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친구, 반려 로봇
인형 모습을 한 인공지능을 적극적으로 보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인형 모습의 인공지능*으로 치매 예방? 외로움 해소?? 되묻고 싶습니다.
*‘토이봇’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효돌이, 효순이, 다솜이… 인형 모양 로봇입니다.
말벗, 기상·식사·약 복용 시간 알람, 인형 안에 들어 있는 센서가 동작을 감지하고 안전관리까지 지원한다고 합니다.
‘음성메시지 전송 및 보호자 응급상황 모니터링 기능도 있어, 일정 시간 움직임이 없거나 인형이 작동하지 않을 경우
안부를 확인할 수 있어 선제적 대응도 가능’(쿠키뉴스, 2020.7.29.)합니다.
첫째, 평범한 사람 관계와 꾸준히 이어온 일상을 거드는 게 ‘예방과 해소’에 더 효과적일 겁니다.
둘째, 사람을 관리의 대상으로만 본 건 아닐지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용과 효율로 계산하여 빚어낸 일 같습니다.
셋째, 나와 내 가족의 삶이 그렇지 않다면 다른 이에게도 권하기를 주저합니다.
사회복지사가 벌인 일이라면 서운합니다. 사람 사이 관계를 잇고 인간성 회복을 향하는 우리 정체성을 생각하면 아쉽습니다.
이런 기기라도 만들어 보급하려는 진정성을 믿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일에는 순서가 있듯, 사회복지사로서 해볼 만한 일들을 벌인 뒤에 나온 결정이면 좋겠습니다.*
* <한여름 날의 낭만잔치> 속 어르신들을 생각합니다.
삼삼오오 둘레 이웃과 때때로 만나 먹고 나누는 모습. 사회적 관계 속에서 어울리며 삶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내 이야기가 실시간으로 녹음되어 텍스트로 만들어 쌓여갑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인공지능과 대화. 오늘 무얼 먹을지 미리 짐작하여 말하고, 무얼 사고 무얼 할지 미리 안내합니다.
철학자 이반 일리치의 말처럼 이런 사회 속에서 인간은 ‘복지 서비스’를 유지하게 하는 숙주 정도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복지 산업의 소비자로 추락하는 존재일지 모릅니다.
토이로봇과 같은 스마트 노인 돌봄 기술이 ‘인간의 몸을 지속적으로 추적하고 감시하면서 수익을 창출하고,
돌봄노동자와 돌봄대상자 모두 하나의 데이터와 수치로 만드는 데이터 자본주의’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스마트 노인 돌봄 기술과 더불어 돌봄중심사회로 나아가기> (김우영,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논문, 2021)
이때 토이 로봇을 사용하는 어르신과 이를 지원하는 사회복지사는 이를 이용하는 가운데
사용한 개인 정보가 누구의 배를 불리는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어떤 서비스가 무료라면 대개는 나의 정보를, 아니 나 자신을 광고에 판 것과 같다.
대부분의 인터넷 서비스는 우리를 ’추적‘하는데, 접속과 검색을 추적한 데이터로 나에게 ’맞춤 광고‘를 보여준다.
내가 욕구를 느끼기도 전에 나의 욕구를 자극해 상품을 구매하게 하거나, 더 많은 데이터를 제공하게 만든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나눔문화, 2016)
‘그저 자신에게 스마트 노인 돌봄 기술을 제공한 정부와 기업에 고마움을 표현하고
본인이 성공적인 노화의 방법으로 디지털 에이징을 직접 선택’했다고 믿을 뿐입니다.
혹은, 끊어진 사회적 관계를 스스로 회복할 능력이 없고 방법을 모른 채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 <돌봄선언>(더 케어 컬렉티브, 니케북스, 2021)에서는
돌봄은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y’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데,
‘셀프케어산업’의 마케팅에 의해 공동체로써 돌봄이 밀려났다고 합니다.
“영어의care는 보살핌, 관심, 걱정, 슬픔, 애통, 곤경을 의미하는 고대 영어caru에서 왔다.
