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주말에 쉬고 온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데이 케어 교실에 하나 가득하다.
웃음 소리 사이로 지나간 시간들이 인생 이야기가 되어 떠오른다.
우리가 캘거리 공항에 도착하던 날은 이 월 중순이었다.
말로만 듣던 캘거리의 칼바람이 몰아쳤다.
지인이 구해준 타운 하우스는 달하우지라는 동네에 있었고 이름에서 풍겨지듯이 마치 달구지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첫 일주일은 SIN(사회보장)카드와 의료 보험등 정부서류를 준비하였고 공항에 마중나와 준 지인의 안내로 레이크 루이스에 다녀왔다.
그런데 둘째 주부터 몸에 이상 증세가 나타났다.
아랫배를 무언가 예리한 바늘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나타났다.
어렵게 구한 훼미리 닥터에게 갔더니 아무래도 응급실에 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검사 결과 염증으로 나왔고 약을 먹으면서 쉬고 있었다.
한국에서 이민오던 그 달 초에도 유치원 원아 모집이다, 예비 소집일이다, 하면서 일을 하다가 왔으니 좀이 쑤셨다.
바람이라도 쏘일까, 하고 밖으로 나오다가 우편함에 꽂힌 커뮤니티 잡지를 발견하였다.
부활절이 다가오는지 표지에는 부활 달걀 색칠하기 등이 화보로 보였고 슬쩍 들쳐본 안에는 작은 글씨로 구인 광고도 있었다.
일하면서 배우실 분이라는 문구가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제 이민온 지 이 주, 무언가라도 배워야할텐데 하며 전화를 걸었다.
사람의 대답 대신 자동 응답기 소리가 들렸다.
"몬테소리 데이 케어 입니다. 메세지를 남겨주시면 전화 드리겠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온 지 이 주 되었구요. 한국에서 유치원 교사 하였습니다.
일하면서 배운다기에 이렇게 전화드립니다."
잠시 후 신기하게도 전화벨이 울렸다.
"애나 부탁합니다. 저는 몬테소리 센터 원장 입니다.
내일 아침 레쥬메(이력서) 준비하여 인터뷰 할 수 있나요?"
"네, 알겠습니다."
다음날 원장님이 환하게 맞아주시면서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오늘부터 근무할 수 있나요?" 하고 물었다.
"네,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 주만에 나는 캐나다 캘거리에서 직장을 구하였다.
원장님이 내개 시킨 일은 현관문 유리를 닦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시키지도 않은 일을 눈에 보이는대로 열심히 하였다.
그러나 영 리스닝(listening)에서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원장님에게 아무래도 영어 학교에 가서 좀 더 배우고 돌아오겠다고 의사를 밝혔더니
"학교 수업은 몇 시에 마치느냐?
내가 데리러 가겠다," 하면서 수업 마친 오후에라도 근무하라고 하였다.
아침 9시부터 2시까지 수업을 듣고, 수업 후에 잠깐 일하고 퇴근 후에는 저널 쓰기 숙제를 하였다.
앨버타 주정부에서 한국 교사 라이센스를 앨버타 라이센스로 바꾸어 준다는데 언제나 그 자격증을 보내줄 지 여름내 기다렸다.
캘거리 스탬피드 축제의 열기가 어느 정도 식어갈 무렵 사자 두 마리가 새겨진 앨버타 주정부 교사 자격증을 받았다.
앨버타 라이센스도 없이 면제 서류로 나를 채용해 주었던 원장님은 교사 자격증을 받았다는 나의 말에 반가워하며 안아주었지만 월급은 변함 없었다.
리벰브런스 데이(remembrance day)가 다가오던 어느 날
나의 운명은 다른 곳으로 물꼬를 틀고 있었다.
영어를 배우던 컬리지 빌딩 안 데이 케어에서 교사 모집을 하였고 새로 받은 서류로 접수시키니 모든 것은 달라졌다.
십 년 넘게 그곳에서 일하다가 이제는 훼미리 촤일드 케어(family child care)를 시작한 지도 어느 덧 또 다른 십 년이 넘었다.
돌아보니 나의 온 생애는 아이들과 함께 손잡고 걸어온 길이었다.
이제 은퇴를 바라보며 하루하루 정리해 나가는 시간
어느 순간, 어느 곳에서도 나의 손길을 잡아주신 그분께 감사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