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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24권 : 경상도(慶尙道)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樂民 장달수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4권 : 경상도(慶尙道)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동쪽으로 진보현(眞寶縣)의 경계까지 65리, 청송부(靑松府)의 경계까지 66리, 남쪽으로 의성현(義城縣)의 경계까지 44리, 서쪽으로 예천군(醴泉郡)의 경계까지 54리, 북쪽으로 영천군(榮川郡)의 경계까지 42리, 예안현(禮安縣)의 경계까지 32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4리이다.
【건치연혁】 안동(安東)은 본래 신라의 고타야군(古陁耶郡)으로 경덕왕(景德王)이 고창군(古昌郡)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임금 견훤(甄萱)과 이 고을의 땅에서 싸워서 견훤을 패배시켰다. 그때 이 고을 사람 김선평(金宣平)ㆍ김행(金幸)ㆍ장길(張吉)이 태조를 도와서 전공(戰功)이 있었으므로, 김선평은 대광(大匡)으로 임명하고, 김행과 장길은 각각 대상(大相)을 삼고 이 까닭으로 인하여, 군(郡)을 승격시켜 부(府)로 삼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가, 뒤에 영가군(永嘉郡)으로 고쳤다. 성종(成宗)은 길주 자사(吉州刺史)로 일컬었고, 현종(顯宗)은 안무사(安撫使)로 고쳤으며 또 지길주사(知吉州事)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안동부(安東府)로 하였다. 명종(明宗) 때에 남적(南賊) 김삼(金三)ㆍ효심(孝心) 등이 주(州)ㆍ군(郡)을 위협하고 약탈하므로 군사를 보내어 쳐서 평정하였는데, 그때 안동부가 공이 있었다고 하여 승격시켜 도호부(都護府)로 하였다. 신종(神宗) 때에 동경(東京 경주)의 야별초(夜別抄) 패좌(孛佐) 등이 무리를 모아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안동도호부가 적(賊)을 항거하여 막은 공로가 있으므로 승격시켜 대도호부(大都護府)로 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이 복주목(福州牧)으로 고쳤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을 피해 남쪽으로 순행(巡幸)하여 고을에 머무를 때에, 고을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여 제공하였으므로 다시 승격시켜 안동대도호부로 하였다. 본조에 들어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 세조(世祖) 때에는 진(鎭)을 설치하고 부사(府使)에게 병마절도부사(兵馬節度副使)를 겸임하게 하였다가 얼마 안 가서 부사(副使)는 폐지하였다.
【속현】 임하현(臨河縣) 부(府)의 동쪽 33리에 있다. 본래 고구려의 굴화군(屈火郡)이었는데 신라의 경덕왕(景德王)이 곡성군(曲城郡)으로 고쳤다가,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때에 본부(本府)에 예속되었다. 풍산현(豐山縣) 부의 서쪽 35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하지현(下枝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영안(永安)으로 고쳐 예천군(醴泉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태조 때에 이 고을 사람 원봉(元逢)이 귀순(歸順)한 공로가 있었으므로 승격시켜 순주(順州)로 하였으나, 뒤에 견훤에게 함락되었으므로, 다시 낮추어 하지현으로 하였다가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때에 본부에 예속되었다. 명종(明宗)은 감무(監務)를 두었으나 뒤에 다시 본부에 예속되었다. 일직현(一直縣) 부의 남쪽 31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일직현(一直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일녕(一寧)으로 고쳐서 고창군(古昌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초기에 옛 이름을 회복하였으며, 현종 때에 본부에 예속되었다. 감천현(甘泉縣) 부의 서쪽 1백 리에 있다. 고려 현종 때에 본부에 예속되었다. 길안현(吉安縣) 부의 동쪽 50리에 있다. 본래 길안부곡(吉安部曲)인데,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에 승격시켜 현(縣)으로 하였다. 내성현(奈城縣) 부의 북쪽 90리에 있다. 본래 퇴곶부곡(退串部曲)인데, 고려 충혜왕이, 이 고을 사람인 내시 강금강(姜金剛)이 원 나라에 있을 때 시위(侍衛)한 공로가 있다고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승격시켜 현으로 하였다. 춘양현(春陽縣) 부의 북쪽 1백 12리에 있다. 본래 가야향(加也鄕)인데 고려 충렬왕(忠烈王) 10년에 이 고장 사람인 호군(護軍) 김인궤(金仁軌)가 공이 있었다고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승격시켜 현으로 하였다. 재산현(才山縣) 부의 동쪽 75리에 있다. 본래 덕산부곡(德山部曲)인데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경화옹주(敬和翁主)의 고향이라고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승격시켜 현으로 하였다. 개단부곡(皆丹部曲) 내성현의 북쪽 25리에 있다. 소천부곡(小川部曲) 재산현의 북쪽 25리에 있다.
【진관】 도호부(都護府)가 2 영해(寧海)ㆍ청송(靑松) ㆍ군(郡)이 3 예천(醴泉)ㆍ영천(榮川)ㆍ풍기(豐基). 현(縣)이 8 의성(義城)ㆍ봉화(奉化)ㆍ진보(眞寶)ㆍ군위(軍威)ㆍ비안(比安)ㆍ예안(禮安)ㆍ영덕(盈德)ㆍ용궁(龍宮).
【관원】 부사(府使) 1인인데, 정3품관으로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겸임한다. 다른 도(道), 다른 진(鎭)에서도 같다. 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고타야(古陁耶)ㆍ고창(古昌)ㆍ영가(永嘉)ㆍ길주(吉州)ㆍ복주(福州)ㆍ능라(綾羅)ㆍ지평(地平)ㆍ석릉(石陵)ㆍ일계(一界)ㆍ화산(花山)ㆍ고장(古藏), 창녕(昌寧) 지리지(地理志)에는 옛날의 창녕국(昌寧國)이라고도 하였다. 고령(古寧).
【성씨】 본부 김(金)ㆍ권(權)ㆍ강(姜)ㆍ조(曹)ㆍ장(張)ㆍ고(高)ㆍ이(李), 우(禹)ㆍ곽(郭) 모두 내성(來姓)이다. 조(趙) 촌성(村姓)이다.임하(臨河) 윤(尹)ㆍ이(李)ㆍ신(申), 전(全) 김(金)이라 하기도 한다. 임(林), 화(華) 개경(開京).풍산(豐山) 김(金)ㆍ임(林)ㆍ유(柳)ㆍ홍(洪)ㆍ강(康)ㆍ심(沈), 민(閔) 강주(剛州).일직(一直) 임(任), 손(孫) 본래 순(荀)인데, 고려 때에 현종(顯宗)의 휘(諱)를 피하여 손(孫)으로 고쳤다. 전(全)ㆍ노(盧)ㆍ전(田)ㆍ한(韓). 가량(加良) 소(邵)ㆍ윤(尹). 감천(甘泉) 이(李)ㆍ김(金)ㆍ조(趙)ㆍ전(全)ㆍ문(文), 장(張)ㆍ최(崔) 모두 속성(續姓)이다.길안(吉安) 김(金)ㆍ임(林)ㆍ박(朴). 내성(奈城) 윤(尹) 속성(續姓)이다. ○ 재산(才山)ㆍ개단(皆丹)ㆍ소천(小川)도 같다.소라(召羅) 엄(嚴). 춘양(春陽) 정(鄭)ㆍ윤(尹).
【풍속】 부지런한 것과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농사 짓고 누에치는 일을 힘쓴다. 지리지(地理志). 무본절용(務本節用) 권시(權偲)의 향사당기(鄕射堂記)에, “풍속은 부지런하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농사를 힘쓰고 씀씀이를 절약하여 당(唐)ㆍ위(魏)의 유풍(遺風)이 있다.” 하였다. 근검충의(勤儉忠義) 권제(權踶)의 덕민루기(德民樓記)에, “근검(勤儉)한 풍속과 충의(忠義)의 열렬함은 남쪽 지방의 으뜸이 된다.” 하였다. 남편은 밭을 갈고 아내는 누에를 치며, 굽은 수레[曲車]를 사용하고, 광주리를 짊어지고 다닌다 옛 사람의 기록이다. 풍속은 예스럽고 백성들은 순박하다 백문보(白文寶)의 금방기(金榜記). 풍기(風氣)가 혼륜(渾淪)하다 권반(權攀)의 모은루기(慕恩樓記).『신증』 석전(石戰) 매년 정월 16일에 부내에 사는 사람들이 부(府)의 중앙에 있는 내를 경계선으로 하여, 좌우편으로 패를 나누어 돌을 던지며 서로 싸워 승부를 결정한다. 경오년 왜적(倭賊)을 토벌할 때에 석전(石戰) 잘하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선봉(先鋒)으로 삼았더니, 적이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형승】 안동은 도(道)의 웅번(雄藩)이다 이석형(李石亨)의 사청기(射廳記). 큰 강이 띠처럼 둘러 있다. 백문보(白文寶)의 금방기(金榜記)에, “무협(巫峽)이 왼쪽에 펼쳐져 있고, 성산(城山)이 오른쪽에 버티고 있으며, 큰 강은 띠처럼 둘러 있고, 물은 돌아서 호수를 만들고 있다.” 하였다. 물은 황지(黃池)로 흐르고, 산은 태백이 뛰어나다 무명씨(無名氏)의 백련사(白蓮寺) 침벽루기(枕碧樓記)에, “물은 황지로 빠져서 일만 구렁을 흡수하고, 산은 태백산(太白山)이 가장 뛰어나 뭇 봉우리를 통솔한다.” 하였다.