단어의 이중적 의미가 분명히 나타나있다. 이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요구와 취약함을 전적으로 돌본다는 것,
그래서 생명의 연약함과 직면하는 것이 어렵고 지치는 일이 될 수 있는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최첨단 기술이 당사자의 삶을 풍요롭게 할지도 의문입니다.
어느 사회복지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래에는 드론이 반찬 배달을 할지 모른다고 합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자기 삶을 살아가며 나아가 더불어 살게 돕는 게 진보이고,
그렇게 일상에 녹아드는 게 발전입니다.
미래의 어느 때가 되면 임시로 이뤄져 온 복지 서비스가 삶에 스며들어 이제 스스로 만들어 먹고,
이웃과 나누고 함께하며 끝까지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 사회복지사의 이상입니다.
복지 서비스는 그대로 놓아두고 그 전달 방법만을 첨단 기기로 활용하는 걸 진보나 발전이라 본다면,
나 또한 그런 시스템에서 탈주하고 싶습니다. 삶의 마지막을 나보다 나를 더 잘하는 인공지능 인형과 함께하고 싶지 않습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이런 도구를 이용한 많은 이가 토이로봇이 자신을 아이처럼 취급하는 경험을 했다는 겁니다.
몸과 마음이나 정신이 약해졌다고 애 취급 한다는 못된 이야기를 사회복지 현장에서 가끔 들었는데,
토이로봇에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미래 사회를 전망하며 ‘외로움’이 일상이 되는 사회를 경계했습니다.
이미 영국과 미국은 외로움에 대응하는 정부 기관을 만들어 질병 관리 수준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핵심이 ‘공동체’였음을 기억합니다.
시민희망 사회적 관계 고려 세심한 공동체 지원 다각화 중요
사회적 외로움을 경험하고 있는 시민들은 사회적 관계 맺기에 대한 개인적 성향의 차이뿐만 아니라
기존의 사회적 관계에서 갈등이나 괴롭힘 등 사회적 폭력을 경험 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서울시가 공적 지원을 추진할 경우 세심하고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그동안 서울시가 오랜 노력으로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 마을공동체사업이나
찾동과 같은 대면 중심의 공동체지원사업뿐만 아니라
최근에 선호되는 온·오프라인을 이용한 취향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다각적인 공동체 지원방안을 마련 할 필요가 있다.
<외로움은 개인만의 문제 아닌 사회적 질병, 사회적 관계 고려 공동체 지원 다각화 필요> (신인철 최지원, 서울연구원, 2019)
재택근무, 온라인 수업, 인공지능과 로봇이 대신하는 일들….
코로나19를 경험하며 이런 모습이 생활 속 깊숙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엄청난 개인 생활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하는 빅데이터에 의존하는 일들입니다.
이런 빅데이터와 이를 실시간으로 활용하는 인공지능은 언제든 조지 오웰의 「1984」 속 빅브라더로 바뀔 수 있습니다.
복지 현장에서 긴급히 약자를 지원한다는 명분 아래 온갖 개인 정보를 넘겨줄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사람다움의 핵심 요소로 자주성과 공생성을 생각하는 사회복지사로서,
자주성을 이루는 주체의식과 역량을 생각한다면 민감하게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KBS 특파원 리포트, 닥치고 방역의 시대, 국가는 어디까지 개입할 것인가?, 2021.8.1.
“한국과 싱가포르가 월등하게 방역에 성공한 이유도 감염 사슬을 추적하면서
개인 정보를 ‘합법적’으로 뒤져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뒤져본 뒤에 대중들에게 공개까지 했다.(민변은 정부가 이태원 클럽 방문자를 확인하기 위해
시민 1만여 명의 기지국 통신 접속 정보를 수집한 것은 우리 헌법정신을 위배했다며 헌법소원을 냈었다). …
국가는 인권과 자유를 최소한으로 침해하며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는지 찾아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그 방법을 의심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변이 바이러스가 번지며 또 사람들이 죽는다.
