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강(裵絳):1694(숙종 20)∼ 1776(영조 52). 본관은 興海. 자는 深之. 호는 春圃. 父 行儉. 居 安東. 안동향청의 공조가 되어 향속을 진작시킴. 壽職으로 資憲大夫에 오름. 저서로는 《春圃遺稿》가 있다. [참고] 《安東鄕校誌》
배강(裵杠):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尙志. 居 安東. 楠의 동생. 趙庸의 문인. 1426년 문과에 급제하여 吏曹佐郞을 지냄. 직언과 간쟁으로 시폐를 바로 잡은 일 등이 《世宗實錄》과 《國朝人物考》 등에 전함. 金鴻洛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경(裵經):1544(중종 39)∼ 1612(광해군 5). 본관은 興海. 居 安東. 임진왜란 때 동생과 함께 모친을 할머니로 변장시켜 업고 피신함. 왜적의 무리가 가까이 이르러 해치려 하다가 형제가 모친을 껴안고 애통해 함을 보고 적이 감동하여 해치지 않음. 1617년 행적이 조정에 알려져 佐郞에 증직됨. [참고] 《嶠南誌》 《寰輿勝覽》 《興海裵氏譜》
배경봉(裵慶鳳):생몰년 미상. 호는 敬庵. 居 盈德. 許薰‧柳必永과 교유함. 經史에 능통하고 성리학과 예에 조예가 깊음. [참고] 《盈德郡誌》
배광직(裵光稷):1863(철종 14)∼1919. 본관은 興海. 자는 景熙. 父 永斗. 居 安東. 柳必永의 문인. [참고] 《興海裵氏譜》
배권(裵權):1376(우왕 2)∼ 1427(세종 9). 본관은 興海. 父 尙志. 居 安東. 1420년 蔭補로 司憲府監察을 제수 받고, 橫城縣監·奉化縣監·刑曹正郎·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함. [참고] 《嶠南誌》
배규정(裵糾正):생몰년 미상. 居 漆谷 八莒. 蔭仕로 右司議軍簿判書를 제수 받음. [참고] 《漆谷誌》
배기석(裵基奭):1887(고종 24)∼1956. 居 高靈. 1919년 3월 29일 고령군 덕곡면 가유동 소재 덕곡면사무소 구내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함. 덕곡 주재소의 일경에 의해 시위 군중은 해산 당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됨. 6월 26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름. 200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大邱慶北 抗日獨立運動史》
배남(裵楠):1384(우왕 10)∼ ?. 본관은 興海. 居 安東. 桓의 동생. 趙庸의 문인. 1411년 문과에 급제하여 成均館學諭‧司憲府監察‧吏曹正郎 등을 역임함. [참고] 《嶠南誌》
배달근(裵達根):1865(고종 2)∼1944.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덕로(裵德老):생몰년 미상. 居 漆谷. 壽職으로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음. [참고] 《漆谷誌》
배도근(裵道根):1866(고종 3)∼1923.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200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동진(裵東進):1866(고종 3)∼l939. 본관은 興海. 자는 德祖. 호는 眉巖. 居 奉化. 필법이 뛰어나 많은 유묵을 남김. [참고] 《奉化郡史》
배동환(裵東煥):1898(광무 2)∼1984. 본관은 興海. 자는 仁伯. 호는 白渚. 父 光稷. 居 安東. 柳必永의 문인. 대종교에 가입하여 포교를 표방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21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함. 출옥 후 1929년 신간회 안동지회에 참여하고, 1934년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함. 194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함.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저서로는 《白渚集》이 있다.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두여(裵斗汝):생몰년 미상. 居 浦項 興海.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후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극진히 섬김. 4세 때 부친이 병이 들었는데, 그 때 난데없이 회오리바람이 몰아쳐 문이 닫히는 순간 손가락을 다쳐 피가 흘러내리자 그 피가 부친의 병환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여 부친의 입에 注血함. 그 후부터 부친의 병세가 차츰 회복되어 효녀로 칭송을 받음. [참고] 《浦項市史》
배득인(裵得仁):1566(명종 21)∼1623(광해군 15). 본관은 興海. 자는 榮仲. 호는 洛庵. 父 經. 居 安東. 孝崇의 6대손. 1590년 增廣試 3등으로 진사에 합격함. 權紀와 함께 《永嘉誌》를 편찬함. [참고] 《司馬榜目》
배면(裵冕):1651(효종 2)∼1718(숙종 44). 본관은 興海. 자는 奉卿. 호는 綯窩. 父 興冑. 居 安東. 龍吉의 증손. 柳稷‧金學培‧李玄逸의 문인. 戶曹參議에 증직됨. 저서로는 《綯窩集》이 있다. 李晩慤이 행장을 짓고, 權璉夏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行狀」 「墓碣銘」 《嶠南誌》
배방우(裵方于):1894(고종 31)∼?. 居 安東.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장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임북 면소재지 사월에서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함. [참고] 《독립운동사》 3권 《독립운동사자료집》 5집
배병욱(裵秉旭):1867(고종 4)∼1939. 본관은 興海. 자는 景朝. 父 永錫. 居 安東. 金興洛의 문인. [참고] 《興海裵氏譜》
배봉섭(裵鳳燮):1904(광무 8)∼1990. 본관은. 자는 儀韶. 호는 剛廬. 父 弘植. 居 奉化. 李中瓚의 외손. 權相用‧朴尋洙의 문인. [참고] 《奉化郡史》
배삼근(裵三近):1537(중종 32)∼1600(선조 33). 본관은 興海. 자는 汝勇. 父 台辰. 居 安東. 三益의 동생. 金彦璣의 문인. 宣敎郞을 지냄. [참고] 《興海裵氏譜》
배삼근(裵三謹):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儒山. 居 安東. 尙志의 후손. 李滉의 문인. 參奉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 벼슬에서 물러남. [참고] 《嶠南誌》
배삼익(裵三益):1534(중종 29)∼1588(선조 21). 본관은 興海. 자는 汝友. 호는 臨淵齋. 父 天錫.��� 居 奉化‧安東. 李滉의 문인. 1558년 생원에 합격함. 1564년 문과에 급제하여 成均館學諭‧佐郞‧正郎‧正言‧豐基郡守‧襄陽府使‧弘文館校理‧左承旨‧掌隷院判決事‧成均館大司成 등을 역임함. 進賀使로 명나라를 다녀올 때 禮部의 정문을 올리고, 신종황제로부터 삼물을 하사받았으며, 환국하자 선조가 내구마 1필을 상사함. 黃海道觀察使로 부임하여 흉년에 굶주린 백성들을 구황하다가 병을 얻어 객사함. 저서로는 《臨淵齋集》이 있다. 柳成龍이 신도비명을 찬함. [참고] 「神道碑銘」 《嶠南誌》 《奉化郡史》
배상공(裵尙恭):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詮. 居 安東. 尙志의 동생.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조에 工曹典書를 지냄. 고려가 망하자 형 尙志와 함께 안동에 낙향함. 옛 동료인 典書 柳從惠가 자신의 전토를 절반이나 주어 풍산현 하회마을에 살게 됨. 사람들이 河回二典書라 일컬음. [참고] 《嶠南誌》 《永嘉誌》
배상규(裵相奎):1811(순조 11)~1890(고종 27). 본관은 興海. 자는 稚文. 父 維震. 祖父 行卿. 居 順興‧安東. 興慶의 증손. 1843년 式年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吏曹參判을 지냄. 유고가 전함.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安東鄕校誌》
배상열(裵相說):1760(영조 36)∼1789(정조 13). 본관은 興海. 자는 君弼. 호는 槐潭. 父 緝. 居 奉化. 權慶餘의 외손. 李象靖의 문인. 천문‧지리‧역학에 정통함. 渾天儀‧天軆周圍圖‧日月十二回圖‧一章七潤圖‧天會圖를 만들고 많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으나 30세 때 요절함. 저서로는 《通學六圖書》‧《畵計瑣錄》‧《四書疑義》‧《性理簒要》 등이 전함. 柳長源이 묘표를 찬함. [참고] 「墓表」 《奉化郡誌》
배상익(裵相益):1765(영조 41)∼ ?. 본관은 興海. 異名 相逵. 자는 翼之. 호는 葛伐. 父 綺. 居 安東. 裵相說의 문인. 1804년 式年試 1등으로 생원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배상지(裵尙志):1351(충정왕 3)∼ 1413(태종 13). 본관은 興海. 호는 栢竹堂. 父 詮. 居 安東. 고려 말 벼슬을 버리고 안동 금계에 물러나 잣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그 사이에 집을 지어 栢竹堂이라 편액함. 고려가 망하자 비분강개하여 두문불출함. 鏡光書院에 제향됨. 저서로는 《栢竹堂實紀》가 있다. 權瑎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상현(裵象鉉):1814(순조 14)∼1884(고종 21). 본관은 興海. 初名 相璉. 자는 耳玉. 호는 浯山. 父 曇. 居 安東. 1847년 진사에 합격함. 1849년 문과에 급제하여 肇慶殿別檢‧成均館典籍‧司憲府持平‧吏曹正郎‧成均館直講‧司諫院正言‧黃山道察訪 등을 역임함. 저서로는 《菊窓盥錄》‧《浯山集》 등이 전함. 金興洛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배상협(裵相協):1766(영조 42)∼1810(순조 10). 본관은 興海. 자는 君燮. 호는 松廬. 居 奉化‧安東. 尙志의 후손. 《中庸》의 道에 맞게 생활함. 문필에도 능함. 문집이 전함. [참고] 《奉化郡史》
배선강(裵善綱):1866(고종 3)∼l905(광무 9). 본관은 興海. 자는 益三. 호는 一柳. 居 奉化. 주자서를 연구함. 공자의 杏壇처럼 露臺를 만들어 선비들과 상유함. 후학 양성에 전력함. 유고가 전함. [참고] 《奉化郡史》
배선만(裵善萬):1805(순조 5)∼ 1880(고종 17). 본관은 興海. 자는 性浩. 호는 杜湖. 父 翰周. 居 安東.
의 현손. 1849년 진사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배선박(裵善博):1867(고종 4)∼l946. 본관은 興海. 자는 學餘. 호는 淸虛. 居 奉化. 完學보다 訓學을 중시하여 단양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함. 청렴결백으로 선비의 도를 지킴. [참고] 《奉化郡史》
배선영(裵善榮):1852(철종 3)∼1930. 본관은 興海. 자는 義五. 호는 乃山. 居 奉化. 경서와 성리학에 매진함. 유고가 전함. [참고] 《奉化郡史》
배선우(裵善佑):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晩菴. 居 永川. 三益의 10세손. 학문을 좋아하고 행실이 두터우며 經史에 널리 통달함. 左承旨에 증직됨. 문집이 전함. [참고] 《忠孝의 고장 永川》
배선원(裵善源):1808(순조 8)∼1880(고종 17). 본관은 興海. 자는 性涵. 호는 守磵. 父 翼周. 生父 翰周. 居 安東. 柳致明의 문인. 1871년 司馬試에 합격했으나 출사하지 않음. 향리에서 정자를 수축하고 학문을 연마함. 저서로는 《四七辨輯證》‧《守磵集》 등이 전함. 權相翊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선한(裵善翰):1883(고종 20)∼ 1961. 본관은 興海. 자는 伯汝. 父 龍周. 居 安東. 桓의 후손. 1906년 申乭石 의병에 참가함. 같은 해 3월 50명의 의병들과 함께 영양읍을 공격하여 무기고를 점령하고 무기를 빼앗음. 4월에는 130명의 병력으로 청송읍을 공격함. 1907년 부대를 재정비하여 진보‧영양‧평해‧청송 일대에서 일군과 싸우다가 1908년 6월에 체포됨. 그 해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름.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선회(裵善晦):1829(순조 29)∼ 1904(광무 8). 본관은 興海. 자는 叔燁. 호는 岐軒. 居 安東. 龍吉의 9세손. 뜻을 돈독히 하고 행동에 힘씀. 문행으로 명망이 있음. 權相圭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배세태(裵世泰):1890(고종 27)∼1943. 居 義城 安平. 1919년 3월 15일~3월 19일 교회 인사들과 함께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의 만세 운동을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1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소(裵素):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尙恭. 祖父 詮. 居 安東. 1408년 式年試 동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여 司宰監主簿‧養蠶採訪判官‧江原道都事‧吏曹正郎‧義城縣令 등을 역임함. [참고] 《國朝文科榜目》 《太祖實錄》 《嶠南誌》
배순(裵純):생몰년 미상. 居 榮州 梨店. 匠人으로 효행과 충의로 이름이 높음. 선조가 승하하자 3년 상을 입었고, 李滉의 喪事에도 3년 상을 입고 무쇠로 이황의 像을 주조함. 郭
이 행적을 시로 지음. [참고] 《榮州榮豐鄕土誌》
배승환(裵昇煥):1885(고종 22)~1951. 본관은 興海. 異名 成埈. 자는 起甫. 父 善模. 生父 忠模. 居 安東.
