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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의 아리랑
글 박철영
무슨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구석에 처 박힌 해묵은 앨범을 뒤적이다 사진 몇 장이 눈에 들어왔다. 나에게 아예 중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시절이 없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물론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우리 집에서 갈 수 있는 중학교는 남원 시내에 두 곳이 있었다. 남원 용성중학교는 우리 집과는 5km 정도였고 남원중학교는 6km로 더 멀었다. 은행알을 돌려 배정받은 것이 운이 없게도 남원중학교였다. 처음 남원중학교에 입학할 때만 해도 16번이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학기가 바뀌면서 자꾸만 내 키 순번이 빨라졌다. 2학년부터는 아예 앞 순서가 되었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아예 말뚝을 박았다. 참담했다. 다른 것은 어떻게 해 보겠는데 사람 키는 방법이 없었다.
아예 중 1학년 2학기에는 아버지가 큼지막한 삼천리 중고 자전거를 사주셨다. 엔간한 쌀가마도 짐 실을 곳에 각목 두어 개 받치면 충분했다. 그러기 전에는 학교에 가기 위해 6km를 뛰다시피 걸어 다녔다. 그래서일 거다. 지금도 걷는 속도가 무척 빠르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러면서도 할 짓은 다 하고 다녔다. 학교를 마치고 향교동 쪽으로 가로질러 오다 보면 철로가 있었다. 기적 소리가 듣기 좋았고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려 좋았다. 끝없이 놓인 철로를 따라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졌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철로가에서 노는 것이 좋았다. 레일에 귀를 갖다 대고 있으면 멀리서 기차가 오는 충격이 육중하게 전해왔다. 그럴 때 집에서 챙겨온 쇠못을 재빨리 레일에 얹혀놓고 기차가 지나가기를 바랬다. 그런 친구들 대여섯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기다렸다. 긴장한 눈으로 기차가 지나가면 튕겨 나가떨어지는 못을 잘도 찾아내곤 했다. 간혹 서로 자기 것이라고 우기기도 하였지만 그러다 말았다. 기차는 내일도 또 지나가니까. 기차 바퀴에 납작해진 못을 갈아 칼을 만들기도 한 기억이 새롭다. 그런 칼을 보여주면 기차를 타 보지 못한 동네 어린아이들에게는 대단한 호기심 거리가 되었다. 그런 것은 철로를 가로질러가는 남원중학교에 다녔기에 가능한 것이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보이는 것이 다 호기심의 대상이었지만 중학교 입학하기 전 맨 먼저 외운 apple이란 영어 단어에서 더는 진전이 없었다.
중학교 때 일 년이면 몇 번 타지도 않는 버스는 항상 만원이었다. 그때는 비가 억수로 내렸다. 최악의 날에 삼십 분 넘게 버스에서 서 있어야 하는 것은 나에게는 또 다른 고통을 주었다. 차라리 자전거로 학교 가는 게 더 마음이 편했다. 동네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부터 신경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좋아했던 여자애 영심이는 자꾸 엉덩이도 커지고 가슴도 볼록해지면서 멋있어졌고 내 키는 자라지않고 제자리니 그럴 수밖에. 당시만 해도 버스에는 운전기사가 있었고 조수라고 불리는 남자 차장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버스 문짝이 터질 듯이 승객을 밀어 넣고는 닫히지도 않는 문짝을 닫느라 차장은 바깥쪽으로 위험하게 달리는 차 문에 매달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곤 했다. 안쪽으로 들어가 달라는 고함을. 그러다 급커브쯤에서 차가 한쪽으로 쏠리면서 승객들이 차 문짝 반대쪽으로 몰릴 때를 절호의 기회로 요령껏 문을 닫곤 했다. 생각해보면 위험하기 그지없는 것인데 말이다.
