族 譜
일족(一族)의 계보(系譜)를 기록한 가계보(家系譜).
중국 후한(後漢)시대에 왕실의 계보를 기록한 것이 그 시초이다.
한국에서도 고려시대부터 편찬되었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족보로서는
1476년에 발간된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성화보(成化譜)가 있다.
한국에서 족보의 발생은
벌족(閥族)의 세력이 서로 대치하고,
동성일족(同姓一族)의 관념도 매우 뚜렷하게 된 이후의 일이며,
족보 간행을 촉진시킨 요인은
가. 동성불혼(同姓不婚)과 계급내혼제(階級內婚制)의 강화
나.소목질서(昭穆秩序) 및 존비구별(尊卑區別)의 명확화
다.적서(嫡庶)의 구분
라.친소(親疏)의 구분
마.당파별(黨派別)의 명확화 등이었다.

족보에는
편찬할 때의 서문(序文)과 선조(先祖),
현조(顯祖)의 사적(事蹟) 행장기(行狀記) 묘비문(墓碑文),
현조의 묘(墓)나 조묘(祖墓)의 소재도(所在圖)등이 기재되며,
또 시조(始祖)부터 현세대에 이르는 일족 전체의 남성성원(男性成員)의 이름,
자,호,시호(諡號),관직 생몰연월일 및 묘의 소재지,
배우자의 성과 본관 등이 기재된다.
다만 여자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으며,
남편의 성명,본관 그리고 아들의 이름이 기록될 뿐,
철저한 남계중심의 기록이다.
족보는 현대에 와서는 누구든지 만들어도 되지만,
봉건사회에서는 양반씨족이 아니면 가질 수가 없었는데,
말하자면 양반이라는 증서와 같은 것이었으며,
이것이 없으면 상민(常民)으로 전락하여 병역 등이 부과되므로,
조선시대 중기 이후 족보 편찬사업이 활발해졌다.
족보에는
시조부터 현세대에 이르기까지의 일족을 망라한 대동보(大同譜)와
유력한 인물을 파조(派祖)로 하는 일파를 단위로 해서 편찬되는 파보(派譜)가 있다.
대동보의 편찬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대씨족(大氏族)인 경우 거의 불가능하고,
따라서 30∼40년마다 편찬되는 파보가 주가 되지만,
이 시조까지의 계보와 각 파간의 계통이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족보는 한 성씨의 역사 기록이고 가계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사문서(私文書)이지만 공문서의 성격도 지닌다.
족보의 기록을 통하여 자기 조상의 업적을 찾아보고
종중(宗中)의 협동과 상부상조,
그리고 교화의 역할을 한다는 면에서는 사회통합적 기능도 아울러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족보가 단순히 가계의 기록만이 아니라
종중(宗中)의 단합과 사회적 통합의 기능을 지닌다고 할 때
그것은 오늘날에도 존재의의가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최근에는 족보 안에 사진을 넣거나 한글로 풀어쓰거나 영상자료 형태로 제작하는 등
여러 새로운 양식들이 시도되고 있다.

족보의 種類
대동보(大同譜)
같은 시조 아래에 각각 다른 계파와 본관을 가지고있는 씨족을 함께 수록하여 만든 족보책이다.
족보(族譜), 종보(宗譜)
본관을 단위로 같은 씨족의 세계를 수록한 족보책으로, 한 가문의 역사와 집안의 계통을 수록한 책이다.
세보(世譜), 세지(世誌)
한종파 또는 그이상이 같이 수록되어있그나, 한종파만 수록된것을 말하며 동보(同譜)합보(合譜) 라고도한다.
파보(派譜), 지보(支譜)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한종파만의 이름과 벼슬,업적 등을 수록한책이다, 이들 파보에는 그 권수가 많아 종보를 능가하는것도 적지않다, 파보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증가되어가고 그표제에 연안김씨파보,경주이씨좌랑공파보, 등과같이 본관 성씨 외의 지파의 중시조명 또는 집성촌,세거지 지명을 붙이고 있으나, 내용과 형식에서 족보와 다름없다.
가승보(家乘譜)
본인을 중심으로 수록하되, 시조로부터 자기의 윗대와 아랫대에 이러기까지의 이름과 업적,전설,사적을 기록한 책으로 족보편찬의 기본이된다.
계보(系譜)
한가문의 혈통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자만을 계통적으로 나타낸 도표로서, 한씨족 전체 또는 한부분만을 수록한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계보에 대하여 오인될 경우 조폭의 이미지가...ㅎㅎㅎ>
가보(家譜)와 가첩(家牒)
편찬된형태,내용에 상관없이 동족 전부에 걸친 것이 아니라 자기일가의 직계에 한하여 발췌한 세계표(世系表)를 가리킨다.
만성보(萬姓譜)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라 고도하며, 국내 모든 성씨의 족보에서 큰줄기를 추려내어 모아놓은 책으로 모든 족보의 사전구실을 하는것이다. 「청구씨보(靑丘氏譜」,「장영보(薔纓譜)」, 「만성대동보(萬成大憧輔)」,『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이 있다.
기타(其他)
「문보(文譜)」,「삼반십세보(三斑十世譜)」,「호보(號譜)」 와 같이 현달한 조상의 세계를 명백히 하려고 한 보서(譜書)나 「대방세가언행록(帶方世家言行綠)」,「보성선씨오세충의록(寶城宣氏五世忠義錄)」 등과 같이 조상중에서 충(忠),효(孝),절(節),의(義)가 특히 뛰어난 사적과 공훈을 수록한것도 있다.
또한 환관(내시) 사이에도 계보를 끊이지 않게하기 위하여 성이 다른 자손을 입양시켜 자손으로 삼고 가계를 보존하고 있는 양세계보(養世系譜) 등도 있다.
족보관련常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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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족보는 어떻게 보는것인가?
저는 어릴적 어머님께서 보여주신 족보책을 요즘 인사동의 고문서쯤 생각했으나
사실은 별 것(?) 아니었다. 주로 한자가 가득했으나 요즘은 한글로 편찬되어
누구라도 담박에 알수 있다. 족보 보는 법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나의 뿌리가 어디쯤에 있는가를 확인해 보십시요.
족보 보는 법

