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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림 류공 행장可林柳公行狀
공의 휘는 장식(璋植), 자는 규범(圭範), 호는 가림(可林), 성은 류씨(柳氏),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고려 말에 완산백(完山伯) 습(濕)이 그 상조이다. 중세에 휘 의손(義孫)이 있으니 집현전 제학이고 호는 회헌(檜軒)이다. 5대를 내려와 휘 복기(復起)는 예빈시 정(禮賓寺正) 증 이조 참의이고 호는 기봉(岐峯)이다. 또 5대를 내려와 휘 정원(正源)은 경학으로 원릉(元陵)에 지우(知遇)를 입어 관직이 대사간에 이르렀고 호는 삼산(三山)이다. 그 손자 휘 휘문(徽文)은 천거로 후릉과 장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고 임하(林下)에서 도를 강론하니 학자들이 호고와(好古窩) 선생이라고 일컬었는데 곧 공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치교(致喬) 호는 수재(守齋)이고, 조부의 휘는 정흠(鼎欽)이고, 부친의 휘는 달수(達洙)이니 모두 문행(文行)으로 대를 이었다. 모친은 한양 조씨(漢陽趙氏)이니 임강(霖崗) 처사 병성(秉性)의 따님이다.
처음에 삼산의 개손(介孫) 의문(懿文)이 양자로 나가 함벽당(涵碧堂) 선생의 증손 성휴(晟休)의 뒤를 이었는데 호는 단고(丹臯)이다. 이분이 휘 치중(致中)을 낳고, 이분이 휘 두진(斗鎭)을 낳고, 이분이 휘 연보(淵溥)를 나으니, 곧 공의 생가 고조‧증조‧조부‧부친이다. 생가 모친은 경주 정씨(慶州鄭氏)이니 옥은(玉隱) 처사 승곤(升坤)의 따님이다.
고종 을해년(1875) 10월 8일에 공은 어산리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준수하고 총명하여 식견과 도량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5세에 양자로 나가 호고와의 적손이 되었다. 당시에 양친이 다 생존하셨는데, 공은 사랑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다. 처음에 글자를 배울 때 또한 쉽게 이해하니 선친이 기뻐하여 문호를 유지할 희망이 있는 것으로 기대하였다. 8세에 모친상을 당하고 10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거듭 거창한 일을 겪어 외롭고 힘겨운 처지가 어린 나이에 감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나 능히 예제를 지키는 것이 어른과 같았으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선친의 유명으로 부계(芙溪) 족형 동수(東秀)에게 나아가 배워 날로 일과를 따라 공부하여 조금도 해이한 적이 없었으니, 부계 공이 깊이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깨우치고 인도함이 지극하였다. 14, 15세에 경전(經傳)을 다 읽어 문장이 일찍 성취되었다.
관례를 마친 후에는 고향에 머물면서 서파(西坡) 선생에게 학업을 물으니, 선생이 책려하여 지도함에 있어서 집안의 다른 자질보다 더욱 관심을 더 쏟았다. 이는 아마 공이 호고와의 적손이라고 하여 공으로 하여금 크게 배워 가문의 전통을 실추하지 말도록 하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성암(誠菴)·청산(聽山)·만산(晩山)·동산(東山) 등 여러 공들이 좌우로 도와 일심으로 힘을 기울인 것도 모두 이 때문이었지만, 또한 공의 자품과 지향이 함께 할 만한 것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은 이러한 뜻을 지극 정성으로 가슴에 새기고 뜻을 굳게 세우고 간혹 책을 가지고 산방과 재사에 들어가 각고의 공부를 하여 조예가 더욱 깊었다. 그러나 가문을 부지하는 데는 이루지 못한 선사(先事)가 허다한데 재물 없이는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여, 경제를 이룰 계책에 유의하여 학문 외에 한편으로 산업을 다스려 매우 근검하게 하였다. 가산이 제법 넉넉하기에 이르러서는 선조의 문집 수십 권을 간행하고, 묘도에 비석을 세우고, 제전을 마련하여 정연하게 조리가 있었다.
정유년(1897)에 생가 부친상을 당하고 병오년(1906)에 또 모친상을 당하여 전후로 상례의 제도를 지키는 것이 매우 엄숙하여 예를 따라 어긋남이 없었다.