버스에 올라타 보면 내가 앉을 좌석은 아예 없다. 우리 동네보다 위 시골에 사는 이백면과 산동면 촌놈 또래들이 먼저 좋은 자리를 차지해버린 상태였다. 나도 촌놈이지만 그런 때는 나보다 더한 촌놈들이 한 끗발을 잡은 거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여학생들 틈에서 항상 키가 작아 조금 이라도 커 보이려고 시내까지 키 발을 딛고 서 있노라면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가방의 무게도 그렇거니와 당시는 도로가 비포장 신작로였기에 급격하게 쏠리거나 급브레이크를 밟으면 순간 키 발이 흐트러지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어디선가 나를 바라보고 있을 영심이를 나는 의식해야만 했다.
작은 키는 내 사춘기랄 수 있는 고등학교 내내 나를 괴롭혔다. 무엇이든지 할 수 없을 것처럼 주눅이 되었으니까. 항상 소심해 있었고 남들과 어울리면 그게 나를 억눌렀다. 특히 체육 시간이나 교련 시간은 나에게는 불편한 과목이었다. 그래도 체육 시간은 그렇다 치더래도 교련 시간은 여러 가지로 나를 괴롭혔다. 우리 학교는 교련을 통해 학생들을 휘어잡는 학교였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처음에는 교련 선생의 독단이었겠지만 학교장의 은근한 내락에 따라 한 번씩은 시내 구보 행군을 해야만 했다. 대충 눈으로 코스를 그려봐도 족히 5km는 되었을 성 싶다. 무슨 군대도 아니고 군가까지 부르며 모조 m1 소총을 들고 뛰는 아이들도 힘들었겠지만 나는 더 큰 곤욕이었다. 그 교련 선생은 그것을 즐겼던 것 같다. 아마 군복만 입히면 어지간한 군대보다 군기가 잘 잡혀 있었다.
시내 구보 행군을 할 때면 우선 키가 작아 맨 뒤에 힘들게 따라가는 나를 눈요깃감으로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내에서 시민들이 보면서 웃음거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 뻔한 것이다. 조그만 꼬맹이가 행군하고 있으니 우습지 않겠는가? 먼 훗날 시내 행군 코스의 도롯가에 사셨던 장모님이 그런 나를 본 것처럼 농을 치기도 하셨으니 말이다. 고3 졸업 때까지 키가 155cm 정도였을 테니까. 지금도 그때의 교련 선생을 가끔 떠올려본다. 그토록 윽박지르고 신경질적이었던 그 선생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풍문으로 교육감에 출마했다 낙마했다는 말을 들었다. 자기 성취를 위한 욕구가 매우 강한 사람이었음이 맞다. 어찌 본다면 그것은 한 사람의 자기 성취를 위한 것이었거나 고집으로 지위를 이용해 많은 학생에게 자신이 추구해온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자기 생각을 누군가에게 손쉽게 복제시킬 수 있는 것이 군사문화임은 분명하다. 그때 그 시절은 그게 가능했다. 잘못하면 기름 먹인 지휘봉이 학생들의 등짝이나 머리에 사정 볼 것도 없이 내리쳐졌으니까. 지금도 그 선생에게 맞았던 내 머리통이 이만한 게 다행이다 싶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당시 여리기만 한 나에게는 감당할 수 있을 상처는 아니였다고본다.