【산천】 청량산(淸涼山) 재산현(才山縣)의 서쪽에 있다. 하지산(下枝山) 다른 이름은 풍악(豐岳)인데, 풍산현(豐山縣)에 있다. 병산(甁山) 본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 고려 태조가 견훤과 더불어 여기에서 싸워 훤이 패주(敗走)할 때에 시랑(侍郞) 김악(金渥)을 포로로 잡았으며, 죽은 자가 8천 명을 넘었다. 문필산(文筆山) 다른 이름은 갈나산(葛那山)인데, 본부의 남쪽 23리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신라의 김생(金生)이 여기에서 글씨를 배웠으므로 산 이름을 문필산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 안축(安軸)의 시(詩)에, “신라 때의 김생은 글씨 쓰는 법이 신기하였는데, 산 집[山室]에서 글씨를 배우던 일이 이미 천년을 지났네.” 하였다. 태백산(太白山) 소천부곡(小川部曲)에 있다. 자세한 것은 강원도의 삼척부(三陟府)에 있다. 이이현(耳而峴) 임하현(臨河縣)에 있다. 두모현(豆毛峴) 부의 북쪽 35리에 있다. 모현(茅峴) 길안현(吉安縣)에 있다. 노산(盧山) 본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학가산(鶴駕山) 하가산(下柯山)이라고도 한다. 본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또 영천군(榮川郡) 편에 나온다. 천등산(天燈山) 부의 북쪽 28리에 있다. 치원봉(致遠峯) 청량산(淸涼山)에 있다. 최치원(崔致遠)이 여기에서 글을 읽었으므로 이름 지은 것이다. 와부탄(瓦釜灘) 부의 동쪽 3리에 있다. 진보현(眞寶縣)의 신한천(神漢川), 청송부(淸松府)의 남천(南川), 임하현의 금소천(琴召川)의 하류이며 견항진의 남쪽에서 합류한다. 귀령(龜嶺) 일직현(一直縣)에 있다. 견항진(犬項津) 부의 동쪽 3리에 있다. 물야탄의 하류이다. 물야탄(勿也灘) 부의 동쪽 11리에 있다. 요촌탄의 하류이다. 요촌탄(蓼村灘) 부의 동쪽 40리에 있다. 예안현(禮安縣)의 부진(浮津)의 하류이다. 독천(禿川)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근원이 의성현(義城縣)의 황산(黃山)에서 나와서 견항진의 하류에 들어간다. 금소천(琴召川) 임하현의 서쪽 5리에 있으며, 부(府)와의 거리는 동쪽으로 27리이다. 즉 청송부 관내 안덕현(安德縣) 서천(西川)의 하류로 와부탄의 상류에 들어간다. 여자지(女子池) 풍산현에 있다.『신증』 화산(花山) 하나는 부의 동쪽 14리에 있고, 하나는 풍산현의 남쪽 5리에 있다. 송관산(松官山) 내성현(奈城縣)의 남쪽 5리에 있다. 문수산(文殊山) 내성현의 북쪽에 있다. 송대풍혈(松臺風穴) 청량산에 있다. 석현(石峴) 일직현의 남쪽 1리에 있다. 고암현(古巖峴)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광탄(廣灘) 부의 동쪽 13리에 있다. 화천(花川) 풍산현의 화산(花山) 아래에 있다. 사천(斜川) 일직현의 앞에 있다. 망라담(網羅潭)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토산】 철(鐵)ㆍ인삼(人蔘)ㆍ은어[銀口魚]ㆍ잣[海松子]ㆍ설면(雪綿)ㆍ꿀(蜂蜜)ㆍ왕골[莞草]ㆍ적복령(赤茯苓)ㆍ신무애뱀[白花蛇], 자석(紫石) 독천(禿川)에서 나오는데, 벼루를 만들 수 있다. 송이[松蕈]ㆍ석이버섯[石蕈]ㆍ오미자(五味子)ㆍ지황(地黃).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9백 47척(尺), 높이가 8척이며, 안에 샘물 18군데와 도랑[渠] 1군데가 있다.
【봉수】 남산(南山) 봉수 다른 이름은 봉지산(烽枝山)이다. 부의 남쪽 14리에 있다. 동쪽으로 신석산 봉수에 호응하고, 남쪽으로는 일직현(一直縣) 감곡산(甘谷山) 봉수에 호응하며, 서쪽으로는 풍산현 소산 봉수에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개목산 봉수에 호응한다. 신석산(申石山) 봉수 부의 남쪽 26리에 있다. 동쪽으로 임하현 약산 봉수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남산 봉수에 호응한다. 약산(藥山) 봉수 임하현의 동쪽 16리에 있다. 동쪽으로 진보현(眞寶縣) 남각산(南角山) 봉수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신석산 봉수에 호응한다. 소산(所山) 봉수 풍산현의 남쪽 4리에 있다. 서쪽으로 예천군(醴泉郡) 서암산(西菴山) 봉수에 호응하고, 동쪽으로 남산 봉수에 호응한다. 당북산(堂北山) 봉수 내성현의 남쪽 3리에 있다. 동쪽으로 봉화현(奉化縣) 용점산(龍岾山) 봉수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영천군(榮川郡) 성내산(城內山) 봉수에 호응한다. 개목산(開目山) 봉수 부의 북쪽 39리에 있다. 남쪽으로 남산 봉수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예안현(禮安縣) 녹전산(祿轉山) 봉수에 호응한다. 감곡산(甘谷山) 봉수 일직현의 동쪽 9리에 있다. 남쪽으로 의성현 마산(馬山) 봉수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남산 봉수에 호응한다.
