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학을 전공해서일 수도 있지만,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다는 이 말을 인간을 인식하는 기본 전제로 삼고 있다. 인간은 서로 어울려 살 수밖에 없으며, 사회 속에서만 '인간은 인간이다.' 그런데 이런 내 믿음을 곤혹스럽게 만든 책이 하나 있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내 독해가 틀리지 않다면 그 말에 대한 그녀의 해석은 이렇다. "사회 속에서 인간은 정말로 동물과 같다.'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랄까. 인간은 사회 속에서 인간인가, 동물인가. (중략)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 게 아니라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고 했다. 그런데 세네카가 이 말을 '사회적 동물(animal socialis)로 번역했고, 아퀴나스는 두 말이 사실상 같다고 했다. 아렌트에 따르면 이는 대단한 오해이다. 본래 그리스에는 '사회'(societas)를 지칭하는 말이 없다.
그리스인들은 '폴리스'(polis)와 '오이코스'(oikos)라는 두 가지 분리된 삶이 있을 뿐이다. 폴리스는 공적인 토론과 결정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각 개인들은 이곳에서 말과 품성으로써 자기를 드러내고 상대방을 설득한다. 오이코스는 반대로 사적 살림살이 영역이다.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보존하는 데 필수적인, 욕구와 필요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양육과 출산, 경제적 생산이 여기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사회'는 사적이면서 동시에 공적인 것이 되었다.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서로 뒤섞이면서" 나타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고대 그리스에서 누군가 자신의 오이코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폴리스에 참여한다면 대단한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근대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공적 활동이 사적 이해관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정치 당파들은 각종 이익집단들을 대변한다. 사회란 그런 점에서 공적 영역으로 진출한 사적 영역, 오이코스 방식으로 운영되는 폴리스와 같다. 그리고 정치란 공적 영역에서 사적 이해를 조정하는 기술처럼 되었다.
하지만 공적 영역을 사적 이익을 위한 수단 정도로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책임한 태도인디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빈곤층 양산과 공동체의 파괴, 판 전체가 깨질 위험이 있다. 19세기의 혁명들은 이 점을 인식시키려 했다. 그리고 혁명가들은 '사회'개념 자체를 재 발명하려 했다. 이들은 '사회'를 사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전체'로 규정했고(코뮤니즘), 그것이 부르주아 '소유주들의 위장된 조직'(국가)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가 얼마나 성공했는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소유주들의 위장된 조직으로서의 사회'에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함께 살아가는 동료들, 빈곤하고 몸 아픈 동료 들에 대한 복지비용조차 경쟁력을 저해한다며 아까워하고, 사적 이익을 위한 악다구니가 정치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사회라면, 게다가 우리가 그 속에서 사적 이익에 눈멀어 서로 으르렁대고 있다면, 사회 속에서 우리는 틀림없는 '동물'이다.
(고병권, P81~85)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론』 서문의 첫 단락에 이렇게 썼다. "대부분의 다윈주의자들은 동종간의 치열한 경쟁이 생존경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자 진화의 주요원인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로서는 동물의 개체수가 풍부한 몇 안 되는 지역에서조차 그것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이 과학을 넘어 신앙의 지위까지 오르려던 시절에, 감히 '나는 그것을 못 보았노라'고 말했다. 유라시아 대륙을 돌아다녔고 바이칼호 근처를 뚫어져라 보았는데도 그는 종내 상호투쟁을 별로 보지 못했다. 대신 그가 본 것은 개체들의 상호부조였다. 자연의 혹독한 눈보라를 내리고, 다른 종들이 무자비한 싸움을 걸어올 때도, 아니 그럴 때일수록 동종끼리 서로 돕는 걸 더 많이 보았노라고, 그는 말했다.
동물은 동종끼리 생존수단을 놓고 싸운다는 것, 그리고 이 싸움의 과정에서 약자는 도태되고 강자가 선택된다는 것, 19세기 만연했던 사회진화론은 이런 인식을 인간세계로 확장한 것이었다. 여기에 반대했던 이들은 동물과 인간의 연결을 끊어버림으로써 대응하고자 했다. 이들은 인간의 지성이 동물로의 타락을 막아줄 것이라 믿었다. 한쪽에는 '우리도 알고 보면 늑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우리는 더 이상 늑대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셈이다.
크로포트킨은 이들로부터 정말 멀리 떨여져 있던 사람이다. 그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늑대도 늑대적이지 않다." 늑대가 서로 협력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일찌감치 굶어 죽었을 것이다. "꿀벌은 의태나 그 이외의 보호 기능이 없는 곤충이다. 만약 꿀벌이 고립되어 살아가는 곤충이었다면 이런 기능들이 없이는 멸종을 피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꿀벌은 상호부조를 실천하는 덕택에 우리가 알다시피 넓게 분포되어 있고 또한 찬탄할 정도의 지능을 얻게 되었다." 상호경쟁하는 종이 아니라 상호부조하는 종이 자연의 혹독한 시련 속에서 살아남는다. 이것의 그의 주장이다. (고추장p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