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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나요? 하늘은 뜻이 없는 목숨은 낳지 않고, 땅은 의미 없는 생명은 기르지 않는다는군요. 목숨을 가지고 살아가는 데는 그렇게 사는 의미가 있다고 하네요. 여러분은 지금 이루고 싶은 인생의 목표가 있는지요?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좋으니 그냥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정말 하고 싶고, 그것을 하면 신이 나고, 나뿐 아니라 남도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없을까요? |
◉ 무엇을 위해 사나요?
출석을 부르면서 묻습니다. 김명철!
공부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요? 잘 살려고요.
잘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지요?
이영희! 영희는 사는 목적이 무엇이지요?
왜 사나요? 무엇을 위해 사나요? 무엇 때문에 사나요?
여러분!
한 번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볼까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물음에 그저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세요.
◉ 내가 사는 이유?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기) |
【 삶이란 그 무엇엔가에, 그 누군에겐가에 정성을 쏟는 일 】
스님, 거처하는 방문 앞 아름드리 느티나무 잎이 마지막 역사인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들었다 다 떨어졌겠지요.
잎을 훌훌 털어버리고 엄동을 맞을 비장한 차비로 의연하게 버티고 거 있는 모습이 스님의 모습과 겹쳐 든든하고도 선합니다. 고난의 길을 뚫고 가려면 간편한 몸차림을 하라는 가르침인가요?
해마다 낙엽을 보며, 또 엄동에 까맣게 언 솔잎을 보며 느끼는 일입니다.
참 삶이란 부단히 버리고 끝끝내 지키는 일의 통일처럼 느껴집니다. 신진대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져야 생명의 운행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이치와 같습니다.
가을의 낙엽에서는 버림, 청산을 결행하고, 겨울의 얼어붙은 솔잎에서는 극한의 역경에서도 끝내 지켜야 할 것은 지키라는 것을 온몸으로 그 가르침을 배운다고 여기면서도, 그게 쉽지 않고 버리기도 지키기도 힘들다는 점만을 알 따름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정쩡하게 목숨만 이어 갑니다. 버릴 줄 알아야 지킬 줄 알겠는데, 버리지 못하니까 지키지 못합니다.
느티나무는 가을에 낙엽 진 다음 해마다 봄이 되면 새 잎을 피울 뿐만 아니라 껍질도 벗습니다. 누에를 쳐 보니, 다섯 번 잠을 자고 다섯 번 허물을 벗은 다음 고치를 짓습니다. 탈피 탈각이 없이는 생명의 성장과 성취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탈피 탈각을 하지 못하면 주검이겠지요.
단풍과 지는 해가 산천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것을 보면서 때때로 인생의 마지막을 저렇게 멋지게 마치진 못할 망정 추접하게 마치지는 말아야 하는데 하고 느낍니다. 사실 마지막이란 일상이 쌓여서 이루어지는 거지 어디서 느닷없이 나타나는 게 아닐진대, 삶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끝마침도 제대로 이루어지겠지요.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건 자연의 운행과 역사의 과제에 충실한 삶을 사는 건데 세상의 흐름은 자연과 멀어지고 역사보다는 순간과 개인적인 삶으로 오그라드는 것 같습니다.
한로와 추상이 낙엽과 결산을 결행하듯 각자는 자기에게 추상1)같을 수 있어야 타락과 답보2)에서 벗어나 옳게 살 수 있고, 민족도 때때로 추상을 내리고 벽력을 쳐서 민족 정기를 바로 세워야 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터입니다. 얼버무림은 단풍도 낙엽도 가져오지 못하고, 더더욱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지도 못할 뿐 아니라 압살시키고 말지요.
자연계가 한 해에 몇 차례 태풍과 뇌성벽력을 쳐서 생태계를 추스리듯, 개인과 사회도 그런 일이 생겨 생명을 추스리고 침체3)의 늪에서 떨쳐 일어나야겠습니다.
그런데 스님!
추상으로 낙엽이 지는데 우리 농촌은 그 무슨 얄궂은 돌개바람이 불어서인지 젊은이들이 혹은 온 집안이 정든 고향을 떠나 농가는 이 가을에 빛을 털어 버리고, 민족은 이 가을에 분단의 장벽을 털어 버려야 하는데, 그게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피를 빨고 있습니다. 올해 책정된 쌀값과 수매량으로는 농가 빛의 이자도 안됩니다. 농민은 다 빚쟁이고, 노동자는 46퍼센트가 빚쟁이랍니다. 몇 퍼센트 몇 퍼센트의 인상이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닙니다. 쌀 값이 빚이나 갚을 수 있게 해야지 거기 무슨 딴 수작이 있겠어요? 구도하시는 스님들도 공양을 들여야 염불도 참선도 하시는데, 밥 먹고 사는 사람이 쌀을 업신여기는 건 백성을 얕잡아 보는 데서 나옵니다. 농민들의 추상같은 벼락만이 빚을 떨쳐 버릴 수 있고 민족의 추상같은 뇌성벽력 없이는 분단의 장벽은 허물어지지 못할 것 같아요. 때때로 백성과 민족의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스님, 딴 일은 거의 끝나고 요 며칠째는 산수유를 따고 있습니다. 퇴비만 주다가 올핸 뒷거름을 듬뿍 주었더니, 가지가 땅에 닿도록 지천으로 열렸습니다.
