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이라는 직업
금강산 시인대회 하러 가는 날, 고성 북측 입국심사대의 귀때기가 새파란 젊은 군관 동무가 서정춘 형을 세워놓고 물었다. “시인 말고 직업이 뭐여?” “놀고 있습니다.” “여보시오, 놀고 있다니 말이 됩네까? 목수도 하고 노동도 하면서 시를 써야지……” 키 작은 서정춘 형이 심사대 밑에서 바지를 몇 번 추슬러올리다가 슬그머니 그만두는 것을 바다가 옆에서 지켜보았다
# 14k
어머님 돌아가셨을때 보니 내가 끼워드린 14k 가락지를 가슴 위에 꼬옥 품고
누워계셨습니다 그 반지는 1972년 2월 바람 부는 졸업식장에서 내가 상으로 받은,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어머님의 다 닳은 손가락에 끼워드린 것으로, 여동생 말에 의하면 어머님은 그 후로 그것을 단 하루도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 정 님 이
용산 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 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 주며 맛있니 맛있니
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 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주더니
왜 가 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 섣달 긴긴 밤 베틀에 고개 숙여
달그랑잘그랑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 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 나올 것만 같더니
한 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 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 역전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이시영(李時英) 시인은 1949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수학했다.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제3회 <월간문학> 신인 작품 모집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만월(1976), 바람 속으로(1986), 길은 멀다 친구여(1988), 이슬 맺힌 노래(1991), 무늬(1994), 사이(1996), 조용한 푸른 하늘(1997), 은빛 호각(2003), 바다 호수(2004), 아르갈의 향기(2005),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2007), 긴 노래 짧은 시(2009),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2012) 등이 있다. 정지용문학상(1996), 동서문학상(1998), 현대불교문학상(2004), 지훈상(2004), 백석문학상(2004) 등을 수상했다. 현재 단국대 문예창착과 초빙교수로 있다.
첫댓글 "시인이라는 직업"
이 작품을 읽으며 유물사관 공산주의 국가의 사고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사고에 대해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정신 노동이나 종교 등이 부정되는 공산주의 사회상을 잘 드러내주는 일화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자유의 세상과 로맨스를 기대하기도 힘들고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기도 어렵겠다는 직감이 듭니다.
"14k"
어머님의 자식에 대한 강한 사랑과 애착을 느낍니다.
옛적 어머님들은 예외없이 그러했지요
요즘은 시대가 많이 변해 자녀보다 자신의 인생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이 되지않았나 합니다.
어느 것이 정답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요
기쁜 희생으로 행복했을 어머니, 합리적 사고안에 최선의 행복을 찾아 누리는 어머니...
"정님이"
예전엔 정님이 같은 누님이 주변에 더러 많이 있었지요
용산역전에서 극적인 만남이 있었다면 너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잘 감상했습니다.^^
"정님이"~~?? 그럴 수도 있었겠습니다.
참으로 슬픈 그리움입니다. ^^보고픈 님!!
李時英시인의 시 중에 좀 특이한 산문형식의 詩가 많아서 소개해 보았습니다.
李시인의 등단 40년을 맞아 현재 문단에서 빛나는 활동을 하고 있는 친구들(김사인. 고형렬. 김정환. 하종오)이 정성들여 묶어준 시선집 속에 들어 있는 시입니다.
李시인은 '創批문단'의 선후배 사이에서 글판과 술판의 벗이자 과묵의 사무총장 노릇을 십수년했다고 합니다. '창비'라는 데가 문학창작과 사회비평은 물론 사회참여도 하는 곳인데, 지치지 않는 시정신으로 문학적 순결을 지켰고, 그것이 그의 문학적 성가를 높여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감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