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은 세상을 다시 보게 하는 사랑의 눈
이창훈 (시인)
그곳에선 눈총이
어떤 총보다 무섭다는군
눈총 한번 맞으면
은총 다시 받기 힘들다는 거야
눈총 한방에 거꾸러지거나
어느 날 조용히 사라진 사람도 있고
평생을 눈총만 피해 지내다가
허리가 굽어버린 사람도 많다는군
눈총을 맞지 않으려면
눈치의 기술을 익혀야 하는데
코치를 받기도 한다는군
피하지만 말고 함께 힘을 모아
대포를 쏘아 올리자고
다짐들도 하지만, 고작
어스름 퇴근길 몇 명씩 모여 앉아
대포를 들이킬 때일 뿐이라는군
-도대체 거기가 어디야?
-쉿…
-<권이영, 「조용한」, 시인정신 2016년 겨울호>
남에게 의자가 될 수 있다는 건
곁에다 하늘을 들여놓고 산다는 것과 동일하다
어릴 적 아들놈은 늘
내 무릎을 의자 삼아 앉곤 했다
내 몸무게보다 더 무거워진 뒤부터
아들놈은 내 무릎을 기피한다
대신 내 손에 든 짐을 들어줄 때가 많다
내 짐을 덜어주는, 의자 등받이 같은 아들을 보며
더 이상 의자가 되지 못하는 아비의 무릎은
세상 모서리에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무릎이 내 의자가 되어 쉬는 날
꺽은 무릎에서 끄윽끄윽
공기 반 소리 반 생소한 음이 들여왔다
처방전을 건네는 신경외과 의사의 말을 듣고
무릎에도 눈물이 고인다는 걸 알았다.
-<박종현, 「의자 -명퇴하던 날」, 시인정신 2016년 겨울호>
♯1. 일찍이 제레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산업국가에서 75%의 노동력은 기계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고 우울한 전망을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단순한 산업국가의 시대를 거쳐 컴퓨터 사용의 확대, 현란한 매체의 진보가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고 있는 후기 산업사회에 이르러 그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하고 있음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러나 기술의 진보와 물적 재화의 증가가 수치로 보여주는 풍요로움은 역설적으로 ‘손’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노동이 끊임없이 천대받고 소외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위 상위 몇 %로 불리는, 정치 기득권과 부유한 자본권력이 아니라면 언제든 제 삶의 실상으로 접해야 하는 말이 ‘살을 깎는 구조조정’, ‘해고와 실직’, ‘단군 이래 최고의 청년 실업률’이라는 말들입니다. ‘경제 민주화’를 외치며 양극화 문제에 사생결단의 자세로 덤벼들 것만 같던 그 많은 정치인들이 선거가 끝나면 어쩔 수 없이 ‘노동 시장의 유연화’를 외치는 모습들은 절망이 아닌 환멸을 언제나 부르지 않았는지요. 그럼에도 메트로폴리스의 밤의 거리, 현란한 조명을 켜놓고 고객님들을 맞이하는 저 많은 대형마트와 백화점들은 언제나 불야성입니다. 온갖 매체를 통해 ‘여기 오라’고, 와서 ‘지갑을 열어’ 행복을 사라는 소비광고의 손짓은 언제나 매혹적입니다.
