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화가桃李花歌
_아련해서 더 애절한 사랑의 절창
글 박철영
우연치고 영화 속 장면처럼 내가 찾아간 날 남원에도 눈이 참 많이 내렸다. 눈 오는
날의 여유로 고향에서 영화 한 편의 "도리화가桃李花歌"는 행운이었다. 마치 영화 장면이 이어지듯 마지막에 도리화가라는 노래가 아이들의 가락으로 이명처럼 사방으로 퍼진다. 누군가에게 다가가듯 눈이 춤을 춘다. 비련의 주인공 진채선이
대원군의 실각으로 자유의 몸이 되면서 한양에서 천리 길 고창 동리정사의 신재효를 찾아가는 모습은 굵은 눈 천지인 들판을 나비가 훨훨 나는 듯하다. 안타깝게도 운명처럼 사랑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여성으로 농염해진
진채선과 달리 긴 세월에 쇠잔할 대로 노쇠해진 신재효의 모습이 눈 그치면 녹아 없어질 듯 장면은 암시하고 있다.
우리 옛말에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열 살 이짝저짝 일 여자아이에게 신재효가 던진 말 한마디는 아이의 삶의 목적이 된다. 영화의 장면은 그렇게 시작된다. 고창 성곽 아래 공터에서 걸쭉한
입담을 자랑하는 소리판이 벌어진다. 판이 무르익을수록 사람들은 소리꾼을 둘러싸며 너름과 추임새에
맞춰 맞장단을 치고 소리꾼의 소리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어 간다. 북장단을 맞춰주는 고수의 가락은
중간중간 매듭을 틀어 소리꾼의 신명을 유도하거나 절정을 치닫게 한다. 흥은 흥대로 사람들의 마음을
비집고 제 갈 길을 잘도 찾아간다.
그 많은 사람 사이에서 조그만 여자아이가 무슨 일인지 서럽게 울고 있다. 보는 관중도
의아했겠지만, 신재효도 마찬가지라 몇 번을 살펴보다 다가가 아이에게 어이 우는고 하고 묻지만, 아이의 설움은 더 복받치고 만다. 서럽게 우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은 하지만 소리판 속에서 울음소리가 내를 이룬다. 그런 아이에게 신재효는 "서럽거든 실컷 울거라 그러면 나중엔 웃음이 나올 것이니"라고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건네고 소리판은 파장 무리 속으로 훑어진다.
북 장단에 쓰인 북은 통 소가죽으로 만들어진다. 소는 죽어서도 몸에서 벗겨낸 가죽을
주인에게 바친다. 그렁한 눈물 가득한 눈으로 주인만을 바라보며 생을 살아왔듯 북이 되어서도 똑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사람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묘함이 있다. 자신을 버린 주인을 애타도록 부르는 소리. 그것은 죽음을 건넨 우직한 눈으로 그려 넣는 사랑이다. 어차피
우리의 판소리는 민중의 애환이 곰삭은 피와 눈물의 소리다. 한번 인간답게 살아보겠다며 탐관오리에
저항하다 맞아 죽거나, 힘없어 배곯은 사람들이 보리 몇 됫박에 애지중지 키운 딸내미를 팔아야 하는
비정한 아버지의 소리요, 슬프디슬픈 눈물을 저 스스로 훔치며 사랑하는 사람을 대원군의 품으로 보내야
하는 비명으로 울부짖는 정한의 소리다. 어찌 피가 터질듯한 목청으로 핏발을 세우며 부르지 않고서야
한 맺힌 소리가 되겠는가, 어찌 오장육부가 뒤집히지 않고서야 애간장을 쥐어뜯는 피 울음이 뿜어져
나오겠는가 말이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가지만 여자아이의 소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사그라지는 것이 아니고 자꾸만 커져간다. 몸살 같은 성장 통이다. 하기사 피붙이 때 제 아비한테도 버려지고
눈밭에서 지어미가 피를 토하며 마지막으로 찾아간 기방에다 홀홀 단신 던져진 기구한 운명이다. 기방의
부엌데기로 연명하면서도 신재효의 슬픔의 끝은 웃음이라는 질박한 해학의 소리 같은 여운은 질기도록 진채련을 놓아주지 못한다. 거기에다 도리화의 의미까지 덧 씌어져 스스로 자신이 도리화가 되겠다는 결의에 처절한 몸부림은 스크린 속에서
그대로 비쳐진다. 그렇지만 중요한 장면에서 의미 부여보다 뒤 떨어진 연기의 미숙은 예민해진 관객의
눈높이를 넘지 못한다.