갑인년(1914)에 마령(馬嶺)으로 이사하여 문호가 비로소 넉넉하게 되니 ‘호고와(好古窩)’ ‘사성재(思誠齋)’ 두 개의 편액을 걸어 우러르고 사모하는 정성을 깃들였다.
갑자년(1924)에 서파 선생이 돌아가시니, 공은 의귀할 곳을 잃은 것을 통탄하고 흰 명주 띠를 매어 심상(心喪)의 제도를 행하고, 문하의 여러 공들과 함께 유문을 수집하여 후세에 전할 것을 도모하였다.
항상 일찍 부친을 여의고 집이 가난하여 문학에 전력할 수 없었던 것을 한스럽게 여겼는데, 제법 한가하고 고요한 시간이 있으면 글 보는 일을 그만두지 않고 선조의 글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기축년(1949) 섣달 그믐에 질병으로 정침에서 천수를 다하니 향년 75세였다. 아미산 계좌(癸坐) 등성이에 안장하였다.
배위는 의성 김씨(義城金氏)이니 괴와(愧窩) 점운(漸運)의 증손이고 진황(鎭璜)의 따님이다. 부덕이 매우 갖추어졌다. 공이 초년에 한묵(翰墨)만 일삼다가 나중에 가산을 이룬 것은 부인의 내조가 실로 많았다. 공보다 7년 먼저 세상을 마쳤다. 오현 대곡 건좌(乾坐) 등성이에 안장하였다.
3남을 낳았으니 병희(秉熙), 통희(通熙), 도희(道熙)이다. 장남의 아들은 기훈(基勳)·기환(基煥)·기조(基祚)이고, 딸은 권수봉(權壽鳳)·김태현(金台鉉)·김영탁(金永倬)에게 출가하였다. 차남의 아들은 건즙(建楫)이고, 딸은 오혁원(吳奕元)·우종석(禹鍾奭)에게 출가하였다. 막내의 아들은 건창(建昌), 건명(建明), 건춘(建春), 건민(建敏), 건영(建瑛)이다. 기훈의 아들은 종우(鍾宇)·종태(鍾兌)·종운(鍾雲)이고, 딸은 이돈(李燉)·이재성(李在聲)에게 출가하였다. 기환의 아들은 종극(鍾克)·종완(鍾完)·종박(鍾朴)이고, 딸은 김택관(金宅官)에게 출가하였다. 건창의 아들은 종원(鍾元), 종양(鍾陽)이다. 건명의 아들은 종두(鍾斗), 종철(鍾喆)이다. 건춘의 아들은 종화(鍾華), 종윤(鍾潤)이다. 기조의 아들은 종덕(鍾悳)이고, 딸은 어리다. 건즙의 아들은 종석(鍾碩), 종현(鍾賢)이다. 건민의 아들은 종걸(鍾傑), 종헌(鍾憲), 종억(鍾億)이다. 권수봉(權壽鳳)의 딸은 이동길(李東吉), 신홍범(申洪範)에게 출가하였다. 김태현의 아들은 영택(榮澤)·선택(善澤)·원택(源澤)이고, 딸은 권우건(權宇鍵)에게 출가하였다. 김영탁의 아들은 원동(元東), 경동(慶東)이다. 오혁원의 아들은 식창(寔昌), 도창(道昌)이다. 우종석의 아들은 제방(濟邦)이다. 종우의 아들은 준현(準昡), 준형(準炯)이다. 이돈이 아들은 준영(晙永)이다. 이재성의 아들은 창현(昌鉉)이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외모가 준정(峻整)하고 성품이 관후(寬厚)하였다. 처음의 바탕이 유가의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가문 대대로 이어받은 것이 절로 있었으니 달리 바꿀 수 없었다.
