닫고 돌이켜 하느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살다보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해는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도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은 우리 인생들을 오해하지 않으십니다. 창조 이래 지금까지 이 땅에 존재했던 수많은 인생들을 향해서 그분이 오해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 인생들이 하느님을 오해한다는 것이지요. 과거 역사를 들춰보면, 하느님을 향한 인생들의 오해의 역사였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인간들은 자신들의 짧은 생각을 기준으로 하느님을 오해했던 적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인생들의 오해 속에서 칠흑 같은 밤을 지새운 적이 많으십니다.
카데스 바르네아에서의 어느 날, 그날도 하느님께서 인생들에게 큰 오해를 받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고 아끼셔서, 모세를 통해 노예로 살고 있는 그들을 탈출시키셨습니다. 보듬어 안아서 이집트에서 광야로 데려오셨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만큼, 하느님께서는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정성스럽게 보살피시며 이집트를 탈출시키셨습니다. 그리고 1년 동안 그들을 시나이 산에 머물게 하시면서, 인생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것인지, 하느님과의 바른 관계가 무엇이며 어떻게 그 관계를 맺어가야 하는지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와 같은 하느님의 진심을 이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탈출기 후반부에 있는 주님의 율법과 계명과 말씀, 그리고 레위기 전체의 말씀을 받아 누리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들은 한결같이 사람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답게, 행복하게 하느님 안에서 살 수 있는가에 관한 내용들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가슴에 담은 그들이 드디어 시나이 산을 떠나 그들과 그들이 후손이 살아야 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진군해 가던 중 카데스 바르네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제 곧 가나안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단단히 무장하고 있는 일곱 부족들이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먼저 정탐한 후에 그곳을 점령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하게 되고, 하느님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셔서 정찰대를 뽑으라 하십니다. 여호수아와 칼렙을 비롯해 각 지파에서 대표로 뽑힌 열두 명의 정찰대원들은 40일 동안 가나안 곳곳을 샅샅이 살펴보게 됩니다. 이윽고 정찰은 무사히 끝났으나 문제가 생깁니다. 그 문제는 다름 아니라, 그 열두 명의 정찰대원 중 열 명이 가나안에 살고 있는 아낙 자손이 워낙 힘이 센 자들이라서 그들과 싸우면 승산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의견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한 것입니다.
물론, 아낙 자손과 자신들을 비교해 볼 때 객관적으로 전력이 차이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자신들과 이집트인들을 비교하면, 이집트인들은 상상츨 초월할 정도로 힘 센 자들이고 자신들은 그들 밑에서 수백여 년 동안 노예로 지냈어야 할 만큼 힘이 없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집트 탈출은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과 그분의 이끄심으로 이루어진 일이었고, 이곳 카데스 바르네아에 오기까지도 그분의 큰 도우심 가운데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이미 1년 동안이나 경험해 온 자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낙 자손과 비교해보니 자신들은 힘이 없고, 그러므로 그들과 싸우면 분명 지고 말 것이기에 가나안으로 진군할 수 없다고 의견을 모은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모세와 여호수아, 칼렙 등 몇몇 소수를 제외한 60만 명 전체가 모두 그 판단에 동의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진군을 포기하고 이집트로 돌아가기로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그들의 능력만 가지고 가나안으로 진군한다면 분명 실패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판단이 옳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과 함께하고 있으며, 하느님과 함께 가나안에 진군하는 것입니다. 그 경험을 백 년 전, 천 년 전에 한 것이 아니라 불과 1년 전에 했으며, 지난 1년의 시간 동안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깊은 만남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느님이 이집트에서 잘 살고 잇는 자기들을 이끌어내어 광야에 머물게 하다가 가나안 족속들과 싸움을 붙여서 다 죽이려 한다고 하느님을 오해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정말 지독한 오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그런 오해를 받으시며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보내셔야 했습니다. 얼마나 속상하고, 아프셨을까요? 어리석은 몇몇 사람들이 철모르고 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시대를 이끌 수 있는 굵직한 지도자 열 명이 앞장서고, 모든 백성들이 하나같이 그들의 판단에 동의하고 나올 때,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하느님이 그들을 사랑하고 보듬어 안아 여기까지 이끄셨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하느님이 자신들을 가나안과 싸우게 해서 다 죽이려 한다는 기가 막힌 오해들을 쏟아놓을 때, 속이 얼마나 상하셨을까요.
그런데 그처럼 지독한 오해를 받으신 그 칠흑 같은 밤에도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다음 날 아침에 먹을 만나를 내려주고 계십니다. 벌써 1년 전부터 그들에게 주기 시작하셔서 안식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밤마다 하늘의 문을 열어 소복이 내려주셨던 그 하늘의 양식을 그 밤에도 어김없이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낮에 그토록 하느님을 원망하며 대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이 든 그 시간, 속상한 마음 쓸어내릴 길도 없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도 또 다시 소복소복 만나를 내려주고 계십니다.