의 5대손. 1919년 6월경부터 중국 동북삼성 유하현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함. 독립군 요원을 모집하고 경북에 돌아와서 활동하다가 1920년 9월 24일 체포됨. 1921년 2월 22일 3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3년 12월 30일 병보석으로 출옥함.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연즙(裵淵楫):1875(고종 12)∼1951. 본관은 興海. 자는 元序. 居 靑松 府南. 비안과 의성 일대의 포수와 민병들을 모집하여 무장시키고 鄭鏞基의 의진에 들어감. 1906년 3월 5일 의진의 규모가 갖추어지자 영해로 진출하여 申乭石 의진과 합진하여 적과 교전 끝에 큰 전과를 올림. 그 후 청하로 진격하던 중 대장 정용기가 체포되자 고향으로 돌아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靑松郡誌》 《독립유공자공훈록》 《산남의진유사》
배영우(裵永祐):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자는 天授. 호는 沙隱. 居 奉化. 壽職으로 通政大夫에 오름. [참고] 《奉化郡史》
배영진(裵永進):1864(고종 1)~1919. 본관은 興海. 자는 希顔. 호는 白峰. 父 善宇. 居 安東. 龍吉의 9대손.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2년 만주 통화현으로 이주함. 1919년 남만에서 한족회가 조직되자 李相龍‧金大洛‧金東三 등과 이주동포들의 정착을 협의하고 황무지 개척과 청년교육에 힘씀. 오랜 고생 끝에 병을 얻어 회복하지 못하고 죽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石洲遺稿》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용길(裵龍吉):1556(명종 11)∼1609(광해군 1). 본관은 興海. 자는 明瑞. 호는 琴易堂‧藏六堂. 父 三益.��� 居 安東. 金誠一의 문인. 1585년 式年試 3등으로 진사에 합격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金垓의 휘하에서 部將으로 활약함. 1594년 洗馬‧侍直‧副率을 역임하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화의를 반대하는 소를 올림. 1602년 別試 을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藝文館檢閱‧忠淸道都事 등을 역임함. 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됨. 저서로는 《琴易堂集》이 있다. 金應祖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배용도(裵容度):1895(고종 32)∼1971.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용석(裵容奭):1890(고종 27)∼1938.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200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용운(裵容雲):1897(광무 1)∼1950.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의성지청에서 태형 90度를 받음.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유진(裵維震):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惺齋. 居 安東. 경사에 박통함. 저서로는 《惺齋遺稿》가 있다. [참고] 《嶠南誌》
배이순(裵以純):1445(세종 27)~1496(연산군 2). 본관은 興海. 자는 自强. 父 袵. 居 安東. 尙志의 현손. 1472년 진사에 합격함. 대과에 실패하고는 출사를 단념하고 임천에 자적함. 풍기 미가암에서 현재의 봉화 내성인 호평으로 이거함. 증손 三益의 현달로 인해 通訓大夫 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됨. 裵龍吉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榮州榮豐鄕土誌》
배익겸(裵益謙):1587(선조 20)~1654(효종 5). 본관은 興海. 자는 道亨. 호는 負暄堂. 父 得仁. 居 安東. 張興孝의 문인. 문예가 빼어나고 효행이 특출함. 柳必永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인길(裵寅吉):1571(선조 4)~1592(선조 25). 본관은 興海. 자는 敬甫. 父 三近. 居 奉化‧安東. 三益의 조카. 1592년 임진왜란 때에 종형인 龍吉과 함께 의병을 일으킴. 禮安縣監 申之悌의 관군과 합세하여 용궁으로 진군하여 분전하다가 전사함. 그가 타고 갔던 말이 홀로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 월성이씨는 남편을 따라 자결함. 이를 추모하고자 봉화읍 석평리 유루골에 쌍절각을 건립함. [참고] 《嶠南誌》 《奉化郡史》
배임(裵衽):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孝長. 居 榮州. 尙志의 증손. 1449년부터 右軍攝副司勇‧修義副尉副司直·彰信校尉·昭威將軍 등을 역임함. [참고] 《榮州榮豐鄕土誌》
배정(裵禎):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자는 元吉. 父 孝長. 祖父 權. 居 安東. 景分의 10세손. 일찍이 부친상을 당하여 모친 밑에서 수학함. 서법과 활쏘기에 능함. 1456년 司馬試에 합격하고 禮安訓導‧昌原敎授 등을 역임함. 李增‧南致晶‧盧孟信 등과 友鄕契를 맺음.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興海裵氏譜》
배중엽(裵重曄):1882(고종 19)∼1934. 호는 內村.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2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집(裵
):1710(숙종 36)~1755(영조 31). 본관은 興海. 자는 季珍. 호는 月峯. 父 行儉. 居 安東. 金樂行‧金聲久‧趙普陽 등과 교유함.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함. 문장과 이론이 창달하고, 학문에 성취함이 있어 두루 박식함. 저서로는 《月峯集》이 있다. 權相圭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배천석(裵天錫):1523(중종 18)~1573(선조 6). 본관은 興海. 자는 景受. 父
. 居 奉化‧安東. 1543년 權橃의 천거로 醫書習讀官을 제수 받고, 1546년 宣敎郞·忠佐衛副司果를 제수 받았으나 부모 봉양을 위하여 곧 사직함. 1558년 금계에서 도목촌으로 이거함. 아들 三益의 현달로 인해 兵曹參判에 추증됨. 具鳳齡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奉化郡史》
배천택(裵天澤):생몰년 미상. 居 大邱. 1909년 安熙濟·李元植·金東三·南亨祐·李時說 등 80여명과 함께 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함. 1910년 8월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을 돕고 부민단에서 활동함. 1919년 3.1운동 후 서간도의 독립군단체로 서로군정서가 조직되자 참가하고, 1923년 1월부터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서간도독립군단체 대표로 참석함. 1925년 1월 독립군단체인 정의부를 조직하여 간부로 활동하고, 1927년 11월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 각지대표연합회가 개최되자 정의부의 대표로 참가함. 한국혁명당을 조직했다가 1934년 남경에서 만주의 한국독립당과 통합하여 신한독립당을 창당하고 간부로 활동함.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운동사》 4‧5권 《독립운동사자료집》 12집 《독립유공자공훈록》
배태근(裵太根):1871(고종 8)~1923. 본관은 興海. 異名 大根. 居 安東. 尙志의 후손.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운동사》 3권 《독립운동사자료집》 5집
배한주(裵漢周):1849(헌종 15)∼?. 본관은 興海. 자는 順朝. 호는 樊隱. 父 顯八. 居 奉化‧安東. 1892년 別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司諫院正言을 지냄.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奉化郡史》
배행검(裵行儉):1673(현종 14)~1752(영조 28). 본관은 興海. 자는 守約. 호는 三餘堂. 父 冕. 居 安東. 일찍이 李光靖‧權德秀 등과 도의와 문장으로 강마함. 향중의 선비들에게 박식고론함으로 칭송받음. 戶曹參判에 증직됨. 저서로는 《三餘堂集》이 있다. 權璉夏가 행장을 지음. [참고] 「行狀」 《嶠南誌》
배헌(裵
):1482(성종 13)~1524(중종 19). 본관은 興海. 자는 獻之. 父 以純. 居 奉化‧安東. 景分의 후손. 15세에 부친상을 당함. 1516년에 생원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유학함. 출사를 단념하고 자제의 교육에 전념함. 내성향약을 만들어 향리의 풍속을 순화시킴. 손자 三益의 현달로 인해 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兼 經筳參贊官에 추증됨. 裵龍吉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奉化郡史》
배혁모(裵赫模):1875(고종 12)~1960. 본관은 興海. 자는 聖助. 居 安東. 龍吉의 12대손.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중평리 장날에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운동사》 3권 《독립운동사자료집》 5집 《안동독립운동가 700인》
배현부(裵顯溥):1775(영조 51)~1851(철종 2). 본관은 興海. 자는 穉博. 호는 儉庵. 居 安東. 柳徽文·李野淳의 문인. 權載成‧李蓍秀‧權仁濩‧金百行 등과 교유함. 저서로는 《儉庵集》이 있다. 金浩直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배현주(裵賢周):생몰년 미상. 居 浦項. 부모를 모시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부자가 같은 날 함께 죽는 것이 내 소원이다.”라고 말했는데 忌祭時에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모신 후 취침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니 침상에 혈흔이 있었음. 나라에서 사실을 알고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에 증직함. [참고] 《浦項市史》
배환(裵桓):1379(우왕 5)~ 본관은 興海. 父 尙志. 居 安東. 權의 동생. 1401년 문과에 급제하여 藝文館直提學‧左右司諫 등을 거쳐 兵曹‧刑曹‧工曹 등의 參議을 역임하고, 황해도‧전라도‧충청도 觀察使를 역임함. 宣慰使를 겸직하여 광주에서 일본사신을 접견하고, 그 뒤 晉州牧使를 지냄. 琴鏞夏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회주(裵會周):1823(순조 23)~1868(고종 5). 본관은 興海. 자는 汝極. 父 顯溥. 居 安東. 1865년 생원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배효건(裵孝謇):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桓. 居 安東. 孝崇의 동생. 玉果縣監‧南原鎭管兵馬節制都尉 등을 역임함. 만년에 李增‧南致恭‧權自謙 등 고장의 덕망 있는 선비 13명과 友鄕契를 맺고 풍속 교화에 이바지함. [참고] 《興海裵氏譜》
배효사(裵孝思):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桓. 居 安東. 孝謇의 동생. 彦陽縣監을 지냄. 1467년 南怡와 李施愛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原從功臣에 책록됨. [참고]《興海裵氏譜》
배효숭(裵孝崇):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糟谷. 父 桓. 居 安東. 1447년 式年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司憲府執義‧驪興府使 등을 역임함. 原從功臣에 책록됨.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배효종(裵孝從):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桓. 居 安東. 司憲府監察을 지냄. [참고] 《興海裵氏譜》
배흥조(裵興祚):1630(인조 8)~1689(숙종 15). 본관은 興海. 자는 振夫. 호는 後澗. 祖父 龍吉. 居 安東. 觀察使가 조정에 천거했으나 은명이 내리기 전에 세상을 떠남. 저서로는 《易說考異》가 있다. [참고] 《安東鄕校誌》
배희목(裵熙穆):1861(철종 12)∼? 본관은 興海. 자는 德敏. 父 永浩. 居 安東. 尙志의 후손. 1885년 增廣試 3등으로 생원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배희직(裵熙稷):1868(고종 5)∼1942. 居 靑松 府東. 沈誠之 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함. 1896년 4월 2일 인근지역의 金象鍾‧金河洛 의진과 연계하여 감은리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적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림.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赤猿日記》
배희직(裵羲稷):1883(고종 20)∼1969. 居 蔚珍. 1919년 3월 19일 영덕 창수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함. 2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인 가운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위 군중을 주도함.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됨.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음. 199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강(裵杠):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尙志. 居 安東. 楠의 동생. 趙庸의 문인. 1426년 문과에 급제하여 吏曹佐郞을 지냄. 직언과 간쟁으로 시폐를 바로 잡은 일 등이 《世宗實錄》과 《國朝人物考》 등에 전함. 金鴻洛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경(裵經):1544(중종 39)∼ 1612(광해군 5). 본관은 興海. 居 安東. 임진왜란 때 동생과 함께 모친을 할머니로 변장시켜 업고 피신함. 왜적의 무리가 가까이 이르러 해치려 하다가 형제가 모친을 껴안고 애통해 함을 보고 적이 감동하여 해치지 않음. 1617년 행적이 조정에 알려져 佐郞에 증직됨. [참고] 《嶠南誌》 《寰輿勝覽》 《興海裵氏譜》
배경봉(裵慶鳳):생몰년 미상. 호는 敬庵. 居 盈德. 許薰‧柳必永과 교유함. 經史에 능통하고 성리학과 예에 조예가 깊음. [참고] 《盈德郡誌》
배광직(裵光稷):1863(철종 14)∼1919. 본관은 興海. 자는 景熙. 父 永斗. 居 安東. 柳必永의 문인. [참고] 《興海裵氏譜》
배권(裵權):1376(우왕 2)∼ 1427(세종 9). 본관은 興海. 父 尙志. 居 安東. 1420년 蔭補로 司憲府監察을 제수 받고, 橫城縣監·奉化縣監·刑曹正郎·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함. [참고] 《嶠南誌》
배규정(裵糾正):생몰년 미상. 居 漆谷 八莒. 蔭仕로 右司議軍簿判書를 제수 받음. [참고] 《漆谷誌》
배기석(裵基奭):1887(고종 24)∼1956. 居 高靈. 1919년 3월 29일 고령군 덕곡면 가유동 소재 덕곡면사무소 구내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함. 덕곡 주재소의 일경에 의해 시위 군중은 해산 당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됨. 6월 26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름. 200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大邱慶北 抗日獨立運動史》
배남(裵楠):1384(우왕 10)∼ ?. 본관은 興海. 居 安東. 桓의 동생. 趙庸의 문인. 1411년 문과에 급제하여 成均館學諭‧司憲府監察‧吏曹正郎 등을 역임함. [참고] 《嶠南誌》
배달근(裵達根):1865(고종 2)∼1944.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덕로(裵德老):생몰년 미상. 居 漆谷. 壽職으로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음. [참고] 《漆谷誌》
배도근(裵道根):1866(고종 3)∼1923.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200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동진(裵東進):1866(고종 3)∼l939. 본관은 興海. 자는 德祖. 호는 眉巖. 居 奉化. 필법이 뛰어나 많은 유묵을 남김. [참고] 《奉化郡史》
배동환(裵東煥):1898(광무 2)∼1984. 본관은 興海. 자는 仁伯. 호는 白渚. 父 光稷. 居 安東. 柳必永의 문인. 대종교에 가입하여 포교를 표방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21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함. 출옥 후 1929년 신간회 안동지회에 참여하고, 1934년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함. 194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함.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저서로는 《白渚集》이 있다.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두여(裵斗汝):생몰년 미상. 居 浦項 興海.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후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극진히 섬김. 4세 때 부친이 병이 들었는데, 그 때 난데없이 회오리바람이 몰아쳐 문이 닫히는 순간 손가락을 다쳐 피가 흘러내리자 그 피가 부친의 병환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여 부친의 입에 注血함. 그 후부터 부친의 병세가 차츰 회복되어 효녀로 칭송을 받음. [참고] 《浦項市史》
배득인(裵得仁):1566(명종 21)∼1623(광해군 15). 본관은 興海. 자는 榮仲. 호는 洛庵. 父 經. 居 安東. 孝崇의 6대손. 1590년 增廣試 3등으로 진사에 합격함. 權紀와 함께 《永嘉誌》를 편찬함. [참고] 《司馬榜目》
배면(裵冕):1651(효종 2)∼1718(숙종 44). 본관은 興海. 자는 奉卿. 호는 綯窩. 父 興冑. 居 安東. 龍吉의 증손. 柳稷‧金學培‧李玄逸의 문인. 戶曹參議에 증직됨. 저서로는 《綯窩集》이 있다. 李晩慤이 행장을 짓고, 權璉夏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行狀」 「墓碣銘」 《嶠南誌》
배방우(裵方于):1894(고종 31)∼?. 居 安東.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장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임북 면소재지 사월에서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함. [참고] 《독립운동사》 3권 《독립운동사자료집》 5집
배병욱(裵秉旭):1867(고종 4)∼1939. 본관은 興海. 자는 景朝. 父 永錫. 居 安東. 金興洛의 문인. [참고] 《興海裵氏譜》
배봉섭(裵鳳燮):1904(광무 8)∼1990. 본관은. 자는 儀韶. 호는 剛廬. 父 弘植. 居 奉化. 李中瓚의 외손. 權相用‧朴尋洙의 문인. [참고] 《奉化郡史》
배삼근(裵三近):1537(중종 32)∼1600(선조 33). 본관은 興海. 자는 汝勇. 父 台辰. 居 安東. 三益의 동생. 金彦璣의 문인. 宣敎郞을 지냄. [참고] 《興海裵氏譜》
배삼근(裵三謹):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儒山. 居 安東. 尙志의 후손. 李滉의 문인. 參奉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 벼슬에서 물러남. [참고] 《嶠南誌》
배삼익(裵三益):1534(중종 29)∼1588(선조 21). 본관은 興海. 자는 汝友. 호는 臨淵齋. 父 天錫.��� 居 奉化‧安東. 李滉의 문인. 1558년 생원에 합격함. 1564년 문과에 급제하여 成均館學諭‧佐郞‧正郎‧正言‧豐基郡守‧襄陽府使‧弘文館校理‧左承旨‧掌隷院判決事‧成均館大司成 등을 역임함. 進賀使로 명나라를 다녀올 때 禮部의 정문을 올리고, 신종황제로부터 삼물을 하사받았으며, 환국하자 선조가 내구마 1필을 상사함. 黃海道觀察使로 부임하여 흉년에 굶주린 백성들을 구황하다가 병을 얻어 객사함. 저서로는 《臨淵齋集》이 있다. 柳成龍이 신도비명을 찬함. [참고] 「神道碑銘」 《嶠南誌》 《奉化郡史》
배상공(裵尙恭):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詮. 居 安東. 尙志의 동생.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조에 工曹典書를 지냄. 고려가 망하자 형 尙志와 함께 안동에 낙향함. 옛 동료인 典書 柳從惠가 자신의 전토를 절반이나 주어 풍산현 하회마을에 살게 됨. 사람들이 河回二典書라 일컬음. [참고] 《嶠南誌》 《永嘉誌》
배상규(裵相奎):1811(순조 11)~1890(고종 27). 본관은 興海. 자는 稚文. 父 維震. 祖父 行卿. 居 順興‧安東. 興慶의 증손. 1843년 式年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吏曹參判을 지냄. 유고가 전함.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安東鄕校誌》
배상열(裵相說):1760(영조 36)∼1789(정조 13). 본관은 興海. 자는 君弼. 호는 槐潭. 父 緝. 居 奉化. 權慶餘의 외손. 李象靖의 문인. 천문‧지리‧역학에 정통함. 渾天儀‧天軆周圍圖‧日月十二回圖‧一章七潤圖‧天會圖를 만들고 많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으나 30세 때 요절함. 저서로는 《通學六圖書》‧《畵計瑣錄》‧《四書疑義》‧《性理簒要》 등이 전함. 柳長源이 묘표를 찬함. [참고] 「墓表」 《奉化郡誌》
배상익(裵相益):1765(영조 41)∼ ?. 본관은 興海. 異名 相逵. 자는 翼之. 호는 葛伐. 父 綺. 居 安東. 裵相說의 문인. 1804년 式年試 1등으로 생원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배상지(裵尙志):1351(충정왕 3)∼ 1413(태종 13). 본관은 興海. 호는 栢竹堂. 父 詮. 居 安東. 고려 말 벼슬을 버리고 안동 금계에 물러나 잣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그 사이에 집을 지어 栢竹堂이라 편액함. 고려가 망하자 비분강개하여 두문불출함. 鏡光書院에 제향됨. 저서로는 《栢竹堂實紀》가 있다. 權瑎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상현(裵象鉉):1814(순조 14)∼1884(고종 21). 본관은 興海. 初名 相璉. 자는 耳玉. 호는 浯山. 父 曇. 居 安東. 1847년 진사에 합격함. 1849년 문과에 급제하여 肇慶殿別檢‧成均館典籍‧司憲府持平‧吏曹正郎‧成均館直講‧司諫院正言‧黃山道察訪 등을 역임함. 저서로는 《菊窓盥錄》‧《浯山集》 등이 전함. 金興洛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배상협(裵相協):1766(영조 42)∼1810(순조 10). 본관은 興海. 자는 君燮. 호는 松廬. 居 奉化‧安東. 尙志의 후손. 《中庸》의 道에 맞게 생활함. 문필에도 능함. 문집이 전함. [참고] 《奉化郡史》
배선강(裵善綱):1866(고종 3)∼l905(광무 9). 본관은 興海. 자는 益三. 호는 一柳. 居 奉化. 주자서를 연구함. 공자의 杏壇처럼 露臺를 만들어 선비들과 상유함. 후학 양성에 전력함. 유고가 전함. [참고] 《奉化郡史》
배선만(裵善萬):1805(순조 5)∼ 1880(고종 17). 본관은 興海. 자는 性浩. 호는 杜湖. 父 翰周. 居 安東.
의 현손. 1849년 진사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배선박(裵善博):1867(고종 4)∼l946. 본관은 興海. 자는 學餘. 호는 淸虛. 居 奉化. 完學보다 訓學을 중시하여 단양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함. 청렴결백으로 선비의 도를 지킴. [참고] 《奉化郡史》
배선영(裵善榮):1852(철종 3)∼1930. 본관은 興海. 자는 義五. 호는 乃山. 居 奉化. 경서와 성리학에 매진함. 유고가 전함. [참고] 《奉化郡史》
배선우(裵善佑):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晩菴. 居 永川. 三益의 10세손. 학문을 좋아하고 행실이 두터우며 經史에 널리 통달함. 左承旨에 증직됨. 문집이 전함. [참고] 《忠孝의 고장 永川》
배선원(裵善源):1808(순조 8)∼1880(고종 17). 본관은 興海. 자는 性涵. 호는 守磵. 父 翼周. 生父 翰周. 居 安東. 柳致明의 문인. 1871년 司馬試에 합격했으나 출사하지 않음. 향리에서 정자를 수축하고 학문을 연마함. 저서로는 《四七辨輯證》‧《守磵集》 등이 전함. 權相翊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선한(裵善翰):1883(고종 20)∼ 1961. 본관은 興海. 자는 伯汝. 父 龍周. 居 安東. 桓의 후손. 1906년 申乭石 의병에 참가함. 같은 해 3월 50명의 의병들과 함께 영양읍을 공격하여 무기고를 점령하고 무기를 빼앗음. 4월에는 130명의 병력으로 청송읍을 공격함. 1907년 부대를 재정비하여 진보‧영양‧평해‧청송 일대에서 일군과 싸우다가 1908년 6월에 체포됨. 그 해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름.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선회(裵善晦):1829(순조 29)∼ 1904(광무 8). 본관은 興海. 자는 叔燁. 호는 岐軒. 居 安東. 龍吉의 9세손. 뜻을 돈독히 하고 행동에 힘씀. 문행으로 명망이 있음. 權相圭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배세태(裵世泰):1890(고종 27)∼1943. 居 義城 安平. 1919년 3월 15일~3월 19일 교회 인사들과 함께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의 만세 운동을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1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소(裵素):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尙恭. 祖父 詮. 居 安東. 1408년 式年試 동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여 司宰監主簿‧養蠶採訪判官‧江原道都事‧吏曹正郎‧義城縣令 등을 역임함. [참고] 《國朝文科榜目》 《太祖實錄》 《嶠南誌》
배순(裵純):생몰년 미상. 居 榮州 梨店. 匠人으로 효행과 충의로 이름이 높음. 선조가 승하하자 3년 상을 입었고, 李滉의 喪事에도 3년 상을 입고 무쇠로 이황의 像을 주조함. 郭
이 행적을 시로 지음. [참고] 《榮州榮豐鄕土誌》
배승환(裵昇煥):1885(고종 22)~1951. 본관은 興海. 異名 成埈. 자는 起甫. 父 善模. 生父 忠模. 居 安東.
