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학당. 자미. 3-12. 論君臣相得之難
李 珥
손님이 또 묻기를, “삼대(三代) 후에는 다시 왕도(王道)를 행한 자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주인이 개탄하면서, “도학(道學)에 밝지 못하고 행하지 못함이 그 원인이다. 한대(漢代) 이후에는 왕위에 있는 자가 도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직 지력(智力)만으로 천하를 유지하여 미봉책(彌縫策)으로 시일만 넘기려 하였으므로 적막하게도 수천 년 동안이 오직 긴긴 밤같이 되고 말았다. 정자(程子)의 말에, ‘주공(周公)이 죽은 뒤에는 백세(百世) 동안 선치(善治)가 없었다.’ 하였으니, 과연 사실이다.” 하니,
손님이 또, “한대(漢代) 이후에도 독서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을 텐데 이른바 도학이란 어떤 학문인가?” 하니,
주인이, “고루하다. 그대의 말이여! 도학이란 것은 격물치지(格物致知)로써 선(善)을 밝히고, 성의정심(誠意正心)으로써 몸을 닦아 그 학문이 몸에 쌓이면 천덕(天德)이 되고 그것을 정사(政事)에 베풀면 왕도가 되는 것이니, 독서는 격물치지 중의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독서만 하고 실천이 없으면 앵무새가 말 잘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양(梁)나라 원제(元帝) 같은 이는 만 권의 책을 읽었지만 결국 위(魏)나라의 포로(捕虜)가 되었으니 이것도 도학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손님이, “삼대 후에는 도학하는 군주는 전혀 없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도학을 하는 선비도 없었단 말인가?” 하니,
주인이, “어찌 그런 사람이 없기야 했겠는가마는, 다만 윗사람이 그들을 너무 이상적이고 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의심하여 등용하지 않았다. 도학(道學)을 하는 선비를 진유(眞儒)라고 하는데, 맹자 이후에는 진유가 나오지 않다가 천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주염계(周濂溪)가 태어나 미묘한 진리를 발명하였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계승한 연후에 이 도(道)가 세상에 크게 행해져 중천에 솟아오른 태양과 같이 되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송나라의 군주가 도학을 알지 못하여 대현(大賢)을 말직(末職)에 버려두어 백성이 그 혜택을 입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손님이 “한나라와 당나라 이후로 영명하여 큰일을 하려는 군주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어찌 모두 진유를 알지 못했겠는가. 다만 서로 만나지 못하였을 뿐이다.” 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후세의 임금 중에 누가 진유를 등용할 만한 사람인가. 나는 보지 못했으니 그대가 말해 보라.” 하니,
손님이 답하기를, “한 고조(漢高祖)는 어떠한가?” 하였다.
주인이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반드시 임금이 공경을 극진히 하고 예를 다한 연후에 朝廷에 이르는 법이다. 저 한 고조는 본래부터 거만하고 무례하여, 그가 부리는 자는 모두가 공명이나 부귀를 바라는 자들뿐이니, 진유(眞儒)가 어찌 걸터앉아 발을 씻으며 상대하는 모욕을 당하면서까지 변변치 못하게 한신(韓信)ㆍ영포(英布)의 반열(班列)에 있겠는가.” 하였다.
손님이, “문제(文帝)는 어떠한가?” 하니,
주인이, “문제는 자포자기한 임금이다.” 하였다. 손님이 크게 놀라면서, “문제는 천하의 현군(賢君)인데 자포자기한 자라고 함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주인이 말하기를, “삼대 후에는 천하의 현군으로 문제 같은 이도 없지만, 다만 그 지향(指向)하는 것이 낮고 무식하여 선왕의 도를 결코 회복할 필요가 없다 여기고, 조용하게 지내는 것만 즐기고 겨우 양민(養民)을 주장하였으니 선왕의 도가 회복되지 못한 것은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다. 문제 같은 사람은 요순시대의 도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니 자포자기한 자가 아니고 무엇인가. 진유를 만났더라도 등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였다.
손님이, “그러면 무제(武帝)는 어떠한가?” 하니,
주인이, “무제는 속으로는 욕심이 많으면서 겉으로는 인의(仁義)를 시행(施行)하였으니, 그가 말한 인의라는 것은 모두 허례만을 숭상하여 겉치레를 삼았을 뿐이니, 성심으로 도를 믿은 자는 아니다. 동중서(董仲舒)와 급암(汲黯) 같은 이가 있었는데도 등용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진유(眞儒)를 등용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손님이 또 묻기를, “광무(光武)는 어떠한가?” 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광무는 규모가 고조를 따르지 못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삼공(三公)을 신임하지 않았으니 진유를 믿고 쓰지 못하였음은 알 수 있다.” 하였다.
