렬전(烈傳):《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온달조(溫達條)에 따르면
온달은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눈 먼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얼굴이 우습게 생겨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시 고구려의 평원왕(平原王) 고탕(高湯)에게는 어린 공주가 있었는데 울기를
잘하여 놀리느라고 ‘네가 울기를 잘하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 보내야겠다’고
항상 말하였는데 공주의 나이 16세가 되어 왕이 고씨(高氏)에게 시집 보내려 하자
공주는 ‘임금은 식언(食言)할 수 없다’고 하며 궁중을 나와 온달을 찾아가 부부의
연을 맺고는 궁중에서 가지고 나온 패물을 팔아 집과 밭을 마련하고 말을 사서
준마로 키웠다.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3월 3일이 되면 왕이 신하 및 병사들과
더불어 사냥을 하였는데 이에 온달이 공주가 키운 말을 타고 참가하였다.
말을 타는 품이 언제나 남보다 앞서고 잡는 짐승도 많아 평원왕이 그를 불러
그 이름을 물었는데 그가 공주와 부부의 연을 맺은 온달 임을 알자 매우 놀랐다.
얼마 후 후주(北周)의 무제(武帝) 모용외(慕容廆)가 고구려를 침공하였는데
이에 평원왕은 친정하여 북주(北周)의 군대를 배산(拜山)에서 맞아 싸워 이를
격퇴시켰는데 이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큰 공을 세우니 왕이 기뻐하여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 하고 작위를 주고 대형(大兄)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590년(영양왕 1) 평원왕이 붕어하고 영양왕(嬰陽王) 고원(高元)이 즉위하자 온달은
신라에 빼앗긴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이서(以西)의 땅을 회복하겠다고 출정을
자원하였는데 신라군과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신라군의 화살(流矢)에 맞아
넘어져서 죽었다. 장사를 행하려 하였는데 상여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갑시다!”라고 하니,
그제서야 상여가 움직여 장사 지내니, 영양왕이 이를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고 한다.
사론(私論): 온달의 처(妻)인 공주는 평원왕(平原王) 혹은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
고탕(高湯) 딸이므로 보통 평강공주(平崗公主)라고 부르는데 이 평강공주와
온달의 나이 차가 대략 7살 정도는 되어야 어릴 적에 공주가 울 때 온달에게
시집 보내겠다는 말이 가능해진다. 577년 북주의 무제 모용외가 침공해 올 때
온달이 활약하므로 적어도 그보다 5년전쯤에는 둘이 부부가 되었다는 가정하고
평강공주가 대략 16세를 전후로 혼례를 올렸다는 보면 평강공주는 대략 555년
전후에 출생한 것이 되므로 이를 근거로 온달의 출생 년도를 550년 이전으로
추정하였으며 사망 년도는 평원왕이 붕어하고 영양왕 고원(高元)이 즉위한 이후에
온달이 자원하여 출정하였으므로 590년 10월 이후 겨울에 출정하여 해가 바뀌기
전에 전사한 것으로 추정하여 590년으로 기재하였다. 하지만 이듬해인 591년
봄에 출정하여 그 해에 전사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므로 590년의 뒤에
별도로 ‘물음표(?)’를 기재하였다.
코드번호: Goguryeo_0042
한글 이름: 온군해
영문 이름: On Gun-hae
한자 이름(漢字名): 溫君解
원어발음(原語發音): 온군해
생몰년(生沒年): *(580?)~648
가족관계(家族關係):
아버지(父)- 온달(溫達)?
어머니(母)- 평강공주(平崗公主)?
배우자(配偶者)-?
아들(子)- 온사문(溫沙門)?
그 외(其他)- 고탕(高湯)=평원왕(平原王)=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이 어머니인
평강공주의 아버지로 외할아버지에 해당한다.
고원(高元)=영양왕(嬰陽王)이 어머니인 평강공주의 오라버니로 외숙부(外叔父)이다.
고성(高成)=고건무(高建武)=영류왕(榮留王)이 어머니인 평강공주의 남동생으로
외숙부(外叔父)이다.
단 어머니와 배다른 형제였을 가능성이 있어 정치적으로는 반대파였을 가능성도 있다.
직위(職位): 고구려에서의 직위는 알 수 없음(대형[大兄]?).
신라에서는 대아찬(大阿飡)는 추증(追贈) 받았다.