학창 시절의 일상은 변화한다. 변화는 또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성장이라고 하는 게 맞다. 더딘 키보다는 마음이 더 먼저 자랐다. 일찍 눈을 뜬 여자아이에 대한 호기심은 초등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한다. 그렇지만 그런 열망을 이뤄줄 키가 도무지 따라주질 않았다. 중학교 시절은 그렇다 치더래도 고등학교 시절은 더 힘들었다. 이성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절제는 자존심의 문제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우습지만, 항상 자존심은 쉽게 꺾을 수 없어 폼은 죽지 않았다. 여학생 옆을 지나가면 최대한 짧은 다리를 좌우로 벌려 꺾인 듯이 자전거 페달을 밟아 조금이라도 작은 키가 큰 듯 보이도록 했지만, 여학생의 눈길은 언제나 나를 빗겨가고 있었다. 교복을 입을 때는 짧은 다리에 9인치 이상의 나팔바지를 입기 위해 노력한 귀여운 아이의 처절한 성장기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후 스물 한 살에야 8cm의 키가 한해 동안 크면서 나아질 기미를 보였지만 오래도록 억눌린 자아는 쉽게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더 많은 세월이 흘러 삼십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소중한 자부심으로 되살아났다. 어찌 보면 나의 사춘기는 그때부터였는지 모른다. 되돌아보면 피식 웃음부터 나지만 당시 나에게는 학교의 공부보다 더 큰 자존의 문제였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시작한 부평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또 다른 기회의 시간이었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선배가 내려왔다. 시골 일 년 선배의 위상은 대단했다. 그것도 서울 물을 먹은 선배다. 시골서는 부평도 서울로 통했다. 서울 올라간다는 나에게 사만 원을 땡겨 건네준 작은 집 사촌 형이 엄마의 어깨너머에서 안타깝게 날 바라보고 있었다. 종중 제실 짓는 데 도와준 품삯에다 엄마가 보태준 돈이었다. 그 당시 사만 원이면 어림잡아 쌀 한 가마 값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새벽에 내린 영등포역은 어둠을 걷어내고 있었다. 기차에서 막 내린 촌놈의 어둠을 툭툭 건드리며 다가오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거리의 여자들이었다. 저 여자들이 잘못하면 내 코를 베어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코도 베어 간다는 무서운 서울이었다. 선배와 그 틈을 빠져나와 밀치고 들어간 국밥집의 그 맛은 촌놈의 입맛에는 너무도 과분한 것이었다. 이미 그때에 내 느릿한 키의 성장판이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머지않아 그런 식사가 나의 삼시 세끼가 되었으니 말이다.
선배를 따라간 곳은 부평 외곽에 있는 부개동이었다. 군데군데 황톳빛 나는 밭이 있었고 4월은 따뜻해서 푸른 기운이 돌았다. 하지만 그곳은 플라스틱 사출을 하는 공장이었다. 공장이라야 사출기 대 여섯대 놓고 고만고만한 선배 또래 위아래 아이들이 전부였다. 일없을 때는 밭에서 축구를 하고 때 되면 대놓고 먹는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는 것이었다. 지금도 사십 대의 인심 후한 식당 아줌마가 눈에 아른거린다. 어영부영 보낸 날이 제법 되어버렸다. 자칫하다 보면 공돌이가 될 판이다. 왠지 공돌이란 말이 듣기가 싫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은연중 어쭙잖게 미래의 직업에 대해 화이트칼라를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서 있다 보니 잔 심부름도 하게 되었고 사출기도 몇 번 인가 조작을 해 보게 되었다.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아도 아니다 싶었다. 시장에서 장사꾼이 되어야 돈을 벌 것 같았다. 걸어서 무작정 시장이 있다는 곳으로 갔다. 가는 동안에 스치는 생각이 거리를 맴돌았다. 쭈뼛대다 용기를 내 마른 고추가 산더미처럼 쌓인 가게를 찾아들었다. 무던하게 보인 가게 주인은 막상 말을 나누는데 내 생각과는 달랐다. 돈은 무엇일까? 돈에도 등급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쉽게 돈을 벌 수 있다고 해도 목욕탕 때밀이를 하라는 것은 어린 마음에 강한 거부감으로 다가왔다. 그 가게를 나오면서 거리를 걷는데 뒷맛이 씁쓸했다.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지하도를 건너 더 큰 상가들이 몰려 있는 곳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이후 몇 번을 더 망설이다 열려있는 가게로 들어갔다. 주인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고 이후 몇 가지를 더 물었다. 부인하고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어디론가 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새까만 전화기의 번호가 돌아가는 소리가 듣기 좋았고 상대편 쪽으로 하는 말도 대충 짐작하고도 남았다. 우리 아버지에게 배운 눈칫밥에 이력이 나 있었으니까 저 정도는 식은 죽 먹기인 셈이다.