【누정】 관풍루(觀風樓) 부의 성안에 있다. ○ 김수온(金守溫)의 기(記)에, “조령(鳥嶺)의 남쪽에 웅대한 번진(藩鎭)과 큰 고을이 안개처럼 벌여 있고, 솥발처럼 병립하고 있으나 대도호부(大都護府)라는 칭호는 오직 영가부(永嘉府)만이 일컬어지고, 다른 고을은 참여하지 못한다. 무슨 까닭인가. 전조(前朝) 때에 공민왕(恭愍王)이 적의 침구(侵寇)를 피하여 남쪽으로 거둥하다가, 이 고을에 머무르면서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켜서, 싸워 이겨 경성(京城)을 수복하고 임금의 행차가 서울로 돌아갔다. 그 큰 계책이 여기에서 큰명[大命]을 정(定)하여 능히 다시 우리 동쪽 나라를 안전하게 하였으므로, 고을 이름을 안동(安東)이라고 내렸으며,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켜 영남(嶺南)의 모든 고을 중에서 우두머리가 되게 한 것이다. 이때부터 부의 이름난 성씨와 거대한 가문들이 중외(中外)에 빛났으며, 장수나 재상의 지위에 이르는 자가 어느 시대에나 끊이지 않았다. 그 인물과 토산물의 왕성함은 또 다른 고을이 비교할 수 없다. 객사(客舍)의 동쪽에 옛날 다섯 칸의 누(樓)가 있었는데, 이름을 덕민루(德民樓)라고 하였다. 신묘년에 횃불 맡은 사람이 실화(失火)하여 하루 저녁에 타서 재만 남게 되었다. 이듬해인 계사년에,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공은 목사(牧使)로서, 일선(一善) 김성경(金成慶)군은 통판(通判)으로서, 함께 부(府)의 일을 맡게 되었다. 손공이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서 폐단은 없어지고 이로운 것은 일어나며 백성들은 화합하고 시절은 풍년이 들었다. 부(府)의 부로(父老)들을 불러 말하기를, ‘아래 읍(邑)이나 작은 현(縣)에서도 오히려 누대(樓臺)가 있어서 왕명을 받들고 온 사람들을 오르게 하는데, 너희 부는 큰 고을로서 홀로 누 하나 없단 말인가.’ 하였다. 이에 고을에서 나이 많고 준걸(俊傑)한 이들이 목사의 말을 듣고 번갈아 찾아뵙고는 누 세우기를 계속 청하였다. 손공이 말하기를, ‘나를 번거롭게 하지 마시오. 수령들이 법령을 까다롭게 하고 부세(賦稅) 징수를 빈번하게 함으로 인하여, 평민이 산중으로 도피하여 중의 옷을 입고 있는 자가 많게 되었으니, 이 고을 안에도 반드시 중으로서 기와를 잘 굽는 자, 나무를 잘 다루는 자, 먹줄을 잡아 길고 짧음을 잘 잴 줄 아는 자들이 있을 것이오. 그 자들의 이름을 적어 오시오.’ 하였다. 이튿날, 기와 굽는 사람, 나무 다루는 사람, 길고 짧음을 재는 자 수십 명의 명단을 올렸다. 손공이 그들의 기능의 순서에 따라 그 일을 나누어 맡기니, 여러 공장(工匠)들이 일제히 분발하여 제각기 경쟁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나무를 벌채하여도 백성들은 알지 못하였으며, 재목을 운반하여도 백성들은 알지 못하였다. 흙을 두드려 차지게 빚고, 가마를 축조하여 기와를 구워도 백성들은 모두 알지 못하였다. 이에 객사의 대문 밖에 터를 정하고 누 5칸을 기공하였더니, 두어 달이 채 못 되어서 날아갈 듯이 아름답고 훌륭한 누각이 우뚝 솟아 서게 되었다. 그 일을 준공하였을 때에 손공이 여러 공장들에게 술을 대접하고 낙성식을 올렸다. 그때 마침 감사(監司) 김영유(金永濡) 공이 부에 들어왔다가 이 누에 올라서 두루 살피면서 서성거리니, 온 부중(府中)의 좋은 광경이 좌우로 펼쳐졌다. 감사가 손공에게 말하기를, ‘누는 이루어졌소. 이름은 또 불타버리고 남은[回祿 불맡은 귀신] 옛 이름을 습용(襲用)하려 하시오?’ 하니, 손공은 말하기를, ‘부에 누가 없어서 부내의 사람들이 민망하게 여기었는데, 이제 누가 이루어지고 큰 손님이 내림(來臨)하셨으니, 청하건대 관풍루(觀風樓)라 고쳐서 오늘의 상공(相公)의 아름다운 정치를 드러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김공이 말하기를, ‘나 때문에 관풍루라고 이름을 짓는 것은 자기의 칭찬을 하는 것 같은 혐의로운 데가 있소. 그러나 실상 세상에 널리 통용되는 이름이니 무슨 해로움이 있겠소.’ 하고, 드디어 그 현액(懸額)을 ‘관풍(觀風)’이라고 썼다. 무릇 누대(樓臺)ㆍ정사(亭榭)라는 것은 본래 정치하는 도리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 누대를 폐지하고 일으키고 하는 일에 있어서는, 폐지해야 하고 일으켜서는 안 될 것이 있으며, 일으켜야 하고 폐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리하여 관리의 정치를 잘하고 못한 것도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안동부는 평지에 자리잡아 수읍(首邑)을 정하고 또 자성(子城)을 둘러 쌓았기 때문에, 관청의 청사와 객사(客舍)의 집이 모두 위치가 낮고 막혔으므로 답답하다. 더운 때를 당하면 비록 목사나 통판(通判)일지라도 또한 시원함을 취할 길이 없었다. 혹 천지가 화로 속 같고 불 같은 해가 공중에서 타고 있을 때에, 봉명사신(奉命使臣)이 거마(車馬)를 쉬지 않고 달리느라면 길은 멀기만 하고, 물과 산의 험난한 곳을 드나들지만, 역사(驛舍)는 황폐하고 길에는 쉴 곳도 없어 땀은 비오듯 하고 티끌은 옷에 가득하여, 몸은 더욱 피로하고 호흡 또한 곤난할 것이다. 이러한 때에 말을 버리고 높은 누(樓)에 올라 옷깃을 헤치고 헌함에 서면, 맑은 바람이 가볍고 시원하게 불어와서 마치 날개가 돋혀서 하늘로 훨훨 날아오르는 것 같을 것이니, 번열(煩熱)과 숨막힘을 씻을 수 있고, 정신을 시원스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뜨거운 것을 잡고도 가서 씻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것은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누대(樓臺)와 정사(亭榭)가 정치하는 도리에는 무관한 것으로서 주군(州郡)에는 없어도 좋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이제 손공은 놀고 있는 자들을 사역하여 백성들은 부역(夫役)을 알지 못하였으며, 불탄 것을 다시 지었을 뿐이고 새로이 창건한 것이 아님에랴. 수령(守令) 가운데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서민들은 편안하여 예악(禮樂)이 있을 뿐, 꼭 하는 바가 없어도 교화(敎化)에 잠기는 것을 누릴 수 있게 되고, 감사(監司)로써 훌륭한 인물이 있으면 관하(管下)에 있는 관원들의 벼슬을 올려 주는 일, 내쫓는 일들이 공정하여 수령들의 횡포하고 지나치는 폐단이 끊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근심과 한탄이 없는 아름다운 상태는 옛날 한(漢) 나라의 문제(文帝)와 그의 아들 경제(景帝)의 시대에 겨우 보였을 뿐이며, 형옥(刑獄)과 송사(訟事)는 없어지고 칭송하는 소리만 일어나는 상태는, 다시 옛날 서주(西周)의 성대(盛代) 같은 것을 볼 수 없는 것일까. 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다. 홀로 수령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감사 또한 훌륭한 인재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감사 김공은 안동 김씨(安東金氏)로서 당대의 이름난 관원이 되어, 이 도에 감사로 부임하여 탐오(貪汚)한 자를 엄중하게 다스리니 아전들은 법을 두려워하여 부정부패한 자가 없고, 부세(賦稅)와 정사를 너그럽게 하니 백성들은 생업에 안정할 수 있어서 떠돌아다니며 이사해야 하는 괴로움이 없다. 죄형(罪刑)의 판결이 현명하여 감옥에는 미결로 오래 지체하는 죄수가 드물며, 감사 자신에 대한 추종(騶從)을 간이(簡易)하게 하고, 역전(驛傳)에는 살찐 말이 있다. 모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정사와 선인(善人)과 악인(惡人)을 구별하는 방법은 마련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영남의 70여 고을이 다 편안하게 살면서 생업을 즐기는 가운데에 있다. 다른 날 공이 조정에 돌아가서 공경(公卿)이 되었을 때에, 이 누(樓)가 큰 부(府)에 우뚝 솟아 남아 있으면, 마땅히, 옛날 주(周) 나라의 소공(召公)이 사랑[愛]을 남긴 남국(南國) 땅에 남은 감당(甘棠) 나무와 같이 백성들의 그 덕을 사모하는 대상이 될 것이다. 나의 4대조 판삼사(判三司) 손홍량(孫洪亮) 공이 정일품(正一品) 벼슬에서 물러나와 이 고을에 사니, 공민왕이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총애하였다. 그러니 나도 또한 이 고을 사람이다. 그런 까닭에 즐겁게 공의 어짊을 말하고, 인하여 뒤의 풍속을 관찰하는 자가 김공에게 짝할 만한 아름다운 정사를 하기 바라며, 그리고 또한 이 누에 이름을 걸게 되는 것을 다행하게 여긴다.” 하였다.