의 5대손. 1919년 6월경부터 중국 동북삼성 유하현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함. 독립군 요원을 모집하고 경북에 돌아와서 활동하다가 1920년 9월 24일 체포됨. 1921년 2월 22일 3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3년 12월 30일 병보석으로 출옥함.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연즙(裵淵楫):1875(고종 12)∼1951. 본관은 興海. 자는 元序. 居 靑松 府南. 비안과 의성 일대의 포수와 민병들을 모집하여 무장시키고 鄭鏞基의 의진에 들어감. 1906년 3월 5일 의진의 규모가 갖추어지자 영해로 진출하여 申乭石 의진과 합진하여 적과 교전 끝에 큰 전과를 올림. 그 후 청하로 진격하던 중 대장 정용기가 체포되자 고향으로 돌아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靑松郡誌》 《독립유공자공훈록》 《산남의진유사》
배영우(裵永祐):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자는 天授. 호는 沙隱. 居 奉化. 壽職으로 通政大夫에 오름. [참고] 《奉化郡史》
배영진(裵永進):1864(고종 1)~1919. 본관은 興海. 자는 希顔. 호는 白峰. 父 善宇. 居 安東. 龍吉의 9대손.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2년 만주 통화현으로 이주함. 1919년 남만에서 한족회가 조직되자 李相龍‧金大洛‧金東三 등과 이주동포들의 정착을 협의하고 황무지 개척과 청년교육에 힘씀. 오랜 고생 끝에 병을 얻어 회복하지 못하고 죽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石洲遺稿》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용길(裵龍吉):1556(명종 11)∼1609(광해군 1). 본관은 興海. 자는 明瑞. 호는 琴易堂‧藏六堂. 父 三益.��� 居 安東. 金誠一의 문인. 1585년 式年試 3등으로 진사에 합격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金垓의 휘하에서 部將으로 활약함. 1594년 洗馬‧侍直‧副率을 역임하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화의를 반대하는 소를 올림. 1602년 別試 을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藝文館檢閱‧忠淸道都事 등을 역임함. 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됨. 저서로는 《琴易堂集》이 있다. 金應祖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배용도(裵容度):1895(고종 32)∼1971.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용석(裵容奭):1890(고종 27)∼1938.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200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용운(裵容雲):1897(광무 1)∼1950.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의성지청에서 태형 90度를 받음.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유진(裵維震):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惺齋. 居 安東. 경사에 박통함. 저서로는 《惺齋遺稿》가 있다. [참고] 《嶠南誌》
배이순(裵以純):1445(세종 27)~1496(연산군 2). 본관은 興海. 자는 自强. 父 袵. 居 安東. 尙志의 현손. 1472년 진사에 합격함. 대과에 실패하고는 출사를 단념하고 임천에 자적함. 풍기 미가암에서 현재의 봉화 내성인 호평으로 이거함. 증손 三益의 현달로 인해 通訓大夫 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됨. 裵龍吉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榮州榮豐鄕土誌》
배익겸(裵益謙):1587(선조 20)~1654(효종 5). 본관은 興海. 자는 道亨. 호는 負暄堂. 父 得仁. 居 安東. 張興孝의 문인. 문예가 빼어나고 효행이 특출함. 柳必永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인길(裵寅吉):1571(선조 4)~1592(선조 25). 본관은 興海. 자는 敬甫. 父 三近. 居 奉化‧安東. 三益의 조카. 1592년 임진왜란 때에 종형인 龍吉과 함께 의병을 일으킴. 禮安縣監 申之悌의 관군과 합세하여 용궁으로 진군하여 분전하다가 전사함. 그가 타고 갔던 말이 홀로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 월성이씨는 남편을 따라 자결함. 이를 추모하고자 봉화읍 석평리 유루골에 쌍절각을 건립함. [참고] 《嶠南誌》 《奉化郡史》
배임(裵衽):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孝長. 居 榮州. 尙志의 증손. 1449년부터 右軍攝副司勇‧修義副尉副司直·彰信校尉·昭威將軍 등을 역임함. [참고] 《榮州榮豐鄕土誌》
배정(裵禎):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자는 元吉. 父 孝長. 祖父 權. 居 安東. 景分의 10세손. 일찍이 부친상을 당하여 모친 밑에서 수학함. 서법과 활쏘기에 능함. 1456년 司馬試에 합격하고 禮安訓導‧昌原敎授 등을 역임함. 李增‧南致晶‧盧孟信 등과 友鄕契를 맺음.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興海裵氏譜》
배중엽(裵重曄):1882(고종 19)∼1934. 호는 內村.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2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집(裵
):1710(숙종 36)~1755(영조 31). 본관은 興海. 자는 季珍. 호는 月峯. 父 行儉. 居 安東. 金樂行‧金聲久‧趙普陽 등과 교유함.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함. 문장과 이론이 창달하고, 학문에 성취함이 있어 두루 박식함. 저서로는 《月峯集》이 있다. 權相圭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배천석(裵天錫):1523(중종 18)~1573(선조 6). 본관은 興海. 자는 景受. 父
. 居 奉化‧安東. 1543년 權橃의 천거로 醫書習讀官을 제수 받고, 1546년 宣敎郞·忠佐衛副司果를 제수 받았으나 부모 봉양을 위하여 곧 사직함. 1558년 금계에서 도목촌으로 이거함. 아들 三益의 현달로 인해 兵曹參判에 추증됨. 具鳳齡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奉化郡史》
배천택(裵天澤):생몰년 미상. 居 大邱. 1909년 安熙濟·李元植·金東三·南亨祐·李時說 등 80여명과 함께 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함. 1910년 8월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을 돕고 부민단에서 활동함. 1919년 3.1운동 후 서간도의 독립군단체로 서로군정서가 조직되자 참가하고, 1923년 1월부터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서간도독립군단체 대표로 참석함. 1925년 1월 독립군단체인 정의부를 조직하여 간부로 활동하고, 1927년 11월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 각지대표연합회가 개최되자 정의부의 대표로 참가함. 한국혁명당을 조직했다가 1934년 남경에서 만주의 한국독립당과 통합하여 신한독립당을 창당하고 간부로 활동함.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운동사》 4‧5권 《독립운동사자료집》 12집 《독립유공자공훈록》
배태근(裵太根):1871(고종 8)~1923. 본관은 興海. 異名 大根. 居 安東. 尙志의 후손.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운동사》 3권 《독립운동사자료집》 5집
배한주(裵漢周):1849(헌종 15)∼?. 본관은 興海. 자는 順朝. 호는 樊隱. 父 顯八. 居 奉化‧安東. 1892년 別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司諫院正言을 지냄.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奉化郡史》
배행검(裵行儉):1673(현종 14)~1752(영조 28). 본관은 興海. 자는 守約. 호는 三餘堂. 父 冕. 居 安東. 일찍이 李光靖‧權德秀 등과 도의와 문장으로 강마함. 향중의 선비들에게 박식고론함으로 칭송받음. 戶曹參判에 증직됨. 저서로는 《三餘堂集》이 있다. 權璉夏가 행장을 지음. [참고] 「行狀」 《嶠南誌》
배헌(裵
):1482(성종 13)~1524(중종 19). 본관은 興海. 자는 獻之. 父 以純. 居 奉化‧安東. 景分의 후손. 15세에 부친상을 당함. 1516년에 생원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유학함. 출사를 단념하고 자제의 교육에 전념함. 내성향약을 만들어 향리의 풍속을 순화시킴. 손자 三益의 현달로 인해 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兼 經筳參贊官에 추증됨. 裵龍吉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奉化郡史》
배혁모(裵赫模):1875(고종 12)~1960. 본관은 興海. 자는 聖助. 居 安東. 龍吉의 12대손.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중평리 장날에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운동사》 3권 《독립운동사자료집》 5집 《안동독립운동가 700인》
배현부(裵顯溥):1775(영조 51)~1851(철종 2). 본관은 興海. 자는 穉博. 호는 儉庵. 居 安東. 柳徽文·李野淳의 문인. 權載成‧李蓍秀‧權仁濩‧金百行 등과 교유함. 저서로는 《儉庵集》이 있다. 金浩直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배현주(裵賢周):생몰년 미상. 居 浦項. 부모를 모시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부자가 같은 날 함께 죽는 것이 내 소원이다.”라고 말했는데 忌祭時에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모신 후 취침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니 침상에 혈흔이 있었음. 나라에서 사실을 알고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에 증직함. [참고] 《浦項市史》
배환(裵桓):1379(우왕 5)~ 본관은 興海. 父 尙志. 居 安東. 權의 동생. 1401년 문과에 급제하여 藝文館直提學‧左右司諫 등을 거쳐 兵曹‧刑曹‧工曹 등의 參議을 역임하고, 황해도‧전라도‧충청도 觀察使를 역임함. 宣慰使를 겸직하여 광주에서 일본사신을 접견하고, 그 뒤 晉州牧使를 지냄. 琴鏞夏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회주(裵會周):1823(순조 23)~1868(고종 5). 본관은 興海. 자는 汝極. 父 顯溥. 居 安東. 1865년 생원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배효건(裵孝謇):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桓. 居 安東. 孝崇의 동생. 玉果縣監‧南原鎭管兵馬節制都尉 등을 역임함. 만년에 李增‧南致恭‧權自謙 등 고장의 덕망 있는 선비 13명과 友鄕契를 맺고 풍속 교화에 이바지함. [참고] 《興海裵氏譜》
배효사(裵孝思):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桓. 居 安東. 孝謇의 동생. 彦陽縣監을 지냄. 1467년 南怡와 李施愛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原從功臣에 책록됨. [참고]《興海裵氏譜》
배효숭(裵孝崇):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糟谷. 父 桓. 居 安東. 1447년 式年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司憲府執義‧驪興府使 등을 역임함. 原從功臣에 책록됨.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배효종(裵孝從):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桓. 居 安東. 司憲府監察을 지냄. [참고] 《興海裵氏譜》
배흥조(裵興祚):1630(인조 8)~1689(숙종 15). 본관은 興海. 자는 振夫. 호는 後澗. 祖父 龍吉. 居 安東. 觀察使가 조정에 천거했으나 은명이 내리기 전에 세상을 떠남. 저서로는 《易說考異》가 있다. [참고] 《安東鄕校誌》
배희목(裵熙穆):1861(철종 12)∼? 본관은 興海. 자는 德敏. 父 永浩. 居 安東. 尙志의 후손. 1885년 增廣試 3등으로 생원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배희직(裵熙稷):1868(고종 5)∼1942. 居 靑松 府東. 沈誠之 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함. 1896년 4월 2일 인근지역의 金象鍾‧金河洛 의진과 연계하여 감은리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적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림.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赤猿日記》
배희직(裵羲稷):1883(고종 20)∼1969. 居 蔚珍. 1919년 3월 19일 영덕 창수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함. 2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인 가운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위 군중을 주도함.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됨.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음. 199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강(裵杠):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尙志. 居 安東. 楠의 동생. 趙庸의 문인. 1426년 문과에 급제하여 吏曹佐郞을 지냄. 직언과 간쟁으로 시폐를 바로 잡은 일 등이 《世宗實錄》과 《國朝人物考》 등에 전함. 金鴻洛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경(裵經):1544(중종 39)∼ 1612(광해군 5). 본관은 興海. 居 安東. 임진왜란 때 동생과 함께 모친을 할머니로 변장시켜 업고 피신함. 왜적의 무리가 가까이 이르러 해치려 하다가 형제가 모친을 껴안고 애통해 함을 보고 적이 감동하여 해치지 않음. 1617년 행적이 조정에 알려져 佐郞에 증직됨. [참고] 《嶠南誌》 《寰輿勝覽》 《興海裵氏譜》
배경봉(裵慶鳳):생몰년 미상. 호는 敬庵. 居 盈德. 許薰‧柳必永과 교유함. 經史에 능통하고 성리학과 예에 조예가 깊음. [참고] 《盈德郡誌》
배광직(裵光稷):1863(철종 14)∼1919. 본관은 興海. 자는 景熙. 父 永斗. 居 安東. 柳必永의 문인. [참고] 《興海裵氏譜》
배권(裵權):1376(우왕 2)∼ 1427(세종 9). 본관은 興海. 父 尙志. 居 安東. 1420년 蔭補로 司憲府監察을 제수 받고, 橫城縣監·奉化縣監·刑曹正郎·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함. [참고] 《嶠南誌》
배규정(裵糾正):생몰년 미상. 居 漆谷 八莒. 蔭仕로 右司議軍簿判書를 제수 받음. [참고] 《漆谷誌》
배기석(裵基奭):1887(고종 24)∼1956. 居 高靈. 1919년 3월 29일 고령군 덕곡면 가유동 소재 덕곡면사무소 구내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함. 덕곡 주재소의 일경에 의해 시위 군중은 해산 당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됨. 6월 26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름. 200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大邱慶北 抗日獨立運動史》
배남(裵楠):1384(우왕 10)∼ ?. 본관은 興海. 居 安東. 桓의 동생. 趙庸의 문인. 1411년 문과에 급제하여 成均館學諭‧司憲府監察‧吏曹正郎 등을 역임함. [참고] 《嶠南誌》
배달근(裵達根):1865(고종 2)∼1944.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덕로(裵德老):생몰년 미상. 居 漆谷. 壽職으로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음. [참고] 《漆谷誌》
배도근(裵道根):1866(고종 3)∼1923.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200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동진(裵東進):1866(고종 3)∼l939. 본관은 興海. 자는 德祖. 호는 眉巖. 居 奉化. 필법이 뛰어나 많은 유묵을 남김. [참고] 《奉化郡史》
배동환(裵東煥):1898(광무 2)∼1984. 본관은 興海. 자는 仁伯. 호는 白渚. 父 光稷. 居 安東. 柳必永의 문인. 대종교에 가입하여 포교를 표방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21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함. 출옥 후 1929년 신간회 안동지회에 참여하고, 1934년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함. 194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함.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저서로는 《白渚集》이 있다.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두여(裵斗汝):생몰년 미상. 居 浦項 興海.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후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극진히 섬김. 4세 때 부친이 병이 들었는데, 그 때 난데없이 회오리바람이 몰아쳐 문이 닫히는 순간 손가락을 다쳐 피가 흘러내리자 그 피가 부친의 병환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여 부친의 입에 注血함. 그 후부터 부친의 병세가 차츰 회복되어 효녀로 칭송을 받음. [참고] 《浦項市史》
배득인(裵得仁):1566(명종 21)∼1623(광해군 15). 본관은 興海. 자는 榮仲. 호는 洛庵. 父 經. 居 安東. 孝崇의 6대손. 1590년 增廣試 3등으로 진사에 합격함. 權紀와 함께 《永嘉誌》를 편찬함. [참고] 《司馬榜目》
배면(裵冕):1651(효종 2)∼1718(숙종 44). 본관은 興海. 자는 奉卿. 호는 綯窩. 父 興冑. 居 安東. 龍吉의 증손. 柳稷‧金學培‧李玄逸의 문인. 戶曹參議에 증직됨. 저서로는 《綯窩集》이 있다. 李晩慤이 행장을 짓고, 權璉夏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行狀」 「墓碣銘」 《嶠南誌》
배방우(裵方于):1894(고종 31)∼?. 居 安東.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장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임북 면소재지 사월에서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함. [참고] 《독립운동사》 3권 《독립운동사자료집》 5집
배병욱(裵秉旭):1867(고종 4)∼1939. 본관은 興海. 자는 景朝. 父 永錫. 居 安東. 金興洛의 문인. [참고] 《興海裵氏譜》
배봉섭(裵鳳燮):1904(광무 8)∼1990. 본관은. 자는 儀韶. 호는 剛廬. 父 弘植. 居 奉化. 李中瓚의 외손. 權相用‧朴尋洙의 문인. [참고] 《奉化郡史》
배삼근(裵三近):1537(중종 32)∼1600(선조 33). 본관은 興海. 자는 汝勇. 父 台辰. 居 安東. 三益의 동생. 金彦璣의 문인. 宣敎郞을 지냄. [참고] 《興海裵氏譜》
배삼근(裵三謹):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儒山. 居 安東. 尙志의 후손. 李滉의 문인. 參奉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 벼슬에서 물러남. [참고] 《嶠南誌》
배삼익(裵三益):1534(중종 29)∼1588(선조 21). 본관은 興海. 자는 汝友. 호는 臨淵齋. 父 天錫.��� 居 奉化‧安東. 李滉의 문인. 1558년 생원에 합격함. 1564년 문과에 급제하여 成均館學諭‧佐郞‧正郎‧正言‧豐基郡守‧襄陽府使‧弘文館校理‧左承旨‧掌隷院判決事‧成均館大司成 등을 역임함. 進賀使로 명나라를 다녀올 때 禮部의 정문을 올리고, 신종황제로부터 삼물을 하사받았으며, 환국하자 선조가 내구마 1필을 상사함. 黃海道觀察使로 부임하여 흉년에 굶주린 백성들을 구황하다가 병을 얻어 객사함. 저서로는 《臨淵齋集》이 있다. 柳成龍이 신도비명을 찬함. [참고] 「神道碑銘」 《嶠南誌》 《奉化郡史》
배상공(裵尙恭):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詮. 居 安東. 尙志의 동생.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조에 工曹典書를 지냄. 고려가 망하자 형 尙志와 함께 안동에 낙향함. 옛 동료인 典書 柳從惠가 자신의 전토를 절반이나 주어 풍산현 하회마을에 살게 됨. 사람들이 河回二典書라 일컬음. [참고] 《嶠南誌》 《永嘉誌》
배상규(裵相奎):1811(순조 11)~1890(고종 27). 본관은 興海. 자는 稚文. 父 維震. 祖父 行卿. 居 順興‧安東. 興慶의 증손. 1843년 式年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吏曹參判을 지냄. 유고가 전함.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安東鄕校誌》
배상열(裵相說):1760(영조 36)∼1789(정조 13). 본관은 興海. 자는 君弼. 호는 槐潭. 父 緝. 居 奉化. 權慶餘의 외손. 李象靖의 문인. 천문‧지리‧역학에 정통함. 渾天儀‧天軆周圍圖‧日月十二回圖‧一章七潤圖‧天會圖를 만들고 많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으나 30세 때 요절함. 저서로는 《通學六圖書》‧《畵計瑣錄》‧《四書疑義》‧《性理簒要》 등이 전함. 柳長源이 묘표를 찬함. [참고] 「墓表」 《奉化郡誌》
배상익(裵相益):1765(영조 41)∼ ?. 본관은 興海. 異名 相逵. 자는 翼之. 호는 葛伐. 父 綺. 居 安東. 裵相說의 문인. 1804년 式年試 1등으로 생원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배상지(裵尙志):1351(충정왕 3)∼ 1413(태종 13). 본관은 興海. 호는 栢竹堂. 父 詮. 居 安東. 고려 말 벼슬을 버리고 안동 금계에 물러나 잣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그 사이에 집을 지어 栢竹堂이라 편액함. 고려가 망하자 비분강개하여 두문불출함. 鏡光書院에 제향됨. 저서로는 《栢竹堂實紀》가 있다. 權瑎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상현(裵象鉉):1814(순조 14)∼1884(고종 21). 본관은 興海. 初名 相璉. 자는 耳玉. 호는 浯山. 父 曇. 居 安東. 1847년 진사에 합격함. 1849년 문과에 급제하여 肇慶殿別檢‧成均館典籍‧司憲府持平‧吏曹正郎‧成均館直講‧司諫院正言‧黃山道察訪 등을 역임함. 저서로는 《菊窓盥錄》‧《浯山集》 등이 전함. 金興洛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배상협(裵相協):1766(영조 42)∼1810(순조 10). 본관은 興海. 자는 君燮. 호는 松廬. 居 奉化‧安東. 尙志의 후손. 《中庸》의 道에 맞게 생활함. 문필에도 능함. 문집이 전함. [참고] 《奉化郡史》
배선강(裵善綱):1866(고종 3)∼l905(광무 9). 본관은 興海. 자는 益三. 호는 一柳. 居 奉化. 주자서를 연구함. 공자의 杏壇처럼 露臺를 만들어 선비들과 상유함. 후학 양성에 전력함. 유고가 전함. [참고] 《奉化郡史》
배선만(裵善萬):1805(순조 5)∼ 1880(고종 17). 본관은 興海. 자는 性浩. 호는 杜湖. 父 翰周. 居 安東.