이 후로 40여 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떠한 어리석은 행동을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매일매일 쉬지 않고 만나를 내려주십니다. 달리 양식을 변통할 수 없는 광야라는 한계상황 가운데 처한 이스라엘을 위해 쉼 없이 만나를 공급하심으로써 그들의 생명을 보전하여 주십니다. 오해를 받아 칠흑 같은 밤을 보내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들을 끌어안고 용서하며 사랑하시는 장면을 읽을 때마다 그 크신 사랑 앞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호세아는 아주 인품이 훌륭하고 성실해서, 그 시대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명으로 그는 자신과는 정반대되는 인격의 소유자인 여자 고메르를 만나 결혼하게 됩니다. 이 여자는 남편의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고귀한 남편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결혼하기 전의 삶의 방식을 쉽게 벗어버리지 못합니다.
어느 날 보니 고메르가 남편 아닌 다른 남자를 따라 집을 나가버리고 없었습니다. 더 이상 아내를 찾아 나서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까지 그녀를 진실하고 소중하게 사랑했던 것처럼 순수하게 다시 사랑하라고 명하시며, 고메르를 찾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호세아가 아내를 찾으러 갔더니 함께 있는 그 남자가 은 열다섯 세켈을 주고 고메르를 데려가라 합니다. 속이 말이 아니었겠지만, 호세아는 은 열다섯 세켈과 보리 한 호메르와 한 레텍을 주고 자신의 아내를 데려옵니다.
그처럼 기가 막힌 상황을 당하며 호세아는 알게 됩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고메르와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며 호세아가 고메르를 향해 품고 있는 것 같은 마음을 품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난 2백여 년 동안 하느님의 품을 떠나 마음대로 바알과 아스타롯 등 이상한 신들을 섬기며 엉뚱한 길로 살아왔을 때, 하느님께서 얼마나 속상하셨을지, 그 마음을 호세아가 헤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난 2백여 년 동안 인생의 행복과 풍요가 바알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바알을 숭배하는 잘못된 길로 달려왔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하느님을 오해해 온 것입니다. 2백 년은커녕 한 순간만 오해해도 바로 매를 들어서 주저앉혀야 하는데 그 긴 세월을 오해받아 오셨으면서도 우리 하느님은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호세아를 보내셔서 제발 돌아오라고 외치시며 사랑을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호세아서를 통해서 그 긴 세월 동안 속상해하신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눈물을 만납니다. 칠흑 같은 밤이라는 말로 표현하기 민망할 정도로 그 답답한 세월이 너무 길었습니다. 그런데 긴 세월 동안 기다리신 하느님께서 다시 한 번 순수한 사랑을 쏟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이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연약한 인생들을 끝까지 놓지 않으시고 안고 또 안아 주시는 분, 그분이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하느님의 사랑의 결정체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삼 년 동안 갈릴래아와 예루살렘, 그리고 유다 인근을 뛰어다니시며 인생들을 보듬고 안고 사랑하십니다. 그 내용이 기록된 책이 4복음서인데, 우리가 정직하게 그 4복음서를 펴서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인생들을 친히 사랑하기 위해 얼마나 온몸을 바치셨는지 세세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 년의 공생활을 마친 우리 예수님께서도 그 말미에 인생들에게 큰 오해를 받으십니다. 그렇게 사람 사랑하느라 바쁘게 살아오신 예수님을 대사제와 율법 학자들이 선동하고 벳사이다 들녘에서 생선과 보리빵을 받아먹었던 민중들까지 합세해서 오해해 버리고 맙니다. 그가 하느님을 모독했고, 민중들의 삶을 피폐한 상황으로 몰아갔으며, 자신들의 평화를 지켜주는 로마를 향해 저항하라고 선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오해해서 아무 죄 없으신 그분을 십자가에 목 박아버립니다.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쏟으시는 그 순간, 어두워서 한치 앞도 안 보이는 그 칠흑 같은 순간에 우리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잘못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독한 오해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는 매일 만나를 통해 먹을 것을 공급하셨습니다. 한두 달도 아니고 2백연 년 동안이나 지속적으로 북이스라엘이 잘못된 길을 감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참아 기다려주셨습니다. 이제 더 나아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고통의 순간에도 인간들을 위해 대신 용서를 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오해받는 순간까지라도 끊임없이 인생들을 보듬고 안으시는 사랑. 나를 향한 그 크신 사랑.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그 큰 사랑이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있는 친구들에게
하느님이 계심을 깨달을 수 있는 한 마디의 말,
“영원한 생명을 모르고 하느님도 모르는 친구에게
이제 헤어지면 영원히 만날 기회가 없지 않나. 그래서 만나자고 했네.”
“그분의 마음 속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하느님의 사랑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연약한 인생들을
끝까지 놓지 않으시고 안고 또 안아 주시는 분, 그분이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