영호루(映湖樓) 부(府)의 남쪽 5리에 있다. ○ 공민왕이 남쪽으로 거둥하여 복주(福州)에 이르렀을 때에, 영호루에 나아가서 배를 타고 유람하여, 호수가에서 활을 쏘았는데, 안렴사(按廉使)가 임금에게 음식을 대접하니 구경하는 자가 담처럼 둘러 섰다. 어떤 이는 옷소매를 돌리어 눈물을 닦으며 탄식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참서(讖書)를 외우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홀연히 남쪽의 한 도적이 깊이 와우봉(臥牛峯)에 들어온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예전에 소[牛]가 크게 우니 용(龍)이 바다를 떠나 얕은 물에서 맑은 물결을 희롱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제 그 징험을 보는구나.” 하였다. ○ 백문보(白文寶)의 금방기(金榜記)에, “신축년 겨울 11월에 임금이 난(亂)을 피하여 가다가 복주에 이르렀다. 처음에 충주(忠州)ㆍ광주(廣州)로부터 조령(鳥嶺)을 넘으니, 관리들과 백성들이 난리에 당황하여 놀란 노루와 숨은 토끼처럼 되어서, 손발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였다. 비록 명령할지라도 걷잡을 수 없어서 임금이 마음으로 근심하였는데, 조령에 올라서 내려다보니 넓고 멀고 아득하여서 마치 천지가 가로놓인 것 같은 것이 경상도의 영역이었다. 영(嶺)으로부터 북쪽은 태백산(太白山)ㆍ소백산(小白山)이 웅장하게 솟아 있고, 그 남쪽에 구불구불 서린 것은 열이 넘는 주군(州郡)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복주는 거진(巨鎭)이다. 산은 높고 물은 맑으며 풍속은 예스럽고 백성들은 순박하다. 장군과 원수(元帥)의 기(旗)는 엇갈려 덮여 있고, 관면(冠冕)과 패옥(佩玉)의 차림은 서로 바라다보였다. 행궁(行宮)을 말끔히 정돈하여 임금의 행차를 인도하면서 태연하고 침착하여 여유가 있었다. 임금이 마음으로 기뻐하여 여기에 거가(車駕)를 멈추고, 장수에게 명하여 적(賊)을 치게 하였다. 이윽고 싸움에 이겨 경도(京都)를 수복하게 되자, 드디어 이 고을을 승격시켜 대도호부(大都護府)로 하고 조세(租稅)를 감면하였다. 하루는 고을의 영호루에 거둥하여 기쁜 마음을 시원스럽게 폈는데, 경도에 돌아간 뒤에도 멀리 생각함을 그치지 못하였다. 한가한 날에 친히 필연(筆硯)을 잡고 누(樓)의 현판(懸板)으로 할 큰 글씨 석 자를 써서 하사하여 그 누에 달게 하였다. 영호루는 호수를 굽어보고 있어서 기둥과 서까래, 대마루와 들보가 물속에 거꾸로 비쳐 그림자가 능란(凌亂)하다. 무협(巫峽)이 그 왼쪽에 펼쳐져 있고 성산(城山)이 그 오른쪽에 버티고 있다. 큰 강은 띠처럼 둘러 있고 물은 돌아서 호수를 만들고 있다. 무릇 물의 근원과 지류가 머리를 간방(艮方)에 두고 꼬리를 곤방(坤方)에 둔 것으로서 하늘에 있는 것을 은하수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복주의 글 잘하는 선비와 걸출한 인재가 가끔 이 정기를 타고 그 사이에 탄생한다. 대체로 해와 달이 형상을 드리우고 은하수가 문채를 이루는 것은 하늘의 아름다운 현상이다. 이 누가 은하수처럼 근원을 간방에 두고 꼬리를 곤방에 둔 강물을 누르고 섰으니, 하늘의 문채와도 같은 임금의 제자(題字)를 얻어 금벽(金碧)의 단청으로 새겨서 후세에 밝게 빛나게 함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임금의 덕의 밝은 빛이 이곳에 강림(降臨)하여, 몇 천 년을 두고 우러러보며 흠모하게 되었으니, 나라 일의 기틀에 불행함이 있었던 것이 도리어 누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 되었다.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옛날에 우리 충렬왕(忠烈王)은 비록 태평한 세상을 만났었으나, 오히려 동쪽 변두리에 일이 있어서 이 지방을 순행(巡幸)하다가 이 고을의 영은정(迎恩亭)에 행차하여 또한 귀한 제액(題額)을 하사하였으니 또한 정자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었다. 앞의 것과 뒤의 것이 빛나서 모범이 되고 해와 별처럼 밝아서 함께 한 고을의 영광과 광채가 된다. 아 거룩하도다. 이 누를 지은 것이 이미 오래이다. 금빛으로 새긴 현액의 자획은 하늘을 떠 받치는 기둥 같은데, 누의 크기는 그 현액과 걸맞지 않았다. 지정(至正) 무신년에 고을의 수령 신자전(申子展)군이 옛 규모를 고치니, 새가 날개를 펼친 듯한 자세와 꿩이 높이 나는 듯한 아름다운 채색으로, 바로 호수의 수면에 걸터앉게 되었다. 때로 누에 오르면 아침 해가 올라올 때나 저녁 달이 빛날 때에는, 황금 빛 현액과 광채를 다투는 것이, 곧 불빛 구름을 피워 올리며 용(龍)이 싸우는 듯한 광경이 갑자기 호심(湖心)에 변화를 일으킨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이 뛰고 혼백이 떨게 만들어서, 이 누에 오르내리는 것이 두려워지는 것만 같다. 진실로 바라보면 의젓하고 위엄이 있어서 두려워 침범할 수 없을 것 같다. 임금의 수택(手澤)만으로도 오히려 그러하니, 하물며 친히 몸소 임금의 덕화에 감화를 받은 사람임에랴. 봉익판전교(奉翊判典校) 권사복(權思復)군은 이 고을 사람으로 이미 그 누를 중신(重新)하여 그 현액을 걸고, 그 단서(端緖)의 기(記)를 나에게 청하였다. 내 비록 글을 잘하지 못하나 영원히 전하여질 훌륭한 일을 찬미하는데 이름을 싣는 것을 적이 기뻐하여 대충 누의 오랜 세월의 연혁을 서술하고, 뒷날에 있을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 같은 훌륭한 글을 기다리기로 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다른 날 강산의 유람을 나가서 다시 한번 이 누에 이르러 훌륭한 필적을 얻어 볼 수 있게 되면, 다시 절하고 시(詩)를 지어서 또한 나의 심정을 다하여 나의 평소의 뜻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찬(讚)과 그 서문(序文)에, “지정(至正) 신축년 겨울에 국가가 남으로 복주에 옮기고, 군사를 출동시켜 북벌하여 이듬해에 드디어 적(賊)을 경성(京城)에서 섬멸시켰다. 복주를 승격시켜 안동도대호부로 하였으니, 대체로 그 옛 칭호를 회복한 것이고 또 기쁨을 표시한 것이다. 병오년 겨울에 임금이 서연(書筵)에서 영호루(映湖樓)라는 석 자를 큰 글씨로 써서, 정순대부(正順大夫) 상호군(上護軍) 신(臣) 흥경(興慶)에게 명하여 왕지(王旨)를 전달하고, 봉익대부(奉翊大夫)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신 사복(思復)을 불러들여 면전에서 글씨를 주었다. 그때 안동도호부의 판관(判官) 조봉랑(朝奉郞) 신 자전(子展)이 아전들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누의 규모가 누차하여 임금이 하사할 현액(懸額)을 빛나게 할 수 없을까 걱정이다.’ 하고, 이에 기일을 정하여 더 넓히고 더욱 물에 가깝게 하니, 그 규모가 더욱 크고 시원하였다. 신 사복(思復)이 그 까닭을 신에게 자세히 말하고 또 기(記)를 청하였다. 신이 말하기를, ‘누(樓)의 기(記)를 쓰는 일은 비록 능(能)하지 못하나, 신은 홀로 느낀 바 있다. 임금이 전날 복주에 머무를 때에 일찍이 이 누에 거둥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신이 시신(侍臣)으로서 실제 수종(隨從)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경계하던 마음은 게을러지고 또 잊은 지 오래 되었다. 아, 임금께서 안동을 사랑하여 돌보심이 이에 이르렀으니, 신이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고루한 것을 잊고 절하며 머리를 조아려 찬(讚)을 짓는 바이다.’ 찬에 이르기를, ‘높고 밝은 저 운한(雲漢)을 성인(聖人)이 법칙으로 삼아서, 마음과 자획(字畫)이 한결같이 바르고 곧다. 붓이 손에서 움직이니 광채가 하늘로부터 이루어졌다. 신기하게 변하고 불가사의하게 화하여, 어째서 그렇게 되는가를 알지 못한다. 굴절생시(屈折生柴)하는 저 곤(困)하게 배우는 자들은, 엎드려 감탄하며 놀라서 비지땀을 흘린다. 이 안동(安東) 고을은 우리가 다시 일어난 곳이라 하여, 영호루(映湖樓)라는 큰 글씨 석자를 써 주셔서 거(莒)를 잊지 아니하는 뜻을 보였네. 햇빛은 그 가운데에 있고 용(龍)은 와서 둘렀도다. 위에도 하늘이요 아래에도 하늘이니 물이 비쳐 주었다네. 이 현액 때문에 풍경은 모습을 고치고, 산천은 수려함을 더한다. 부로(父老)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임금의 만세수(萬歲壽)를 축원한다. 편안한 때에나 위태한 때에나 근심을 생각하면 반드시 창성하리라. 복주의 사람들에게 사사로운 정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전하는 떳떳함이라네. 세상을 보전할 뿐만 아니라 또한 충성을 권(勸)함이라네. 신(臣)은 절하고 찬(讚)을 지어 신하들에게 고(告)하노라.’ 하였다.” 했다.
