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너는 시에서 떨어져 나온 한 조각일지도
흥얼흥얼
어떤 슬픔은 길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파란 사과 한 알을 쥐고 장례식장 안을 뛰어다니는 어린 상주가 있는가 하면,
벽에 기대어 흥얼거리는 어린 상주의 엄마가 있습니다
너무 어린 슬픔이거나,
너무 아린 슬픔이거나,
슬픔이 눈물을 따라가야는데,
과일가게 간판에 한눈팔거나,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갈 때가 있습니다
어떤 슬픔은
가 본 길인데 길을 잃고
어떤 슬픔은
갈 때마다 길을 잃고
당신의 슬픔이 길을 잃어 당신도 모르게 흥얼흥얼 노래가 흘러나올 때, 나는
당신의 슬픔을 따라 길을 잃고,
당신의 흥얼거림을 따라 흥얼거립니다
당신이 흥얼거리는 노래마저 길을 잃고 한 멜로디를 맴돌 때, 나도
그 멜로디를 따라 맴돕니다
무슨 노래인지 묻지 않으면서,
무슨 슬픔인지 묻지 않으면서,
한 흥얼거림이 한 흥얼거림을 흥얼흥얼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사
셋집으로 이사하고 너는 가장 먼저 묻는다
이 집에도 못을 마음대로 박을 수 없겠지?
너는 벽을 똑똑 두드리며 사나운 벽과 순한 벽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우리 집으로 이사하고 싶다고,
못이 튈까, 망치로 못을 때릴 때마다 눈을 감으면서도 오래 때릴 수 있는 벽을 가진 집으로 이사하고 싶다고,
벽에 못을 박을 수 없는 셋집에서는 우리의 액자를 높은 곳에 걸지 못하고 기대어 놓아야 한다고, 그래서
우리는 액자 속에서도 어깨를 기대는 버릇이 있는 거라고,
왜 우리는 이미 박혀 있는 못에만 시계를 걸어야 하냐고,
이 집에서 세 들어 살다 산 사람들은 왜 같은 높이에 걸린 시간만 살다 가야 하냐고,
우리가 새로 못을 박는다면 집을 떠날 때,
새로 박은 못을 모두 빼고 떠나야겠지?
못을 뺀 자리에 껌이라도 붙이고 떠나야겠지?
마음대로 상처 낼 수 없는 집은 우리의 집이 아니라고,
액자의 기울기
나는 기운 듯한데, 너는 왜 수평이 맞다, 하는 걸까
액자로 다가가 액자의 왼쪽 어깨와 오른쪽 어깨를 다독이고, 나는
한 걸음 물러서며 네게 한 걸음 다가간다
고개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기울어 본다
우리 앞의 벽이 기운 건 아닐까
또 한 걸음 물러서며 한 걸음 네게 다가간다
네게 머물 때까지 물러서 봐도,
너를 지날 때까지 물러서 봐도,
액자는 기운 듯한데,
너는
왜 계속 수평이 맞다, 하는 걸까
얼마나 더 물러서야 네 수평을 볼 수 있을까
액자 속 네 얼굴이 내 얼굴 쪽으로 기울어 그런 줄도 모르고,
기울어진 네 얼굴에서 내 얼굴로
설탕 같은 웃음이 흘러오는 줄도 모르고,
네 얼굴의 웃음이
내 얼굴에서 웃음소리가 날 때까지 흘러가야 하는 줄도 모르고,
액자 속 너는
우리 앞의 영원을 본 사람처럼 웃고,
액자 속 나는
우리 앞의 끝을 본 사람처럼 웃고,
우리 앞의 시간이 기운 줄도 모르고,
잠만 자는 방
밥을 먹을 수도 없습니다
배가 부르면 방이 좁아집니다
모서리에 지은 방이라서 고개만 돌려도 모서리에 찔리고,
쪼개서 지은 방이라서 잠도 쪼개서 잡니다
서서 누구를 기다리는 자세나,
그 사람을 향해 서둘러 걸어가는 자세도 모두 방문 밖에 두고 들어야 합니다
몰래 데려온 애인의 신발을 방 안에 들여놓아야 하듯,
몰래 빛을 데려오면 들킬 수 있습니다
기쁨 없이 웃고,
슬픔 없이 울아야 합니다 아니
표정만으로도 방이 좁아집니다
표정도 시간도 이 방안에는 왜 이렇게 빈 비닐봉지들이 많은지,
조금만 뒤척여도 바스락거립니다
잠만 자는 방이라서 꿈을 꿀 공간이 없습니다
창문 하나를 갖고 싶은 꿈이 얼마나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지 알지 않습니까
꿈을 꾼대도 꿈속이 좁아 이별한 애인들과 자주 마주칩니다
양말은 이 방 어디서 짝을 잃어버리는 걸까요
내가 들어와도 돌아보지도 않고 잠만 자는 방입니다
이사
벽을 장식한 책을 박스에 담고 있는 이삿짐센터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집 이사가 가장 힘드시나요?