이후 손님도 끊기고 상가는 시간이 갈수록 조용해졌다. 그러길 한참 후 짐 자전거에 볼살이 붙은 사십 대 후반의 아저씨가 내가 있는 가게를 두어 바퀴 돌다 들어왔다. 돌면서 짧게 보내는 눈짓으로 그분은 나를 보았고 나는 그 눈짓의 의미를 다 알고 있었다. 몇 마디의 말로 나를 떠보는 것 같았다. 이후 그분 뒤를 따라나섰다. 큰 거리를 지나 안쪽으로 부평 시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껏 둘러본 곳들은 외곽에 있는 주변 상가에 불과한 곳임을 그러고도 몇 개월이 지나서야 알아갔다. 농심 라면과 새우깡이 먼저 눈에 띄었고 더 안쪽에는 미원이 쌀가마처럼 빼곡히 쌓여 있었다. 걸어 들어가는 마지막 안쪽에 사무실이 있었고 경리 아가씨와 주인아저씨의 부인이 나를 반겨 주었다. "부창상회"라는 간판을 달고 미원과 농심라면을 취급하는 지역 대리점인 그곳이 내 생애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해준 곳이 되었다. 그런 이후 아저씨가 타고 온 커다란 짐 자전거는 나의 힘을 수시로 필요로 했다. 작은 체구에 처음엔 수없이 넘어지고 그러기를 반복했지만 그런 횟수만큼 요령은 자꾸 늘어갔다. 내가 지난 세월을 뒤돌아봐도 인생은 짐 자전거와 같다고 본다. 짐바라는 자전거에 누구나 짐을 가득 실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원하는 곳까지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남이 아닌 자신이 해야만 한다. 그것은 단순한 이야기 같지만 살아가는 요령이고 지혜라고 본다. 지금껏 살아오며 내 생이 심하게 요동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스무 살의 나이에 중심을 다잡아 짐자전거를 끌던 그 시절을 생각하곤 한다. 짐자전거가 넘어지기 직전 사력을 다해 내 작은 다리로 바퀴를 굴려냈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끝없는 혼신의 노력이 필요함을 그때 터득했다. 자신의 삶이 잘 굴러가도록 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이고 그 결과도 자신이 수혜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부창상회에서 하는 일은 남원 고향에서 학교 다니며 농사일을 도운 것과 비교하면 허드렛일에 불과했다. 거기다 좋은 음식을 먹여주고 잠도 잘 수 있는 뜨뜻한 방이 생겼다. 고향에서처럼 산에 가서 땔 나무를 해대야 하는 일도 없었다. 낮에는 창고에 딸린 사무실이지만 밤에는 내가 기거하는 공간이 되어주었고 모든 게 행복했다. 거기다 매일 먹는 식사는 먹을 때마다 이렇게 먹어도 되는 것인가 하는 미안함마저 들었다. 마침 주인아저씨 누나가 하는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매일 먹는 밥상에 고기가 올라왔고 반찬도 그 정도면 잔칫집 수준이었다. 식사하러 가면 나를 예뻐하는 것 같았다. 주인아저씨의 누나니깐 내 근황을 꿰뚫고 있을 것이다. 덤으로 얹혀주는 달걀 후라이 하나에도 남달랐으니까 말이다. 난 어느새 일 잘하는 "박 군"에서 장사 잘하는 박 군이 되어 있었다. 판매용 타이탄이라는 차량이 세 대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도 많았고 처음의 꼬맹이가 당당한 역할을 해내니까 대우도 달라졌다. 차를 타고 다니며 판매하는 판매원이 되었다. 자전거로 보고 다니는 세상과 차를 타고 느끼는 세상의 스피드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스무 살 어깨에 둘러매진 국방색 전대가 선물처럼 주어졌다. 날이 바뀌고 달이 바뀌다 보니 내 손때가 묻어 여닫는 자크 쪽이 반지르 해져갔다. 사람의 손에서도 기름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량을 이용한 루트 세일은 구역을 나누고 거기서 일정한 판매액을 유지해가야 한다. 막상 해보니까 차량 기사와 한 조가 되어 판매 전략을 세우는데 메인인 나에게 모든 책임이 있을 수밖에. 나의 전략은 많은 거래처를 유지하는 거였다. 거래처라야 군데군데 공단 주위에 흩어져있는 구멍가게였다. 그런 곳은 차량이 들어가지 못하는 도로 안쪽에 있는 곳이 많았다.
