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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남천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여운
법과 등불 2월 20일 공부
장자 外物(외물)편 강의 -
공자의 도덕적 필연론에 대한 장자의 비판
전국시대는 국가들끼리 전쟁이 심했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강력한 병력이 필요하고,
병력은 식량과 옷이 있을 때 유지될 수 있다. 국가는 비옥한 농지를 확보하고 길쌈작업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했다. 이러한 일은 국가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한편 국가는 무엇보다 백성의 확고한 충성심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충성심을 요구하는 지배층에게는
무엇보다 전쟁과 살육을 원치 않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 장애였다.
그러므로 춘추전국 특히 전국시대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예와 법의 의미는
인간의 자연성을 억압하는 과정을 뜻했다.
노자는 이것을 정치가 백성과 싸우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국가는 백성들의 충성심을 유도하기 위해 인간 자신의 존재를 충성을 다해야하는 백성으로 규정하고
지배자의 권력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충(忠)은 그래서 도덕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지켜야할
정당한 가치[義]를 의미했다. 따라서 불충(不忠)은 곧 반역(反逆) 즉 역적이 된다는 것을 뜻했다.
충성이 옳음(義)이지만 지켜지지 않는 것이 자연적 현실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왕에 대한 충성을
가정에서부터 키우기 위해 부모에게 복종하는 것을 어린아이가 지켜야하는 정당한 가치
즉 효(孝)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 효를 짐승과는 다른 점이라고 가르치고,
지키지 않으면 짐승과 같은 삶으로 비하하여 선택의 여지가 없게 했다.
그러나 장자는 호랑이도 자식을 보살피기 때문에 인(仁)하다고 했다.
효는 도가의 입장에서 보면 생명의 실상에 대한 왜곡이다.
충과 효는 국가의 지배질서를 정당화하는 도덕적 명령체계이다.
그리고 충과 효는 그 자체로 완벽한 진리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다른 사회적 도덕을 용납하지 않았다.
열자는 여행을 통해 현실에는 다양한 도덕이 존재하고 있는 사실을 폭로하고
다양한 도덕이 서로 각각 균등함을 주장했다.
주나라 때에는 예는 귀족에게 적용되는 질서체계이고 법과 형벌은 일반 백성에게 적용되었다.
그러나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오면서 국가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법과 형벌이 강조되었다.
순자가 그 대표적인 학자였다. 순자는 형벌이 있어야 인간의 이기적이고 악한 본성을 다스릴 수 있고
나아가 국가의 질서를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순자는 “모든 사람이 왕이 되려는 것을 방치하면 천하에 혼란만이 있을 뿐이다.”고 말했다.
비록 평화 시에는 예가 강조되고 전쟁에는 형벌이 강조되기는 했지만,
도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와 법은 그 외형으로 보면 덕치와 법치로 나타나지만,
그 본질은 부국강병을 위한 통치체계이다.
공자는 인의의 도덕이 성인이 하늘의 명령을 파악한 진리라고 주장했다.
충효도덕이 인류가 마땅히 지켜야할 질서임을 주장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실천이
반드시 행복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필연적 인과를 증명해야 했다.
공자는 충과 효가 인륜이 반드시 실천해야할 도덕이며 그 결과 인간과 사회가
도덕적으로 완성된다고 주장했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는
그 필연적 인과관계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장자는 이 필연적 인과관계가 과연 진리인지 그리고 실현가능한 도덕인지 묻고 있다.
이하 장자 잡편에 나오는 외물(外物)편을 해석하고 장자의 뜻을 탐구한다.
- 바깥 사물은 필연(필연적인 인과)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용봉은 충신이면서도
하나라 걸왕에게 사형을 당했고, 비간은 충신으로서 직언을 하다가 은나라 주왕에게 처형을 당했다.
주왕의 서형 기자는 미친 사람처럼 행세했고 간신 오래(은나라 주왕의 신하로 간신)도
주나라 무왕에게 사형을 당했으며, 폭군이던 걸왕과 주왕도 망했다.