‘어떤 총보다 무섭다’는 ‘눈총’을 받으며 매일매일 무거운 발걸음을 디디며 갈 수 밖에 없는 그곳. ‘눈총 한방에’ 그냥 절벽 아래로 ‘거꾸러지거나’, 소비비용을 지불할 보수와 조직 내에서의 명예를 담보하는 승진이라는 ‘은총’을 ‘다시 받기 힘’들다는 곳. 눈총을 맞지 않으려고 ‘눈치의 기술’까지 익히려 강의를 받기도 한다는 곳. ‘평생을 눈총만 피해 지내다가 / 허리가 굽어버린’ 많은 사람들을 보며 ‘함께 힘을 모아 / 대포를 쏘아 올리자고’ 다짐들을 하게 만들기도 하는 곳. 그러나 그 다짐들이 결코 실천적 행위로 이루어질 수 없도록 만드는 곳. 잠시 그곳을 벗어난 ‘어스름 퇴근길’에 대포를 쏠 음모와 혁명이 아닌, ‘몇 명씩 모여 앉아’ ‘대포를 들이키게’ 만드는 곳. 이 땅의 대다수의 평범한 노동자들이 바로 그곳으로 갔다 잠시 집에서 잠을 잔 후 다시 그곳으로 가고 있음을 시인은 매우 평이한 언어로, 능수능란한 언어유희를 구사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노동이 자신의 오랜 꿈이나 자아실현과 연결될 수 없는 시대, 언제 어떻게든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자신의 의식에 새기고 살아야 하는 삶. 그러기에 ‘눈총’을 받지 않고 어떻게든 끈질기게 살아남아 생을 영위하기 위한 ‘돈’을 벌어야만 하는 비애. 그리고 그 벌어 온 ‘돈’으로 어찌됐든 소비하고 소비되는 생. 바로 그런 삶을 살고 있고, 살 수 밖에 없는 지금 이 땅의 대다수 노동자들의 ‘그곳’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불러야 하나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역설이 그저 오래된 고전이라고 함부로 치부할 수 있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존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무릎에 고인 눈물’을 보고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에게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소비회로의 노예로 전락한 노동의 삶이 지금 여기의 현실이라고 해도, 개별 일상의 삶을 영위하는 노동자들은 각자 자신의 품고 있는 소소한 행복과 희망을 위해 ‘눈총’을 견디며 살고 있음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박종현의 ‘의자’는 바로 그런 삶을 살아온, 한 존엄한 중년의 노동과 삶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내 무릎을 의자 삼아 앉곤’ 했던 ‘어릴 적 아들놈’이 아마 빛나는 ‘하늘’을 화자의 마음속에 들여놓고 살게 했을 것입니다. 바쁘고 힘들고 아프지만, 미래의 희망을 품고 하루하루 살게 했을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내 무릎을 기피’하고 ‘내 손에 든 짐을 대신 들어’주는 ‘의자 등받이 같이’ 커 가는 아들을 보며 비록 아비의 무릎은 ‘세상 모서리에서 삐걱거리기 시작’했어도 뿌듯함과 대견함이 묻어난 미소를 속으로 짓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드디어 ‘내 무릎이 내 의자가 되어 쉬’게 된 날. 그게 주체의 의지가 아니라 자본가의 ‘눈총’에 의해 너무도 손쉽게, 너무나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해고의 날. 생소한 이명이 들리는 ‘꺾은 무릎’을 끌고 사내는 병원으로 갔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치유를 위한 ‘처방전’을 건네받으면서 보이지 않는 마음의 ‘눈물’이 자기 생의 ‘무릎’에 잔뜩 고여 있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서럽게 속울음을 울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를 읽는 지금 여기의 많은 중년의 노동자들 역시 반드시 자신에게 다가올 서러움이라는 사실을 조만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나 당신 혹은 우리들은 꺾은 무릎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명퇴가 아닌 조퇴를 거부하는 마음으로 다시 생의 취업전선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엄한 생의 노동을 위해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너져서
일어서지 못하는 등뼈들이 누워있다
후려치는 통증으로 비틀거리다가
쓰러지기도 하는 몸들
돌지 않으면 아주 잃어버리고 말,
더듬더듬 찾아가는 세상 위에 한 점
돌아가는 지축 위에 축 하나 세우는 일이
오로지 도는 일 말고는 없어, 산다는 건
온몸에 채찍을 감고 견디는 일
미끄러운 세상 바닥에 틈을 비집고 직립하는 일
응달이 내민 언 손을 잡고 서늘한 등줄기를 세워본다
흔들리며 일어서는 어깨 위에
어쩌면 오늘은 피어날지도 모를
무지갯빛 무늬를 위하여
하루의 뼈가 일어선다
-<박정보, 「팽이 -지하철역에서」, 시인정신 2016년 겨울호>
♯2 ‘대포’ 한 번 쏘아보지 못하고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대포’를 기울이며 자신들을 고용한 음흉한 자본과 자본가들에 대해 노가리를 씹듯 뒷담화를 날리거나 그저 침묵하는 풍경은 씁쓸하지만 어쨌든 돌아가서 다시 출근한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 다행이야~ 라고 읊조릴 수 있는 현실이 바로 지금 여기의 핍진한 사실입니다. 거대 모순은커녕 자신이 몸담은 작은 조직에서 벌어지는 작은 부당함조차 참을 수밖에 없는 노동의 비루함은 슬픕니다. 그러나 자아실현은커녕 밥벌이의 괴로움을 속으로 외치며 졸린 눈을 부비며 그 노동자들이 출근하는 지하철의 풍경을 들여다보십시오. ‘눈총’받아 괴로워도 생존의 밥을 먹여 줄 번번한 일터 하나 없이 ‘무너져서 / 일어서지 못하는 등뼈들’의 모습 앞에서는 그 비루한 슬픔마저 희망이라고 말해야 할런지도 모릅니다.