의 현손. 1849년 진사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배선박(裵善博):1867(고종 4)∼l946. 본관은 興海. 자는 學餘. 호는 淸虛. 居 奉化. 完學보다 訓學을 중시하여 단양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함. 청렴결백으로 선비의 도를 지킴. [참고] 《奉化郡史》
배선영(裵善榮):1852(철종 3)∼1930. 본관은 興海. 자는 義五. 호는 乃山. 居 奉化. 경서와 성리학에 매진함. 유고가 전함. [참고] 《奉化郡史》
배선우(裵善佑):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晩菴. 居 永川. 三益의 10세손. 학문을 좋아하고 행실이 두터우며 經史에 널리 통달함. 左承旨에 증직됨. 문집이 전함. [참고] 《忠孝의 고장 永川》
배선원(裵善源):1808(순조 8)∼1880(고종 17). 본관은 興海. 자는 性涵. 호는 守磵. 父 翼周. 生父 翰周. 居 安東. 柳致明의 문인. 1871년 司馬試에 합격했으나 출사하지 않음. 향리에서 정자를 수축하고 학문을 연마함. 저서로는 《四七辨輯證》‧《守磵集》 등이 전함. 權相翊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선한(裵善翰):1883(고종 20)∼ 1961. 본관은 興海. 자는 伯汝. 父 龍周. 居 安東. 桓의 후손. 1906년 申乭石 의병에 참가함. 같은 해 3월 50명의 의병들과 함께 영양읍을 공격하여 무기고를 점령하고 무기를 빼앗음. 4월에는 130명의 병력으로 청송읍을 공격함. 1907년 부대를 재정비하여 진보‧영양‧평해‧청송 일대에서 일군과 싸우다가 1908년 6월에 체포됨. 그 해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름.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선회(裵善晦):1829(순조 29)∼ 1904(광무 8). 본관은 興海. 자는 叔燁. 호는 岐軒. 居 安東. 龍吉의 9세손. 뜻을 돈독히 하고 행동에 힘씀. 문행으로 명망이 있음. 權相圭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배세태(裵世泰):1890(고종 27)∼1943. 居 義城 安平. 1919년 3월 15일~3월 19일 교회 인사들과 함께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의 만세 운동을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1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소(裵素):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尙恭. 祖父 詮. 居 安東. 1408년 式年試 동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여 司宰監主簿‧養蠶採訪判官‧江原道都事‧吏曹正郎‧義城縣令 등을 역임함. [참고] 《國朝文科榜目》 《太祖實錄》 《嶠南誌》
배순(裵純):생몰년 미상. 居 榮州 梨店. 匠人으로 효행과 충의로 이름이 높음. 선조가 승하하자 3년 상을 입었고, 李滉의 喪事에도 3년 상을 입고 무쇠로 이황의 像을 주조함. 郭
이 행적을 시로 지음. [참고] 《榮州榮豐鄕土誌》
배승환(裵昇煥):1885(고종 22)~1951. 본관은 興海. 異名 成埈. 자는 起甫. 父 善模. 生父 忠模. 居 安東.
의 5대손. 1919년 6월경부터 중국 동북삼성 유하현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함. 독립군 요원을 모집하고 경북에 돌아와서 활동하다가 1920년 9월 24일 체포됨. 1921년 2월 22일 3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3년 12월 30일 병보석으로 출옥함.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연즙(裵淵楫):1875(고종 12)∼1951. 본관은 興海. 자는 元序. 居 靑松 府南. 비안과 의성 일대의 포수와 민병들을 모집하여 무장시키고 鄭鏞基의 의진에 들어감. 1906년 3월 5일 의진의 규모가 갖추어지자 영해로 진출하여 申乭石 의진과 합진하여 적과 교전 끝에 큰 전과를 올림. 그 후 청하로 진격하던 중 대장 정용기가 체포되자 고향으로 돌아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靑松郡誌》 《독립유공자공훈록》 《산남의진유사》
배영우(裵永祐):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자는 天授. 호는 沙隱. 居 奉化. 壽職으로 通政大夫에 오름. [참고] 《奉化郡史》
배영진(裵永進):1864(고종 1)~1919. 본관은 興海. 자는 希顔. 호는 白峰. 父 善宇. 居 安東. 龍吉의 9대손.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2년 만주 통화현으로 이주함. 1919년 남만에서 한족회가 조직되자 李相龍‧金大洛‧金東三 등과 이주동포들의 정착을 협의하고 황무지 개척과 청년교육에 힘씀. 오랜 고생 끝에 병을 얻어 회복하지 못하고 죽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石洲遺稿》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용길(裵龍吉):1556(명종 11)∼1609(광해군 1). 본관은 興海. 자는 明瑞. 호는 琴易堂‧藏六堂. 父 三益.��� 居 安東. 金誠一의 문인. 1585년 式年試 3등으로 진사에 합격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金垓의 휘하에서 部將으로 활약함. 1594년 洗馬‧侍直‧副率을 역임하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화의를 반대하는 소를 올림. 1602년 別試 을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藝文館檢閱‧忠淸道都事 등을 역임함. 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됨. 저서로는 《琴易堂集》이 있다. 金應祖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배용도(裵容度):1895(고종 32)∼1971.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용석(裵容奭):1890(고종 27)∼1938.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200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용운(裵容雲):1897(광무 1)∼1950.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의성지청에서 태형 90度를 받음.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유진(裵維震):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惺齋. 居 安東. 경사에 박통함. 저서로는 《惺齋遺稿》가 있다. [참고] 《嶠南誌》
배이순(裵以純):1445(세종 27)~1496(연산군 2). 본관은 興海. 자는 自强. 父 袵. 居 安東. 尙志의 현손. 1472년 진사에 합격함. 대과에 실패하고는 출사를 단념하고 임천에 자적함. 풍기 미가암에서 현재의 봉화 내성인 호평으로 이거함. 증손 三益의 현달로 인해 通訓大夫 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됨. 裵龍吉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榮州榮豐鄕土誌》
배익겸(裵益謙):1587(선조 20)~1654(효종 5). 본관은 興海. 자는 道亨. 호는 負暄堂. 父 得仁. 居 安東. 張興孝의 문인. 문예가 빼어나고 효행이 특출함. 柳必永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인길(裵寅吉):1571(선조 4)~1592(선조 25). 본관은 興海. 자는 敬甫. 父 三近. 居 奉化‧安東. 三益의 조카. 1592년 임진왜란 때에 종형인 龍吉과 함께 의병을 일으킴. 禮安縣監 申之悌의 관군과 합세하여 용궁으로 진군하여 분전하다가 전사함. 그가 타고 갔던 말이 홀로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 월성이씨는 남편을 따라 자결함. 이를 추모하고자 봉화읍 석평리 유루골에 쌍절각을 건립함. [참고] 《嶠南誌》 《奉化郡史》
배임(裵衽):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孝長. 居 榮州. 尙志의 증손. 1449년부터 右軍攝副司勇‧修義副尉副司直·彰信校尉·昭威將軍 등을 역임함. [참고] 《榮州榮豐鄕土誌》
배정(裵禎):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자는 元吉. 父 孝長. 祖父 權. 居 安東. 景分의 10세손. 일찍이 부친상을 당하여 모친 밑에서 수학함. 서법과 활쏘기에 능함. 1456년 司馬試에 합격하고 禮安訓導‧昌原敎授 등을 역임함. 李增‧南致晶‧盧孟信 등과 友鄕契를 맺음.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興海裵氏譜》
배중엽(裵重曄):1882(고종 19)∼1934. 호는 內村.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2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집(裵
):1710(숙종 36)~1755(영조 31). 본관은 興海. 자는 季珍. 호는 月峯. 父 行儉. 居 安東. 金樂行‧金聲久‧趙普陽 등과 교유함.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함. 문장과 이론이 창달하고, 학문에 성취함이 있어 두루 박식함. 저서로는 《月峯集》이 있다. 權相圭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배천석(裵天錫):1523(중종 18)~1573(선조 6). 본관은 興海. 자는 景受. 父
. 居 奉化‧安東. 1543년 權橃의 천거로 醫書習讀官을 제수 받고, 1546년 宣敎郞·忠佐衛副司果를 제수 받았으나 부모 봉양을 위하여 곧 사직함. 1558년 금계에서 도목촌으로 이거함. 아들 三益의 현달로 인해 兵曹參判에 추증됨. 具鳳齡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奉化郡史》
배천택(裵天澤):생몰년 미상. 居 大邱. 1909년 安熙濟·李元植·金東三·南亨祐·李時說 등 80여명과 함께 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함. 1910년 8월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을 돕고 부민단에서 활동함. 1919년 3.1운동 후 서간도의 독립군단체로 서로군정서가 조직되자 참가하고, 1923년 1월부터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서간도독립군단체 대표로 참석함. 1925년 1월 독립군단체인 정의부를 조직하여 간부로 활동하고, 1927년 11월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 각지대표연합회가 개최되자 정의부의 대표로 참가함. 한국혁명당을 조직했다가 1934년 남경에서 만주의 한국독립당과 통합하여 신한독립당을 창당하고 간부로 활동함.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운동사》 4‧5권 《독립운동사자료집》 12집 《독립유공자공훈록》
배태근(裵太根):1871(고종 8)~1923. 본관은 興海. 異名 大根. 居 安東. 尙志의 후손.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운동사》 3권 《독립운동사자료집》 5집
배한주(裵漢周):1849(헌종 15)∼?. 본관은 興海. 자는 順朝. 호는 樊隱. 父 顯八. 居 奉化‧安東. 1892년 別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司諫院正言을 지냄.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奉化郡史》
배행검(裵行儉):1673(현종 14)~1752(영조 28). 본관은 興海. 자는 守約. 호는 三餘堂. 父 冕. 居 安東. 일찍이 李光靖‧權德秀 등과 도의와 문장으로 강마함. 향중의 선비들에게 박식고론함으로 칭송받음. 戶曹參判에 증직됨. 저서로는 《三餘堂集》이 있다. 權璉夏가 행장을 지음. [참고] 「行狀」 《嶠南誌》
배헌(裵
):1482(성종 13)~1524(중종 19). 본관은 興海. 자는 獻之. 父 以純. 居 奉化‧安東. 景分의 후손. 15세에 부친상을 당함. 1516년에 생원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유학함. 출사를 단념하고 자제의 교육에 전념함. 내성향약을 만들어 향리의 풍속을 순화시킴. 손자 三益의 현달로 인해 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兼 經筳參贊官에 추증됨. 裵龍吉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奉化郡史》
배혁모(裵赫模):1875(고종 12)~1960. 본관은 興海. 자는 聖助. 居 安東. 龍吉의 12대손.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중평리 장날에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운동사》 3권 《독립운동사자료집》 5집 《안동독립운동가 700인》
배현부(裵顯溥):1775(영조 51)~1851(철종 2). 본관은 興海. 자는 穉博. 호는 儉庵. 居 安東. 柳徽文·李野淳의 문인. 權載成‧李蓍秀‧權仁濩‧金百行 등과 교유함. 저서로는 《儉庵集》이 있다. 金浩直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배현주(裵賢周):생몰년 미상. 居 浦項. 부모를 모시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부자가 같은 날 함께 죽는 것이 내 소원이다.”라고 말했는데 忌祭時에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모신 후 취침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니 침상에 혈흔이 있었음. 나라에서 사실을 알고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에 증직함. [참고] 《浦項市史》
배환(裵桓):1379(우왕 5)~ 본관은 興海. 父 尙志. 居 安東. 權의 동생. 1401년 문과에 급제하여 藝文館直提學‧左右司諫 등을 거쳐 兵曹‧刑曹‧工曹 등의 參議을 역임하고, 황해도‧전라도‧충청도 觀察使를 역임함. 宣慰使를 겸직하여 광주에서 일본사신을 접견하고, 그 뒤 晉州牧使를 지냄. 琴鏞夏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회주(裵會周):1823(순조 23)~1868(고종 5). 본관은 興海. 자는 汝極. 父 顯溥. 居 安東. 1865년 생원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배효건(裵孝謇):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桓. 居 安東. 孝崇의 동생. 玉果縣監‧南原鎭管兵馬節制都尉 등을 역임함. 만년에 李增‧南致恭‧權自謙 등 고장의 덕망 있는 선비 13명과 友鄕契를 맺고 풍속 교화에 이바지함. [참고] 《興海裵氏譜》
배효사(裵孝思):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桓. 居 安東. 孝謇의 동생. 彦陽縣監을 지냄. 1467년 南怡와 李施愛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原從功臣에 책록됨. [참고]《興海裵氏譜》