임금이라면 누구나 그의 신하들이 충성스럽기를 바라지만, 충신이라고 반드시 왕의 신임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오나라 자서는 충신이면서도 오나라 임금 부차에게 충언하다
자살을 했고 그 시체는 강물에 던져졌다. 주나라 장홍은 충언을 하다 촉 땅에 돌아와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백성들이 그를 장사 지낸 지 3년 만에 묘를 파보니
그의 피는 변하여 푸른 구슬이 되었다 한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식이 효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효자라고 반드시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은나라의 효기는 계모로 인해 근심 속에 살았고,
공자의 제자 증삼은 아버지의 미움을 사서 슬픔 속에 지냈다. -
현실에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도덕을 실천하면 끊임없이 실패하게 된다. 그 결과 필연적인 인과를 믿고
도덕을 실천하는 자는 좌절과 근심을 떠날 수 없다. 그 결과 신체와 마음에 갖추고 있는
선천적인 조화상태가 무너진다. 도덕을 실천할수록 기쁨이 오지 못하는 모순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장자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천둥과 벼락 등을 비유하여 조화를 잃은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 나무와 나무를 비비면 불이 붙고, 쇠가 불 속에 오래 있으면 녹는다. 음과 양의 기운이
잘못 만나면 천지가 크게 놀란다. 이 때 천둥과 번개가 생긴다. 그래서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벼락이 일어나 큰 느티나무를 태운다.
사람 또한 두 갈래 길에서 깊이 근심하지만, 도망갈 곳이 없다. 두려움 속에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마음은 하늘과 땅 사이에 떠서 매달려 있는 것 같다. 고민하느라
마음이 침울하고 이익과 손해에 대한 생각이 서로 부딪쳐 불길이 활활 일어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조화로운 기운을 모두 태워버린다. 달빛처럼
차가운 기운도 본시 불을 끌 수는 없으니, 아무리 서늘하게 몸과 마음을 식혀도
이때가 되어서는 조화가 무너지고 도가 사라지게 된다. -
충효도덕은 백성을 살리기보다 지배질서를 세우고 명분에 집착하여 오히려 백성들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장자는 비판하고 있다. 공자의 도덕은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다.
- 장자가 집이 가난하여 감하후에게 곡식을 빌리러 갔다.
감하후가 말했다.
“좋습니다. 내 고장의 세금을 거둬들인 다음 선생에게 삼백금을 빌려드리겠습니다. 괜찮겠지요?”
장자는 화가나서 얼굴빛을 고치며 말했다.
“제가 어제 이곳에 오는데 오는 도중에 저를 부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돌아다보니
수레바퀴자국 가운데에 붕어가 있었습니다. 제가 붕어에게 물었습니다.
‘붕어야,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붕어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동해 용왕의 신하입니다. 선생은 어찌 몇 됫박의 물로
나를 살려주지 않습니까?’
제가 말했습니다. ‘좋다. 내가 남쪽의 오나라와 초나라의 임금을 설득시켜 서강의 물을 끌어다가
너를 맞이하도록 하겠다. 괜찮겠지?’
붕어는 성이 나서 얼굴빛을 고치며 말했습니다.
‘저는 제가 늘 필요로 하는 물이 없어서 몸 둘 곳이 없습니다. 저는 몇 됫박의 물만 얻으면
살 수 있습니다. 선생이 이렇게 말을 하니 차라리 건어물 가게에 가서 나를 찾는 것이 낫겠습니다.’ -
공자가 주장하는 충효의 도덕적 명분은 주관적이며 현실적인 실용성이 없다. 주관적인 명분은
전통과 권위에 의해 진리로 강요하지만, 구체적인 인과로서 현실에서 입증할 수 없다.
현실은 자연적 세력의 제 관계를 파악할 때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 임공자가 큰 낚시와 굵고 검은 줄을 준비한 다음 오십 마리의 황소를 미끼로 회계산에
걸터앉아 낚싯대를 동해에 던졌다. 매일같이 낚시질을 계속했으나 한 해가 가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다 이윽고 큰 고기가 낚시를 물었다. 그 고기는 큰 낚싯대를 끌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뛰어오르면서 등지느러미를 떨치니, 산처럼 높은 흰 물결이 솟고
바닷물이 크게 흔들렸다. 그 소리는 귀신들의 울음소리와 같아서 천리나 먼 곳에서도
사람들을 떨게 했다.