손님이, “명제(明帝)는 어떠한가?” 하니,
주인은, “명제는 세밀하게 살피기를 좋아하여 임금의 도량이 없고 임옹(臨雍)에서 늙은 학자에게 절을 한 것은 다만 겉치레를 보인 것뿐이니 어찌 진유를 알 수 있겠는가. 하물며 호교(胡敎: 불교)를 처음 숭상하여 만세(萬世)에 무궁한 문젯거리를 열어 놓았으니, 이것이 어찌 큰일을 할 수 있는 임금이겠는가.” 하였다.
손님이 또 묻기를, “당 태종(唐太宗)은 어떠한가?” 하니,
주인이, “태종은 아비를 위협하여 병력을 동원하고 형을 죽여 왕위를 빼앗고 아우의 아내를 간통하는 등 개나 돼지 같은 행위를 하였으니, 태종이 비록 진유를 등용하고자 했더라도 어떤 진유가 태종의 신하가 되려 했겠는가.” 하였다.
손님이, “송 태조(宋太祖)는 어떠한가?” 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송태조는 주(周)나라 세종(世宗)의 총애를 받던 신하였는데, 진교(陳橋)의 변란이 닥침에 마침내 찬역(簒逆)의 신하가 되었으니, 진유라면 반드시 돌아보지 않고 떠나 버릴 것이다.” 하였다.
손님이 몹시 놀라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말을 믿는다면 진유는 끝끝내 세상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가?” 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만약에 진유들이 소열(昭烈: 劉玄德)을 만났다면 조금은 그 뜻한 바를 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열이 공명(孔明)을 세 번 찾아갔을 때, 공명은 신분이 천하고 나이가 젊었고 소열은 지위도 높고 나이도 많았는데, 소열은 공명에 대하여 이름만을 들었을 뿐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부지런하고 간곡(懇曲)하게 두 번 세 번 찾아갔으니, 현인(賢人)을 좋아하는 지성이 아니고는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공명이 정말 진유였다면 소열은 반드시 공명을 존경하고 신임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후세의 임금 가운데서 소열만이 진유를 등용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대체로 큰일을 한 군주는 반드시 존경하고 신임하는 신하가 있어 부자(父子)처럼 서로 친하고 고기와 물처럼 서로 뜻이 맞고 궁(宮)ㆍ상(商)의 음률처럼 서로 조화롭고 계부(契符 도장 찍은 문서)처럼 서로 부합하는 것이니 그런 연후에야 그가 하는 말이 쓰이지 않음이 없고 도(道)가 행해지지 않음이 없으며 일이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요(堯)가 순(舜)에게, 순이 우(禹)와 고요(臯陶)에게, 탕(湯)이 이윤(伊尹)에게, 무정(武丁)이 부열(傅說)에게, 문왕이 태공(太公)에게 대한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고, 그다음이 될 만한 것이 소열이 제갈량에게 한 것이다. 후세의 임금과 신하들은 모두 따라가지 못한다.” 하였다.
손님이 말하기를, “부견(符堅)이 왕맹(王猛)에게, 당 태종이 위징(魏徵)에게 한 것 같은 것도 서로 잘 만났다고 할 수 있는데, 그대가 치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내가 말하는 서로 잘 만났다는 것은 정도(正道)로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저 부견은 오랑캐의 우두머리로서 범인(凡人) 중에서는 조금 나은 편이었으나, 왕맹의 속임수로 꾸며진 공은 일세(一世)도 마치지 못했으니 어찌 거론에 낄 수 있겠는가! 당 태종은 이름나는 것을 좋아하던 임금이었고, 위징도 이름나기를 좋아한 신하였다. 비록 서로 뜻이 맞은 듯하여 세상을 한때 가식으로 다스렸으나, 살아있을 때도 죽이고 싶은 마음을 금하지 못하였고 죽은 뒤에는 비석을 깨뜨리는 모욕을 주었으니, 이것이 어찌 충심으로 좋아하고 진실로 믿었던 관계라 하겠는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