표정 잃은 많은 사람들을 싣고 자신이 쓸 자본과 자본의 이윤확대를 위해 생기 잃은 몸을 맡기고 잠시 이동하게 해 주는, 메트로 폴리스의 곳곳에 등뼈처럼 여기저기 뻗어 있는 무표정의 지하철. 그 역사驛舍마다 우리가 자주 목격해야만 했던, ‘미끄러운 세상 바닥’에서 어떻게든 밀려나지 않으려고 애쓰다 ‘후려치는 통증으로 비틀거리다가’ ‘쓰러지기’만 하던 몸들. 교환가치의 돈이 숭배된 지 오래인 물신의 도시에서 완벽히 밀려나 재활이나 재생은 꿈도 꾸지 못하고 완벽히 돌아버린 것만 같던 사람들. 완벽히 죽은 것만 같던 사람들.
그러나 시인은 이른 아침 죽음처럼 차디찬 미끄러운 세상바닥에 깔았던 종이박스를 거두며 그들이 일어서는 모습에서 ‘미끄러운 세상 바닥에 틈을 비집고 직립하는’ 능동성을 읽어내고 있습니다. ‘돌아가는 지축 위에 축 하나 세우는 일이 / 오로지 도는 일 말고는 없어’ 돌고 돌며 ‘더듬더듬 찾아가는’ ‘세상 위의 한 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온몸에 채찍을 감고 견디는’ 삶을 살아온 그들의 생의 비애와 숭고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비록 ‘언 손’이지만, 그늘진 응달이 내미는 손길을 잡으려는 생의 의지가 그들의 ‘서늘한 등줄기’를 세우는 모습을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흔들리며 일어서는 어깨’를 흔들며 하루치의 일당을 받고자 새벽 인력시장으로 헛걸음을 하거나… 어느 역전의 무료급식차 앞에 배식판을 들고 줄을 서 있는 팽이, 팽이들. 비 온 뒤 잠시 뜨는 무지개가 비록 (헛)희망일지라도 ‘어쩌면 오늘은 피어날지도 모를 / 무지갯빛 무늬’를 꿈꾸며 ‘하루의 뼈’를 고통스럽게 세우는 팽이, 팽이들. 그 일어섬 앞에 누가 감히 누추와 비루의 삶을 말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행복은 비루하고 절망은 찬란한, 저 역설의 희망 앞에서…
실족한 사람들이 여기 모여 있구나
떨어지지 않으려 절벽을 잡고 몸부림 친
흔적이 햇살에 아름답다
죽을힘 다해 절벽을 기어오르다가
얼어 죽은 미라의 몸속에
실핏줄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세월호 캄캄한 절벽을 잡고
끝까지 바깥세상을 믿었던 사람들
그 눈물도 함께 여기 얼어붙어 있다
아직도 세상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햇살 좋은 봄 오면 다시 환생할까
흰 목련처럼 몸에 감았던 붕대를 풀고
봄꽃처럼 환하게 웃는 날 올까
떨어지지 않으려 절벽을 잡고 몸부림 친
투명인간의 흔적이 햇살에 아름답다
실족한 우리 젊은 날들이 여기 다 모여 있다
-김진광, 「겨울폭포」, 시인정신 2016년 겨울호>
♯3. 속도와 경쟁이 찬양되는 시대는 어쩌면 영원히 찬 겨울입니다. 굳이 기암괴석이 우람하게 진을 치고 있는 자연 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무수한 절벽과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향상과 진보가 결국 자본의 무한증식으로 수렴되고 있는 문명의 절벽으로 뻗어 있는 길. 평평한 듯 날렵해 보이는 화려한 길이지만 늘 불안과 두려움 속에 걷고 있는… 아프거나 다치거나 조금의 방심으로 게을러지면 바로 실족하게 되는 절벽의 길.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면 여기저기 낙마하는 사람, 사람들. 그들의 비명, 울음. 그 절규마저도 성공과 배제의 경쟁구도로 내몰아 실패의 낙인을 손쉽게 찍고 마는 세상.