첫째
족보를 보려면 우선 '나'가 어느 파에 속해 있는 지를 알아야 한다. 만약 파를 알지 못한다면 조상이 어느 지역에 살았고, 그 지방에 어떤파가 살았던가를 알아야 한다.
시조로부터 몇 세(世)인지를 알아야 한다. 족보로는 가로로 단을 나누어서 같은 세대에 속하는 혈손을 같은 단에 가로로 배열하였으므로 자기 세의 단만 보면 된다. 세수를 모른다면 항렬자로 세수를 헤아려야 한다.
셋째
항렬자와 족보에 기록된 이름(譜名)을 알아야 한다. 예로부터 집에서 부르는 이름이나 호적에 올린 이름에는 항렬자를 넣지 않았더라도 족보에 실을 때는 반드시 항렬자를 넣은 이름을 기재했으므로 이를 알아야 한다.
위의 세가지는 족보를 보는 기본 요건이므로 필수적으로 알아야 한다.
다음은 족보의 한 쪽을 예로 들었으니
그것을 보면서 좀더 세세하게 족보를 보는 방법을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1.
파의 이름이다.
파의 명칭은 대부분 파조(派祖)의 관작명, 시호, 아호(雅號)등을 따서 붙이게 마련이다.
벼슬을 지낸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00 공파'라 한 것이다.
이 파를 찾으려면 족보 계보도(系譜圖)외에 세계도(世系圖)를 보아야 한다.
세계도에는 대략 분파 계도를 그려놓고 무슨 파는 몇 권 몇 쪽에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이 표시를 과거에는 천자문(千字文)의 순서대로 한 장에 한 장씩 붙였는데
요즘은 대개 숫자순으로 쓰고 있다.
2
열(悅)을 기두(起頭)라 한다.
오른쪽의 작은 글씨는 열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표시 한 것이다.
그 옆에 큰 글씨로 쓰여져 있는 사첩(四疊)은 가로로 네 번 바뀌었다는 뜻이다.
3
18은 열의 상계,
즉 자전이 18쪽에 있다는 표시다.
몇 권이라는 표시가 따로 없는 것은 그 책의 18쪽이라는 뜻이다.
4
20세는
시조 또는 1세조로부터의 세수를 표시한 것이다.
5
보명(譜名) 또는 관명(冠名)이라 한다.
6
양자(養子)의 생부(生父)를 나타낸 것이다.
7
누구에게 양자를 갔다는 표시이다. 이를 출계(出系)라고 한다.
8
자(字)와 관직을 기록한 것이다.
호(號)가 있을 경우는 자 다음에 호를 기록하고 다음에 관직을 기재하게 되어 있다.
9
출생 연대이다. 요즘은 서기와 간지(干支)를 함께 쓰고 있다.

10
생전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11
사망한 연대와 사망한 나이이다.
12
배우자의 성, 본관, 부친, 조부와 증조의 이름 및 관직이다.
13
배우자의 외조부의 성과 본관, 이름, 맨 끝으로 묘소의 소재지이다.
14
교(嶠)의 하계(下界),
즉 아들 이하는 나타나 있다는 표시이다.
15
둘째 아들이다.
16
셋째 아들이다.
17
출가한 딸의 배우자, 즉 사위의 성명이다.
18
사위의 본관과 사위의 아들, 즉 외손자의 이름이다.