시대의 역사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써 가는 것이고 새로운 생각은 옛것을 뛰어넘기까지 많은 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물론 영화의 극적 구성을 위해 검증되지 않는 팩트에 과한 설정일 수는 있겠지만, 당시는 기녀가 아닌 여자가 판소리를 배운다는 것은 사회적 벽이 높다는 것을 은연중 암시하고 있다. 벽이 높다는 것은 아예 할 수 없다는 절대적 금녀의 벽으로 사회적으로 용인 불가다. 추정이 가능한 것은 반상의 양반 사회 위주 유교적 이상 국가가 조선이라는 국가다. 거기에 남녀가 유별하다는 것과 더불어 서얼 차대법이 서자의 관직 진출을 일부까지만 허용했으니 이해가 가능하다. 머리가 덜 찬 양반이란 놈들이 벼슬을 잡더니 배에 기름기가 끼자 처첩 질에다 온갖 지랄을 다 하다 생긴
제 새끼들을 신분적으로 차별하겠다는 법이니 생물적 배설의 후유증이 엉뚱한 서자에게 튄 것이다.
신재효는 첩의 자식이다. 제 입으로 행운을 거머쥔 대원군 이하응 앞에서 한탄 조로 읊조리며
소리꾼이 될 수밖에 없었음을 굴레가 된 신분 질서의 불합리성을 고발한다. 물론 인물의 묘사와 실연으로
보여주는 효과는 영화에서는 중요하다. "도리화가"라는
영화의 긴장감은 역사 속의 실재적 인물과 시대를 차용했기에 관객들에게 호기심을 유발한 데 성공한다. 단연
인물 배역 설정에서 성공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도 있었겠지만, 배역의 성공도 신재효와 이하응의 역으로
분한 두 사람 정도를 꼽을 수 있을 정도여서 배역의 비중으로 이끌어가는 영화계의 단면을 보는듯하다. 가장
많은 시선을 받은 진채선 역의 배수지는 초기의 진채선 역을 소화하는 데 있어 무리가 있어 보였고 아역으로 분한 황청원도 슬피 울어야만 하는
절박한 동기부여와 그렇게 울다가 웃음으로 변화되는 장면은 너무 어설퍼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후 진채선으로
분한 배수지의 미모에 기대한 만큼 소리가 따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소품처럼 배역한 인물들이
자신의 역량을 관객에게 알리는 효과도 있었지만 그 역할이 보는 이들의 내면으로 파고들지 못한 듯 한계를 나타냈다.
도리화가 갖는 시대의 의미와 현재의 어수선한 사회현실과 맞물려 소재의 선정은 크게 대중성에서 나쁘지 않았다고 본다. 지금도 오래 전 보았던 서편제의 명연기와 영화의 장면마다 보여주는 완성도 높은 감동을 따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는 생각은 나만은 아닐 것이다. 특히 배역에서의 아쉬움도 아쉬움이지만, 영화의 장면에서 중요하게 다뤄야 할 것들이 비춰주며 지나가는 형식으로 보여졌다. 일례로 동리정사를 통해 진채선이 사회적 신분을 뛰어넘는 판소리꾼으로 성장하는 시련의 긴 시기도 명창이라는
설정에 비해 다소 가볍다고 느껴졌다. 특히 소리꾼들이 명산의 폭포를 찾아 처절하게 고통과 싸워 육화된
소리를 득음하는 모습은 그저 장면을 보여준 것에 그친 아쉬움으로 남는다. 신재효가 혼신을 바쳐 이루고자했던 판소리가 어떻게 민족의 정서로 자리잡아
애환을 뛰어 넘었고 한의 소리 매김으로 완성되어졌는가를 최초 여류 명창이라는 진채선이 신재효를 대신해 관객에게 절절하게 파고들어 탄성을 자아냈어야했다.
물론 영상미의 압권은 진채선이 하얀 눈을 맞으며 들판으로 걸어나서는 장면에서 휘날리는 눈발과 한복의 나빌레는 절제미로 단아한 선으로
이어지며 잦아드는 소리 가락은 더 절묘해져 안타까움을 배가해주었다. 또한 진채선의 가름한 얼굴선과
이루지 못할 애절한 사랑의 미성이 쏟아지는 눈발에 가려져 돋보였다. 한 편의 영화는 그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나 배우에게는 혼신을 다한 삶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일류가 아닌 이류나 삼류라 해도 주어진
역활로 만족해서는 안될 이유가 충분하다. 그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모두다 일류의 모습으로 스크린에서
만나기를 고대하기 때문이다. 관객이 상영관에 앉아 바라보는 시간 동안은 영화의 장면이 비록 허구지만
가장 진실되고 리얼리티한 감동과 만나기 위해 찾아간다. 그것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관객은 멋있고 빼어난 미모의 배우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고 혼신을 다한 영화 사도역의 유아인 같은 배우에게
진심 어린 박수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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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네 글이 더 애절하네 그려!
그리 보았다면 그러할터
본시 글은 그 사람의 손끝으로 쓰는거지만 어찌 마음이 따로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