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격호의 삶
오늘은 사람의 일생이 무슨 의미를 많이 가지고 있느냐 싶어
집 창가에서 보이는 롯데월드타워의 주인공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을
살펴보는 하루였다.
첫째, 도전 정신이다.
노자돈 83엔을 들고 일본 시모노세키행 배를 타고 일본 유학길을 떠났다.
둘째, 노력과 끈기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밑 바닥부터 고생을 해가며 재벌의 위치까지 성장한 사례는 정주영과 신격호 뿐이다. 그는 빈농 집안의 5남 5녀 가운데 장남이다.
셋째, 신뢰와 보은이다.
일본인 사업가 하나미쓰는 신격호를 높이 평가해 사업자금으로 5만엔을 비려준다. 이 돈은 1944년 도쿄 인근에 윤활유 공장을 세운다. 하지만 공장은 미군의 폭격을 받아 가동도 못하고 불타 버린다. 5만엔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는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일본에 머물던 한국인이 대거 귀국했지만 신격호는 ‘나를 믿고 돈을 빌려준 사람을 두고 갈 수 없다’며, 우유 배달과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해 사업 밑천을 마련했다.이렇게 모은 돈으로 그는 1946년 도쿄에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라는 공장을 짓고 비누 크림 등을 만들어 1년 만에 빚을 다 갚았다.
자신을 믿고 기다려 준 이에게 빌린 자금을 모두 돌려주면서 고마움 표시로 집까지 한 채 사주었다.
넷째, 성실성과 집념이다.
낮에는 우유와 신문배달 밤에는 야간 대학 학업정진으로 세계적 명문인 와세다 대학 화학과를 졸업했다.
다섯째, 마음이 따뜻한 문학 소년이다.
‘롯데’라는 회사 이름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여주인공 ‘샤롯데’에서 따왔다. 롯데가 샤롯데처럼 사랑받는 기업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신 회장의 감수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여섯째, 롯데 신화의 막을 올렸다.
‘히카리특수화학 연구소’라는 공장 이후 승승장구한 신격호는 1948년 자본금 100만엔 종업원 10명의 회사를 설립하고 ‘롯데’ 간판을 처음으로 내 걸었다. 껌 회사인 ㈜롯데를 창업하면서 ‘롯데 신화’의 막을 올렸다. 롯데신화의 사업 출발은 자기가 전공하고 잘 아는 분야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일곱째, 고향을 잊지 않는 애향적이다.
2013년까지 매년 5월 고향 찾아 마을 잔치을 열였다. 고향은 경남 울산 삼남면 둔기리이다.
여듭째. 사업보국과 숙원사업에 대한 집념이다.
1988년 서울시로부터 부지 매입이후 그로부터 29년후 2017년 초에 롯데월드타워가 준공되었다. 그는 2015년 5월 22일 롯데월드타워를 방문하여 건설보고를 받았다. 신격호 회장의 평생의 꿈이 이루어졌다. 대한민국의 랜드마크 지상 123층 높이 555m 롯데월드타워이다.
아흡째, 박정희 대통령과 만남의 새로운 전환
박대통령의 외국 귀빈을 맞이할 수 있는 최고급 호텔 건립의 청을 받고 롯데 호텔과 롯데 쇼핑센터를 건립하면서 한국 롯데그룹이 태동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열째, 그룹 회장 가의 복잡한 가족사이다
고향의 첫 부인 노순화씨와 딸 신영자, 신동주 신동빈의 어머니 일본인 부인, 서미경 초대 미스롯데와 딸 신유미이다. 서씨는 신격호 자신의 샤롯데였다. 서미경씨는 22살에 유학을 간다며 1981년 돌연 은퇴한다. 그리고 2년 뒤 신 명예회장의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딸 신유미씨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무려 37살이고 이때 신 회장 나이는 만 62세 진갑이었다.
열 한번째, 2015년 롯데판 왕자의 난
신격호 회장의 시대는 2015년 7월 장남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경영권 분쟁을 벌이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신 명예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열 두번째, 노년기에 몸조심하기다.
신 회장은 1922년에 태어나 2020년 1월 19일 오후 4시 29분 향년 99세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장수 체력인데, 소공동 롯데호텔 집무실에서 넘어져 고관절 수술의 전신마취가 신체 쇠락의 원인이 되었다.
열 셋번째, 고향인 울주군 선영에 안치
부친 신진수씨가 모셔져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다. 인생의 마지막 안식처는 고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