○ 정도전(鄭道傳)의 시(詩)에, “나는 용[飛龍]이 하늘에서 밝은 구슬을 희롱하니, 그 구슬 멀리 영가(永嘉) 고을 호수 위의 누(樓)에 떨어졌다. 밤에 구경할 때에도 촛불을 잡고 볼 까닭이 없나니, 신기한 광채가 1만 길이나 물가를 쏘아 비치네.” 하였다. ○ 고려 채홍철(蔡洪哲)의 시에, “요사이 바다로 산으로 많이 다녔으나, 티끌 세상 밖에 있는 것 같은 정신은 여기에 오니 더하여진다. 처음에는 꿈에 운우(雲雨)의 무협(巫峽)에 노니는 것 같더니, 점차로 몸이 그림 속의 집으로 들어가는 듯하구나. 남쪽 강의 가을 밤에는 1천 봉우리에 달빛 비치고, 북쪽 마을의 봄바람에는 1만 나무에 꽃이 피네. 비록 이 담담(淡淡)한 심정의 한가한 길 가는 자로도, 이 누에 오르니 마른 삭정이 같을 수는 없구나.” 하였다. ○ 고려 우탁(禹倬)의 시에, “영남에 만판 놀며 여러 해를 보냈건만, 이곳의 물과 산에 경치 더욱 좋은 것을 가장 사랑하네. 꽃다운 풀 우거진 나룻터에는 손[客]의 길이 나누어졌고, 푸른 버들 늘어진 둑 가에는 농부의 집이 있다. 바람이 고요하니 거울 같은 수면(水面)에는 연기가 그린 눈썹처럼 가로질러 비치고, 세월이 오래니 담 머리에는 이끼가 자랐구나. 비가 그친 사방 들에 격양가(擊壤歌) 들리는데, 앉아서 숲가에 차운 삭정이가 밀려온 것을 보노라.” 하였다. ○ 고려 조간(趙簡)의 시에, “이 누의 풍경은 사람을 애타게 함이 많아, 쌍계팔영(雙溪八詠)도 감히 더할 수 없으리. 깃발과 일산의 그림자는 초부(樵夫)와 목동(牧童)의 길에 엇갈리고, 피리와 거문고 소리는 아전과 백성들의 집에 떨어지네. 공중에 걸터앉은 처마가 훤하니 트여서 몸에 소름이 돋고, 물에 비치는 헌함이 높아서 눈에 아찔하게 현기증 인다. 옥도끼로 하늘 위의 광한전(廣寒殿)을 다듬어 이룬 것 같아서, 훨훨 나는 듯이 신선의 뗏목에 오른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였다. ○ 정포(鄭誧)의 시에, “말을 타고 총총히 두어 고을을 지나와서, 석양에 친구의 손을 잡고 다시 누에 오른다. 귀양은 왔을망정 물과 산이 좋은 것 싫지는 않고, 옛일은 가고 없는데 공연히 세월이 급박한 데 놀라네. 한쪽 벽만 비치는 희미한 등잔불 외로운 여관의 밤이요, 처마 곁의 성긴 나무에는 옛 동산이 가을에 잠겼어라. 이별한 뒤의 서로 생각하는 뜻을 알고자 하거든, 하늘가에 긴 강물이 곤곤히 흐르는 것을 보라.” 하였다. ○ 정자후(鄭子厚)의 시에, “이 누(樓)를 일으킨 시적(詩的)인 안목이 공력(功力)을 소모함이 많아, 달 도끼와 구름 날[月斧雲斤]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으리라. 스스로 횡취각(橫翠閣)에 등림(登臨)하였는가 의심하노니, 누가 나로 하여금 태청가(太淸家)에 날아 오르게 하였는가. 봄 강물의 푸르름은 포도주가 넘치는 듯 석양의 붉은 빛은 철쭉꽃이 만발한 듯. 지나가기를 기다리니 헌개(軒蓋)가 가까워 오는 것을 알겠구나. 나무 위에 때마침 까치가 우는 것을 보니.” 하였다. ○ 신천(辛蕆)의 시에, “이 누의 좋은 경치는 말을 많이 할 까닭이 없다. 좋은 것을 찾고 기이한 것을 더듬는 일은 나보다 더한 이는 없을 것이니, 백 리나 이어진 뽕나무의 그늘은 술집을 감춰 버리고, 사산(四山)에 가득한 소나무의 푸르름은 관가(官家)를 지키네. 비 내려 어두운 강가에는 풀이 하늘과 맞닿고, 안개 짙은 항구에는 꽃이 집 밖에 피어 있네. 다만 오르기만 하고 만약 묵묵(黙黙)할 뿐이라면, 시인(詩人)으로서 광채 없음이 삭정이와 같으리.” 하였다. ○ 전록생(田祿生)의 시에, “북으로 서울을 바라보니 첩첩히 봉우리들도 많아라. 누(樓)가 높으니 손[客]의 한(恨)이 더욱 더하여진다. 왕중선(王仲宣)은 부(賦)를 지어 우리 땅이 아니라 했고,강령(江令)은 돌아가기를 생각하였으나 집에 이르지 못하였네. 버들은 저혼자 시름 속의 실을 흔들고, 개나리는 난리 뒤에 처음으로 꽃을 피웠네. 만약 강물을 봄술[春酒]로 변하게 할 수 있다면, 가슴속의 찌꺼기와 삭정이를 시원히 씻으련만.”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동ㆍ남 지방의 많은 군현(郡縣)들을 고루 거쳐 왔더니, 영가(永嘉)의 지세와 경치의 뛰어남이 더욱 더한 것을 알겠구나. 읍의 위치는 가장 산천의 형세 좋은 곳을 자리잡았고, 인물은 장군이니 재상이니 하는 고귀한 사람들의 집이 수두룩하구나. 논밭에 풍년이 드니 곡식들은 풍요하고, 누대의 봄 꿈은 꾀꼬리와 꽃으로 둘러졌다. 모름지기 흐뭇이 취하여 오늘 저녁을 보내야겠다. 만리 길을 처음으로 바다의 뗏목을 타고 돌았으니.”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손[客]의 몸으로 높은 데 올라 굽어보니 느낌과 탄식이 많고, 게을리 노느라 귀밑머리에는 흰머리 늘어가네. 바닷가로 흘러 떠돌면서 공연히 고국을 그리워하고, 고향이라고 돌아 왔으나 내 집은 없다. 백 척(百尺)이나 높은 위태로운 난간은 푸른 공중에 떠 있고,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내리신 임금의 글씨는 황금빛 꽃처럼 찬란하네. 긴 내[川]는 멀리 은하수와 이어졌으니, 곧 멀리멀리 한 개의 뗏목을 띄우고 싶구나.” 하였다. ○ 고려 권사복(權思復)의 시에, “누대 있는 곳이라면 어디를 가나 좋은 경치를 많이 볼 수 있지만, 이 누에 오르면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더하여진다. 갈대 언덕 저편에는 서쪽ㆍ남쪽으로 길이 뚫렸고, 뽕나무 우거진 마을에는 서너 채씩 농가가 있다. 영호루(映湖樓) 세 글자의 어필(御筆)은 금빛으로 물에 비치고, 한 지방의 좋은 경치는 비단 위의 꽃처럼 광채를 더한다. 어릴 때에 강가의 버들을 잡아 꺾었더니, 노쇠하여 돌아와도 그 버들은 아직 삭정이가 되지는 않았네.” 하였다. ○ 이원(李原)의 시에, “금년에 또 다시 영남 유람 길을 떠나, 남쪽 고을들을 두루 지나서 복주에 이르렀네. 땅이 후미지니 사람들이 검소를 숭상함이 자랑할 만하고, 정자(亭子)가 한가하여 손의 눈동자가 경치에 굳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산천이 어찌 흥망을 따라 고쳐지랴. 바람과 달은 응당 왼쪽에서나 오른쪽에서나 자유롭게 거둘 수 있으리라. 반나절을 누에 올라 굽어보니 가슴이 시원하여, 돌아가려다 가지 않고 거듭 머물러 있다네.” 하였다. ○ 조효문(曹孝門)의 시에, “영남의 아름답고 고운 경치는 이미 많지 않은데, 지형과 경치 좋기는 화산(花山)이 백 배나 더하다. 꽃다운 풀과 맑은 냇물에 나그네 길 나누어지고, 푸른 버들 긴 대는 인가를 가린다. 호심(湖心)에 날이 따뜻하니 물고기가 물결을 불고, 담 모서리에 바람이 잔잔하니 제비가 꽃을 찬다. 남으로 뛰어가서 북으로 달리는 일을 어느 때에 마칠 것인가. 영주(瀛洲)에서 장건(張騫)의 뗏목을 묻고 싶구나.” 하였다. ○ 최수(崔脩)의 시에, “강가의 누(樓)에 봄이 가득하여 경치가 많으니, 시인의 심정과 흥취는 전보다 더하구나. 온 성중의 복숭아와 오얏꽃은 반안(潘安) 고을과 같고, 양쪽 언덕의 동산과 못은 습씨(習氏)의 집과 같다. 목은(牧隱)의 새 글은 구슬이 달에 우는 것 같고,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고운 글귀는 붓에서 꽃이 피는 것 같다.