나는
우리집처럼 책이 많은 집이라는 대답을 은근히 기대하며,
교양 많은 사람의 미소로 물었습니다
집을 줄여 이사 가는 집요
집을 늘려 이사 가는 집 말고요
문짝을 떼도 들어가지 못하는 냉장고나 장롱처럼,
버리지 못하고 가져갔는데 문으로도 들어가지 못하는 웃음소리처럼요
여자는 버릴 수 없는 마음인데, 남자는 그 마음을 버리고 가야 한다, 말하는 집요 이를테면
튤립 궁전이 담긴 선물상자를 뜯는 마음처럼요
남자가 여자에게
가져가면 놓을 데가 어딨나, 물으면
여자가
놓을 데를 머릿속에서 더듬다가
그냥 버리라, 말하는 집요
그런 집 이사는 한 사람이 한 사람의 마음을 대신 버려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니까요
그렇게 마음을 하나하나 버리고 사람만 겨우 이사하는 집요
어쩌면 너는 시에서 떨어져 나온 한 조각 일지도,
떨어져 나온 조각이 어디서 떨어져 나온 건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날카롭게 나를 노려보는 유리 조각이 사실은 투명한 화법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듯,
넘어져 울고 있는 아이의 눈물이 끝까지 아이스크림을 놓지 않은 아이의 웃음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듯,
시장 좌판 여자의 악다구니가 집에 두고 온 어린 울음소리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듯,
애인의 질투는 빨간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심장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듯,
모퉁이를 돌아 마주친 솜뭉치 같은 강아지가 제가 가진 가장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며 깡깡 짖을 때,
강아지의 짖음은 무서워 울부짖는 울음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 아닐까
대부분 떨어져 나온 조각들은 둥글고 부드럽고 물렁물렁한 것에서 혼자 떨어져 나와 날카로워진 것들
꽃무늬 접시의 이 빠진 자리에 너를 맞춰 보다가,
어쩌면 너는
시에서 떨어져 나온 한 조각일지도,
너의 침묵이 시에서 떨어져 나온 한 조각의 여백이라는 걸
너의 비틀거림이 시에서 떨어져 나온 한 조각의 걸음이라는 걸,
그래서
너에게 손보다 가슴을 베일 때가 있다는 걸,
푸른치과
내가 당신 무릎에 누워
아-
입을 벌리면 당신
내 입 속으로 빨간 체리를 넣어주려나,
나는 입을 아- 벌리고 귀먹은 19세기의 음악이 흐르는 시간 동안 생각합니다
왜 새콤한 체리를 기다리는 입 모양과
아픈 소리를 내는 입 모양과
낮을 횡단하는 짐승들이 흘린 핏물이 스며드는
수평선을 바라보는 입 모양은 닮은 걸까
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아름다움은 차라리 통증이 아닐까요
새콤은 아픈 맛
아름다움을 앓습니다
통증이 살아날 때,
바깥의 옷자락을 꼭 그러쥐듯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볼 때,
내 애인들을 그리워합니다
혼자 오는 것이 아니었어
바람을 가슴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입 속에 넣어주는 사람
상처에 바람이 불 때,
노을에 바람이 불 때,
왜 입 모양은 더 큰 동그라미가 되는 걸까
그래요 거기요 거기가 아파요
웅얼거리는 소리로 대답하고 있어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사과에 박힌 내 잇자국을 바라봅니다
누군가를 베어 물지 않고는 내 잇자국을 바라볼 수 없는 걸까
아-
입을 벌려 당신이 넣어 주는 체리를 기다립니다
입 속으로 둥근 칼 모양의 초승달이 들어온대도 나는 입을 다물지 않을 거예요
달빛을 입 안에 가득 머금고 오글오글 헹구고 싶어요
당신의 인사는 나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아- 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