그러니 지금은 ‘나보다 공동체’다. 자유보다 연대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백신을 맞을 때다.”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기술 도구의 도입이 빨라졌고,
인간지능을 넘어선 인공지능 개발로 더욱 서로를 향한 관심이 있어야 할 마음의 자리를 기계가 대신할까 두렵습니다.
망치를 든 이에게 모든 사물이 못으로 보이듯,
스마트폰을 든 이에게는 모든 문제 해결이 앱application으로 가능할 거라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가 SNS를 하지 않는다며 저를 알 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주로 페이스북에 머무는데, 제가 보기에 페이스북 속에 있는 그야말로 알 속에 있는 듯 보였습니다.
저는 오프라인 만남을 좋아합니다. 또한, 온라인 카페를 활용합니다.
누가 알 속에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에코 챔버 효과(eco chamber).
갇힌 방 안에서 대화하면 같은 이야기만 듣기 마련입니다.
특정 SNS에서 활동하다 보면, 갇힌 방 같은 그 안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전부처럼 느껴집니다.
유튜브를 보다보면 알고리즘이 비슷한 영상을 계속 보여줍니다.
그렇게 내가 보는 것만이 진실이라 여기는 확증편향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런 인공지능과 첨단로봇이 중요하게 사용될 곳이 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우려스러운 건, 이런 도구를 ‘미래’나 ‘진보’ 혹은 ‘발전’으로 여기는 순간,
‘인간 돌봄’이 ‘구시대의 낡은 것’이 되어버리고 마는 현상입니다.
시인 박노해는 ‘접촉의 역사’로부터 역행하는 것은 ‘사랑의 감축’이고 ‘사랑의 소멸’이라 했습니다.*
*<박노해 사진에세이 ‘길’> (박노해, 느린걸음, 2020)
어린 아이도 인공지능을 사용하여 무한 정보를 탐험할 수 있고, 로봇을 활용하여 하지 못할 일이 없어지는 시대.
한 없이 자유로워지는 인간의 시대 속에서 우리 할 일은
‘더 깊은 진짜 만남 속에서 새로운 삶의 철학으로 나아가기’입니다.
어울려 사는 모습이야말로 인간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대면 비대면 외면>*에서 김찬호는 ‘보이는 것이 많아지면 보는 것이 줄어든다’ 했습니다.
인공지능이 즉각 답하고, 나의 욕구를 예측하여 미리 보여주는 순간,
내가 보고 깨닫는 능력은 그 만큼 사라질지 모릅니다.
특히 타자와 관계하는 영역을 손쉽게 내어주는 순간, 삶이 아니라 생존이 될까 두렵습니다.
*「대면 비대면 외면」 ‘뉴노멀 시대, 우리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김찬호, 문학과 지성사, 2022)
인터넷 강의를 듣거나 웹으로 영화를 볼 때 2~3배 속으로 돌리기도 한다.
시선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어떤 주제나 대상에 마음이 머무는 시간이 짧아지고,
잡다한 자극과 이미지들을 표면적으로 터치할 뿐이다.
대화에서 상대방을 섬세하게 경청하는 능력도 감퇴한다. <대면 비대면 외면>
사진은 올봄 '서귀포시서부종합사회복지관' 이웃 동아리 활동 모집 풍경입니다.
이웃 서로 취미 취향으로 모임을 꾸리며 어울리게 지원하는 일이 복지관 핵심 과업입니다.
그런 일에 힘쓰고 싶어요.
누군가 그랬습니다. 지옥이 있다면 진수정찬이 차려진 곳인데 혼자인 곳이라고.
최첨단 기술에 둘러쌓여 있지만 찾아오는 이가 없다면 삶은 지옥 속에 있는 느낌일 겁니다.
첫댓글 의식을 깨워주는 글 감사합니다 선생님.
안연빈 선생님이 읽어주니 고맙습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7.24 13:48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7.24 1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