천성에 근본한 지성(至性)이 있었으니, 어린 나이에 양자로 나가 얼마 지나지 않아 문득 양친을 잃어 항상 오래 봉양하지 못한 것을 종신의 애통함으로 여겼다. 아버지 형제를 대신 섬겨 조석으로 안부를 살피고 매사에 반드시 여쭌 뒤에 행하였고, 차례로 돌아가신 뒤에는 상장(喪葬)의 절차에 정성을 다하여 유감이 없게 하였다. 생가의 거리가 제법 떨어졌는데 하루건너 달려가 안부를 살피고, 맏형과 함께 수시로 어버이 곁에서 기쁘게 해드리고 물러나서는 자리를 나란히 해서 강론하고 연마하여 화기가 항상 넘쳤다. 양친의 상을 당해서는 상례의 절차와 슬퍼하는 실정이 지극함을 갖추었다. 기일을 당해서는 심한 병이 아니면 반드시 제수를 가지고 전날 가서 재계하고,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슬퍼하고 사모함이 처음 상을 당한 것 같았다. 만년에 맏형이 세상을 떠나니 천륜의 지기(知己)를 잃은 것을 통탄하고, 말이 맏형에게 미치면 문득 눈물이 흘러내렸다. 선조를 받드는 데는 성의가 지극하고, 아랫사람을 부리는 데는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행해졌다. 종족 간에 처신하는 데는 화목을 위주로 하고, 빈객을 대하는 데는 정성이 넉넉하였다.
이상은 날마다 볼 수 있는 행실이고, 선조를 드러내는 한 가지 일 같은 것은 더욱 큰 절목이었다. 호고와의 유문이 한우충동(汗牛充棟)이고 유수한 기록이었으나 집안의 변고가 거듭 닥쳤기 때문에 백 년 동안 덮어 두었는데, 가세(家勢)가 쇠락한 나머지에 공이 양자로 들어가 대를 잇고 곧이어 또 상화가 연이어서 형세가 매우 위태하였으니, 큰 규모와 역량이 아니었다면 거의 사라져 없어지기에 이르고 말았을 것이다. 공은 곧 일찍이 가세를 수립할 것을 스스로 기약함이 마치 화살이 과녁을 향하듯 확고하여 전일한 정성이 금석을 뚫고 신명에 통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재력을 따라 세 차례 인쇄하여 후학에게 은혜를 널리 베풀었다. 이는 다만 한 가문에서 선조의 뜻과 일을 계승한 효를 행하였을 뿐만이 아니니 유학을 빛낸 것이 어떠한가!
큰 근본이 이미 정립되었기 때문에 다른 길로 빠질 유혹이 절로 없었으니, 비록 태평한 시대를 만났더라도 본래의 가법이 마땅히 명리를 구하는 곳에 급급하지 않았을 것인데, 게다가 세상이 점차 어지러워 선비가 발걸음을 내딛을 시기가 아니었기에 일찍이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본원의 학문에 전심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 고가의 세족이 대부분 시류에 따라 움직이고 고향을 떠났지만 공은 시의(時宜)를 헤아려 조금도 뜻을 꺾거나 빼앗기지 않았다. 스스로 높은 체 하지 않았지만 안으로 쇠를 끊는 듯이 지키는 뜻이 있었고, 시류에 따라 동화되지 않았지만 밖으로 남과 달리 하는 모난 행실이 없었다. 세상에 처신하는 데는 차라리 후하게 하는 가운데 잘못을 범할지언정 박하게 하는 가운데 잘못을 범하지 않았고, 일을 만나서는 차라리 더딘 가운데 잘못을 범할지언정 바쁘게 하는 가운데 잘못을 행하지 않았다.
어려운 일을 해나가는 데는 오직 선조를 추모하고 후인에게 법도를 끼치는 것을 궁극의 사업으로 삼았다. 일찍이 선대를 위한 일 가운데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을 초록(抄錄)하여 차례대로 행하여 후일에 살필 근거로 삼으니, 서파(西坡) 옹이 매우 가상하게 여겨 《술지록(述志錄)》이라고 제목을 붙여주었다. 여전히 간행하지 못한 책이 허다하고 또 유적이 있는 곳에 정자를 세우려고 작정하여 모두 마음에 계산이 있었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였으니, 임종 무렵에 아들과 손자에게 거듭거듭 부탁을 남긴 것은 이 일이었다.