韓國姓氏 發生 과 變遷
우리나라 성씨의 발생과 변천 을
통해서 족보를 되새겨 봅니다!
저는 인동 장가 입니다.
우리의 성씨는

1천년이 넘는 오랜 역사와 함께 세계에서도 가장 독특한 체계를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막상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씨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다.
이를테면 우리의 성씨는 외국인의 성씨와 어떻게 다르며,
우리의 성씨는 어떠한 역사적인 과정을 밟아 변천해 왔으며,
얼마 만한 성이 어떻게 분포되어 왔고,
또 본관이 왜 생겼으며 동성 동본이란 어떤 뜻을 갖는 것인지,
또 우리 민족이 오늘의 형태로 형성되기까지 어느 정도의 이민족이 들어와
우리 민족에 동화했는지 하는 것 등은 매우 중요한 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관심이 현대로 오면 올수록 엷어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1)高句麗 時代 의 姓氏(고구려 시대의 성씨)
고대 씨족공동체 사회에서는 성이란 것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지(魏誌) '예전(濊傳)'에 나타나 있는 우리나라에 관한 기록에
"其俗重山川 山川 名有部分 不得妄相入 同姓不婚:
그 풍속은 산천을 소중하게 여기며 산천에는 각기 부분이 있어 서로 넘나들거나 상관하지 않으며,
성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라는 얘기가 있다.
이를 보면 당시 중국인들이 우리 토착사회에서
그 일정한 집단 안에서는 혼인을 하지 않는 풍습을 보고
일정한 집단을 同姓(동성)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성을 사용한 나라는
일찍부터 한나라와 접촉해있던 고구려였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고구려는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관계로
중국 문화에 접하는 기회가 많아서 중국의 성씨를 빨리 모방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소노부, 계루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消奴部, 桂婁部, 絶奴部, 順奴部, 灌奴部) 등
다섯 부족 연맹으로 출발하여 처음에는 소노부가 패권을 잡아 맹주의 역할을 하여 왕위를 계승하다가 고구려 건국 시조 동명왕(東明王)이 계루부에서 나와 세력을 폄으로써 주도권을 빼앗았다.
고구려 임금의 성은 처음에는 해씨(解氏)였다가 제6대 왕인 태조 이후에는 고씨가 왕위를 계승했다.
태조왕은 그 이 전의 왕인 해씨와는 계통을 달리하여
졸본부여족(卒本扶餘族)의 방계인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유사> 나 <삼국사기>에 주몽(주몽:동명왕)의 성을 그대로 소급하여 적은 것으로 보인다.
BC 80년 경 후한(後漢) 시대에 완성도니 전한(前漢)의 역사서<漢書:한서>의 조선전을 보면,
동명왕 주몽을 '고구려후 추'라 기록하고 있다.
추는 주몽의 이름이므로 성이 없었던 셈이다.

AD265년 경 진(晉)나라 초기에 만든 위, 오, 촉, (魏, 吳, 蜀), 의역사를 기록한
<삼국지>'동이전' 속에는 '고구려전'과 '공손도전<公孫度傳>'이 있다.
그 글을 보면 고구려 1대 왕인 동명왕을 추로,
6대 태조왕을 궁(宮)으로 ,7대 차대왕(次大王)을 수성(遂成)으로,
8대 신대왕(新大王)을 백고(伯固)로,9대 고국천왕(故國川王)을 이이모(伊夷模)로,
10대 산상왕(産上王)을 위궁(位宮)이라 하여 성이 없고,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또한 대가우거(大加優居), 주부연인 등의 말이 나오는데
'대가'는 부족장을 가리키는 말이고,
'우거'는 이름, 주부는 종2품 정도의 벼슬이었고 '연인'은 이름이다.
이런 기록들로 미루어 볼 때
이때까지는 성이 없었고 이름만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AD 487년 제나라 무제 때의 영명 5년(고구려 장수왕 75)에 만든 송의 역사서<송서>에는
장수왕을 고련(高璉)이라고 기재하고 있는데
이것이 고구려 왕의 성을 고씨로 기록한 최초의 기록이다.
또 <송서>에는 장수왕이 중국에 보낸 사신의 이름으로
고익, 마루, 손수, 동등 (高翼, 馬婁, 孫漱, 董謄)등이 나오는데,
이들의 고, 마, 손, 동, 등이 모두 성씨이다.
AD554년 북제 문선제(文宣帝)의 천보 5년(고구려 양원왕 10년)에 완성된
북위의 역사서 <위서> 고구려 전에는 동명왕을 고주몽(高朱蒙)이라 하여 성씨와 이름을 적고 있다.