배효숭(裵孝崇):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糟谷. 父 桓. 居 安東. 1447년 式年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司憲府執義‧驪興府使 등을 역임함. 原從功臣에 책록됨.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배효종(裵孝從):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桓. 居 安東. 司憲府監察을 지냄. [참고] 《興海裵氏譜》
배흥조(裵興祚):1630(인조 8)~1689(숙종 15). 본관은 興海. 자는 振夫. 호는 後澗. 祖父 龍吉. 居 安東. 觀察使가 조정에 천거했으나 은명이 내리기 전에 세상을 떠남. 저서로는 《易說考異》가 있다. [참고] 《安東鄕校誌》
배희목(裵熙穆):1861(철종 12)∼? 본관은 興海. 자는 德敏. 父 永浩. 居 安東. 尙志의 후손. 1885년 增廣試 3등으로 생원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배희직(裵熙稷):1868(고종 5)∼1942. 居 靑松 府東. 沈誠之 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함. 1896년 4월 2일 인근지역의 金象鍾‧金河洛 의진과 연계하여 감은리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적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림.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赤猿日記》
배희직(裵羲稷):1883(고종 20)∼1969. 居 蔚珍. 1919년 3월 19일 영덕 창수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함. 2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인 가운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위 군중을 주도함.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됨.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음. 199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경(裵經):1544(중종 39)∼ 1612(광해군 5). 본관은 興海. 居 安東. 임진왜란 때 동생과 함께 모친을 할머니로 변장시켜 업고 피신함. 왜적의 무리가 가까이 이르러 해치려 하다가 형제가 모친을 껴안고 애통해 함을 보고 적이 감동하여 해치지 않음. 1617년 행적이 조정에 알려져 佐郞에 증직됨. [참고] 《嶠南誌》 《寰輿勝覽》 《興海裵氏譜》
배경봉(裵慶鳳):생몰년 미상. 호는 敬庵. 居 盈德. 許薰‧柳必永과 교유함. 經史에 능통하고 성리학과 예에 조예가 깊음. [참고] 《盈德郡誌》
배광직(裵光稷):1863(철종 14)∼1919. 본관은 興海. 자는 景熙. 父 永斗. 居 安東. 柳必永의 문인. [참고] 《興海裵氏譜》
배권(裵權):1376(우왕 2)∼ 1427(세종 9). 본관은 興海. 父 尙志. 居 安東. 1420년 蔭補로 司憲府監察을 제수 받고, 橫城縣監·奉化縣監·刑曹正郎·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함. [참고] 《嶠南誌》
배규정(裵糾正):생몰년 미상. 居 漆谷 八莒. 蔭仕로 右司議軍簿判書를 제수 받음. [참고] 《漆谷誌》
배기석(裵基奭):1887(고종 24)∼1956. 居 高靈. 1919년 3월 29일 고령군 덕곡면 가유동 소재 덕곡면사무소 구내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함. 덕곡 주재소의 일경에 의해 시위 군중은 해산 당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됨. 6월 26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름. 200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大邱慶北 抗日獨立運動史》
배남(裵楠):1384(우왕 10)∼ ?. 본관은 興海. 居 安東. 桓의 동생. 趙庸의 문인. 1411년 문과에 급제하여 成均館學諭‧司憲府監察‧吏曹正郎 등을 역임함. [참고] 《嶠南誌》
배달근(裵達根):1865(고종 2)∼1944.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덕로(裵德老):생몰년 미상. 居 漆谷. 壽職으로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음. [참고] 《漆谷誌》
배도근(裵道根):1866(고종 3)∼1923.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200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동진(裵東進):1866(고종 3)∼l939. 본관은 興海. 자는 德祖. 호는 眉巖. 居 奉化. 필법이 뛰어나 많은 유묵을 남김. [참고] 《奉化郡史》
배동환(裵東煥):1898(광무 2)∼1984. 본관은 興海. 자는 仁伯. 호는 白渚. 父 光稷. 居 安東. 柳必永의 문인. 대종교에 가입하여 포교를 표방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21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함. 출옥 후 1929년 신간회 안동지회에 참여하고, 1934년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함. 194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함.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저서로는 《白渚集》이 있다.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두여(裵斗汝):생몰년 미상. 居 浦項 興海.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후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극진히 섬김. 4세 때 부친이 병이 들었는데, 그 때 난데없이 회오리바람이 몰아쳐 문이 닫히는 순간 손가락을 다쳐 피가 흘러내리자 그 피가 부친의 병환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여 부친의 입에 注血함. 그 후부터 부친의 병세가 차츰 회복되어 효녀로 칭송을 받음. [참고] 《浦項市史》
배득인(裵得仁):1566(명종 21)∼1623(광해군 15). 본관은 興海. 자는 榮仲. 호는 洛庵. 父 經. 居 安東. 孝崇의 6대손. 1590년 增廣試 3등으로 진사에 합격함. 權紀와 함께 《永嘉誌》를 편찬함. [참고] 《司馬榜目》
배면(裵冕):1651(효종 2)∼1718(숙종 44). 본관은 興海. 자는 奉卿. 호는 綯窩. 父 興冑. 居 安東. 龍吉의 증손. 柳稷‧金學培‧李玄逸의 문인. 戶曹參議에 증직됨. 저서로는 《綯窩集》이 있다. 李晩慤이 행장을 짓고, 權璉夏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行狀」 「墓碣銘」 《嶠南誌》
배방우(裵方于):1894(고종 31)∼?. 居 安東.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장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임북 면소재지 사월에서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함. [참고] 《독립운동사》 3권 《독립운동사자료집》 5집
배병욱(裵秉旭):1867(고종 4)∼1939. 본관은 興海. 자는 景朝. 父 永錫. 居 安東. 金興洛의 문인. [참고] 《興海裵氏譜》
배봉섭(裵鳳燮):1904(광무 8)∼1990. 본관은. 자는 儀韶. 호는 剛廬. 父 弘植. 居 奉化. 李中瓚의 외손. 權相用‧朴尋洙의 문인. [참고] 《奉化郡史》
배삼근(裵三近):1537(중종 32)∼1600(선조 33). 본관은 興海. 자는 汝勇. 父 台辰. 居 安東. 三益의 동생. 金彦璣의 문인. 宣敎郞을 지냄. [참고] 《興海裵氏譜》
배삼근(裵三謹):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儒山. 居 安東. 尙志의 후손. 李滉의 문인. 參奉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 벼슬에서 물러남. [참고] 《嶠南誌》
배삼익(裵三益):1534(중종 29)∼1588(선조 21). 본관은 興海. 자는 汝友. 호는 臨淵齋. 父 天錫.��� 居 奉化‧安東. 李滉의 문인. 1558년 생원에 합격함. 1564년 문과에 급제하여 成均館學諭‧佐郞‧正郎‧正言‧豐基郡守‧襄陽府使‧弘文館校理‧左承旨‧掌隷院判決事‧成均館大司成 등을 역임함. 進賀使로 명나라를 다녀올 때 禮部의 정문을 올리고, 신종황제로부터 삼물을 하사받았으며, 환국하자 선조가 내구마 1필을 상사함. 黃海道觀察使로 부임하여 흉년에 굶주린 백성들을 구황하다가 병을 얻어 객사함. 저서로는 《臨淵齋集》이 있다. 柳成龍이 신도비명을 찬함. [참고] 「神道碑銘」 《嶠南誌》 《奉化郡史》
배상공(裵尙恭):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詮. 居 安東. 尙志의 동생.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조에 工曹典書를 지냄. 고려가 망하자 형 尙志와 함께 안동에 낙향함. 옛 동료인 典書 柳從惠가 자신의 전토를 절반이나 주어 풍산현 하회마을에 살게 됨. 사람들이 河回二典書라 일컬음. [참고] 《嶠南誌》 《永嘉誌》
배상규(裵相奎):1811(순조 11)~1890(고종 27). 본관은 興海. 자는 稚文. 父 維震. 祖父 行卿. 居 順興‧安東. 興慶의 증손. 1843년 式年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吏曹參判을 지냄. 유고가 전함.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安東鄕校誌》
배상열(裵相說):1760(영조 36)∼1789(정조 13). 본관은 興海. 자는 君弼. 호는 槐潭. 父 緝. 居 奉化. 權慶餘의 외손. 李象靖의 문인. 천문‧지리‧역학에 정통함. 渾天儀‧天軆周圍圖‧日月十二回圖‧一章七潤圖‧天會圖를 만들고 많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으나 30세 때 요절함. 저서로는 《通學六圖書》‧《畵計瑣錄》‧《四書疑義》‧《性理簒要》 등이 전함. 柳長源이 묘표를 찬함. [참고] 「墓表」 《奉化郡誌》
배상익(裵相益):1765(영조 41)∼ ?. 본관은 興海. 異名 相逵. 자는 翼之. 호는 葛伐. 父 綺. 居 安東. 裵相說의 문인. 1804년 式年試 1등으로 생원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배상지(裵尙志):1351(충정왕 3)∼ 1413(태종 13). 본관은 興海. 호는 栢竹堂. 父 詮. 居 安東. 고려 말 벼슬을 버리고 안동 금계에 물러나 잣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그 사이에 집을 지어 栢竹堂이라 편액함. 고려가 망하자 비분강개하여 두문불출함. 鏡光書院에 제향됨. 저서로는 《栢竹堂實紀》가 있다. 權瑎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상현(裵象鉉):1814(순조 14)∼1884(고종 21). 본관은 興海. 初名 相璉. 자는 耳玉. 호는 浯山. 父 曇. 居 安東. 1847년 진사에 합격함. 1849년 문과에 급제하여 肇慶殿別檢‧成均館典籍‧司憲府持平‧吏曹正郎‧成均館直講‧司諫院正言‧黃山道察訪 등을 역임함. 저서로는 《菊窓盥錄》‧《浯山集》 등이 전함. 金興洛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배상협(裵相協):1766(영조 42)∼1810(순조 10). 본관은 興海. 자는 君燮. 호는 松廬. 居 奉化‧安東. 尙志의 후손. 《中庸》의 道에 맞게 생활함. 문필에도 능함. 문집이 전함. [참고] 《奉化郡史》
배선강(裵善綱):1866(고종 3)∼l905(광무 9). 본관은 興海. 자는 益三. 호는 一柳. 居 奉化. 주자서를 연구함. 공자의 杏壇처럼 露臺를 만들어 선비들과 상유함. 후학 양성에 전력함. 유고가 전함. [참고] 《奉化郡史》
배선만(裵善萬):1805(순조 5)∼ 1880(고종 17). 본관은 興海. 자는 性浩. 호는 杜湖. 父 翰周. 居 安東.
의 현손. 1849년 진사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배선박(裵善博):1867(고종 4)∼l946. 본관은 興海. 자는 學餘. 호는 淸虛. 居 奉化. 完學보다 訓學을 중시하여 단양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함. 청렴결백으로 선비의 도를 지킴. [참고] 《奉化郡史》
배선영(裵善榮):1852(철종 3)∼1930. 본관은 興海. 자는 義五. 호는 乃山. 居 奉化. 경서와 성리학에 매진함. 유고가 전함. [참고] 《奉化郡史》
배선우(裵善佑):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晩菴. 居 永川. 三益의 10세손. 학문을 좋아하고 행실이 두터우며 經史에 널리 통달함. 左承旨에 증직됨. 문집이 전함. [참고] 《忠孝의 고장 永川》
배선원(裵善源):1808(순조 8)∼1880(고종 17). 본관은 興海. 자는 性涵. 호는 守磵. 父 翼周. 生父 翰周. 居 安東. 柳致明의 문인. 1871년 司馬試에 합격했으나 출사하지 않음. 향리에서 정자를 수축하고 학문을 연마함. 저서로는 《四七辨輯證》‧《守磵集》 등이 전함. 權相翊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선한(裵善翰):1883(고종 20)∼ 1961. 본관은 興海. 자는 伯汝. 父 龍周. 居 安東. 桓의 후손. 1906년 申乭石 의병에 참가함. 같은 해 3월 50명의 의병들과 함께 영양읍을 공격하여 무기고를 점령하고 무기를 빼앗음. 4월에는 130명의 병력으로 청송읍을 공격함. 1907년 부대를 재정비하여 진보‧영양‧평해‧청송 일대에서 일군과 싸우다가 1908년 6월에 체포됨. 그 해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름.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선회(裵善晦):1829(순조 29)∼ 1904(광무 8). 본관은 興海. 자는 叔燁. 호는 岐軒. 居 安東. 龍吉의 9세손. 뜻을 돈독히 하고 행동에 힘씀. 문행으로 명망이 있음. 權相圭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배세태(裵世泰):1890(고종 27)∼1943. 居 義城 安平. 1919년 3월 15일~3월 19일 교회 인사들과 함께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의 만세 운동을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1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소(裵素):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尙恭. 祖父 詮. 居 安東. 1408년 式年試 동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여 司宰監主簿‧養蠶採訪判官‧江原道都事‧吏曹正郎‧義城縣令 등을 역임함. [참고] 《國朝文科榜目》 《太祖實錄》 《嶠南誌》
배순(裵純):생몰년 미상. 居 榮州 梨店. 匠人으로 효행과 충의로 이름이 높음. 선조가 승하하자 3년 상을 입었고, 李滉의 喪事에도 3년 상을 입고 무쇠로 이황의 像을 주조함. 郭
이 행적을 시로 지음. [참고] 《榮州榮豐鄕土誌》
배승환(裵昇煥):1885(고종 22)~1951. 본관은 興海. 異名 成埈. 자는 起甫. 父 善模. 生父 忠模. 居 安東.