임공자는 이 물고기를 잡아서 잘라서 말렸다. 바닷가 동쪽으로부터 창오 땅 북쪽 사람들까지
모두 그 고기를 실컷 먹었다. 이 일이 있고나서 후세의 놀라운 제주나 소문을 전하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 서로 이 사실을 전했다.
무릇 작은 낚싯대와 가는 줄로 도랑에 가서 송사리나 붕어를 기다리며 큰 고기를 잡으려면 어렵다.
그와 같이 작은 이론을 꾸며 세상에 드러나 크게 출세하려면 또한 어림이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임공자의 소문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으로서는 세상을 제대로 행세하지
못할 것이니, 이 역시 어림없는 일인 것이다. -
장자는 필연적 인과관계를 주장하는 공자의 유학이 한 시대에 적용된 작은 도덕일 뿐이며,
실제로는 명리와 부귀를 얻는 수단이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옛 문물을 이용해 명예나 이익을 얻는 것은
옛 무덤을 파헤쳐 구슬을 훔치는 도둑과 같다고 혹평했다.
- 유학자가 시경과 예기를 근거로 남의 무덤을 팠다.
함께 간 큰 선비가 무덤 위에서 아래쪽에 대고 말했다.
“동녘이 밝아오는데 일이 어찌 되었는가?”
작은 선비가 말했다.
“시신의 옷을 아직 다 벗기지 못했습니다. 입 속에 구슬이 물려 있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푸르고 푸른 보리가
무덤과 무덤에서 자라고 있네.
살아서 남에게 은덕을 베풀지도 못하고서
죽어서 어찌 구슬을 물고 있나?’고 했다.
그 시신의 머리카락을 잡고 그 턱수염을 누른 다음, 망치로 그의 턱을 두드려
천천히 그의 뺨을 벌려, 입 속의 구슬이 다치지 않도록 잘 꺼내게.” -
한 시대에 적용되었던 도덕을 진리로 규정하고 현실에 적용하려는 공자의 의도는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면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교만일 뿐이다. 장자는 공자의 학문적인 태도는 혼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 노래자(노자)의 제자가 나무를 하러 갔다가 길에서 공자를 만나고는 돌아와 알렸다.
“저 쪽에 한 사람이 있는데, 상체는 길고 하체는 짧으며 등은 꾸부정하고
귀는 머리 뒤편에 붙어 있었습니다. 눈빛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 같습니다.
그가 누구 집 아들인지 모르겠습니다.”
노래자가 말했다. “이 사람은 공자다. 불러오너라.”
중니(공자)가 오자 노래자가 말했다. “구(공자의 이름)여, 그대 몸에 나타나는 자랑과 얼굴에
드러나는 아는 체하는 모양을 버리시오. 그래야 군자가 될 것입니다.”
공자가 절을 하고 물러섰다. 몸을 움츠리며 얼굴빛을 고치며 물었다.
“제가 배우면 나아질까요?”
노래자가 말했다.
“그대는 한 시대의 혼란을 보고 참지 못해 일을 꾸미다 앞으로 만 세대에 닥칠 재난을
가벼이 보고 있소. 이렇게 된 것은 스스로 굽혀서 생각이 좁아진 건가요?
널리 보는 것이 없어서 지혜가 미치지 못하는 건가요? 그대는 신이 나서 달려가겠지만,
죽을 때까지 추한 꼴이 될 것이오. 보통 사람들이 함께 행동을 같이 하는 것은 명예로
서로 끌어당겨주고, 서로 의견이 한 쪽으로 모아지기 때문에 당파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성군인 요임금을 칭송하고 폭군 걸왕을 비난하는 것보다 이 두 가지를 다 잊고
칭송과 비난을 멈추는 것이 낫습니다.
혼란을 참지 못해 세상에 반대하면 반드시 다치게 됩니다. 세상에 나서면 반드시 일이
어긋나게 됩니다. 성인은 나서지 않고 머뭇머뭇하면서 일을 하기 때문에 언제나 성공을 합니다.