라면 열 상자를 내려달라면 곤욕스러웠다.
처음에는 다섯 상자도 버거웠는데 어느 정도 요령을 터득하니 열상자도 한꺼번에 들고 이십여 미터를 거뜬히 갈 수 있었다. 지금도 내 모습을 상상해보면 눈에 선하다. 당시는 농심라면 한 상자 안에 라면 쉰 개가 담겨 있었다. 상당한 무게였다. 거뜬히 들수 있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체력이 좋아지고 있었다. 그 힘이 서서히 내 못 자란 키로 가고 있음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사람이나 나무나 가을을 넘기고 겨울을 견뎌내야 더 단단해지는 법이다. 특히 단단한 나무일수록 산비탈의 볕이 덜 드는 능선에서 자란다. 어릴 때 산에 가서 장작이 될 만한 사태 나무나 소나무를 톱질해와 집 뒤안에서 도끼로 장작을 패 보았기에 그것을 안다. 볕 드는 능선은 사람 손도 자주 타기 때문에 내 몫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면 갈치 앞산의 응달진 골짜기에는 진눈깨비가 녹을 틈이 없어 추운 나무들과 어우러져 음산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견디다 죽어가는 나뭇등걸들이 있었다. 추울수록 사람도 살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부평의 가을은 어느새 내 반소매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남원도 산악지형이라 가을이 빨리 온 편이다. 그런데 부평은 가을도 더 빨리 왔고 겨울도 곧 매섭게 달라붙었다. 정말 부평의 겨울 새벽 추위는 남원은 저리가라였다. 물건을 팔기 위해 강화도가 코 앞에 보이는 검단 바닷가의 이름 모를 동네 구멍가게를 찾아가는데 눈보라가 눈을 가렸다. 눈발이 칼바람이 되어 내 볼과 귀때기를 사정없이 베어 가는 듯했다. 아 정말 요즘도 그쪽은 그토록 추운지 모르겠지만 그럴수록 고향이 간절해지곤 했다. 그렇다고 그만둘 수는 없었다. 장사를 배워 성공해보고 싶은 욕망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길을 일관되게 밀고 가지를 못했다. 지금도 주인아저씨의 장사꾼으로서 견지한 철학이 귀에서 엊그제처럼 울린다. 장사꾼의 똥은 하도 더러운 꼴을 많이 봐서 개도 안 쳐다본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어찌 장사꾼에만 해당하겠는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일 거라고 본다. 어떤 일을 성취하는 데 있어 인내와 이해 그리고 포용을 요구한 아량 있는 삶의 자세를 말하고 있었던 것임을 이제는 안다.