의 5대손. 1919년 6월경부터 중국 동북삼성 유하현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함. 독립군 요원을 모집하고 경북에 돌아와서 활동하다가 1920년 9월 24일 체포됨. 1921년 2월 22일 3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3년 12월 30일 병보석으로 출옥함.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연즙(裵淵楫):1875(고종 12)∼1951. 본관은 興海. 자는 元序. 居 靑松 府南. 비안과 의성 일대의 포수와 민병들을 모집하여 무장시키고 鄭鏞基의 의진에 들어감. 1906년 3월 5일 의진의 규모가 갖추어지자 영해로 진출하여 申乭石 의진과 합진하여 적과 교전 끝에 큰 전과를 올림. 그 후 청하로 진격하던 중 대장 정용기가 체포되자 고향으로 돌아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靑松郡誌》 《독립유공자공훈록》 《산남의진유사》
배영우(裵永祐):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자는 天授. 호는 沙隱. 居 奉化. 壽職으로 通政大夫에 오름. [참고] 《奉化郡史》
배영진(裵永進):1864(고종 1)~1919. 본관은 興海. 자는 希顔. 호는 白峰. 父 善宇. 居 安東. 龍吉의 9대손.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2년 만주 통화현으로 이주함. 1919년 남만에서 한족회가 조직되자 李相龍‧金大洛‧金東三 등과 이주동포들의 정착을 협의하고 황무지 개척과 청년교육에 힘씀. 오랜 고생 끝에 병을 얻어 회복하지 못하고 죽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石洲遺稿》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용길(裵龍吉):1556(명종 11)∼1609(광해군 1). 본관은 興海. 자는 明瑞. 호는 琴易堂‧藏六堂. 父 三益.��� 居 安東. 金誠一의 문인. 1585년 式年試 3등으로 진사에 합격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金垓의 휘하에서 部將으로 활약함. 1594년 洗馬‧侍直‧副率을 역임하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화의를 반대하는 소를 올림. 1602년 別試 을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藝文館檢閱‧忠淸道都事 등을 역임함. 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됨. 저서로는 《琴易堂集》이 있다. 金應祖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배용도(裵容度):1895(고종 32)∼1971.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용석(裵容奭):1890(고종 27)∼1938.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200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용운(裵容雲):1897(광무 1)∼1950.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의성지청에서 태형 90度를 받음.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유진(裵維震):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惺齋. 居 安東. 경사에 박통함. 저서로는 《惺齋遺稿》가 있다. [참고] 《嶠南誌》
배이순(裵以純):1445(세종 27)~1496(연산군 2). 본관은 興海. 자는 自强. 父 袵. 居 安東. 尙志의 현손. 1472년 진사에 합격함. 대과에 실패하고는 출사를 단념하고 임천에 자적함. 풍기 미가암에서 현재의 봉화 내성인 호평으로 이거함. 증손 三益의 현달로 인해 通訓大夫 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됨. 裵龍吉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榮州榮豐鄕土誌》
배익겸(裵益謙):1587(선조 20)~1654(효종 5). 본관은 興海. 자는 道亨. 호는 負暄堂. 父 得仁. 居 安東. 張興孝의 문인. 문예가 빼어나고 효행이 특출함. 柳必永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인길(裵寅吉):1571(선조 4)~1592(선조 25). 본관은 興海. 자는 敬甫. 父 三近. 居 奉化‧安東. 三益의 조카. 1592년 임진왜란 때에 종형인 龍吉과 함께 의병을 일으킴. 禮安縣監 申之悌의 관군과 합세하여 용궁으로 진군하여 분전하다가 전사함. 그가 타고 갔던 말이 홀로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 월성이씨는 남편을 따라 자결함. 이를 추모하고자 봉화읍 석평리 유루골에 쌍절각을 건립함. [참고] 《嶠南誌》 《奉化郡史》
배임(裵衽):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孝長. 居 榮州. 尙志의 증손. 1449년부터 右軍攝副司勇‧修義副尉副司直·彰信校尉·昭威將軍 등을 역임함. [참고] 《榮州榮豐鄕土誌》
배정(裵禎):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자는 元吉. 父 孝長. 祖父 權. 居 安東. 景分의 10세손. 일찍이 부친상을 당하여 모친 밑에서 수학함. 서법과 활쏘기에 능함. 1456년 司馬試에 합격하고 禮安訓導‧昌原敎授 등을 역임함. 李增‧南致晶‧盧孟信 등과 友鄕契를 맺음.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興海裵氏譜》
배중엽(裵重曄):1882(고종 19)∼1934. 호는 內村.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2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집(裵
):1710(숙종 36)~1755(영조 31). 본관은 興海. 자는 季珍. 호는 月峯. 父 行儉. 居 安東. 金樂行‧金聲久‧趙普陽 등과 교유함.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함. 문장과 이론이 창달하고, 학문에 성취함이 있어 두루 박식함. 저서로는 《月峯集》이 있다. 權相圭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배천석(裵天錫):1523(중종 18)~1573(선조 6). 본관은 興海. 자는 景受. 父
. 居 奉化‧安東. 1543년 權橃의 천거로 醫書習讀官을 제수 받고, 1546년 宣敎郞·忠佐衛副司果를 제수 받았으나 부모 봉양을 위하여 곧 사직함. 1558년 금계에서 도목촌으로 이거함. 아들 三益의 현달로 인해 兵曹參判에 추증됨. 具鳳齡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奉化郡史》
배천택(裵天澤):생몰년 미상. 居 大邱. 1909년 安熙濟·李元植·金東三·南亨祐·李時說 등 80여명과 함께 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함. 1910년 8월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을 돕고 부민단에서 활동함. 1919년 3.1운동 후 서간도의 독립군단체로 서로군정서가 조직되자 참가하고, 1923년 1월부터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서간도독립군단체 대표로 참석함. 1925년 1월 독립군단체인 정의부를 조직하여 간부로 활동하고, 1927년 11월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 각지대표연합회가 개최되자 정의부의 대표로 참가함. 한국혁명당을 조직했다가 1934년 남경에서 만주의 한국독립당과 통합하여 신한독립당을 창당하고 간부로 활동함.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운동사》 4‧5권 《독립운동사자료집》 12집 《독립유공자공훈록》
배태근(裵太根):1871(고종 8)~1923. 본관은 興海. 異名 大根. 居 安東. 尙志의 후손.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운동사》 3권 《독립운동사자료집》 5집
배한주(裵漢周):1849(헌종 15)∼?. 본관은 興海. 자는 順朝. 호는 樊隱. 父 顯八. 居 奉化‧安東. 1892년 別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司諫院正言을 지냄.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奉化郡史》
배행검(裵行儉):1673(현종 14)~1752(영조 28). 본관은 興海. 자는 守約. 호는 三餘堂. 父 冕. 居 安東. 일찍이 李光靖‧權德秀 등과 도의와 문장으로 강마함. 향중의 선비들에게 박식고론함으로 칭송받음. 戶曹參判에 증직됨. 저서로는 《三餘堂集》이 있다. 權璉夏가 행장을 지음. [참고] 「行狀」 《嶠南誌》
배헌(裵
):1482(성종 13)~1524(중종 19). 본관은 興海. 자는 獻之. 父 以純. 居 奉化‧安東. 景分의 후손. 15세에 부친상을 당함. 1516년에 생원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유학함. 출사를 단념하고 자제의 교육에 전념함. 내성향약을 만들어 향리의 풍속을 순화시킴. 손자 三益의 현달로 인해 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兼 經筳參贊官에 추증됨. 裵龍吉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奉化郡史》
배혁모(裵赫模):1875(고종 12)~1960. 본관은 興海. 자는 聖助. 居 安東. 龍吉의 12대손.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중평리 장날에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운동사》 3권 《독립운동사자료집》 5집 《안동독립운동가 700인》
배현부(裵顯溥):1775(영조 51)~1851(철종 2). 본관은 興海. 자는 穉博. 호는 儉庵. 居 安東. 柳徽文·李野淳의 문인. 權載成‧李蓍秀‧權仁濩‧金百行 등과 교유함. 저서로는 《儉庵集》이 있다. 金浩直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배현주(裵賢周):생몰년 미상. 居 浦項. 부모를 모시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부자가 같은 날 함께 죽는 것이 내 소원이다.”라고 말했는데 忌祭時에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모신 후 취침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니 침상에 혈흔이 있었음. 나라에서 사실을 알고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에 증직함. [참고] 《浦項市史》
배환(裵桓):1379(우왕 5)~ 본관은 興海. 父 尙志. 居 安東. 權의 동생. 1401년 문과에 급제하여 藝文館直提學‧左右司諫 등을 거쳐 兵曹‧刑曹‧工曹 등의 參議을 역임하고, 황해도‧전라도‧충청도 觀察使를 역임함. 宣慰使를 겸직하여 광주에서 일본사신을 접견하고, 그 뒤 晉州牧使를 지냄. 琴鏞夏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회주(裵會周):1823(순조 23)~1868(고종 5). 본관은 興海. 자는 汝極. 父 顯溥. 居 安東. 1865년 생원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배효건(裵孝謇):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桓. 居 安東. 孝崇의 동생. 玉果縣監‧南原鎭管兵馬節制都尉 등을 역임함. 만년에 李增‧南致恭‧權自謙 등 고장의 덕망 있는 선비 13명과 友鄕契를 맺고 풍속 교화에 이바지함. [참고] 《興海裵氏譜》
배효사(裵孝思):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桓. 居 安東. 孝謇의 동생. 彦陽縣監을 지냄. 1467년 南怡와 李施愛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原從功臣에 책록됨. [참고]《興海裵氏譜》
배효숭(裵孝崇):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糟谷. 父 桓. 居 安東. 1447년 式年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司憲府執義‧驪興府使 등을 역임함. 原從功臣에 책록됨.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배효종(裵孝從):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桓. 居 安東. 司憲府監察을 지냄. [참고] 《興海裵氏譜》
배흥조(裵興祚):1630(인조 8)~1689(숙종 15). 본관은 興海. 자는 振夫. 호는 後澗. 祖父 龍吉. 居 安東. 觀察使가 조정에 천거했으나 은명이 내리기 전에 세상을 떠남. 저서로는 《易說考異》가 있다. [참고] 《安東鄕校誌》
배희목(裵熙穆):1861(철종 12)∼? 본관은 興海. 자는 德敏. 父 永浩. 居 安東. 尙志의 후손. 1885년 增廣試 3등으로 생원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배희직(裵熙稷):1868(고종 5)∼1942. 居 靑松 府東. 沈誠之 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함. 1896년 4월 2일 인근지역의 金象鍾‧金河洛 의진과 연계하여 감은리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적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림.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赤猿日記》
배희직(裵羲稷):1883(고종 20)∼1969. 居 蔚珍. 1919년 3월 19일 영덕 창수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함. 2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인 가운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위 군중을 주도함.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됨.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음. 199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경(裵經):1544(중종 39)∼ 1612(광해군 5). 본관은 興海. 居 安東. 임진왜란 때 동생과 함께 모친을 할머니로 변장시켜 업고 피신함. 왜적의 무리가 가까이 이르러 해치려 하다가 형제가 모친을 껴안고 애통해 함을 보고 적이 감동하여 해치지 않음. 1617년 행적이 조정에 알려져 佐郞에 증직됨. [참고] 《嶠南誌》 《寰輿勝覽》 《興海裵氏譜》
배경봉(裵慶鳳):생몰년 미상. 호는 敬庵. 居 盈德. 許薰‧柳必永과 교유함. 經史에 능통하고 성리학과 예에 조예가 깊음. [참고] 《盈德郡誌》
배광직(裵光稷):1863(철종 14)∼1919. 본관은 興海. 자는 景熙. 父 永斗. 居 安東. 柳必永의 문인. [참고] 《興海裵氏譜》
배권(裵權):1376(우왕 2)∼ 1427(세종 9). 본관은 興海. 父 尙志. 居 安東. 1420년 蔭補로 司憲府監察을 제수 받고, 橫城縣監·奉化縣監·刑曹正郎·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함. [참고] 《嶠南誌》
배규정(裵糾正):생몰년 미상. 居 漆谷 八莒. 蔭仕로 右司議軍簿判書를 제수 받음. [참고] 《漆谷誌》
배기석(裵基奭):1887(고종 24)∼1956. 居 高靈. 1919년 3월 29일 고령군 덕곡면 가유동 소재 덕곡면사무소 구내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함. 덕곡 주재소의 일경에 의해 시위 군중은 해산 당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됨. 6월 26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름. 200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大邱慶北 抗日獨立運動史》
배남(裵楠):1384(우왕 10)∼ ?. 본관은 興海. 居 安東. 桓의 동생. 趙庸의 문인. 1411년 문과에 급제하여 成均館學諭‧司憲府監察‧吏曹正郎 등을 역임함. [참고] 《嶠南誌》
배달근(裵達根):1865(고종 2)∼1944.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덕로(裵德老):생몰년 미상. 居 漆谷. 壽職으로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음. [참고] 《漆谷誌》
배도근(裵道根):1866(고종 3)∼1923.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200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동진(裵東進):1866(고종 3)∼l939. 본관은 興海. 자는 德祖. 호는 眉巖. 居 奉化. 필법이 뛰어나 많은 유묵을 남김. [참고] 《奉化郡史》
배동환(裵東煥):1898(광무 2)∼1984. 본관은 興海. 자는 仁伯. 호는 白渚. 父 光稷. 居 安東. 柳必永의 문인. 대종교에 가입하여 포교를 표방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21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함. 출옥 후 1929년 신간회 안동지회에 참여하고, 1934년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함. 194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함.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저서로는 《白渚集》이 있다.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두여(裵斗汝):생몰년 미상. 居 浦項 興海.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후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극진히 섬김. 4세 때 부친이 병이 들었는데, 그 때 난데없이 회오리바람이 몰아쳐 문이 닫히는 순간 손가락을 다쳐 피가 흘러내리자 그 피가 부친의 병환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여 부친의 입에 注血함. 그 후부터 부친의 병세가 차츰 회복되어 효녀로 칭송을 받음. [참고] 《浦項市史》
배득인(裵得仁):1566(명종 21)∼1623(광해군 15). 본관은 興海. 자는 榮仲. 호는 洛庵. 父 經. 居 安東. 孝崇의 6대손. 1590년 增廣試 3등으로 진사에 합격함. 權紀와 함께 《永嘉誌》를 편찬함. [참고] 《司馬榜目》
배면(裵冕):1651(효종 2)∼1718(숙종 44). 본관은 興海. 자는 奉卿. 호는 綯窩. 父 興冑. 居 安東. 龍吉의 증손. 柳稷‧金學培‧李玄逸의 문인. 戶曹參議에 증직됨. 저서로는 《綯窩集》이 있다. 李晩慤이 행장을 짓고, 權璉夏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行狀」 「墓碣銘」 《嶠南誌》
배방우(裵方于):1894(고종 31)∼?. 居 安東.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장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임북 면소재지 사월에서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함. [참고] 《독립운동사》 3권 《독립운동사자료집》 5집
배병욱(裵秉旭):1867(고종 4)∼1939. 본관은 興海. 자는 景朝. 父 永錫. 居 安東. 金興洛의 문인. [참고] 《興海裵氏譜》
배봉섭(裵鳳燮):1904(광무 8)∼1990. 본관은. 자는 儀韶. 호는 剛廬. 父 弘植. 居 奉化. 李中瓚의 외손. 權相用‧朴尋洙의 문인. [참고] 《奉化郡史》
배삼근(裵三近):1537(중종 32)∼1600(선조 33). 본관은 興海. 자는 汝勇. 父 台辰. 居 安東. 三益의 동생. 金彦璣의 문인. 宣敎郞을 지냄. [참고] 《興海裵氏譜》
배삼근(裵三謹):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儒山. 居 安東. 尙志의 후손. 李滉의 문인. 參奉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 벼슬에서 물러남. [참고] 《嶠南誌》
배삼익(裵三益):1534(중종 29)∼1588(선조 21). 본관은 興海. 자는 汝友. 호는 臨淵齋. 父 天錫.��� 居 奉化‧安東. 李滉의 문인. 1558년 생원에 합격함. 1564년 문과에 급제하여 成均館學諭‧佐郞‧正郎‧正言‧豐基郡守‧襄陽府使‧弘文館校理‧左承旨‧掌隷院判決事‧成均館大司成 등을 역임함. 進賀使로 명나라를 다녀올 때 禮部의 정문을 올리고, 신종황제로부터 삼물을 하사받았으며, 환국하자 선조가 내구마 1필을 상사함. 黃海道觀察使로 부임하여 흉년에 굶주린 백성들을 구황하다가 병을 얻어 객사함. 저서로는 《臨淵齋集》이 있다. 柳成龍이 신도비명을 찬함. [참고] 「神道碑銘」 《嶠南誌》 《奉化郡史》
배상공(裵尙恭):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詮. 居 安東. 尙志의 동생.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조에 工曹典書를 지냄. 고려가 망하자 형 尙志와 함께 안동에 낙향함. 옛 동료인 典書 柳從惠가 자신의 전토를 절반이나 주어 풍산현 하회마을에 살게 됨. 사람들이 河回二典書라 일컬음. [참고] 《嶠南誌》 《永嘉誌》
배상규(裵相奎):1811(순조 11)~1890(고종 27). 본관은 興海. 자는 稚文. 父 維震. 祖父 行卿. 居 順興‧安東. 興慶의 증손. 1843년 式年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吏曹參判을 지냄. 유고가 전함.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安東鄕校誌》
배상열(裵相說):1760(영조 36)∼1789(정조 13). 본관은 興海. 자는 君弼. 호는 槐潭. 父 緝. 居 奉化. 權慶餘의 외손. 李象靖의 문인. 천문‧지리‧역학에 정통함. 渾天儀‧天軆周圍圖‧日月十二回圖‧一章七潤圖‧天會圖를 만들고 많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으나 30세 때 요절함. 저서로는 《通學六圖書》‧《畵計瑣錄》‧《四書疑義》‧《性理簒要》 등이 전함. 柳長源이 묘표를 찬함. [참고] 「墓表」 《奉化郡誌》
배상익(裵相益):1765(영조 41)∼ ?. 본관은 興海. 異名 相逵. 자는 翼之. 호는 葛伐. 父 綺. 居 安東. 裵相說의 문인. 1804년 式年試 1등으로 생원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배상지(裵尙志):1351(충정왕 3)∼ 1413(태종 13). 본관은 興海. 호는 栢竹堂. 父 詮. 居 安東. 고려 말 벼슬을 버리고 안동 금계에 물러나 잣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그 사이에 집을 지어 栢竹堂이라 편액함. 고려가 망하자 비분강개하여 두문불출함. 鏡光書院에 제향됨. 저서로는 《栢竹堂實紀》가 있다. 權瑎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상현(裵象鉉):1814(순조 14)∼1884(고종 21). 본관은 興海. 初名 相璉. 자는 耳玉. 호는 浯山. 父 曇. 居 安東. 1847년 진사에 합격함. 1849년 문과에 급제하여 肇慶殿別檢‧成均館典籍‧司憲府持平‧吏曹正郎‧成均館直講‧司諫院正言‧黃山道察訪 등을 역임함. 저서로는 《菊窓盥錄》‧《浯山集》 등이 전함. 金興洛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배상협(裵相協):1766(영조 42)∼1810(순조 10). 본관은 興海. 자는 君燮. 호는 松廬. 居 奉化‧安東. 尙志의 후손. 《中庸》의 道에 맞게 생활함. 문필에도 능함. 문집이 전함. [참고] 《奉化郡史》
배선강(裵善綱):1866(고종 3)∼l905(광무 9). 본관은 興海. 자는 益三. 호는 一柳. 居 奉化. 주자서를 연구함. 공자의 杏壇처럼 露臺를 만들어 선비들과 상유함. 후학 양성에 전력함. 유고가 전함. [참고] 《奉化郡史》
배선만(裵善萬):1805(순조 5)∼ 1880(고종 17). 본관은 興海. 자는 性浩. 호는 杜湖. 父 翰周. 居 安東.
의 현손. 1849년 진사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배선박(裵善博):1867(고종 4)∼l946. 본관은 興海. 자는 學餘. 호는 淸虛. 居 奉化. 完學보다 訓學을 중시하여 단양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함. 청렴결백으로 선비의 도를 지킴. [참고] 《奉化郡史》
배선영(裵善榮):1852(철종 3)∼1930. 본관은 興海. 자는 義五. 호는 乃山. 居 奉化. 경서와 성리학에 매진함. 유고가 전함. [참고] 《奉化郡史》
배선우(裵善佑):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晩菴. 居 永川. 三益의 10세손. 학문을 좋아하고 행실이 두터우며 經史에 널리 통달함. 左承旨에 증직됨. 문집이 전함. [참고] 《忠孝의 고장 永川》
배선원(裵善源):1808(순조 8)∼1880(고종 17). 본관은 興海. 자는 性涵. 호는 守磵. 父 翼周. 生父 翰周. 居 安東. 柳致明의 문인. 1871년 司馬試에 합격했으나 출사하지 않음. 향리에서 정자를 수축하고 학문을 연마함. 저서로는 《四七辨輯證》‧《守磵集》 등이 전함. 權相翊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선한(裵善翰):1883(고종 20)∼ 1961. 본관은 興海. 자는 伯汝. 父 龍周. 居 安東. 桓의 후손. 1906년 申乭石 의병에 참가함. 같은 해 3월 50명의 의병들과 함께 영양읍을 공격하여 무기고를 점령하고 무기를 빼앗음. 4월에는 130명의 병력으로 청송읍을 공격함. 1907년 부대를 재정비하여 진보‧영양‧평해‧청송 일대에서 일군과 싸우다가 1908년 6월에 체포됨. 그 해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름.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선회(裵善晦):1829(순조 29)∼ 1904(광무 8). 본관은 興海. 자는 叔燁. 호는 岐軒. 居 安東. 龍吉의 9세손. 뜻을 돈독히 하고 행동에 힘씀. 문행으로 명망이 있음. 權相圭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배세태(裵世泰):1890(고종 27)∼1943. 居 義城 安平. 1919년 3월 15일~3월 19일 교회 인사들과 함께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의 만세 운동을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1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소(裵素):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尙恭. 祖父 詮. 居 安東. 1408년 式年試 동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여 司宰監主簿‧養蠶採訪判官‧江原道都事‧吏曹正郎‧義城縣令 등을 역임함. [참고] 《國朝文科榜目》 《太祖實錄》 《嶠南誌》
배순(裵純):생몰년 미상. 居 榮州 梨店. 匠人으로 효행과 충의로 이름이 높음. 선조가 승하하자 3년 상을 입었고, 李滉의 喪事에도 3년 상을 입고 무쇠로 이황의 像을 주조함. 郭
이 행적을 시로 지음. [참고] 《榮州榮豐鄕土誌》
배승환(裵昇煥):1885(고종 22)~1951. 본관은 興海. 異名 成埈. 자는 起甫. 父 善模. 生父 忠模. 居 安東.
