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기생 산홍( 山紅)의 시
오늘(3월 25일)은 진주 향교 경서 반 논어 성독 공부 날이다.
교실에 들어서니 칠판에 한시 한수가 적혀있었다. 진주 기생 산홍이 지은 시로서 의기사(義妓祠) 현판에 걸려있는 시다.
千秋汾晉義(천추분진의) : 유구한 세월 진주 남강 충의가 흐르고,
雙廟又高樓(쌍묘우고루) : 두 사당, 의기사엔 우국충정 서려 있네.
羞生無事日(수생무사일) : 변고 없는 시절에 태어나 부끄럽게 여김은
笳鼓汗漫遊(가고한만유) : 피리불고 북치며 질펀한 유희만 일삼음이라네.
山紅(산홍)
또 전결의 ‘羞’자를 제일 마지막으로 해석하면 이렇게도 볼 수 있다.
‘일 없는 시절에 태어나 피리불고 북치며 질펀하게 노는 것을 부끄러워하노라.’
오늘 교수님의 해설에 의하면 ‘汾’은 ‘汾水’를 의미하는 말로 중국 ‘晉’나라 유역으로 흐르는 강이 분수인데 그곳에서 차용한 말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진주 남강을 옛날에는 ‘汾陽’ 혹은 ‘菁川’ 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쌍묘(雙廟)는 충민사(忠愍祠)와 창열사(彰烈祠)를, 고루(高樓)는 의기사(義妓祠)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매천야록'에 수록된 진주기생 산홍(山紅)은 매국노를 꾸짖은 일화가 기록되어 잇다.
얼굴이 아름답고 서예도 잘하였다.
을사오적의 하나로 지목되는 매국노 이지용(李址鎔)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자.
산홍은 사양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첩이 비록 천한 기생이긴 하지만 사람 구실하고 사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이지용이 크게 노하여 산홍을 때렸다. 라는 기록이 있다.
진주기생 산홍이 이지용의 첩이 되는 것을 거부한 것은 당시로서는 큰 사건이었으며 기생들의 자존감을 높여 준 일화이기도 하다.
그러면 이지용이 누구인가?
1905년 내무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적극 찬성하여 조약에 서명한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이다.
1907년에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니, 그 권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대단하였다.
1906년 을사오적 이지용이 진주를 방문했다는 흔적은 촉석루 벼랑에 그의 이름을 새겨 놓은 데서 알 수가 있다.
산홍이 역적의 첩이 될 수 없다고 거절한 일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절개를 칭찬해 마지않았으며, '매천야록'에 그때의 일을 기록하여 역사의 교훈이 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