처음 국방색 전대를 가슴에 매고 인천 4, 5공단에 있는 구멍가게를 들어가면 내 또래의 아가씨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런 곳을 밀치고 들어간다는 것은 보통 곤욕스러운 게 아니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내며 가게 주인아저씨와 안면을 트기전에도 물건을 팔아야 된다는 강박관념과 아가씨들의 은근하게 지켜보는 눈빛은 스무 살의 자존심으로는 그야말로 난감했다. 나의 작은 키에 손 때 묻은 국방색 전대를 맨 초라한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도 그때는 꽃다운 나이였다. 맥없이 망가져 가는 꽃다운 내가 아니기를 바랐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실력이 부족해 대학 진학을 접었지만, 자존심마저 접을 수는 없었다. 이 나이까지 나를 지탱해준 것은 작지만 소중하게 여겨온 나를 사랑하는 자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내가 있는 곳이 객지이고 홀로 있어 외로워지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지면 텅빈 시장거리를 걷곤 했다. 되돌아와 방에 앉으면 무언가를 떠올렸지만 도무지 종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길 반복하면서 서서히 내 손에는 대학노트가 펼쳐졌고 빠이롯트라는 상표를 단 검정 잉크가 펜촉에 진하게 묻혀져 나왔다. 노트에는 한동안 잊었던 고향 집 앞 경치 돌로 잘 쌓인 돌담이 생각났고 대문을 밀치고 가면 맨발로 반길 어머니의 얼굴이 별처럼 떠올랐다. 달 뜨는 날이면 가슴 한 쪽에 첫사랑이라고 새겨놓은 영심이도 달무리처럼 아롱거렸다. 그러다 동로골을 나서면 도로를 따라 모테(모퉁이)논의 방천 사이의 봇도랑과 새논의 물소리가 대학노트에 쓰여지기 시작했다. 횟수가 더해지고 생각은 끝없이 이어지다 날이 샜다. 노곤한 밤이면 보고 싶은 고향 친구들을 하나씩 다 불러보곤 했다. 그런 시간들은 꼭 해를 거듭하며 세월과 연을 대며 변해간다. 세월도 변하지만, 사람도 세월을 통해 변화된다. 나는 고향의 풍경과 사람들을 나의 노트에다 본래의 모습으로 꼼꼼히 적어왔다. 그래서일까 나는 지금도 스무 살 모습 그대로다. 지금껏 그랬듯이 앞으로도 그리 살고 싶다. 이 시간에도 스무 살의 나를 꿈꾸고 있다.
중 1
고 2
스무 살 부평에서
첫댓글 재밌게 잘 읽었다 레일 위에 침을 발라 못을 올려 놓고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귀를 막고 엎드려 있던 시절이 네게도 있었구나 내가 남원용성국민학교 다닐 때였으니 혹시라도 우린 같은 레일 위에 못을 올려놓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너와 나의 인연은 그때부터? 부평은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외출을 자주나오던 곳이었다. 그곳 헌병대에 자주 놀러가기도 했지. 경상도 친구인 동기녀석과 술 먹고 깡판치다가 하하!! 너의 스무살적 이야기가 뭉쿨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형이 남원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참 모든게 지나고 보니 아름다운 기억밖에 없네요.
부평에서의 짧지만 나에게는 많은 의미로운 시간이었거든요.
거기에서 나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다시 되돌아기보고 싶은 시절이지요.
그때 김포 어딘가의 농촌 이었는데 구판장에서 마신 김포 막걸리맛도 기억에 새롭고
푸더짐한 어머니같은 분이
안주로 내민 김치 맛도 입맛을 다시게 하고요.
부평 화란농장이라고 부르던 군 주둔지가 있는 철마산을 수없이 넘나들었으니까요.
전주에서 태어났지만 다섯 살때 목포로 가서 2년 살다가 국민학교 1학년 2학기 때 남원으로 다시 이사를 갔었지 용성국민학교로 전학 갔다가 신설 학교인 대방 국민학교로 다시 전근 갔지 그리고는 다시 장수 국민학교를 거쳐서 전주로 와서 졸업을 했으니 국민학교만 다섯군데를 나오지 않았겠나?
대방국민학교가 우리 다닐 때는 왕치국민학교로 개명한걸로 압니다. 형의 유전도 만만찮네요~~^^
오래전 남원을 상징하는 말이 용성하고 대방이었답니다
값지고 좋은 경험들을 했구만, 구구절절이 감동이네.
그런것 같네.
지금 와 되돌아보니
참 다 소중한 내 삶의
자양분들이란 생각을
해보았네
고맙네ᆞ
글을 통해서 형님의 살아온 모습을 이해할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술마시면서는 이런 얘기 들을 기회도 없었는데,,,
초중고시절 그리고 20대초반의 고뇌와 경험들이 밑돌이 되어서
지금의 철영 형님이 존재하네요^^
좀 쑥쓰럽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