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란하던 지나간 일을 구태여 물어서 무엇하랴. 늙은 나무에 조수(潮水)가 침노하니 누은 채 뗏목이 되었구나.”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기(記)에, “영호루(映湖樓)는 영가(永嘉)의 이름난 누이다. 그 강과 산의 뛰어나고 큰 모양은 비록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에는 양보해야 할지도 모르나, 같이 낙동강(洛東江)의 언덕에 버티고 선 것으로 상산(商山)에 있는 관수루(觀水樓), 일선(一善)에 있는 월파정(月波亭)은 이 누와 더불어 갑을(甲乙)을 다툴 수 없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을 피하여 남쪽으로 달아나다가 이 고을에서 거가(車駕)를 멈추고 이 누에서 노닐며 즐기다가, 환도(還都)한 뒤에 서연(書筵)에 납시어 손수 누의 현액(懸額)으로 큰 글씨 석 자를 써서 하사하였다. 이 고을 사람인 통판(通判) 신자전(申子展)이 누의 제도를 더 크게 하여 현액을 걸었는데, 지금까지 지붕과 마룻대 사이에 빛나고 있다. 이것은 촉석루나 영남루에는 없는 것이다. 자전의 일한 것이 이제 백 년이 넘는다. 그 사이의 수령들이 어찌 그 기둥과 서까래와 마룻장과 난간의 썩고 흔들리는 것과, 지붕의 기와와 계단의 벽돌 떨어진 것, 뚫어진 것을 수리함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같지 않다. 인사(人事)를 곡진(曲盡)하게 닦는 체하는 자는 윗사람에게 뇌물을 바치며 문안을 드리기에 급하고, 한갓 규모만 지키는 자는 장부와 문서, 회계 때문에 겨를이 없다. 그러니 누가 황폐하고 퇴락한 것을 수리하여, 나의 저축한 재용(財用)을 소비하기를 누가 달갑게 여기겠는가. 누가 날로 무너지고 헐어지는 것은 이상할 것 없다. 나의 동년(同年)인 제안(齊安) 김질(金耋)이 어사중승(御使中丞)으로 있다가 이 고을의 수령으로 오더니, 두어 해가 다 못 되어서 정치는 통창(通暢)하고 사람들은 화합하며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또 토지와 노비에 대한 소송은 온 도내의 사람들이 감사(監司)에게 진정서(陣情書)를 내어 김후(金侯)에게 가서 판결 받기를 원하였다. 후가 매양 양편을 판결할 때에는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신중히 재량(裁量)하여 결정하니, 승소한 자도 패소한 자도 다 만족해 하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판결료로 받은 돈과 베가 창고에 차고 넘쳤다. 후가 이에 아전과 백성들에게 의논하여, 이 누를 고쳐 짓기로 하였다. 드디어 무신년 3월 어느 날을 기(期)하여 일 없이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이방(吏房)과 호장(戶長)을 윤번(輪番)으로 일보게 하였다. 터는 옛것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면적의 척수(尺數)는 자못 더하고 덜한 것이 있다. 그 높이와 넓이는 종래의 것보다 3분의 1일 더하였으며, 그 붉고 희게 장식하는 것과 금빛을 올린 현액은 또한 빛나고 밝아서 모양을 바꾸었다. 겨우 두어 달을 지나서 그 공사가 이미 끝나니, 고을 백성들은 늙은이나 어린이나 모두 쳐다보며 감탄하여 다 신(神)이라고 하였다. 이듬해 봄에 김후(金侯)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기술(記述)함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나는 스스로 헤아리지 아니하고 속으로 담암(淡菴)ㆍ목은(牧隱) 두 노선생과 더불어 그 사이에 이름을 나란히 쓰게 된 것을 기뻐하여, 드디어 붓을 잡고 감탄하며 다음과 같이 쓴다. 김후의 정사함이 청렴하고 공평하며 까다롭지 아니하고, 움직이는데 법도로써 한다. 그 인사(人事)를 곡진하게 하는 체하는 자가 개돼지처럼 비열하게 할 뿐 아니며, 그 한갓 규모만을 지키는 자가 종이나 하인처럼 굴 뿐 아닌 데에 비교한다면, 김후는 아전과 백성들이 사랑하고 공경하여 공수(龔遂)와 황패(黃霸)를 천백 년 뒤에서 다시 보는 것 같으니, 그가 누(樓) 하나를 위하여 공(功)을 일으키는 것이야 여유가 있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고래로부터 순후한 풍속을 일컬음이 이 고을만한 데가 없으니 그 백성은 부리기가 쉬울 것이다. 하물며 이 누는 편안히 놀기 위한 것이 아니며, 후세(後世)의 이름을 위한 것도 아니다. 다만 옛 법을 떨어뜨리지 않는 데에 그친 것이겠는가. 문득 내가 더욱 느끼는 바가 있다. 옛날 성화(成化) 초년에 나는 몸이 군(軍) 관계의 직무에 소속되어, 울산(蔚山)의 융막(戎幕)에 종사한 것이 모두 2주년이었는데, 일찍이 일이 있어 이 고을을 왕래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기만 하면 반드시 이 누에 올라서 어슬렁거려 노니며 조망(眺望)하였는데 그 동쪽 30리는 바로 청부(靑鳧 청송(靑松)) 땅이다. 사록(沙麓)의 상서로운 구름이 왕성하게 하늘에 이어져 있으니, 곧 주실(周室)의 유태(有邰)의 경사(慶事)와 더불어 그 장구(長久)함을 같이 하리라. 그 북쪽 10리는 곧 병산(甁山)이다. 역적 견훤의 1천 군사가 험조(險阻)한 곳을 점거하고 있었으나, 드디어 무너져 달아나게 되고 거짓 장수는 머리를 바쳤다. 왕씨(王氏)의 의기(義氣)가 동남(東南)에 크게 떨치게 된 것은 이 싸움이 조짐이 된 것이다. 서쪽으로 풍악(豐岳)을 바라보며, 원봉(元逢)이 먼저는 귀순(歸順)하고 뒤에는 배반하여 여섯 태사(太師)와 더불어 공명(功名)을 누리지 못한 것을 슬퍼한다. 남쪽으로 갈나산(葛那山)을 바라보니 푸른 봉우리가 하늘을 떠받쳤는데, 그 연기와 구름과 초목이 완연히 김생(金生)이 글씨 배울 때에 붓을 휘두르고 먹을 뿌리던 남은 기세를 띠고 있는 것 같다. 왔다갔다하는 것에 게을러지면 반드시 배를 띄우고 노[棹]에 맡겨서, 만(灣) 안으로 굽어 나온 육지와 굴곡진 물가를 거슬러 올라가서 흘러 내려가곤 하다가, 혹은 밤중에 이르러서야 흥(興)이 다하여 돌아오고 하였다. 모든 누의 좋은 경치는 왼쪽에서나 오른쪽에서나 만날 수 있어서 얻은 바가 많았었다. 이제 이미 20여 년이 지나갔으나 오히려 잊을 수 없는 생각이 가슴속을 오락가락한다. 혹이나 김후의 임기가 차기 전에 나로 하여금 남쪽으로 돌아올 계획을 성취하게 한다면, 곧 마땅히 하인 한 사람, 말 한 필의 간편한 차림으로 다시 이 호수 위에 노닐어, 후(侯)와 더불어 누에 올라 옛일을 이야기하며, 또 시(詩)를 지어 고을 백성들의 좋아하는 칭송에 이을[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모은루(慕恩樓)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세조(世祖) 때에 부사(府使) 한치의(韓致義)가 세우고, 권반(權攀)이 명명하고 기(記)를 지었다. 향사당(鄕射堂) 부의 성(城) 서쪽에 있다.