그러나
그후 당나라 태종 6년(고구려 보장왕 5년)에 완성된
진 나라의 역사서 <진서> 사이전 동이조(四夷傳 東夷條) 에는
고구려 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쇠(釗),
22대 안장왕(安藏王)을 안 등으로 기록해 놓고 있어 오히려 성이 없는 이름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옛 기록을 보면 중국의 기록과는 다르다.
1145년 고려 인종 23년 김부식(金富軾)이 쓴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건국 초기인물들의 성씨가 많이 보인다.
동명성왕이 신하들에게 성을 내려 주었다는 극(克), 중실(仲室), 소실(少室),씨 등과
유리왕(유璃王) 이 내려주었다는 위(位),우(羽)씨,대무신왕(大武神王) ,이 내렸다는 낙(낙),
부정(負鼎), 대실(大室)씨 등으로 사실이 아닌 전설로 치부하더라도
제3대 대무신왕 때 좌보(左輔) 벼술을 한 을두지(乙豆支), 우보 벼슬을 한 송옥구(松屋句)가 나와 있고, 또 6대 태조왕 때의 좌보 목도루(穆度婁)와 우보 고복장(高福章),
8대 신라왕 때의 국상 명림답부(國相 明臨答夫),
10대 산상왕 때의 국상 을파소(乙巴素),
11대 동천왕때의 국상 고우루(高優婁), 명림어수(明臨於漱),
14대 봉상왕(烽上王) 때의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 등과 같은
성씨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이름도 나온다.
또한 왕비나 왕모의 성으로는 禮, 宋, 于, 緣, 周,(예,송, 우, 연, 주) 씨 등이 눈에 띈다.

한편
삼국사기보다 330여년 앞서 편찬된 일본의 성씨록에는
일본의 귀화한 백제, 신라, 고구려, 임나 사람들이 이름이 수록되어 있으나
성을 가진 사람이 없다.
이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의 역사책들,
우리의 삼국사기, 일본의 성씨록 등을 종합하여 볼때 모순된 점이 있으므로
삼국사기에 기재되어 있는 장수왕 이전의 성은 뒤에 소급해서 붙인 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아무튼
고구려의 성에는
을, 예 송, 목, 우, 주, 마, 손, 동, 예, 연, 명림, 을지 (乙, 禮 松, 穆, 于, 周, 馬, 孫, 董, 芮, 淵, 明臨, 乙支) 등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 무렵의 성은 후대의 성과는 개념을 달리 하는 것으로
중앙 또는 지방세력 중에서도 핵을 이루는
유력한 족장들의 정치적 신분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2)百濟 時代의 姓(백제 시대의 성)
중국의
<晉書진서>,<송서>,<南齊書남제서>,<梁書양서>,
<陳書진서>,<위서>,<周書주서>,<南史남사>,<北史북사>, 등
여러나라의 역사책에는
백제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부터 27대 위덕왕(威德王)까지 (AD 346~ 598)는
근초고 왕을 여구(餘句), 18대 진지왕을 여영(餘映), 20대 비유왕(毗有王)을 여비(餘毗)
21대 개로왕(蓋鹵王)을 여경(餘慶), 25대 무령왕(武寧王)을 여륭(餘隆),
26대 성왕(聖王)을 여명(餘明), 27대 위덕왕(威德王)을 여창( 餘昌) 등으로
백제의 왕실의 성을 여(餘)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의
<수서:隨書>와 <당서:唐書>에는 29대 무왕(武王)부터는
여(餘) 앞에 부(扶)를 붙여 부여(扶餘)로 기록하고 있다.
위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백제에서는
13대 근초고왕 때부터 성을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중국의 당나라 때 편찬된 <북사> 백제열전에 나타난 백제시대의 성에는
사, 연, 해, 진, 국, 목 (沙, 燕, 解, 眞, 國, 木)등의 성이 기재되어 있으며,
그밖에도 동부에 흘(屹)씨가 있었고,
왕, 장, 사마, 수미, 흑치,( 王,張, 司馬, 首彌, 黑齒) 등 10여 가지 성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 백제의 성씨들과 고구려의 성씨들이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는 이들 성씨들이 백제가 신라에 패망함으로써 성씨를 사용하지 못했거나
혹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인 특권이 주어지는 부분에 한해서만 허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씨 중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연원을 두고 있는 성씨는 극히 드물다.
고구려의 연원을 둔 성씨로 고씨는 고주몽의 후손이 강원도,
횡성 지방에 산재한다고 전해지고 있을 뿐 그 외의 고씨는 모두 탐라(耽羅:제주도) 고씨계이다.
오직 강 씨가 고구려의 장군이었다는 강이식(姜以式)을 시조로 하고 있다.
백제에 연원을 둔 성씨로는
온조(溫祚)를 따라 남하하여 백제 건국에 공을 세우고 십제공신(十濟功臣)이 되었다는 전섭(全攝)과
마여(馬黎)를 먼 조상으로 하는 전씨와 마씨가 있고,
개루왕(蓋婁王)때도 인물인 도미(都彌)를 선계로 하는 성주도씨(星州都氏),
백제가 망하자 당나라로 망명하여 당 고종으로부터 서라는 성을 받고
웅진도독이 되어 귀국했다는 의자왕(義慈王)이 태자 부여융(扶餘隆)을 시조로 하는 부여 서씨가 있다. 이 외에
진씨, 연씨, 국씨가 지금도 있기는 하지만 그 연원이 분명하지 않다.