특이사항(特異事項):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설화의 주인공인 온달(溫達)의 아들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신라쪽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렬전(烈傳): 648년 진덕여왕(眞德女王) 금승만(金勝曼)의 명을 받고 당(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군사원조를 청하고 돌아오는 금춘추(金春秋)를
경호하고 귀국하던 중 고구려 군사에 포위되자, 기지로 금춘추를 작은 배에 태워
피신시키고, 그의 의관을 바꿔입고 사신 금춘추로 위장하여 결국 고구려군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금춘추는 무사히 소임을 다하고 돌아와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대아찬(大阿飡)을 추증하였다.
사론(私論): SBS 대하(大河)드라마[Drama]‘연개소문(淵蓋蘇文)’에서는 온사문의
아버지로 ‘온군’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온사문의 아버지의 이름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확인을 할 수 없다. 아마도 작가가 임의로 지어낸 이름이거나 신라의
온군해(溫君解)를 온사문의 아버지로 오인 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현재 온달(溫達)을 시조로 모시고 있는 봉성(鳳城) 온씨(溫氏)가
‘온씨(溫氏)는 중국(中國) 주(周)나라 성왕(成王)의 아우로 당(唐)에 봉해진 숙우(叔虞)의
12세손 소후(昭候)가 그의 아우 사(師)를 온(溫)에 봉하고 평원(平原)에 도읍을 정하게
하니 온씨의 성(姓)이 여기서 비롯 되었는데.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고구려(高句麗) 때 평강공주(平岡公主)와 혼인하여 평원왕(平原王)의 부마(駙馬)가 된
온달(溫達)로부터 온씨의 혈통(血統)이 시작되어, 신라 진덕왕(眞德王) 때 온군해(溫君解),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회양 부사(淮陽府使)를 지낸 온수(溫粹)로 이어져 왔다.’고
봉성(鳳城) 온씨(溫氏)의 계보에 분명히 온군해를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말이
사실이라면 온군해는 분명 온달의 후손인 것이고 시기상으로 보아 온사문(溫沙門) 보다
앞 세대임으로 온달의 아들로 보아야 옳고 자동적으로 온사문은 온군해의 아들 뻘이 된다.
만약 이 모든게 역사적 사실이라면 그가 신라로 귀화하였음으로 온달의 아들과 온사문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없었던 이유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를 할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영양왕(嬰陽王) 고원(高元)의 가장 측근세력이였을 그가 신라에 귀화하게된 까닭을 찾기
위해 여러가지 가능성을 열어 볼수 있게 된다. 한가지 가능성으로 온달이 신라 원정을
통해 얻은 아단성(阿旦城) 이북의 전선을 책임지다가 영양왕(嬰陽王)의 사후 영류왕(榮留王)
고성(高成)=고건무(高建武)가 즉위하자 이에 반발하여 신라로 투항하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듯싶다. 아마도 온군해는 영양왕(嬰陽王)의 치세 말년인 614년부터
618년까지의 기록이 전무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열쇠를 일 수도 있울 듯하다.
특이사항(特異事項):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설화의 주인공인 온달(溫達)의 손자(孫子).
렬전(烈傳): 고구려의 장군. 온달(溫達)의 손자(孫子)이다. 보장왕 18년(659) 겨울 11월에
당나라 우령군(右領軍) 중랑장(中郞將) 설인귀(薛仁貴) 등을 횡산(橫山)에서 맞아 싸웠으나
격파 당하였다.
사론(私論): * 참고로 인터넷[Internet] 상에 ‘삼국사기 열전 온사문전’ 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자료가 있어 이를 별도로 등재(登載)한다. 내용상으로 보아 무시하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도 소상하여 일단 등재하기로 하였으나 이 내용은《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찾을 수 없는 내용이며 그 정확한 출전 또한 확인 할 수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삼국사기 열전 온사문전》
온사문은 온달의 손자로서 무예에 능해 일찍이 전장에서 공이 많았다.