수유 키운 이야길 좀 해 볼게요.
한 십 오륙년 전 가을, 외가에 갔다가 외가 뒤 안에 빨갛게 익은 수유를 처음 보고 정이 쏠려 심어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시를 구해 이른 봄에 심었습니다. 몇 달이 되어도 수유는 나지 않고, 풀만 잔뜩 나서 혼이 났는데, 수유는 늦여름에야 나기 시작했어요.
씨는 다 봄에 뿌린다는 게 저의 상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수유 씨는 아주 단단해요. 살구 씨, 복숭아씨 보다 더 단단해요. 나중에 알아보니 수유 씨는 가을에 심어야 봄에 싹이 튼대요. 배추, 무 같은 건 그저 적당히 뿌리면 싹이 트지만, 도라지, 우엉, 황기 같은 건 해동되자마자 씨 뿌릴 골을 단단히 밟아 수분 증발을 막아야 씨가 제대로 싹틉니다.
씨라는 것도 제각기 나름대로의 성질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씨앗보다 좀더 복잡한 인간이나 인간집단은 또 나름대로의 성질이 있겠지요. 그걸 탐구하는 것이 종교인가요? 골치 아프겠습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서게 하기 위해선 그러한 탐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씨앗 이야기 나온 김에 채종 이야기를 좀 해 볼게요.
전에는 자기가 지은 논밭에서 잘 된 이삭이나 고추를 따서 심었는데, 몇 해 전부터 나락씨는 면사무소 고추씨나 배추 씨 같은 건 종묘상에서 사다 심습니다. 며칠 전 텔레비전 뉴스에 봉화 지방에서 중만생종 볍씨를 심어서 제대로 여물지 않아 손해를 봤다는 게 있었고, 영양에서 농민 운동의 도화선이 된 감자 씨 사건도 씨가 싹트지 않았던 데서 일어났습니다.
물론 육종은 시험장에서 해야겠지만, 씨앗을 남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건 중대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자가 채종이 불가능한 부분은 외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이제 농민들은 거의 아무런 고뇌 없이 시앗을 거의 다 외부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건 어찌 생각하면 농사짓기가 편해졌다고 할 수도 있으나 실은 핵심의 일부를 놓치는 결과를 가져온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 부작용으로 해마다 몇 건 씩 면과 종묘상을 상대로 농민들이 소동을 벌여요. 그래서 수유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한약방 차린 아는 젊은이에게 수유 심은 이야길 하니까, 그게 언제 커서 돈이 되겠느냐며 나무랐고, 이웃들도 한 오 년이나 십 년쯤 있어야 돈이 된다니까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당장에 수가 나지 않는 일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무 심어 십 년은 잠깐입니다. 오 년쯤 되자, 초봄에 노오란 꽃이 몇 개 달리기 시작하더니, 십 년쯤 되자 꽤 커서 초봄의 추위를 뚫고 피어난 노오란 꽃이 봄추위를 녹여주고 정취를 돋우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추사(秋史)도 황화주실(黃花朱實)이란 글귀를 썼는가 봅니다.
묘목을 가꾸어 이웃에 나누어 주며 눈치를 살폈습니다. 큰 나무를 달라는 사람에 섞여 몇몇 사람들은 씨앗을 달라고 했어요. 그들만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들은 끝내 수유를 키우고 가꿀 겁니다. 비록 수유값이 똥값이 되더라도.
나무를 어찌 돈으로 따지겠어요? 살기가 하도 급하다 보니 조급해서 그런 거지겠지만, 수유를 심는다고 나무라던 이웃들은 아직도 그 구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수유는 커서 심은 이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스님, 나무를 심는다는 건 희망을 심는 일이며, 조국 강산을 수놓는 일입니다. 희망이란 절망에서 솟아나는 것이고, 황폐했기에 나무를 심습니다. 산과 들에는 나무가 우거지고, 동리에는 인재가 득실거려야겠습니다. 전 농촌에서 나무를 심겠어요. 스님은 그 곳에서 이 나라의 주춧돌과 대들보가 될 인재들을 키우고 계시겠지요.