3)新羅時代의 姓(신라시대의 성)

신라 왕실의 세계를 보면
역대 56명의 왕가운데 朴씨가 10명, 昔씨가 8명, 金씨가 38명으로 되어 있다.
이들 박, 석, 김씨의 연원을 살펴보면
BC 69년 3월 1일에 여섯 촌장이 알천가에 모여서
나라를 맡아 백성을 다스릴 君長(군장)을 추대하고자 의논하고 하늘에 제례를 드리던 중
楊山(양산) 밑 나정 수풀사이에 서기가 뻗치고
용마 한 필이 꿇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으므로 가 보았더니
박 같은 것이 있어 기이하게 여기고 헤쳐보자 그 속에서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그래서 박속에서 나왔다하여 성을 '박'이라 하고 이름을 혁거세(赫巨勢)라 하여
BC 57년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래서 박씨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석씨는
BC19년 (박혁거세39년) 아진포(阿珍浦:지금의 영일)에 떠내려온
궤짝을 한 노인이 발견 하였는데 그속에서 나온 아이가 석탈해(昔脫解)였다.
그는 57년 유리왕(儒理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김씨의 시조는 65년(탈해왕 9년) 금성(錦城) 서쪽에 있는
숲인 계림(鷄林)의 나뭇가지에 걸려 있던 금궤에서 태어났다.
금궤에서 나왔다하여 성을 김, 이름은 알지(閼智)라 했는데
그의 7대손이 미추왕(味雛王)이다.
이래서 박, 석, 김의3성이 등장하였는데 이에 대해 견해를 달리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한
이,최, 손, 정, 배, 설(李,崔, 孫, 鄭, 裵,薛) 씨 등을 일컫는
6촌성은 32년(유리왕 9년) 6촌을 6부로 고치면서
박혁거세를 첫 임금으로 추대했던 여섯 촌장에서 각각 성을 재림으로써 생겨나게 외었다고 한다.
알천 양산( 閼天 楊山)촌장알평(閼平)에게 이씨,
돌산 고허(突山 高墟)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에게최씨,
무산 대수(茂山 大樹) 촌장 구례마(俱禮馬)에게 손씨,
자산 진지(紫山 珍支) 촌장 지백호(智伯虎)에게 정씨,
금산 가리(金山 加里) 촌장 지타(祗陀)에게 배씨,
명활산 고야 (明活山 高耶)촌장 호진(虎珍)에게 설끼를 각각 하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9성은 당초부터 그런 성을 갖고 있었건 것은 아니다.
우대에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중국식 성을 사용하게 되면서
각각 계보를 소급하여 붙인 것이라 봄이 정확하다.
그러나 그들은 각각 성을 소급해서 붙일 수 있는 확실한 계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그 계보의 주체가 되는 친족공동체는 그 전부터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 예는 540년부터 576년까지 신라 24대 진흥왕이 새로 점령한 국토를 순행하여
그곳에 세운 순수비(巡狩碑)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비석들에게는 수행자 명단에 많은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나
성은 나타나 있지 않고 대신 출신부 이름이 밝혀져 있는 것이다.
그 비석들에 나타난 이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진흥왕 22년(561년)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동에 건립된 창녕비(昌寧碑)에는 거칠부지(居七夫智), 심표부지(心表夫智), 마알지(麻알智) 등이 나온다.
2). 진흥왕 29년(568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에 건립된 북한산비에는 정차내(丁次奈)란 이름이 나온다.
3). 진흥왕 29년(568)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사동의 만덕산 복흥사 뒤에 있는 운시산 꼭대기에 세워진 마운령 (磨雲嶺碑)에는 거두부(居杜夫智)란 이름이 나온다.
이외에도
25대 진지왕 3년(578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戊戌塢作碑)와
26대 진평왕 때 (579~632)에 건립된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에도 성은 나타나 있찌 않다.
비문에 나타난 거칠부, 심표부, 마알, 정차내 등은 성이 없는 이름이며,
지는 이름 밑에 붙인 존칭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순수비에 나타난 이름들은4대 진흥왕 때는 물론,
25대 진지왕이나 26대 진평왕 때도 성이 없었음을 입증하는 사례이다.
다만 왕실에서는 24대 진흥왕 때부터 김씨를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양서> 신라전(新羅傳)'에는 "신라왕 모태가 처음 사신을 보내왔다."고 나와 있는데
모태란 23대 법흥왕을 가리킨 것이다.
그런데 ㅡ북제서,에는
법흥왕 다음 임금이 진흥왕을 김진흥, 진편왕을 김진평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왕실의 김씨를 제외한 나머지 성들은 그보다 훨씬 뒤에야 비로소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김유신(金庾信)의 경우는 예외적이다
김유신은 가락국(駕洛國)의 시조로 알려진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인데
<삼국사기> 법흥왕 19년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금관국주(金官國主) 김구해가 비와 세 다들 노종(奴宗), 무덕(武德), 무력(武力)과 더불어
국탕보물(國帑寶物)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예로써 대우하여 상등의 벼슬을 주고 본국(가락국)을 식음으로 삼게 하였는데
그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
" 가락국이 법흥왕 때에 신라에 의해 병합 흡수되면서
가락 왕실의 직계 후예가 신라의 최고 신분인 진골(眞骨)에 편입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따.
이 무력이 바로 김유신의 조부이다.
그러나 뒤에 김유신의 누이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비가 되면서부터
김유신이 김씨를 사용하게 된 것 같다는 설도 있어
앞서 예로 든 삼국사기의 구절에 나오는 김구해도 김씨를 소급해서 붙인 것이며
김유신의 조부 무력은 물론 아버지 서현까지도 '김'을 성으로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42년 (유리왕 19년) 가락국의 구간(9명의 추장) 들이 귀지붕에서 금으로 된 상자를 발견,
그것을 열어보자 여섯 개의 알이 들어 있었고,
그 속에서 여섯 동자가 나왔는데
맨 처음 나온 수로를 가락국의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금상자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
제일 먼저 나왔다하여 수로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본다면 성의 표시가 없었다고 해서 곧 성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고,
백제의 고이왕 때부터 왕실에 성이 있었는데
유독 신라에서만 진흥와 때에 이르서서야 왕실에서 김이라는 성을 사용하게 되었고,