선비가 독서(讀書)와 이재(理財)를 아울러 이루기는 실로 어렵지만 본래 이 두 가지는 무관한 일이 아니다. 고인이 말하기를 “갑옷 병기와 금전 곡식은 모두 자기를 위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 이를 두고 말함이 아니겠는가? 공이 초기에 당한 일이 이처럼 험하였으나 능히 개척해나가서 일생 동안 학문에 힘쓰면서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여, 맨손으로 산업을 운영하여 고생스럽고 근면하게 가산을 이루었으면서도 의가 아닌 것은 추호도 취하지 않았다. 화려한 의복과 좋은 음식을 가까이 하지 않고, 넉넉하지 않은 자신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고 반드시 곤궁한 사람을 도와주어 아끼지 않았다. 이것은 대개 인자하고 정성스러운 평소의 성품이 그러한 것이었다.
평소에 저술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오직 뜻에 맞는 사람과 마음의 벗이 오면 혹 운자를 내서 심회를 읊었다. 생가와 양가의 선대 행장이 미비한 것을 일일이 찬술하였다. 항상 예법이 무너진 것을 근심하여 《사례초략(四禮抄畧)》 1책을 편집하였으니, 대개 《상변통고(喪變通攷)》는 책이 너무 많아 살펴보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에 그 가운데 요긴한 내용을 취하여 집안 자질들이 편하게 살피고 익숙히 익히도록 한 것이다. 또 부계(芙溪) 공의 행적이 잊혀 사라지는 것을 염려하여 유사를 기술하여 후일 살피는 것에 대비하였으니, 또한 사일(事一)의 정성에서 나왔다.
공의 가문은 절로 문학의 연수(淵藪)여서 홍유(鴻儒) 석학(碩學)이 많아 정려(鼎呂)의 형세가 있었다. 많은 별들이 떨어진 후로 공이 홀로 우뚝하기가 마치 오랜 세월이 지난 후의 영광전(靈光殿)과 같아 여망(輿望)이 절로 돌아가는 바가 있었다. 원림의 화석(花石)과 책상의 도서가 모두 한정(閒情)을 길러 스스로 즐길 수 있는 것이었지만, 시국의 일이 또 지극히 어지러워 시름과 두려움 속에 날을 보내기를 면하지 못하여 항상 무한한 근심을 품고 세상을 마쳤으니, 참으로 족히 공을 위하여 개탄할 일이다.
동환(東煥)은 어린 나이 때부터 일찍이 공의 덕의(德義)를 가까이 하고 법언(法言)을 들어 이끌어주는 부지런함을 후하게 입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추억하니 황홀하게 책 속의 고인과 같다. 이렇게 텅 비어 아무도 없는 날에 유로(遺老)의 옛 법도가 아득하여 보기 어려우니 다만 상전벽해의 덧없는 감회만 절실하다.
앞서 공의 유문을 인쇄에 부치고 현철한 아들 병희가 나에게 가전(家傳)을 주면서 행장을 부탁하였다. 나는 마땅한 사람이 아니고 또 묘갈명을 지어 세웠으니 행장이 묘갈보다 뒤에 나오는 것은 소용이 없다고 누차 사양하였으나, 병희씨는 선대의 교분으로 책려하여 부지런히 명하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이에 감히 참람함을 잊고 삼가 가전에 의거하여 대략 수정을 더하기를 이상과 같이하여, 한편으로는 평소에 경모하는 사정을 깃들이고 한편으로는 효자의 요청에 답한다.
원릉(元陵) : 조선 조 영조(英祖)의 능이다. 영조를 말한다.
개손(介孫) : 장손 이외의 손자를 말한다.
사일(事一)의 정성 : 부모, 스승, 임금을 한결같이 섬기는 정성 말한다.
정려(鼎呂) : 하(夏)나라 보배 구정(九鼎)과 주(周)나라 보배 대려(大呂)인데, 비중이 큰 인물 또는 사물을 말한다. 구정은 하나라 우임금이 주조한 것이고, 대려는 주나라 종묘의 큰 종이다.
영광전(靈光殿) : 옛 자취가 다 사라진 가운데 홀로 남아 추앙을 받는 대상을 비유한다.
白渚文集(下), 배동환 저, 김홍영, 남계순 역, 학민문화사(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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