땅위에 빈터는 없어요. 음지를 좋아하는 놈, 양지에서 잘 자라는 것, 반음반양에서 잘 되는 것, 여러 가지가 있어요. 곡식은 북주며 메가꾼다고 하는데 마늘 같은 건 북주지 않고 뿌리담을 파헤쳐야 알이 굵게 맺힙니다. 일률적4)이 아닙니다. 스님께서 사람들을 만나 보면 가지각색이지요. 가가붓자식이란 말이 있지요. 세상은 재미있고, 사람이란 참 묘하고 기이한 존재 같은데, 식물도 그와 같아서 농사짓는 재미가 있습니다. 아마 일률 적이면 싫증이 마서 농사가 짓기 싫고, 사람이 몇 종류뿐이면 이 세상은 삭막할 것입니다.
세상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사람의 다양성에 기인5)하는 건데 그건 어쩔 수 없는 좋고도 골치 아픈 일이지만, 공통점도 많아요. 못 먹으면 배고픈 게 사람의 약점이라고 루쉰이 말했지요. 추위, 더위 함께 타고.
스님 술에다 수유를 담가 석 달쯤 두면 약주가 됩니다. 약효를 수렴, 자양 강장, 식욕증진 등인데, 술을 담그면서 생각해 봤어요. 사람도 변할까? 술은 담그다 보면 왕왕 썩기도 해요. 부패, 타락, 왜소화가 아닌 참된 의미의 인간 개조가 과연 가능할까? 이건 사람이 사람에 대한 믿음 같기도 합니다. 지금의 그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러했는가? 사회적으로 시달리며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보니 그렇게 된 게 아닌가?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니고, 그렇게 만들어졌는데도 다들 타성6)에 젖어 휩쓸려 갑니다. 우뚝 버티고 서서 방향을 찾게 할 수 있는 힘은 없을까 생각해 봅니다.
철 따라 옷 바꾸어 입는 일에 골몰한 그들에게 세상을 바꾸자는 말에 귀 기울이게 할 순 없을까? 더 값진 집과 승용차에 인생을 건 그들에게 세상을 바꾸자는 말이 먹혀 들어갈 수 있을까?
스님, 밭에 곡식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니까 잡초, 독초가 기를 쏘고 자랍니다. 곡식이 자리잡고 제대로 크면 잡초가 맥을 추지 못합니다. 세상도 그런 게 아닌가 여겨봅니다.
세상을 만들기 위한 근본은 사람인데, 새로운 형태의 사람들이 나고 크는 일이 세상을 바꾸는 일의 근본이라 믿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생겨나서 힘겹게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 개조에 대해서 신영복 선생님은 다름과 같이 말했대요. “개인의 변혁 또는 개조도 그 사회적 수준의 변혁 또는 개조만큼 가능한 것입니다. 나에게 계속 주어지는 과제는 나를 어디에 세우고, 어떤 과제 속에서 나의 일을 발견 해 낼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이십 년 동안 애가 추구해 온 자기 변혁, 자기 개조 작업의 연장선상에 나를 세우는 일이 과제로 주어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스님, 편지가 길어졌습니다. 별 볼일 없는 말은 길게 마련이지요. 저는 요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삶이란 그 무엇(일)엔가에, 그 누구(사람)에겐가 정성을 쏟는 일이라고.
스님, 안녕히 계십시오.
1989. 11. 4
【읽기 후 활동 】
1. 글쓴이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근본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2. 다음은 많은 사람들이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적은 것입니다. 각 항목을 보고 그 가운데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순서대로 ( )에 순번을 기록하세요.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가?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편안한 생활 ……( )
자신이 한 일에 보람을 느끼며 사는 것 ……( )
자연과 예술을 감상하는 삶 ……( )
모든 사람들이 공평한 기회를 갖는 것 ……( )
걱정이나 고민이 없는 편안한 삶 ……( )
나라를 지키는 것 ……( )
자기 존중 ……( )
진실한 우정 ……( )
진취적이고 활동적이고 신나는 생활 ……( )
가족의 안정 ……( )
자주적인 삶 ……( )
이성과의 완전한 사랑 ……( )
종교를 통한 영원한 삶 ……( )
남으로부터 존경과 인정을 받는 것 ……( )
지혜 ……( )
3. 내 삶의 우선 순위 찾기
급하고 중요한 일들 |
급하지는 않으나 중요한 일들 |
급하긴 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 |
급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 |
4. 낱말 퍼즐 만들기 - 모둠활동, 준비물 : 국어사전
- 윗 글에서 낱말을 20개 정도 고른다. 이때 낱말의 끝말이 이어지는 것으로 찾아야 한다.
- 찾은 낱말을 가로와 세로로 맞추어 낱말 퍼즐에 써 넣으며 일련번호를 붙인다. 낱말이 들어가지 않은 곳은 빗금으로 색칠한다.
- <가로열쇠>와 <세로열쇠>로 해당 낱말의 풀이를 쓴다. 한두 개 정도는 윗 글에 없는 낱말을 만들어 풀이를 써주어도 괜찮다.
- 만든 낱말퍼즐을 바꾼다. 가장 빨리 푼 모둠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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