그 밖의 성들은
경덕왕(742~762) 이후의 일로 추정한 것은 무언가 이상하다.
경덕왕 때라면 당나라의 제반 문화를 수입하여 무든 제도를 중국식으로 개편하고
종래의 고유 지명도 한자로 고쳐 군현제를 완비하였던 시대인 만큼
중국식 성씨 제도도 아울러 도입되어 상류층에 보급되었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도 성이 있는 사람보다 없는 사람이 더 많은 것으로 보아
중국 문화가 들어온뒤라 할지라도
중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중국식 한자 성을 사용하였으나
귀족이나 관리들일지라도 성을 쓰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의 성씨로는 앞서 언급한
박, 석, 김 등 3성과 6촌성 이외에 9세기 초 당나라에 갔다온 후
청해진대사(靑海鎭大使)가 된 장보고(張保皐)가 최초의 장씨로 등장하였고,
신라 말에는 고려 초에 이르러서야 많은 새로운 성씨들이 등장하게 된다.

4)高麗時代의 姓(고려시대의 성)

성씨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부터였다.
그렇다고 태조 왕건이 일률적으로 성을 갖도록 한 것은 아니었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합했다고는 하지만
개국 초기에는 중앙집권적인 정치제도도 확립하지 않았으며
각 지방은 신라 말기에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반란이 일어나던 무렵이라
각 지망을 근거로 독자적인 기반을 닦고 성장한 토착 세력이
한 개 군 지역을 차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지배 영역 내의 농민으로부터 조세를 거두어 들이는 등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면서 성주나 장군으로 일컫고 있던 호족들에게 지배되고 있었다.
이에 태조 왕건은 개국 초기부터 측근 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새 왕조를 수립하는 데 공을 세운 중앙 세력에게 성을 많이 하사하였다.

또한
중앙과 연결된 호족들도 그들 나름대로 성을 갖게 됨을써 많은 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고려의 개국공신(開國功臣)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 (卜智謙)등이 있는데
그들은 처음에는 성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고려 건국에 고을 세웠기 때문에
홍술(洪述)을 홍유, 白玉을 배현경, 三能山(삼능삼)을 신숭겸, 복사귀(卜沙貴)를 복지겸등으로
태조 왕건이 성을 하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홍유는 악계홍씨(岳溪洪氏),
배현경은 경주배씨(慶州裵氏),
신숭겸은 평산신씨(平山申氏),
복지겸은 면천복씨 (沔川卜氏),의 시조가되었다.