사청(射廳) 부의 성내에 있다. ○ 이석형(李石亨)의 기(記)에, “지금 임금의 즉위 13년에, 나는 팔도체찰사(八道體察使)로서 경기ㆍ충청ㆍ전라의 각 도를 순력(巡歷)하고, 다음으로 본도(本道)에 이르렀다. 본도의 지형과 좋은 경치는 다른 도에 비하여 가장 뛰어나다. 그리고 이 부(府)는 도의 웅번(雄藩)으로서, 또한 1ㆍ2위의 아래에 있지 않다. 객관에 내린 이튿날 부사(府使)와 통판(通判)이 청하기를, ‘본부는 주진(主鎭)이 되어 있으니 열무(閱武)와 습사(習射)에 사용할 장소가 없을 수 없으므로, 남문(南門) 안에 참루(塹壘)를 쌓아서 터를 만들고 한 채의 집을 세웠는데, 한가운데에 2칸을 세우고 좌우쪽에 각기 날개를 붙였으니, 땅은 시원하고 처마는 비어서 활쏘는 일에 편의(便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청(射廳)이라고 하고, 전월(前月)부터 시작하여 이달 초에 일을 마쳤습니다. 청(廳)이 처음 낙성되고 그대가 또 마침 왔으니 다행히 경개(梗槪)를 기술(記述)하는 일을 사양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내가 생각하여보니, 풍경을 구경하고 즐기기 위하여 누대 짓기를 좋아하는 이가 많다. 어찌하여 그대는 그러하지 아니하고 홀로 활 쏘는 일에 유의하였을까. 활 쏜다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다. 그런 까닭에 활 쏘는 것으로써 그 사람의 덕행(德行)을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공자(孔子)가 확상포(矍相圃)에서 활을 쏘니, 구경하는 자가 담처럼 둘러섰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군자는 다투는 일이 없으나 반드시 활 쏘는 일에서는 다투느니, 서로 읍(揖)하고 사양하여 오르고 내려와서 마시나니, 그 다투는 것은 군자의 다툼이다.’ 하였다. 활 쏜다는 것이 일에 있어서 진실로 이와 같이 중요한 것이니, 그대가 취하는 바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짝에게 읍(揖)하고 서로 사양하여 그 의식을 절도 있게 하니, 예(禮)가 여기에서 서게 되고, 벌주(罰酒)의 잔을 들어 서서 마시어 그 벌(罰)을 밝히니, 의(義)가 여기에서 시행된다. 예(禮)가 이미 바로 서고 의(義)가 이미 시행된다면, 비록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일일지라도 또한 이에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한 고을임에랴. 생각하건대 영재(鈴齋) 관아(官衙)에 날이 길고 소송하는 뜰에는 사람이 드물 때에, 책상을 치우고 헌함에서 내려와 술을 준비하고 과녁을 마련하여 편안하고 한가롭게 활쏘기를 즐기다면, 또한 한때의 기상을 보기에 넉넉할 것이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긴장(緊張)하기만 하고 늦추지 아니함은 문왕ㆍ무왕도 능히 하지 못하고, 늦추기만 하고 긴장하지 아니함은 문왕ㆍ무왕도 하지 않는다. 한 번 긴장하고 한 번 늦추는 것은 문왕ㆍ무왕의 도(道)이다.’ 하였으니 나도 그대에게 또한 이것을 기대한다. 만약 정사는 게을리 버려 두고 한갓 활 쏘는 것만을 일삼으면서 말하기를, ‘활쏘기는 남자가 할 일이다.’ 한다면 이것은 나나 그대가 취할 바 아닌 것이다. 부사 한치의(韓致義)군은 양절공(襄節公)의 둘째 아들이다. 백성을 안무(安撫)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민첩하여, 선군(先君)의 풍모가 있다. 그런 까닭에 내 그를 위하여 즐겨 기(記)를 쓰고, 이어서 시(詩)를 짓는다. ‘처음으로 새 집[新閣]에 오르니 하늘에 노니는 것 같아, 이것이 남쪽 지방의 첫째 고을임을 알겠다. 멀고 가까운 강과 산은 지맥이 웅장하고, 아침 저녁의 구름과 비는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한다. 활 쏘는 데는 다투어 버들잎을 뚫으며 대적할 자 없음을 자랑하고, 취해서 금잔을 기울이며 무르익도록 거두지 아니한다. 이름난 지역을 간 것이 지금까지 매우 많았지만, 풍경에 빠져 이곳에 오래도록 머무르네.’ 하였다.
영춘정(迎春亭)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옛 이름은 천재정(千載亭)이다. 영락(永樂) 18(1420)년에 부사(府使) 최관(崔關)이 천태종(天台宗)의 중 의호(義湖)로 하여금 시주(施主)를 모아서 짓게 하였다. 매년 입춘(立春) 날에는 제수를 차리고 여기에서 아침 해를 맞이한다. 영은정(迎恩亭)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일찍이 여기에 올랐다가 현액(懸額)을 제명(題名)하였다.『신증』 망호루(望湖樓) 객관의 동쪽에 있다. 부사 박호겸(朴好謙)이 세운 것이다.
삼귀정(三龜亭) 풍산현(豐山縣)의 서쪽 6리에 있다. ○ 성현(成俔)의 기(記)에, “상사(上舍) 김세경(金世卿) 씨가 자기 고향인 풍산현 삼귀정의 상황으로써 나에게 기(記)를 요구하였다. 삼가 살펴보니 풍산은 안동부(安東府)의 속현이다. 서쪽 5리 남짓한 곳에 마을이 있는데 금산촌(金山村)이라고 하고, 그 동쪽 20보(步) 쯤에 봉우리가 있는데 동오(東吳)라고 한다. 그 높이가 겨우 60길[丈]인데 정자는 그 봉우리의 머리에 걸터앉았다. 동쪽ㆍ서쪽ㆍ남쪽은 모두 큰 들인데 그 지세가 시원하게 틔여서 조망(眺望)이 끝이 없다. 정자의 남쪽에는 곡강(曲江)이라고 하는 큰 내가 있는데, 곧 낙동강(洛東江)이다. 그리고 마라(馬螺)라는 못[澤]이 있는데, 못 위에 절벽이 힘차게 솟아 높이가 만길[萬丈]은 될 것이다. 강 위에는 긴 수풀이 잇따라 10리에 뻗쳤다. 정자의 북쪽에도 또 산이 있는데, 학가산(鶴駕山)이라고 한다. 쌍계(雙溪)가 이 산 사이에서 나와서 낙동강으로 들어가며, 그 물이 합수(合水)하는 곳이 병담(屛潭)이다. 혹은 화천(花川)이라고도 한다. 그 산의 봉우리에 또 석벽이 있는데 천 길이 넘으며, 병벽(屛壁)이라고도 한다. 쌍계의 북쪽에는 기묘한 바위가 있는데 붕암(鵬巖)이라고 한다. 시내 양쪽 가에는 밤나무 천여 그루가 있어서 층층의 푸르름이 어지럽게 펴지고 있으며, 정자 아래에는 벼 논과 보리밭이 있어서 봄이면 푸른 싹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누런 구름 같은 벼가 물결친다. 진실로 뛰어나게 경치 좋은 곳이다. 화산(花山)은 김씨(金氏)의 관향(貫鄕)이다. 김씨는 우리 나라의 큰 벌족(閥族)으로서, 그의 외조(外祖) 권 상국(權相國) 제평공(齊平公)은 조정에 높은 명망이 있었다. 권씨(權氏)는 곧 그의 따님인데, 나이가 88세이다. 그의 아들 영전(永銓)ㆍ영추(永錘)ㆍ영철(永鐵) 등이 다 근읍(近邑)의 수령이 되어서 봉양을 지극히 하며, 또 이 정자를 지어 아침저녁으로 어머니의 놀고 쉬는 곳으로 하였다. 정자에 돌 세 개가 있는데 형상이 거북이 엎드린 것 같다. 그래서 삼귀정(三龜亭)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매양 좋은 때와 길(吉)한 날을 만나면 어머니의 가마를 붙들고 정자에 올라가서, 노래자(老萊子) 같은 채색 옷들이 앞뒤에 빛나게 비친다. 뜰에 가득한 자손들이 빽빽하게 늘어서서 모시니, 어머니는 엿[飴]을 머금고 즐거워한다. 그 즐거움을 어찌 이루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세상 사람은 집이 있으나 좋은 경치를 얻지 못하며, 좋은 경치는 있으나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지금 김씨 집안은 땅은 좋은 곳을 얻고, 사람은 어짊을 얻었으며, 어버이는 또 그 장수(長壽)함을 얻었으니, 여러 가지 아름다움이 고루 갖추어졌다. 어찌 선(善)을 쌓고 경사(慶事)를 기른 소치(所致)가 아니겠는가. 생물의 수명은 거북만큼 긴 것이 없고, 물건의 견고함은 돌만한 것이 없다. 자식은 누구나 어버이의 장수가 거북처럼 길고 돌처럼 견고하기를 원한다. 이제로부터 이후로 증손(曾孫)ㆍ현손(玄孫)에 이르고, 증손ㆍ현손으로부터 잉손(仍孫 7대 손자)ㆍ운손(雲孫 8대 손자)의 먼 후손에 이르기까지, 그들로 하여금 각각 자기의 어버이 섬기기를 지금 하는 것처럼 하게 하여 대대로 바꾸지 않는다면, 곧 고을은 장수하는 고을이 되고 사람은 장수하는 백성이 되어서, 마땅히 청사(靑史)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 것이다. 나 같은 자는 비록 조그마한 고향이 있기는 하지만 명리(名利)의 고삐에 얽매어져서 퇴로(退老)할 방법이 없으며, 또 영근(靈根)이 이미 멀어져서 부모 모두 상사가 많았으니, 비록 오정(五鼎)의 영화가 있어 어버이의 봉양을 위하여 쌀을 져 온 자로(子路)와 같은 일을 하고자 하여도 마침내 할 수 없으니, 더욱 김씨의 여러 어진 형제가 능히 그의 어버이를 봉양하여 그를 즐겁게 하는 것을 부러워한다.” 하였다.