시인은 아프게도, 절벽 아래의 허방으로 떨어져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람들의 모습을 겨울폭포에서 보고 있습니다. ‘떨어지지 않으려 절벽을 잡고 몸부림’ 치느라 만신창이로 갈라지고 터진 존재들의 피묻은 절규를 얼어붙은 폭포에 빗대고 있습니다. ‘죽을힘 다해 절벽을 기어오르다가 / 얼어 죽은 미라’에 빗대고 있습니다. 물의 본성과 자연스러움이 흘러감에 있고, 그 흐름이 생명성을 의미한다면 분명 갈라터진 몸으로 굳은 물(폭포)은 죽음의 메타포이지요. 그러나 도처에 음산하게 깔린, 저 무수하게 낙마한 도저한 죽음을 아프게 인식하며 시인은 그 몸부림치다 모든 물기를 잃고 딱딱하게 굳어 버린 죽음의 흔적. 그 ‘흔적이 햇살에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그 미라처럼 굳은 죽음 안의 ‘실핏줄 흐르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토록 아픈 마음의 눈과 귀는 놀랍도록 슬프고 정직합니다. 그렇기에 이 땅이 ‘아직은 세상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얼어붙은 동토凍土임을 분명히 뼈아프게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햇살 좋은 봄 오면 다시 환생할까’, ‘봄꽃처럼 환하게 웃는 날 올까’라는 물음표 없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요. 질문 아닌 간절한 바람이자 소망을…
‘흰 목련이 목에 감았던’ 그 핏물 배이고 고였을 ‘붕대’를 풀고 벙그는 봄날의 모습은 우리에게 아름답게 다가올 수 있을까? 이성부 시인이 오래 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 너는 온다’라고 아프게 얘기했던 그 절창의 울림을 다시 한 번 믿고 싶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어쩌다 유등이 둥둥 뜨는
이 강가를 고향으로 두고 있는가.
강물이 꽃 핀다고
멀리 있는 당신에게 타전하고
글썽이는 등불 하나 물에 놓아준다.
기슭은 찰싹찰싹 물이 돌아오는 소리 들리지만
오늘은 죄다 떠나가는 기슭이어서
나는 소원을 버리는 사람들 틈에 서서
물길 합수合水되는
어느 지류를 꿈꾸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스스로 흐르는 물이 없다고
따라가는 물길들뿐이라고
유등 흘러가다 꺼지는 그쯤에서
캄캄하게 기다리겠노라고
또 글썽글썽 타전하는 것이다.
등을 밀 듯 등燈을 민다.
당신의 등이 어깨 쪽으로 기울 듯
꽃피는 물이 절정이다.
오늘 같은 밤, 당신의 등에 기대면 찰랑찰랑
물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겠다.
-안채영, 「유등」, 시인정신 2016년 겨울호>
♯4. 시인이란 과연 고향을 떠나 온 자입니까? 연어처럼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자입니까? 시인은 당신을 떠난 자인가요? 먼 길 에둘러 당신에게로 돌아가는 자인가요?
시인이 쓸쓸하게 읊조리며, 펼쳐 보이는 ‘유등’의 풍경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저는 구정의 어느 즈음 남도의 끝 섬자락에 있었습니다. 밤마다 한치 잡이 배들이 집어등을 켜고 먼 바다에서 여기저기 빛나는 등대처럼 깜빡깜빡 거렸던 곳. 쭈글쭈글한 주름이 새겨진, 검게 그을린 얼굴의 할머니들이 태왁을 안고 물살의 채찍에 반생이 패인 작은 몸을 물에 둥둥 띄웠다, 깊은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던 곳. 그 조용했지만, 생존의 치열함으로 쉴 틈 없이 분주했던 작은 어촌마을의 한 귀퉁이.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신 제 늙은 어머니가 계신 곳. ‘나는 어쩌다’ 길의 끝마다 바닷물이 가로막아 선 이 섬을 ‘고향으로 두고 있는가’.라고 마음속의 탄식을 하게 하던 곳. 빨리 떠나고만 싶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으나 더디게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감을 늘 불러일으키던 곳. 생의 변곡점마다 맞이했던 상처의 순간들에 시원을 찾아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다시 발길을 무의식적으로 돌리던 곳.