특히 활 쏘기에 능하였다고 한다. 한 번은 거란족을 칠 때 사문이 포위되어 위급할 때
화살이 다 떨어지고 시위가 끊어져 다급해지자 나뭇가지로 화살을 삼아 적을 위협을
주었는데 적이 사문의 활 솜씨를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 하자 급히 말을 몰아
위기를 벗어 났다고 한다. 사문은 언제나 사람들이 자신을 조부와 비교하고 말하기를
"사문이 무예는 조부보다 뛰어나나 조부만한 지략과 덕이 없다 하였다" 이에 사문은
언제나 말하기를 "내 꼭 조부의 공을 넘으리라" 하였다. 당군이 처음 쳐들어 왔을 때
요동성에서 적과 싸웠다. 사문이 힘껏 싸웠으나 성이 함락되고 포로가 되어서 패주하는
당군에게 끌려가다, 탈출하여 연개소문에게 왔다. 소문이 사문을 보고 말하기를
"그대의 조부는 위명이 온 천하를 뒤엎었는데 그대는 어찌 적의 포로가 되었소"하자
사문이 말하기를 "어찌 싸움의 승패가 아래에만 달려 있겠습니까? 낮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은 평지에 떨어져서 멀리 나가지 못 합니다. 사람도 이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소문이 듣고 말하기를 "그대는 참으로 담대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후에 소문이
주위사람에게 말하기를 "내 사문을 책하려 하였으나 사문이 오히려 궁색한 비유를
들어 변명하니 사람들이 그가 조부보다 못 하다는 것이 실로 진실이로구나" 하였다.
사문이 이를 듣고 분해 하였다.
당의 우령중랑장 설인귀 등이 쳐들어오자 사문이 횡산에서 이를 맞아 싸웠는데
사문이 주위의 만류를 물리치고 정면으로 진을 치며 말하기를 "이번 싸움으로 조부의
위엄을 넘어 보이겠다. 그럴 수 없다면 죽음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강을 배후로
하여 배수진을 쳤다. 설인귀가 이를 보고 우리군의 정면에 불을 놓는 화공을 쓰자
사문의 군사들이 크게 놀라 도망치려 하였으나 뒤에 강이 막혀 태반이 타 죽었다.
사문도 이때 죽었다.
사론(私論): 온군해(溫君解)가 온사문의 아버지라면 온사문은 고구려에 처자식을
남겨두고 신라에 투항해버린 조국을 배신 자의 아들이 된다. 온군해의 투항 후에
어떠한 이유에서건 온씨(溫氏) 가문이 멸족은 면하였을지라도 온사문으로써는 분명
배신자의 아들로써 고구려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상당한 고행이였을 것이다.
따라서 온사문의 아버지에 대한 컴플렉스[Complex]는 상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온달(溫達)을 시조로 모시고 있는 봉성(鳳城) 온씨(溫氏)는 고구려에 남아있던
온사문이 아닌 온군해(溫君解)가 신라에서 남긴 후손들이 그 계보를 이어 나간 듯하다.
첫댓글온씨가 오직 온달만 있었을까요? 온군해는 김춘추의 시종이었던 만큼, 고구려 왕실의 금지옥엽 평강공주의 자식된 자가 신라에 투항한다고 했을 때, 그런 지위를 가질리가 없겠지요. 드라마 작가의 상상력을 빌미로 온달의 자식 온군=온군해라고 추정하는 것은 드라마보다 더 잘못된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온달가문의 족보에도 온달은 자식이 없고, 온달의 동생의 자손이 온씨를 퍼뜨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온달과 온군해를 연결하는 것은 찬성하기 힘듭니다. 또한 온사문의 경우 연배상, 온달의 손자뻘로는 추정될 수 있겠으나, 그것이 혈연상으로 직접 할아버지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기록이 적다고, 온씨가 오직 온달뿐이겠습니까?
첫댓글 온씨가 오직 온달만 있었을까요? 온군해는 김춘추의 시종이었던 만큼, 고구려 왕실의 금지옥엽 평강공주의 자식된 자가 신라에 투항한다고 했을 때, 그런 지위를 가질리가 없겠지요. 드라마 작가의 상상력을 빌미로 온달의 자식 온군=온군해라고 추정하는 것은 드라마보다 더 잘못된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온달가문의 족보에도 온달은 자식이 없고, 온달의 동생의 자손이 온씨를 퍼뜨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온달과 온군해를 연결하는 것은 찬성하기 힘듭니다. 또한 온사문의 경우 연배상, 온달의 손자뻘로는 추정될 수 있겠으나, 그것이 혈연상으로 직접 할아버지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기록이 적다고, 온씨가 오직 온달뿐이겠습니까?
음... 그렇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그런데 봉성 온씨가 시조를 온달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계보상 직계로 내려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봉성 온씨의 족보가 허구라고 보아야하나요? 혹 연구가치는 없겠는지요?
삼국사기 열전에 온사문전은 없습니다. 온달의 아들이나 손자에 관한 기록도 없습니다. 온사문이라는 장군이 고구려본기에 보이고 중국 측 사서에 온다사문이란 이름으로 보이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