의 5대손. 1919년 6월경부터 중국 동북삼성 유하현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함. 독립군 요원을 모집하고 경북에 돌아와서 활동하다가 1920년 9월 24일 체포됨. 1921년 2월 22일 3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3년 12월 30일 병보석으로 출옥함.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연즙(裵淵楫):1875(고종 12)∼1951. 본관은 興海. 자는 元序. 居 靑松 府南. 비안과 의성 일대의 포수와 민병들을 모집하여 무장시키고 鄭鏞基의 의진에 들어감. 1906년 3월 5일 의진의 규모가 갖추어지자 영해로 진출하여 申乭石 의진과 합진하여 적과 교전 끝에 큰 전과를 올림. 그 후 청하로 진격하던 중 대장 정용기가 체포되자 고향으로 돌아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靑松郡誌》 《독립유공자공훈록》 《산남의진유사》
배영우(裵永祐):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자는 天授. 호는 沙隱. 居 奉化. 壽職으로 通政大夫에 오름. [참고] 《奉化郡史》
배영진(裵永進):1864(고종 1)~1919. 본관은 興海. 자는 希顔. 호는 白峰. 父 善宇. 居 安東. 龍吉의 9대손.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2년 만주 통화현으로 이주함. 1919년 남만에서 한족회가 조직되자 李相龍‧金大洛‧金東三 등과 이주동포들의 정착을 협의하고 황무지 개척과 청년교육에 힘씀. 오랜 고생 끝에 병을 얻어 회복하지 못하고 죽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石洲遺稿》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용길(裵龍吉):1556(명종 11)∼1609(광해군 1). 본관은 興海. 자는 明瑞. 호는 琴易堂‧藏六堂. 父 三益.��� 居 安東. 金誠一의 문인. 1585년 式年試 3등으로 진사에 합격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金垓의 휘하에서 部將으로 활약함. 1594년 洗馬‧侍直‧副率을 역임하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화의를 반대하는 소를 올림. 1602년 別試 을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藝文館檢閱‧忠淸道都事 등을 역임함. 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됨. 저서로는 《琴易堂集》이 있다. 金應祖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배용도(裵容度):1895(고종 32)∼1971.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용석(裵容奭):1890(고종 27)∼1938.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200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용운(裵容雲):1897(광무 1)∼1950.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의성지청에서 태형 90度를 받음.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유진(裵維震):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惺齋. 居 安東. 경사에 박통함. 저서로는 《惺齋遺稿》가 있다. [참고] 《嶠南誌》
배이순(裵以純):1445(세종 27)~1496(연산군 2). 본관은 興海. 자는 自强. 父 袵. 居 安東. 尙志의 현손. 1472년 진사에 합격함. 대과에 실패하고는 출사를 단념하고 임천에 자적함. 풍기 미가암에서 현재의 봉화 내성인 호평으로 이거함. 증손 三益의 현달로 인해 通訓大夫 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됨. 裵龍吉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榮州榮豐鄕土誌》
배익겸(裵益謙):1587(선조 20)~1654(효종 5). 본관은 興海. 자는 道亨. 호는 負暄堂. 父 得仁. 居 安東. 張興孝의 문인. 문예가 빼어나고 효행이 특출함. 柳必永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인길(裵寅吉):1571(선조 4)~1592(선조 25). 본관은 興海. 자는 敬甫. 父 三近. 居 奉化‧安東. 三益의 조카. 1592년 임진왜란 때에 종형인 龍吉과 함께 의병을 일으킴. 禮安縣監 申之悌의 관군과 합세하여 용궁으로 진군하여 분전하다가 전사함. 그가 타고 갔던 말이 홀로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 월성이씨는 남편을 따라 자결함. 이를 추모하고자 봉화읍 석평리 유루골에 쌍절각을 건립함. [참고] 《嶠南誌》 《奉化郡史》
배임(裵衽):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孝長. 居 榮州. 尙志의 증손. 1449년부터 右軍攝副司勇‧修義副尉副司直·彰信校尉·昭威將軍 등을 역임함. [참고] 《榮州榮豐鄕土誌》
배정(裵禎):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자는 元吉. 父 孝長. 祖父 權. 居 安東. 景分의 10세손. 일찍이 부친상을 당하여 모친 밑에서 수학함. 서법과 활쏘기에 능함. 1456년 司馬試에 합격하고 禮安訓導‧昌原敎授 등을 역임함. 李增‧南致晶‧盧孟信 등과 友鄕契를 맺음.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興海裵氏譜》
배중엽(裵重曄):1882(고종 19)∼1934. 호는 內村.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2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집(裵
):1710(숙종 36)~1755(영조 31). 본관은 興海. 자는 季珍. 호는 月峯. 父 行儉. 居 安東. 金樂行‧金聲久‧趙普陽 등과 교유함.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함. 문장과 이론이 창달하고, 학문에 성취함이 있어 두루 박식함. 저서로는 《月峯集》이 있다. 權相圭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배천석(裵天錫):1523(중종 18)~1573(선조 6). 본관은 興海. 자는 景受. 父
. 居 奉化‧安東. 1543년 權橃의 천거로 醫書習讀官을 제수 받고, 1546년 宣敎郞·忠佐衛副司果를 제수 받았으나 부모 봉양을 위하여 곧 사직함. 1558년 금계에서 도목촌으로 이거함. 아들 三益의 현달로 인해 兵曹參判에 추증됨. 具鳳齡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奉化郡史》
배천택(裵天澤):생몰년 미상. 居 大邱. 1909년 安熙濟·李元植·金東三·南亨祐·李時說 등 80여명과 함께 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함. 1910년 8월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을 돕고 부민단에서 활동함. 1919년 3.1운동 후 서간도의 독립군단체로 서로군정서가 조직되자 참가하고, 1923년 1월부터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서간도독립군단체 대표로 참석함. 1925년 1월 독립군단체인 정의부를 조직하여 간부로 활동하고, 1927년 11월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 각지대표연합회가 개최되자 정의부의 대표로 참가함. 한국혁명당을 조직했다가 1934년 남경에서 만주의 한국독립당과 통합하여 신한독립당을 창당하고 간부로 활동함.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운동사》 4‧5권 《독립운동사자료집》 12집 《독립유공자공훈록》
배태근(裵太根):1871(고종 8)~1923. 본관은 興海. 異名 大根. 居 安東. 尙志의 후손.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운동사》 3권 《독립운동사자료집》 5집
배한주(裵漢周):1849(헌종 15)∼?. 본관은 興海. 자는 順朝. 호는 樊隱. 父 顯八. 居 奉化‧安東. 1892년 別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司諫院正言을 지냄.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奉化郡史》
배행검(裵行儉):1673(현종 14)~1752(영조 28). 본관은 興海. 자는 守約. 호는 三餘堂. 父 冕. 居 安東. 일찍이 李光靖‧權德秀 등과 도의와 문장으로 강마함. 향중의 선비들에게 박식고론함으로 칭송받음. 戶曹參判에 증직됨. 저서로는 《三餘堂集》이 있다. 權璉夏가 행장을 지음. [참고] 「行狀」 《嶠南誌》
배헌(裵
):1482(성종 13)~1524(중종 19). 본관은 興海. 자는 獻之. 父 以純. 居 奉化‧安東. 景分의 후손. 15세에 부친상을 당함. 1516년에 생원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유학함. 출사를 단념하고 자제의 교육에 전념함. 내성향약을 만들어 향리의 풍속을 순화시킴. 손자 三益의 현달로 인해 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兼 經筳參贊官에 추증됨. 裵龍吉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奉化郡史》
배혁모(裵赫模):1875(고종 12)~1960. 본관은 興海. 자는 聖助. 居 安東. 龍吉의 12대손.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중평리 장날에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운동사》 3권 《독립운동사자료집》 5집 《안동독립운동가 700인》
배현부(裵顯溥):1775(영조 51)~1851(철종 2). 본관은 興海. 자는 穉博. 호는 儉庵. 居 安東. 柳徽文·李野淳의 문인. 權載成‧李蓍秀‧權仁濩‧金百行 등과 교유함. 저서로는 《儉庵集》이 있다. 金浩直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배현주(裵賢周):생몰년 미상. 居 浦項. 부모를 모시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부자가 같은 날 함께 죽는 것이 내 소원이다.”라고 말했는데 忌祭時에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모신 후 취침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니 침상에 혈흔이 있었음. 나라에서 사실을 알고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에 증직함. [참고] 《浦項市史》
배환(裵桓):1379(우왕 5)~ 본관은 興海. 父 尙志. 居 安東. 權의 동생. 1401년 문과에 급제하여 藝文館直提學‧左右司諫 등을 거쳐 兵曹‧刑曹‧工曹 등의 參議을 역임하고, 황해도‧전라도‧충청도 觀察使를 역임함. 宣慰使를 겸직하여 광주에서 일본사신을 접견하고, 그 뒤 晉州牧使를 지냄. 琴鏞夏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회주(裵會周):1823(순조 23)~1868(고종 5). 본관은 興海. 자는 汝極. 父 顯溥. 居 安東. 1865년 생원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배효건(裵孝謇):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桓. 居 安東. 孝崇의 동생. 玉果縣監‧南原鎭管兵馬節制都尉 등을 역임함. 만년에 李增‧南致恭‧權自謙 등 고장의 덕망 있는 선비 13명과 友鄕契를 맺고 풍속 교화에 이바지함. [참고] 《興海裵氏譜》
배효사(裵孝思):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桓. 居 安東. 孝謇의 동생. 彦陽縣監을 지냄. 1467년 南怡와 李施愛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原從功臣에 책록됨. [참고]《興海裵氏譜》
배효숭(裵孝崇):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糟谷. 父 桓. 居 安東. 1447년 式年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司憲府執義‧驪興府使 등을 역임함. 原從功臣에 책록됨.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배효종(裵孝從):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桓. 居 安東. 司憲府監察을 지냄. [참고] 《興海裵氏譜》
배흥조(裵興祚):1630(인조 8)~1689(숙종 15). 본관은 興海. 자는 振夫. 호는 後澗. 祖父 龍吉. 居 安東. 觀察使가 조정에 천거했으나 은명이 내리기 전에 세상을 떠남. 저서로는 《易說考異》가 있다. [참고] 《安東鄕校誌》
배희목(裵熙穆):1861(철종 12)∼? 본관은 興海. 자는 德敏. 父 永浩. 居 安東. 尙志의 후손. 1885년 增廣試 3등으로 생원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배희직(裵熙稷):1868(고종 5)∼1942. 居 靑松 府東. 沈誠之 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함. 1896년 4월 2일 인근지역의 金象鍾‧金河洛 의진과 연계하여 감은리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적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림.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赤猿日記》
배희직(裵羲稷):1883(고종 20)∼1969. 居 蔚珍. 1919년 3월 19일 영덕 창수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함. 2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인 가운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위 군중을 주도함.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됨.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음. 199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경봉(裵慶鳳):생몰년 미상. 호는 敬庵. 居 盈德. 許薰‧柳必永과 교유함. 經史에 능통하고 성리학과 예에 조예가 깊음. [참고] 《盈德郡誌》
배광직(裵光稷):1863(철종 14)∼1919. 본관은 興海. 자는 景熙. 父 永斗. 居 安東. 柳必永의 문인. [참고] 《興海裵氏譜》
배권(裵權):1376(우왕 2)∼ 1427(세종 9). 본관은 興海. 父 尙志. 居 安東. 1420년 蔭補로 司憲府監察을 제수 받고, 橫城縣監·奉化縣監·刑曹正郎·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함. [참고] 《嶠南誌》
배규정(裵糾正):생몰년 미상. 居 漆谷 八莒. 蔭仕로 右司議軍簿判書를 제수 받음. [참고] 《漆谷誌》
배기석(裵基奭):1887(고종 24)∼1956. 居 高靈. 1919년 3월 29일 고령군 덕곡면 가유동 소재 덕곡면사무소 구내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함. 덕곡 주재소의 일경에 의해 시위 군중은 해산 당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됨. 6월 26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름. 200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大邱慶北 抗日獨立運動史》
배남(裵楠):1384(우왕 10)∼ ?. 본관은 興海. 居 安東. 桓의 동생. 趙庸의 문인. 1411년 문과에 급제하여 成均館學諭‧司憲府監察‧吏曹正郎 등을 역임함. [참고] 《嶠南誌》
배달근(裵達根):1865(고종 2)∼1944.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덕로(裵德老):생몰년 미상. 居 漆谷. 壽職으로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음. [참고] 《漆谷誌》
배도근(裵道根):1866(고종 3)∼1923.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200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동진(裵東進):1866(고종 3)∼l939. 본관은 興海. 자는 德祖. 호는 眉巖. 居 奉化. 필법이 뛰어나 많은 유묵을 남김. [참고] 《奉化郡史》
배동환(裵東煥):1898(광무 2)∼1984. 본관은 興海. 자는 仁伯. 호는 白渚. 父 光稷. 居 安東. 柳必永의 문인. 대종교에 가입하여 포교를 표방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21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함. 출옥 후 1929년 신간회 안동지회에 참여하고, 1934년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함. 194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함.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저서로는 《白渚集》이 있다.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두여(裵斗汝):생몰년 미상. 居 浦項 興海.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후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극진히 섬김. 4세 때 부친이 병이 들었는데, 그 때 난데없이 회오리바람이 몰아쳐 문이 닫히는 순간 손가락을 다쳐 피가 흘러내리자 그 피가 부친의 병환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여 부친의 입에 注血함. 그 후부터 부친의 병세가 차츰 회복되어 효녀로 칭송을 받음. [참고] 《浦項市史》
배득인(裵得仁):1566(명종 21)∼1623(광해군 15). 본관은 興海. 자는 榮仲. 호는 洛庵. 父 經. 居 安東. 孝崇의 6대손. 1590년 增廣試 3등으로 진사에 합격함. 權紀와 함께 《永嘉誌》를 편찬함. [참고] 《司馬榜目》
배면(裵冕):1651(효종 2)∼1718(숙종 44). 본관은 興海. 자는 奉卿. 호는 綯窩. 父 興冑. 居 安東. 龍吉의 증손. 柳稷‧金學培‧李玄逸의 문인. 戶曹參議에 증직됨. 저서로는 《綯窩集》이 있다. 李晩慤이 행장을 짓고, 權璉夏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行狀」 「墓碣銘」 《嶠南誌》
배방우(裵方于):1894(고종 31)∼?. 居 安東.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장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임북 면소재지 사월에서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함. [참고] 《독립운동사》 3권 《독립운동사자료집》 5집
배병욱(裵秉旭):1867(고종 4)∼1939. 본관은 興海. 자는 景朝. 父 永錫. 居 安東. 金興洛의 문인. [참고] 《興海裵氏譜》
배봉섭(裵鳳燮):1904(광무 8)∼1990. 본관은. 자는 儀韶. 호는 剛廬. 父 弘植. 居 奉化. 李中瓚의 외손. 權相用‧朴尋洙의 문인. [참고] 《奉化郡史》
배삼근(裵三近):1537(중종 32)∼1600(선조 33). 본관은 興海. 자는 汝勇. 父 台辰. 居 安東. 三益의 동생. 金彦璣의 문인. 宣敎郞을 지냄. [참고] 《興海裵氏譜》
배삼근(裵三謹):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儒山. 居 安東. 尙志의 후손. 李滉의 문인. 參奉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 벼슬에서 물러남. [참고] 《嶠南誌》
배삼익(裵三益):1534(중종 29)∼1588(선조 21). 본관은 興海. 자는 汝友. 호는 臨淵齋. 父 天錫.��� 居 奉化‧安東. 李滉의 문인. 1558년 생원에 합격함. 1564년 문과에 급제하여 成均館學諭‧佐郞‧正郎‧正言‧豐基郡守‧襄陽府使‧弘文館校理‧左承旨‧掌隷院判決事‧成均館大司成 등을 역임함. 進賀使로 명나라를 다녀올 때 禮部의 정문을 올리고, 신종황제로부터 삼물을 하사받았으며, 환국하자 선조가 내구마 1필을 상사함. 黃海道觀察使로 부임하여 흉년에 굶주린 백성들을 구황하다가 병을 얻어 객사함. 저서로는 《臨淵齋集》이 있다. 柳成龍이 신도비명을 찬함. [참고] 「神道碑銘」 《嶠南誌》 《奉化郡史》
배상공(裵尙恭):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詮. 居 安東. 尙志의 동생.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조에 工曹典書를 지냄. 고려가 망하자 형 尙志와 함께 안동에 낙향함. 옛 동료인 典書 柳從惠가 자신의 전토를 절반이나 주어 풍산현 하회마을에 살게 됨. 사람들이 河回二典書라 일컬음. [참고] 《嶠南誌》 《永嘉誌》
배상규(裵相奎):1811(순조 11)~1890(고종 27). 본관은 興海. 자는 稚文. 父 維震. 祖父 行卿. 居 順興‧安東. 興慶의 증손. 1843년 式年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吏曹參判을 지냄. 유고가 전함.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安東鄕校誌》
배상열(裵相說):1760(영조 36)∼1789(정조 13). 본관은 興海. 자는 君弼. 호는 槐潭. 父 緝. 居 奉化. 權慶餘의 외손. 李象靖의 문인. 천문‧지리‧역학에 정통함. 渾天儀‧天軆周圍圖‧日月十二回圖‧一章七潤圖‧天會圖를 만들고 많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으나 30세 때 요절함. 저서로는 《通學六圖書》‧《畵計瑣錄》‧《四書疑義》‧《性理簒要》 등이 전함. 柳長源이 묘표를 찬함. [참고] 「墓表」 《奉化郡誌》
배상익(裵相益):1765(영조 41)∼ ?. 본관은 興海. 異名 相逵. 자는 翼之. 호는 葛伐. 父 綺. 居 安東. 裵相說의 문인. 1804년 式年試 1등으로 생원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배상지(裵尙志):1351(충정왕 3)∼ 1413(태종 13). 본관은 興海. 호는 栢竹堂. 父 詮. 居 安東. 고려 말 벼슬을 버리고 안동 금계에 물러나 잣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그 사이에 집을 지어 栢竹堂이라 편액함. 고려가 망하자 비분강개하여 두문불출함. 鏡光書院에 제향됨. 저서로는 《栢竹堂實紀》가 있다. 權瑎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상현(裵象鉉):1814(순조 14)∼1884(고종 21). 본관은 興海. 初名 相璉. 자는 耳玉. 호는 浯山. 父 曇. 居 安東. 1847년 진사에 합격함. 1849년 문과에 급제하여 肇慶殿別檢‧成均館典籍‧司憲府持平‧吏曹正郎‧成均館直講‧司諫院正言‧黃山道察訪 등을 역임함. 저서로는 《菊窓盥錄》‧《浯山集》 등이 전함. 金興洛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배상협(裵相協):1766(영조 42)∼1810(순조 10). 본관은 興海. 자는 君燮. 호는 松廬. 居 奉化‧安東. 尙志의 후손. 《中庸》의 道에 맞게 생활함. 문필에도 능함. 문집이 전함. [참고] 《奉化郡史》
배선강(裵善綱):1866(고종 3)∼l905(광무 9). 본관은 興海. 자는 益三. 호는 一柳. 居 奉化. 주자서를 연구함. 공자의 杏壇처럼 露臺를 만들어 선비들과 상유함. 후학 양성에 전력함. 유고가 전함. [참고] 《奉化郡史》
배선만(裵善萬):1805(순조 5)∼ 1880(고종 17). 본관은 興海. 자는 性浩. 호는 杜湖. 父 翰周. 居 安東.