그러나 어쩌겠소! 그대의 교만이 멈추지 않는 것을.” -
주나라의 예는 사회구성원의 상하 계급차별에 따른 행동규범이다.
예는 주나라의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되면서 상호 관용을 담고 있으며,
계급 간 갈등에 대해 풍부한 경험을 담고 있다.
공자는 주나라의 예법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했다. 공자는 무너지는 현실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주나라 예의 의미를 이해할 것을 요구하고 실제 그 행동규범을 학습했다.
그러나 장자의 입장에서 보면, 주나라의 예법은 한 시대에나 통했던 상대적인 도덕이다.
장자는 공자가 예의 규범과 그 의미에 대해 박학하지만, 절대적인 가치를 고집하는 자신의 지성을
돌아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장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 공자를 비판하고 있다.
- 송나라 원 임금이 밤에 꿈을 꾸는데 어떤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곁문으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저는 재로 땅의 연못에서 왔습니다. 저는 청강의 사자로 하백(황하)의 신에게 가다
여저라는 어부에게 잡혔습니다.”
원 임금은 깨어나서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다. “이것은 신령스러운 거북입니다.”
원 임금이 말했다. “고기잡이 중에 여저라는 사람이 있는가?”
신하들이 말했다. “있습니다.”
원 임금이 말했다. “여저를 궁에 데리고 오너라“
다음날 여저가 궁궐에 오자 원 임금이 말했다. “고기를 잡다가 무엇을 얻었느냐?”
어부 여저가 대답했다. “제 그물에 흰 거북이 걸렸습니다. 거북의 직경이 다섯 자나 됩니다.”
원 임금이 말했다. “네 거북이를 내게 바쳐라.”
거북이 도착하자 임금은 거북을 죽일까 생각하기도 하고 다시 살려줄까 생각하기도 하여
마음이 혼란했다. 그래서 점을 치게 했더니 거북을 죽여서 그 등껍질로 점을 치면
길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거북을 잡아 일흔 두 곳에 구멍을 뚫어 점을 치니 점괘가
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
이에 대해 중니(공자)가 말했다.
“신령스런 거북이는 원 임금의 꿈에 나타날 줄은 알면서도 어부 여저의 그물을 피하지는 못했다.
그의 지혜는 일흔 두 곳에 구멍을 뚫어 점을 쳐 점괘가 틀리는 일이 없을 정도이면서도
자신의 내장이 도려내어지는 환란을 피하지는 못했다. 이와 같이 지혜도 막히는 것이 있고,
신령스러움으로도 미치지 못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비록 지극한 지혜가 있다 해도 사람들은
그를 해칠 수가 있다. 물고기는 그물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물새들은 두려워한다.
작은 지식을 버려야 큰 지혜가 밝아지고, 선하다는 것을 버려야 스스로 선해진다.
아기는 태어나 좋은 스승이 없이도 저절로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말할 줄 아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기 때문이다.” -
충효의 도덕은 정치에 쓸모가 있지만, 자신의 지성을 살펴 무위의 삶을 주장하는 도가의 사상을
어떤 왕이 채용할 것인가?
공자의 학문은 현실 정치를 하는데 유용하지만, 장자의 학문은 오히려 현실에 쓸모가 없지 않은가?
장자는 당시 학자들에게 답하고 있다. 충효의 덕은 왕에게 유용하지만, 백성을 혼란에 몰아넣고 있다.
장자의 학문은 쓸모가 없어보이지만 오히려 세상의 혼란의 원인을 깨닫게 해준다.
인의 도덕이 가져오는 정치현실의 혼란을 통찰하게 하기 때문이다.
장자는 발이 걷지 않는 땅을 비유로 들어 자신의 도덕이 쓸모가 없어 보이지만
기실 쓸모가 있는 까닭을 해명하고 있다.
-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그대의 말은 쓸모가 없다.”
장자가 말했다. “쓸모가 없음을 알아야 비로소 쓸모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천지는 넓고 게다가 크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걸을 때 쓰는 것은 발로 밟는 부분뿐이다.