뭍으로 간 대학 시절. 어떤 낭만의 순애보만이 사랑이라 믿었던 시절. 먼발치에서 오래 좋아하던, 그래서 그 사랑의 순간에만 오직 ‘첫’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한 사람과의 이별로 많이 아팠었습니다. 박남철의 첫사랑에 나오는 구절처럼 책상 모서리를 깎은 것은 아니지만, 제 마음을 자꾸 후벼 파며 ‘나는 왜 나인가?’에 대해 자책하고, 고슴도치처럼 내 안에서 자꾸만 자라나는 가시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골방에 웅크리기만 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제 발길이 향한 곳은 섬의 물가였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조금 앞 둔 시점. 젊은 사람들이 ‘죄다 떠나가는 기슭’같은 곳이었던 제 고향 마을길 따라 연등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불었다 잦았다 하는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등 하나 하나씩 허공에 내걸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혼자 조용히 찾곤 했던 바위너설에 앉아, 퀭한 눈으로 소주 몇 잔을 마시고 편지를 읽었다 접었다 하는 사이 어둠이 깔리던 바다. 저 먼발치 바다 위에 띄엄띄엄 켜지던 고깃배의 집어등들이, ‘글썽이는 등불’처럼 보였습니다. 저 뭍 쪽 가로수 사이사이마다 켜진 연등이 ‘글썽이는 등불’처럼 처연했습니다. 순간 ‘바닷물이 꽃 핀다고 / 멀리 있는 당신에게 타전하고’ 싶다는 열망이 내 안에 작은 등을 켜고 깜빡이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오늘은 죄다 떠나가는’ 밀물이어서, 저 등을 떼어다 이 손편지들과 시집을 넣고 ‘물에 놓아주’고 싶었습니다. 아니 제 몸과 마음을 저 등 안에 실어 놓아주고 싶었습니다. ‘물길 합수되는 / 어느 지류’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지만, 제 ‘유등 흘러가다 꺼지는 그쯤에서 / 캄캄하게 기다리겠노라고’ 말하고만 싶었습니다. 전하고 싶었습니다. 잠깐 스치고 순간 어긋나 버렸지만 ‘보고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행여 이 생의 어느 지점에서 마주치더라도 ‘행복하라’고 ‘충만하게 잘 살라’고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리움이라는 천형은 오롯이 내 몫이고 여기 아무도 보지 않아도 내 안의 등에 붉을 밝히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당신의 ‘등을 밀 듯 등(燈)을’ 밀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등이’ 제 ‘어깨 쪽으로 기울’었던, 제가 ‘당신의 등에’ 기댔던 그 아름다운 날들은 유등이 되어 먼 어둠 속으로 희미한 별빛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봄날은 가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다시 봄
세상을 다시 봄
-이숙희, 「기적」
아무리 춥고 시리고 아파도… 겨울은, 봄이라는 희망의 예감 때문에 견딜 수 있는 한 시절일 겁니다. 그러나, 어김없이 다가오는 봄은 정녕 봄이었는지요? 그저 일없이 방문을 걸어 잠그고는 한없이 웅크려 보냈던 겨울, 그 뒤에 오던 습관적인 시간은 아니었던가요?
언제나 시간의 흐름 따라 이 세상엔 다시 봄이 왔었고, 오고, 또 오겠지요. 그렇지만, 어김없이 오는 봄 앞에서 과연 세상을 다시 들여다보는 그런 지혜의 순간을 나는 가져본 적이 있었나? 하고 뒤돌아보면… 휴우~ 아프지만 없었네요, 없었습니다. 쾅~ 문을 닫아걸고 방문을 잠근 채 그저 유리창을 내다보며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자에게 그저 봄은 그 흔한 봄일 뿐. 결코 ‘다시 봄’은 아니겠지요.
얼어붙은 동토凍土의 길을 걷고 걸으며 오래 앓고 아파한 사람, 그 아리고 쓰린 고통의 계절을 꽉 껴안고는 끝끝내 버티고 이겨낸 사람에게만 봄은‘다시 봄’이겠지요. 그 봄은 세상을 다시 보게 하는 사랑의 눈을 그 사람에게 주겠지요.
‘시인정신’에 실린 시는 아니지만, 제가 여지껏 아끼고 사랑하는 시 한 편 가져와 봤습니다. 이미 지나간 봄을 생각하며 음미해 보시라고. 이미 선뜻 다가 온 혹한의 겨울에 다시 봄을 꿈꾸어 보시라고. 오래 전 제 비망록에 적어 둔 시를 꺼내 읽어 보았습니다. 두고 두고 보고 또 되새김질해 온 시이건만 아직 저는 ‘다시 봄’을 맞은 적이 없습니다.
추운 겨울 지나 다시 올 봄날
당신은 꼭 그런 봄을 맞으시길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ㅡ「시인정신」 2017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