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를 휘저은 기녀 '초요갱'《초요갱》, 박지영, 네오픽션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91)
“지금의 명나라가 있기 전, 그러니까 당나라보다 더 훨씬 앞선 시기인 초나라에 영왕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 영왕이 사랑했던 여인이 허리가 가늘고 아름다웠다고 하더구나. 그 이후부터 사람들은 허리가 가늘고 아름다운 여인을 가리켜 초요(楚腰)라 불렀단다. …(줄임)… 그래서 나는 마지막 글자는 미녀 갱(妔) 자를 써서 초요갱이라 지었다.”
허리가 가는 초나라의 미녀를 닮은, 조선 전기 한양을 떠들썩하게 한 으뜸 기녀 초요갱은 그렇게 탄생했다. 허구와 사실을 절묘하게 섞어 쓴 이 소설, 박지영이 쓴 《초요갱》에서 주인공 ‘다래’의 첫 정인(情人)인 평원대군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그 이름을 지어 주었다.
▲ 《초요갱》, 박지영, 네오픽션
실제 역사 속 초요갱은 어마어마한 ‘화제의 인물’이었다. 세종의 세 아들, 평원대군, 계양군, 화의군이 모두 그녀에게 반했다. 드라마에나 나올 만한 ‘조선 왕자 삼각관계’가 실제 역사에 펼쳐진 것이다. 황진이도 한 줄 나오지 않는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열여섯 번이나 기록이 실렸으니, 한 시대를 풍미한 으뜸 예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처음 초요갱의 마음을 얻은 이는 세종의 7남, 평원대군이었다. 소설 전반부에서는 평원대군과의 사랑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본디 함경도 포도대장의 딸이었으나 아버지가 억울한 죽임을 당하면서 추노꾼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어머니와 둘이 기방에 숨어 살던 ‘다래’에게 평원대군의 사랑은 그간의 고초를 모두 잊을 수 있는 선물이었다.
다래의 빼어난 춤 실력을 아낀 기방의 행수 유어당은 다래를 기생 명부인 기적(妓籍)에 입적시키지 않고 예인으로 키우고자 했다. 기녀가 아닌 이들은 손님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고, 궁중에 연회가 열릴 때 나아가 춤을 추거나 연주를 하며 예인으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다래를 기다리는 운명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평원대군이 우여곡절 끝에 초요갱을 첩으로 들이자, 계양군은 연적(戀敵)인 평원대군을 제거하려 갖은 수를 썼다. 평원대군을 노리는 여러 인물의 이해관계가 얽히며 평원대군은 천연두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평원대군을 진심으로 연모했던 그녀는 엄청난 실의에 빠진다. 천연두로 죽어가는 평원대군의 마지막 순간을 화의군의 도움으로 지켜볼 수 있었지만, 그 일이 문제가 되어 화의군은 직첩을 빼앗기고 초요갱 또한 강릉 관아 물을 긷는 여자 종 곧 수급비로 보내진다.
(p.223)
“주상 전하의 어명이오! 죄인 화의군은 민가의 여인을 남복을 입혀 궁내로 들인 죄, 그 죄는 엄벌에 처해야 마땅하나, 이것 또한 우애가 남달리 깊어 일어난 일이라 참작하여 직첩과 과전을 몰수하고 근신토록 하라. …(줄임)… 죄인 다래는 미천한 신분임에도 지엄한 법을 어긴 죄는 크나, 자신이 모시던 상전을 마지막으로 뵙고자 했던 마음을 가엽게 여겨 강릉 관아 수급비로 보내라는 주상 전하의 어명이오!”
세월은 무심히 흘러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면서, 화의군 이영과 다래는 방면된다. 도성으로 돌아온 다래는 평원대군의 죽음 뒤에 계양군이 있음을 눈치채고, 복수를 하기 위해 기녀가 된다.
(p.263)
“이제부터 다래가 아닌 기녀 초요갱으로 살 것이옵니다. 그래서 꼭 대군 나리의 억울함을 풀어드릴 것이옵니다. 억울함이 풀리는 날, 나리 곁으로 가겠사옵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조금만.”
가슴속에 잠들어 있던 그리움의 덩어리가 꿈틀대며 다래를 타고 올라왔다. 때마침 바람 한 줄기가 그녀의 머리를 스쳐 지났다. 어둠이 물러난 자리에 서서히 빛이 채워졌다.
그렇게 한성 으뜸 기녀, 초요갱의 시대가 열렸다. 그때부터 그녀는 화려한 기녀로 살며 계양군과 아슬아슬한 유혹의 줄타기를 한다. 수양대군의 최측근이었던 계양군은 계유정난이 성공하며 나는 새도 떨어뜨릴 세도가가 되었지만, 결국 초요갱과의 치열한 암투 끝에 파국을 맞이한다.
복수를 마친 초요갱은 궁중 여악 행수로 가무에 정진했다.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궁중 무용인 둑제 악무를 재연할 수 있는 조선의 몇 안 되는 궁중무용 전수자였던 스승 유어당의 뒤를 이어 고려 악무를 재연하며 평생 재예를 꽃피웠다.
소설 속 초요갱의 삶은 이것으로 끝나지만, 실제 역사에서 그녀는 세 왕자 외에도 여러 남자와 염문을 뿌린다. 소설에서 초요갱에게 망신당하고 쫓겨나는 신자형이라는 인물은 실제로는 초요갱을 첩으로 들였고, 소설에서 추노꾼으로 나오는 안계담은 신자형의 7촌 아저씨였다.
이런 엄청난 기록(?)의 주인공임에도 초요갱이 황진이나 논개보다 덜 알려진 연유는 무엇일까? 한 기생을 둘러싼 조선 왕실 삼각 로맨스는 참으로 전무후무한데 말이다. 그녀가 기녀이기 전에 뛰어난 예인이었고, 궁중 악사 박연의 수제자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매력이 출중한 여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지은이 박지영은 소설 《초요갱》으로 ‘제3회 혼불문학상’ 최종심에 올랐으며, 이후 꾸준한 집필활동으로 ‘제1회 오산문학신인상’ 단편소설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소설이 초요갱을 둘러싼 출생의 비밀과 수양대군과 관계된 음모와 얽히며 다소 산만해진 느낌이 드는 것은 아쉽지만, 조선 전기를 주름잡은 으뜸 기녀 초요갱의 삶을 소설로 만나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