그렇다고 발 크기에 맞추어 발자국만큼의 땅만 남겨놓고 나머지 부분은 황천에 이르도록
깎아낸다면 그래도 그 땅이 사람들에게 쓸모가 있겠는가?”
혜자가 대답했다. “쓸모가 없을 것이다.”
장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쓸모없는 것이 쓸모가 있게 되는 이치도 분명하지 않겠나!” -
현실의 혼란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길은 도덕적 편견을 버리고 국가나 사회의 도덕이나 규범을
관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장자는 여러 편에서 주장하듯, 마음을 비우고 세상을 살피는
유(遊)를 주장하고 있다. 유는 소요유(逍遙遊)를 뜻한다.
즉, 멀리 떠나 한가하게 바라본다는 유람(遊覽)을 의미한다. 유(遊)에는 장자의 고유한 사상이 담겨져 있다.
군신(君臣)의 도덕이 인간과 사회의 당위규범이며 진리라고 주장하지만, 편견을 버리고 현실을 보면,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끊임없이 바뀌고 있다.
- 장자가 말했다. “유(노님; 유람)를 할 줄 하는 사람이 어찌 유를 못하겠는가? 유를 못하는
사람이 어찌 유를 할 수 있겠는가?
무릇 이익과 명성을 찾아 돌아다니거나 절개를 나타내는 행동은 슬프게도 지극한 지혜와
두터운 덕을 쌓은 이가 할 일이 아니다. 인의도덕을 실천하다 땅에 떨어지고
넘어져 돌이키지 못하며 불길이 치달아도 되돌아보지 못하고 있다.
비록 서로 임금이 되고 신하가 된다고 해도, 그것은 한 때의 일일 뿐이다. 세상이 바뀌면
서로 상대방을 천하게 여길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지극한 사람은 자취을 남기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무릇 옛날을 존중하고 현대를 하찮게 보는 것은 학자들의 오래된 잘못이다. 하물며
원시시대에 살던 희위씨의 입장에서 지금 세상을 본다면, 누가 치우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직 지극한 사람만이 세상에 노닐면서도 치우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순응하면서도
자기의 본성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지극한 사람은 배우지 않음(不學)을 따른다.
세상 사람들을 따를 뿐,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 -
소요유는 편견에 묶여있는 지성이 자신이 묶여있다는 현실을 보게 한다. 유를 통해 지성이
자신의 예지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장자는 편견이 버려진 의식상태를 ‘비운다(虛)’고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것은 자연적인 욕구이기도 하다. 몸이나 마음이 꽉차있으면 생리적으로
고통이나 답답함이 오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 눈이 잘 보이는 것을 명(明)이라 하고, 귀가 잘 들리는 것을 총(聰)이라 하고,
코가 잘 냄새맡는 것을 전(顫)이라 하고, 입이 맛을 잘 보는 것을 감(甘)이라 하고,
마음이 잘 통하는 것을 지(知)라고 하고, 지혜가 잘 통하는 것을 덕(德)이라고 한다.
무릇 도는 막히기를 바라지 않는다. 막히면 숨쉬기 힘들고, 숨이 막힌 것이 계속되면
움직이지 못하게 되고, 움직이지 못하면 생명에 두루 해를 끼친다.
만물 중에 지혜가 있는 것은 호흡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왕성하지 못한 것은 하늘의 죄가 아니다.
하늘은 늘 뚫리게 하여 낮이고 밤이고 기운이 내려온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구멍을
막고 있는 것이다.
뱃속의 태 안에도 넓은 공간이 있고, 마음에도 정신이 노닐 공간이 있다. 집안에 빈 공간이 없으면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 반목을 한다. 마음에 정신이 노닐 공간이 없으면 여러 가지 정욕이
서로 다투게 된다. 큰 숲이나 언덕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정신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정신이 좋아하는 것은 누구도 막기 어렵다. -
그러므로 명예나 일을 꾸미는 지혜는 자연적 삶을 해친다. 명예나 교지를 버릴 때 자연적 조화를
회복할 수 있다. 명예나 이익에 대한 욕망이 없이 인간이 생존할 수 있을까?