또한 왕건이 세력을 점차 넓히게 되자
각처에서 왕건의 편에 서서
궁예와 견훤의 세력을 물리치고 고려 왕조를 창업하는 데 공을 세운 호족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명주(강릉) 장군이라 일겉던 왕순식(王順式),벽진(碧珍:성주) 장군이라 일컫는 이총언(李悤言), 고울부(영천)장군 황보능장(皇甫能長) 등이었다.
왕순식은
명주의 호족으로 고려 건국 후에까지도 지방에서 독립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승려로 고려 지배권에 살던 아버지가 귀순을 권하자 맏아들 수원(守元)을 보내 귀부했으며,
다른 아들 장명(長命)에게는 1백명의 사병을 데리고 가서 태조의 왕궁을 숙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후에는 자신도 태조를 배알하여 왕씨 성과 대광 (大匡)이라 관직을 받았다.
이총언은 왕권의 권유를 받고 아들 永에게 군사를 이끌고 왕권을 돕게 했으며,
황보능장은 왕권을 도와 공을 세우고 영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총언은 벽진 이씨(碧珍 李氏)의 시조가 되고,
황보능장은 영천 황보씨(永川 皇甫氏)의 시조가 되었다.
오늘날의 성씨 중 상당수는 고려 개국공신의 후예들이다.

앞서 언급한
, 배현경, 복지겸, 홍유나 무송 유씨(武松 庾氏)의 시조인 유검필(庾黔弼) 처럼
군인으로서 공을 세워 중앙세력으로 등장한 인물도 있었고,
지방 세력으로도 왕순식, 이총언, 황보능장 이외에도 많은 사람이 있었다.
문화 유씨(文化 柳氏)의 시조인 유차달(柳車達)은 황해도 유주(儒州:문화) 의 부호였는데
왕건이 견훤을 칠 때 1천 량의 수레를 동원하여 군량을 보급해 주었다고 하며,
전의 이씨(全義 李氏)의 시조 이도(李棹)는
완건이 남정할 때 금강의 물이 넘쳐서 군사들이 강을 건너지 못할 때
그들이 강을 건널 수 있게 해 주었고,
양천 허씨(陽川 許氏)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은
공암(孔巖:양천)의 부농으로서 왕건의 군사들에게 군량을 대어 주었다고 한다
또한 이들 외에도 고려 개국공신으로 각 성씨의 시조가 된 이들이 많았다.

0 0 염씨(廉氏)의 시조는 염 0 0 (廉 0 0) ?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 권행(權幸),
안동 김씨의 시조 김선평(金宣平),
청주 한씨(淸州 韓氏)의 시조 한란(韓蘭),
남양 홍씨(南陽 洪氏)의 시조 홍은열(洪殷悅),
홍주 홍씨(洪州 洪氏)의 시조 홍규(洪規),
남양 방씨(南陽 房氏)의 시조 방계홍(房季洪),
원주 원씨(原州 元氏)의 시조 원극유(元克猷),
파평윤씨(坡平尹氏)의 시조 윤신달(尹莘達),
용인 이씨(龍仁 李氏)의 시조 이길권,
청주 이씨(淸州 李氏)의 시조, 이능희,
면천 박씨(沔川 朴氏)의 시조, 박술희,
아산 이씨(牙山 李氏)의 시조 이서,
동주 최씨(東州 崔氏)의 시소 최준옹,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시조 조맹,
영광 전씨(靈光 全氏)의 시조 전종회,
선산 김씨(善山 金氏)의 시조 김선궁,
해평 김씨(海平金氏)의 시조 김훤술,
봉화 금씨(奉化 琴氏)의 시조 금용식
남평문씨(南平文氏)의 시조 문다성(文多省)이다.

이들 가운데 권행은 원래 김씨였으나 권씨 성을 하사받았고,
그 외에는 성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없어
고려 건국 이전부터 사용하던 성이었던 듯하다.
고려 건국 이전에 성씨가 널리 보급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근거로는
고려 초기의 호장을 시조로 삼은 예가 많음을 들 수 있다.
호장이란 고려 건국 초에 새 왕조에 귀부하지 않은 지방세력들을
강제로 향리의 장으로 삼아 강제로 새왕조에 귀속시켰던 것을 말한다.
그 예로는 신라에서 벼슬을 살던 성주 이씨(星州 李氏)의 시조 이순유는
고려가 건국되자 이에 불복하고 이름을 극신(克臣)으로 고쳐
경산(성주)에 숨어 살다가 경산부의 호장으로 강제로 귀속되었고,
역시 신라의 신하였던 기계 유씨(杞溪 兪氏)의 시조 유의신은 기계현의 호장이 되었다.
그 외에 호장이었던 인물을 시조로 하고 있는 성씨로는
광주 이씨, 한산 이씨, 진성 이씨, 합천 이씨, 덕산 이씨, 고흥 유씨, 단양 우씨, 고력 신씨, 순창 조씨, 동래 정씨,봉화 정씨, 창녕 성씨, 예안 김씨, 반남 밖씨, 양주 조씨 무송 윤씨, 목전 상씨, 등이 있다.