의 현손. 1849년 진사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배선박(裵善博):1867(고종 4)∼l946. 본관은 興海. 자는 學餘. 호는 淸虛. 居 奉化. 完學보다 訓學을 중시하여 단양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함. 청렴결백으로 선비의 도를 지킴. [참고] 《奉化郡史》
배선영(裵善榮):1852(철종 3)∼1930. 본관은 興海. 자는 義五. 호는 乃山. 居 奉化. 경서와 성리학에 매진함. 유고가 전함. [참고] 《奉化郡史》
배선우(裵善佑):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晩菴. 居 永川. 三益의 10세손. 학문을 좋아하고 행실이 두터우며 經史에 널리 통달함. 左承旨에 증직됨. 문집이 전함. [참고] 《忠孝의 고장 永川》
배선원(裵善源):1808(순조 8)∼1880(고종 17). 본관은 興海. 자는 性涵. 호는 守磵. 父 翼周. 生父 翰周. 居 安東. 柳致明의 문인. 1871년 司馬試에 합격했으나 출사하지 않음. 향리에서 정자를 수축하고 학문을 연마함. 저서로는 《四七辨輯證》‧《守磵集》 등이 전함. 權相翊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선한(裵善翰):1883(고종 20)∼ 1961. 본관은 興海. 자는 伯汝. 父 龍周. 居 安東. 桓의 후손. 1906년 申乭石 의병에 참가함. 같은 해 3월 50명의 의병들과 함께 영양읍을 공격하여 무기고를 점령하고 무기를 빼앗음. 4월에는 130명의 병력으로 청송읍을 공격함. 1907년 부대를 재정비하여 진보‧영양‧평해‧청송 일대에서 일군과 싸우다가 1908년 6월에 체포됨. 그 해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름.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선회(裵善晦):1829(순조 29)∼ 1904(광무 8). 본관은 興海. 자는 叔燁. 호는 岐軒. 居 安東. 龍吉의 9세손. 뜻을 돈독히 하고 행동에 힘씀. 문행으로 명망이 있음. 權相圭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배세태(裵世泰):1890(고종 27)∼1943. 居 義城 安平. 1919년 3월 15일~3월 19일 교회 인사들과 함께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의 만세 운동을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1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소(裵素):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尙恭. 祖父 詮. 居 安東. 1408년 式年試 동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여 司宰監主簿‧養蠶採訪判官‧江原道都事‧吏曹正郎‧義城縣令 등을 역임함. [참고] 《國朝文科榜目》 《太祖實錄》 《嶠南誌》
배순(裵純):생몰년 미상. 居 榮州 梨店. 匠人으로 효행과 충의로 이름이 높음. 선조가 승하하자 3년 상을 입었고, 李滉의 喪事에도 3년 상을 입고 무쇠로 이황의 像을 주조함. 郭
이 행적을 시로 지음. [참고] 《榮州榮豐鄕土誌》
배승환(裵昇煥):1885(고종 22)~1951. 본관은 興海. 異名 成埈. 자는 起甫. 父 善模. 生父 忠模. 居 安東.
의 5대손. 1919년 6월경부터 중국 동북삼성 유하현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함. 독립군 요원을 모집하고 경북에 돌아와서 활동하다가 1920년 9월 24일 체포됨. 1921년 2월 22일 3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3년 12월 30일 병보석으로 출옥함.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연즙(裵淵楫):1875(고종 12)∼1951. 본관은 興海. 자는 元序. 居 靑松 府南. 비안과 의성 일대의 포수와 민병들을 모집하여 무장시키고 鄭鏞基의 의진에 들어감. 1906년 3월 5일 의진의 규모가 갖추어지자 영해로 진출하여 申乭石 의진과 합진하여 적과 교전 끝에 큰 전과를 올림. 그 후 청하로 진격하던 중 대장 정용기가 체포되자 고향으로 돌아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靑松郡誌》 《독립유공자공훈록》 《산남의진유사》
배영우(裵永祐):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자는 天授. 호는 沙隱. 居 奉化. 壽職으로 通政大夫에 오름. [참고] 《奉化郡史》
배영진(裵永進):1864(고종 1)~1919. 본관은 興海. 자는 希顔. 호는 白峰. 父 善宇. 居 安東. 龍吉의 9대손.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2년 만주 통화현으로 이주함. 1919년 남만에서 한족회가 조직되자 李相龍‧金大洛‧金東三 등과 이주동포들의 정착을 협의하고 황무지 개척과 청년교육에 힘씀. 오랜 고생 끝에 병을 얻어 회복하지 못하고 죽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石洲遺稿》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용길(裵龍吉):1556(명종 11)∼1609(광해군 1). 본관은 興海. 자는 明瑞. 호는 琴易堂‧藏六堂. 父 三益.��� 居 安東. 金誠一의 문인. 1585년 式年試 3등으로 진사에 합격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金垓의 휘하에서 部將으로 활약함. 1594년 洗馬‧侍直‧副率을 역임하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화의를 반대하는 소를 올림. 1602년 別試 을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藝文館檢閱‧忠淸道都事 등을 역임함. 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됨. 저서로는 《琴易堂集》이 있다. 金應祖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배용도(裵容度):1895(고종 32)∼1971.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용석(裵容奭):1890(고종 27)∼1938.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200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용운(裵容雲):1897(광무 1)∼1950.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의성지청에서 태형 90度를 받음.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유진(裵維震):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惺齋. 居 安東. 경사에 박통함. 저서로는 《惺齋遺稿》가 있다. [참고] 《嶠南誌》
배이순(裵以純):1445(세종 27)~1496(연산군 2). 본관은 興海. 자는 自强. 父 袵. 居 安東. 尙志의 현손. 1472년 진사에 합격함. 대과에 실패하고는 출사를 단념하고 임천에 자적함. 풍기 미가암에서 현재의 봉화 내성인 호평으로 이거함. 증손 三益의 현달로 인해 通訓大夫 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됨. 裵龍吉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榮州榮豐鄕土誌》
배익겸(裵益謙):1587(선조 20)~1654(효종 5). 본관은 興海. 자는 道亨. 호는 負暄堂. 父 得仁. 居 安東. 張興孝의 문인. 문예가 빼어나고 효행이 특출함. 柳必永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인길(裵寅吉):1571(선조 4)~1592(선조 25). 본관은 興海. 자는 敬甫. 父 三近. 居 奉化‧安東. 三益의 조카. 1592년 임진왜란 때에 종형인 龍吉과 함께 의병을 일으킴. 禮安縣監 申之悌의 관군과 합세하여 용궁으로 진군하여 분전하다가 전사함. 그가 타고 갔던 말이 홀로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 월성이씨는 남편을 따라 자결함. 이를 추모하고자 봉화읍 석평리 유루골에 쌍절각을 건립함. [참고] 《嶠南誌》 《奉化郡史》
배임(裵衽):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孝長. 居 榮州. 尙志의 증손. 1449년부터 右軍攝副司勇‧修義副尉副司直·彰信校尉·昭威將軍 등을 역임함. [참고] 《榮州榮豐鄕土誌》
배정(裵禎):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자는 元吉. 父 孝長. 祖父 權. 居 安東. 景分의 10세손. 일찍이 부친상을 당하여 모친 밑에서 수학함. 서법과 활쏘기에 능함. 1456년 司馬試에 합격하고 禮安訓導‧昌原敎授 등을 역임함. 李增‧南致晶‧盧孟信 등과 友鄕契를 맺음.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興海裵氏譜》
배중엽(裵重曄):1882(고종 19)∼1934. 호는 內村. 居 義城 比安.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함.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시위를 주도함.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2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배집(裵
):1710(숙종 36)~1755(영조 31). 본관은 興海. 자는 季珍. 호는 月峯. 父 行儉. 居 安東. 金樂行‧金聲久‧趙普陽 등과 교유함.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함. 문장과 이론이 창달하고, 학문에 성취함이 있어 두루 박식함. 저서로는 《月峯集》이 있다. 權相圭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배천석(裵天錫):1523(중종 18)~1573(선조 6). 본관은 興海. 자는 景受. 父
. 居 奉化‧安東. 1543년 權橃의 천거로 醫書習讀官을 제수 받고, 1546년 宣敎郞·忠佐衛副司果를 제수 받았으나 부모 봉양을 위하여 곧 사직함. 1558년 금계에서 도목촌으로 이거함. 아들 三益의 현달로 인해 兵曹參判에 추증됨. 具鳳齡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奉化郡史》
배천택(裵天澤):생몰년 미상. 居 大邱. 1909년 安熙濟·李元植·金東三·南亨祐·李時說 등 80여명과 함께 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함. 1910년 8월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을 돕고 부민단에서 활동함. 1919년 3.1운동 후 서간도의 독립군단체로 서로군정서가 조직되자 참가하고, 1923년 1월부터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서간도독립군단체 대표로 참석함. 1925년 1월 독립군단체인 정의부를 조직하여 간부로 활동하고, 1927년 11월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 각지대표연합회가 개최되자 정의부의 대표로 참가함. 한국혁명당을 조직했다가 1934년 남경에서 만주의 한국독립당과 통합하여 신한독립당을 창당하고 간부로 활동함.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운동사》 4‧5권 《독립운동사자료집》 12집 《독립유공자공훈록》
배태근(裵太根):1871(고종 8)~1923. 본관은 興海. 異名 大根. 居 安東. 尙志의 후손.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운동사》 3권 《독립운동사자료집》 5집
배한주(裵漢周):1849(헌종 15)∼?. 본관은 興海. 자는 順朝. 호는 樊隱. 父 顯八. 居 奉化‧安東. 1892년 別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司諫院正言을 지냄.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奉化郡史》
배행검(裵行儉):1673(현종 14)~1752(영조 28). 본관은 興海. 자는 守約. 호는 三餘堂. 父 冕. 居 安東. 일찍이 李光靖‧權德秀 등과 도의와 문장으로 강마함. 향중의 선비들에게 박식고론함으로 칭송받음. 戶曹參判에 증직됨. 저서로는 《三餘堂集》이 있다. 權璉夏가 행장을 지음. [참고] 「行狀」 《嶠南誌》
배헌(裵 ):1482(성종 13)~1524(중종 19). 본관은 興海. 자는 獻之. 父 以純. 居 奉化‧安東. 景分의 후손. 15세에 부친상을 당함. 1516년에 생원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유학함. 출사를 단념하고 자제의 교육에 전념함. 내성향약을 만들어 향리의 풍속을 순화시킴. 손자 三益의 현달로 인해 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兼 經筳參贊官에 추증됨. 裵龍吉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奉化郡史》
배혁모(裵赫模):1875(고종 12)~1960. 본관은 興海. 자는 聖助. 居 安東. 龍吉의 12대손.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중평리 장날에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운동사》 3권 《독립운동사자료집》 5집 《안동독립운동가 700인》
배현부(裵顯溥):1775(영조 51)~1851(철종 2). 본관은 興海. 자는 穉博. 호는 儉庵. 居 安東. 柳徽文·李野淳의 문인. 權載成‧李蓍秀‧權仁濩‧金百行 등과 교유함. 저서로는 《儉庵集》이 있다. 金浩直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배현주(裵賢周):생몰년 미상. 居 浦項. 부모를 모시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부자가 같은 날 함께 죽는 것이 내 소원이다.”라고 말했는데 忌祭時에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모신 후 취침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니 침상에 혈흔이 있었음. 나라에서 사실을 알고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에 증직함. [참고] 《浦項市史》
배환(裵桓):1379(우왕 5)~ 본관은 興海. 父 尙志. 居 安東. 權의 동생. 1401년 문과에 급제하여 藝文館直提學‧左右司諫 등을 거쳐 兵曹‧刑曹‧工曹 등의 參議을 역임하고, 황해도‧전라도‧충청도 觀察使를 역임함. 宣慰使를 겸직하여 광주에서 일본사신을 접견하고, 그 뒤 晉州牧使를 지냄. 琴鏞夏가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嶠南誌》
배회주(裵會周):1823(순조 23)~1868(고종 5). 본관은 興海. 자는 汝極. 父 顯溥. 居 安東. 1865년 생원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배효건(裵孝謇):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桓. 居 安東. 孝崇의 동생. 玉果縣監‧南原鎭管兵馬節制都尉 등을 역임함. 만년에 李增‧南致恭‧權自謙 등 고장의 덕망 있는 선비 13명과 友鄕契를 맺고 풍속 교화에 이바지함. [참고] 《興海裵氏譜》
배효사(裵孝思):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桓. 居 安東. 孝謇의 동생. 彦陽縣監을 지냄. 1467년 南怡와 李施愛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原從功臣에 책록됨. [참고]《興海裵氏譜》
배효숭(裵孝崇):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호는 糟谷. 父 桓. 居 安東. 1447년 式年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司憲府執義‧驪興府使 등을 역임함. 原從功臣에 책록됨.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배효종(裵孝從):생몰년 미상. 본관은 興海. 父 桓. 居 安東. 司憲府監察을 지냄. [참고] 《興海裵氏譜》
배흥조(裵興祚):1630(인조 8)~1689(숙종 15). 본관은 興海. 자는 振夫. 호는 後澗. 祖父 龍吉. 居 安東. 觀察使가 조정에 천거했으나 은명이 내리기 전에 세상을 떠남. 저서로는 《易說考異》가 있다. [참고] 《安東鄕校誌》
배희목(裵熙穆):1861(철종 12)∼? 본관은 興海. 자는 德敏. 父 永浩. 居 安東. 尙志의 후손. 1885년 增廣試 3등으로 생원에 합격함.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배희직(裵熙稷):1868(고종 5)∼1942. 居 靑松 府東. 沈誠之 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함. 1896년 4월 2일 인근지역의 金象鍾‧金河洛 의진과 연계하여 감은리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적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림.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赤猿日記》
배희직(裵羲稷):1883(고종 20)∼1969. 居 蔚珍. 1919년 3월 19일 영덕 창수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함. 2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인 가운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위 군중을 주도함.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됨.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음. 199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
첫댓글 본관이 표시되지는 않았으나, 거주지가 경북 북부권인 경우에는 포함시켰습니다.
임연 선조의 아우되시는 유산공(휘 배삼근)에 대한 정보에 오류가 있습니다. 고치지 않고 그냥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