장자는 봄이 오면 씨를 뿌리고 가을이 오면 추수를 하는 등 자연이 하는 일을 따르는 일은
욕망이 없이도 저절로 할 수 있듯이 인간에게는 명예나 이익에 대한 욕망이 없이도
조화롭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 덕은 명예 때문에 잃게 되고, 명예는 교만 때문에 망치게 된다. 음모는 급한데서 나오고
지혜는 다툼에서 나온다. 제사는 종족을 지키려는 욕심에서 나온다. 일을 집행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봄에 비가 오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풀과 나무들이 무성해지며, 밭 갈고 김매는 일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풀과 나무는 대부분 가꾸지 않아도 잘 자라나지만 왜 그렇게 되는지 모른다. -
그러므로 마음을 비우고 담담히 하는 것은 곧 생명과 사회가 자연의 조화를 회복하는 길이다.
끝없이 앞 뒤의 모순을 일으키는 인의나 충효도덕의 한계를 보았기 때문이다.
- 고요하게 쉬면 병이 나을 수 있고, 눈 주위를 비비면 늙음을 방지할 수가 있고,
편안한 마음가짐은 조급함을 없앨 수 있다. 비록 그렇지만, 이런 방법은 억지로 하는 사람들이
힘쓰는 것이니, 마음이 한가한 사람들은 일찍이 묻지도 않았다.
성인이 천하를 바로잡으려 한 것은 그 위의 신인은 일찍이 묻지도 않았다.
현인이 세상을 바로잡으려 한 것은 그 위의 성인은 일찍이 묻지도 않았다.
군자가 나라를 바로잡으려 한 것은 그 위의 현인은 일찍이 묻지도 않았다.
소인들에 시세에 영합하는 것은 군자는 일찍이 묻지도 않았다. -
유학은 끊임없이 재물과 명예 벼슬로 인간의 마음을 유혹하고 있다. 장자가 보기에 공자의 학문은
인간의 심성을 혼란하게 만드는 도덕이다.
- 연문(송나라 성문이름)에 부모 상을 당한 사람이 있었다. 곡을 하고 슬퍼하다 몸이 상하자
상을 잘 치렀다고 관사라는 벼슬이 내려졌다. 그러자 그 마을 사람에 상을 치른 사람들 중
반 이상이 몸이 상해 죽었다.
요임금이 허유에게 천하를 물려주려 하자 허유가 도망을 쳤다. 탕임금이 무광에게 천하를
물려주려 하자 무광은 성을 냈다. 선비 기타는 그 얘기를 듣고 다음에는 자기라고 생각하여
제자들을 거느리고 관수(강물 이름)가로 가서 숨어살았다. 제후들은 기타가 물에 투신할까
걱정되어 삼 년 동안이나 그를 위문했다. 선비 신도적은 그것을 보고 자기도 높은 명성을
얻으려고 황하에 몸을 던졌다. -
충효의 도덕은 상과 벌, 명예와 치욕, 지와 무지, 인간과 동물 등 차별적인 현실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러한 공자의 도덕은 결국 인간을 혼란에 빠지게 하고 지성을 마비시킨다.
도덕을 절대화하고 인간을 계급적인 존재로 설득하는 것은 아직 지성이 예지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이다.
당시 전국시대의 학자들은 부국강병과 충효의 도덕에 몰입했다. 이런 학문만이 왕에게 채용되어
부귀와 출세의 길이 열렸다. 장자는 충효의 도덕이 현실에 적용할 수 없는 허위임을 밝히고,
충효의 도덕을 버리고 마음을 비울 때 저절로 행복이 열린다고 강조하고 있다.
- 통발은 고기를 잡기 위한 도구지만, 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게 된다.
올가미는 토끼를 잡는 도구지만 토끼를 잡고 나면 올가미를 잊게 된다.
말은 뜻을 표현하는 도구이지만, 뜻을 알고 나면 말을 잊게 된다.
우리는 어찌하면 저 말을 잊은 사람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인가! -
첫댓글 '뜻을 아라고 나면 말을 잊게 된다..' 공감이 갑니다.. 말이 얼마나 궁색한지 저는 아직도 말이 편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