위에 든 성씨는 이외에도
고려 초기의 인물을 시조로 하고 있는 성씨가 많은 것으로 보아
신라말부터 고려 초에 이르는 사이에
지방 호족이나 고려의 공신들이 대부분 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거나 성을 만들어 가졌다고 보여지며
고려에 들어와서는 성씨 앞에 본관을 표시하여 혈족 계통을 구별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성씨는 특권층만 가지고 있었고 일반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성씨가 일반화된 요인 중의 하나는
958년(광종 9년)부터 실시된 과거제도를 들 수 있다.
중국 후주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한림학사가 된 쌍기의 제안으로 시작된 과거제도는
제도가 자리잡아 가는 과정에서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필수 요건으로 성을 가져야 하고
본관(출신지)을 밝혀야만 했다.
더욱이 11대 문종9년(1044년)에는
응시자의 성명, 본관, 4대조 까지의 이름을 써서 풀로 봉하여
미리 시원에 제출하도록 하는 봉미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성은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천민계급에 속해 있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성이 없었다.

5)朝鮮時代의 姓(조선시대의 성)

조선 건국 후에도
고려시대의 정책이 계승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천민들은 여전히 조선조 초기까지도 성을 사용하지 못하였다.
천민들까지 모두 성을 갖게 된 것은
신분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임진왜란 후부터 한말이 이르러서였다.
임진왜란으로 군사체제의 개편이 불가피하게 되자
그때까지 병역의무가 지워지지 않았던 천민층까지 모두 징발당하게 되었다.
이들 천민층이 전쟁 중에 공을 세우면 평민 신분으로 올려주었으며
임진왜란 후 사회체제의 변동에 따라 천민들이 하급관리로 등용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양민층 이상만 가질 수 있었던 성을 노비들까지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1894년 갑오경장으로 종래의 신분계급이 타파됨으로써
성의 대중화가 촉진되었으며

1909년 민적법이 새행되면서 누구나 다 성을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성을 새로 만들 때 중국의 성현이나 명문 거족의 성을 사용하여
그들의 후예인 것처럼 자처하는 시대적인 풍조에 젖는 일이 많았으므로
성의 기원이 비록 중국이라 하더라고
그 성을 가진 사람이 조상이 중국인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영조 때의 영의정 도곡 이의현은 우리나라의 성씨의 수를 298성이라 하였고,
<증보문헌비고>에는 406성이 나와 있다.

6)日帝 時代의 姓(일제 시대의 성)

한일합방 후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 동조동근(同祖同根)이라는 명목 아래
우리 고유의 것들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썼다.
이의 일환으로 1040년 2월 조선총독으로 있던 미나미 지로는
창씨개명을 실시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성씨를 버리게 하고
새로 일본식 성을 만들어 사용하게 강제하였다.
창씨개명에 끝까지 반대하여 우리의 성씨를 그대로 보존하였던 사람도 있었으나
80%나 되는 우리 국민이 창씨개며을 하였다.

그러나
뿌리를 보존하고 계승하려는 우리 민족은
일본식의 두글자 성을 만들면서도 우리 고유의 성과 본을인용하였다.
파평 윤씨는 사까히라(坡平), 히라누마(平沼), 사까이(坡井), 이또오(伊東), 등으로 고쳤고,
김해 김씨는 가네우미로(金海), 광신 김씨는 미써야마로(光山),
평산 신씨는 히라야마로(平山),
전주 이씨는 리노이에나 구니모또나 미야모또 등으로 고쳤던 것이 그 예들이다.
한편 우리 성씨와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성씨로 성을 바꾼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성씨를 일본식으로 바꾸었다고 해서 친일파라고 치부할 수는 없지만,
일본의 압제가 조금만 더 지속되었더라면
우리 고유의 동성동본의 씨족제도는 붕괴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창씨개명은
해방과 함께 자동적으로 없어지고 이전의 성명으로 환원되었다.

참고문헌: 여양진씨 유적편,벽진이씨 홈페이지 자료 등
이미지는 '아름다운 제주이미지'에서...
첫댓글 *漢詩時調 의 방장(房主人丈)이신 廉京姬 女史의 본관을 몰라서....공란으로 비워 두었읍니다!!!!!*"廉 詩人"께서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파주 염이고요 중시조는 염형방/고려시대 삼한시대는 모르겠다고 하네요...에구 고운 명절 보내세요
파주 염씨는 엄청 귀한 양반인데...
잘보고갑니다 야생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