환수정(環水亭) 내성현(奈城縣)의 서쪽에 있다. 귀래정(歸來亭) 부의 동쪽 3리에 있다. 유수(留守) 이굉(李硡)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서 와부탄(瓦釜灘) 위에 정자를 지었다. ○ 이우(李堣)의 시에, “인끈[印紱]을 풀어놓고 일찍 돌아와서, 두 물이 나누이는 곳에 정자를 지었네. 내와 산은 주인이 있는 것을 알겠고, 갈매기와 백로는 무리를 짓는구나. 차조가 익으니 먼저 술 빚는 데에 쓰고, 마음이 한가로우니 구름으로 화(化)하려 하네. 은거하며 이곳에서 늙으려 할 뿐 임금의 부름을 받으려는 것은 아니라네.” 하였다. ○ 더듬어 천년의 비경(祕境)을 깨뜨리고, 맑고 새롭게 위에 의거하여 노닌다. 동쪽에는 두 갈래의 물이 와서 합하고, 서쪽으로는 긴 한 줄기 숲을 안았다네. 안개에 가렸을 땐 절인가 하였는데, 환하게 개이자 호수 위의 누(樓)라네. 오두(遨頭)가 가을에 농사를 살피다가, 여기에 이르러서 오래 머무르네.
【학교】 향교(鄕校) 부의 성(城) 북쪽에 있다. 누(樓)가 있다.
【역원】 안기역(安奇驛) 부의 북쪽 3리에 있다. ○ 찰방(察訪)을 둔다. 본도(本道)에는 속역(屬驛)이 10개소가 있는데, 철파(鐵破)ㆍ청로(靑路)ㆍ운산(雲山)ㆍ금소(琴召)ㆍ송제(松蹄)ㆍ청운(靑雲)ㆍ문거(文居)ㆍ화목(和睦)ㆍ각산(角山)ㆍ영양(寧陽)이다. ○ 찰방(察訪) 1인. 옹천역(甕泉驛) 부의 북쪽 34리에 있다.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말 타고 가는 앞에 보이는 풍경은 손의 심정을 괴롭게 하여, 시내와 산의 경치는 가는 곳마다 그림 같구나. 시(詩)를 외우며 천천히 우거진 풀 사이 길을 가노라니 홀연히 한 나무 매화가 있어 눈부시네.” 하였다. 금소역(琴召驛) 금소천(琴召川)의 북쪽 언덕에 있다. 송제역(松蹄驛) 임하현(臨河縣)에 있다. 부(府)와의 거리는 76리이다. 안교역(安郊驛) 풍산현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37리이다. 운산역(雲山驛) 일직현(一直縣)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33리이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운산역 주변에 석양이 비끼는데, 시냇가의 그윽한 꽃은 말을 둘러 싸고 향기를 피우네. 들꿩이 사춘(思春)하는 마음을 갖고 스스로 응하기를 꾀하니, 수풀을 사이에 두고 멀리 애여장(艾如張)이 보이네.” 하였다. 유동역(幽洞驛) 감천현(甘泉縣)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1백 13리이다. 관음원(觀音院)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소을마원(所乙麽院) 부의 동쪽 12리에 있다. 관원(館院) 부의 남쪽 10리에 있다. 독천원(禿川院) 독천(禿川)의 언덕에 있다. 자제원(慈濟院) 부의 서쪽 2리에 있다. 영추원(迎秋院) 부의 서쪽 12리에 있다. 도솔원(兜率院)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연비원(燕飛院) 부의 북쪽 12리에 있다. 낙목원(落木院) 부의 북쪽 24리에 있다. 비사원(飛沙院) 부의 북쪽 3리에 있다. 두모원(豆毛院) 두모현(豆毛峴) 아래에 있다. 오리원(吾里院) 부의 북쪽 21리에 있다. 망지원(望至院) 임하현(臨河縣)의 동쪽 10리에 있다. 신읍곡원(申邑谷院) 임하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보제원(普濟院) 임하현의 서쪽 1리에 있다. 가라연원(加羅淵院) 소천부곡(小川部曲)의 남쪽 2리에 있다. 감마원(甘亇院) 풍산현(豐山縣)의 서쪽 17리에 있다. 양재원(楊才院) 감천현(甘泉縣)의 남쪽 1리에 있다. 귀모원(歸毛院) 감천현의 서쪽 8리에 있다. 모현원(茅峴院) 모현 아래에 있다.
【불우】 백련사(白蓮寺) 노산(盧山)에 있으며, 침벽루(枕碧樓)가 있다. ○ 권한공(權漢功)의 시에, “10년 동안 글 읽던 곳을, 포의(布衣)로 이제 다시 놀러 왔네. 긴 소나무는 옛 길에 그늘을 지우고, 어지러운 돌들은 차가운 냇물에 씻기우며 있다. 산촌에 하루가 저무니, 동부(洞府)엔 봄빛이 그윽하기만. 어느 때나 천병만마(千兵萬馬)를 거느리고, 한 번 웃으며 강가의 누(樓)에 오를 것인가.” 하였다. 임하사(臨河寺) 부의 서쪽에 있다. 법림사(法林寺) 성 남쪽에 있다. 법룡사(法龍寺) 성 서쪽에 있다. 청량사(淸涼寺) 청량산에 있다. 개목사(開目寺) 개목산(開目山)에 있다. 법흥사(法興寺) 부의 동쪽에 있다. ○ 박효수(朴孝修)의 시에, “이 절에 오르면 황홀하여 공중에 있는 것 같으니, 열두 봉우리들이 서로 등지기도 하고 마주 보기도 하네. 들 비[野雨]는 빛이 먹처럼 짙어서 모든 자취를 검게 덮어 버리고, 호수에 날이 개니 가늘게 밝은 자태를 희롱한다. 먼 마을의 단풍 든 나무에는 저녁볕이 머무르고, 높은 산 차운 소나무에는 가을 안개 물러간다. 다른 날 임충의 수레 아래에서 이 누(樓)를 생각하게 된다면, 하루 밤에 남쪽 꿈을 두 번 꾼들 무엇이 싫으랴.” 하였다.
【사묘】 사직단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부의 동쪽 6리에 있다. 여단 부의 북쪽에 있다.
【총묘】 김선평묘(金宣平墓) 부의 서쪽 고태장리(古苔莊里)에 있다. 장길묘(張吉墓) 부의 서쪽 성곡리(城谷里)에 있다. 권행묘(權幸墓) 부의 서쪽 본파곡리(本破谷里)에 있다.
【고적】 일계현(日谿縣) 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본래는 열혜현(熱兮縣)이니 혹은 이혜(泥兮)라고 한다. 신라의 경덕왕(景德王)이 일계(日谿)라고 고치고 고창(古昌)에 예속시켰다. 지금은 어디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요촌부곡(蓼村部曲) 부의 동쪽 35리에 있다. 하양부곡(河壤部曲)ㆍ신양부곡(新陽部曲) 풍산현에 있다. 소라부곡(召羅部曲) 춘양현(春陽縣)에 있다. 봉화현(奉化縣)의 동촌(東村)에 넘어 들어가 있다. 토곡부곡(吐谷部曲) 내성현(奈城縣)의 북쪽에 있다. 청량산고성(淸涼山古城) 돌로 쌓았다. 둘레가 1천 3백 50척이다. 안에 우물 7개소, 시내[溪] 2개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명환】 고려 유석(庾碩) 고종(高宗) 때에 이 고을의 부사(副使)가 되니 온 고을 백성들이 부모같이 사랑하며 신명(神明)같이 공경하였다. 그때의 판관(判官) 신저(申著)는 본래 탐오(貪汚)한 사람이므로 석(碩)이 그와 더불어 함께 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날마다 선비들과 더불어 글 짓고 시 읊으며 지내니 저(著)가 분하게 여겨 최이(崔怡)에게 고소(告訴)하여 석을 나주(羅州)의 암타도(巖墮島)에 귀양보내게 하였다. 장차 떠나가려 하니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길을 막고 소리내어 울며 말하기를, “하늘이여, 우리 유공(庾公)이 무슨 죄가 있단 말입니까. 공이 가시면 우리들은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하고 옷을 붙잡고 가지 못하게 하더니 압송하는 별초(別抄)가 소리쳐 꾸짖어 길을 열 수 있었다. 아내와 아들ㆍ딸들을 데리고 가는데, 사유(私有)의 말이 다만 세 필 뿐이어서 어떤 이는 도보로 걸어 가는 이가 있었다. 읍 사람들이 하루 더 머무르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아니하니 말과 하인을 내어서 호송하려 하였다. 그의 아내가 사양하여 말하기를, “가장이 귀양을 가는 길이니 처자는 다 죄인입니다. 어찌 하인과 말을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굳이 청하였으나 끝까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최재(崔宰) 충목왕(忠穆王) 갑오년에 이 고을의 수령이 되었다. 민정(民情)을 살피고 규약(規約)을 지키었다. 간 뒤에도 백성들이 그를 생각하였다. 추적(秋適) 이 고을의 서기(書記)가 되었다. 박유저(朴惟氐) 이 고을의 수령이 되었다. 스스로 자기의 정사하는 것이 유석(庾碩)에게 못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아전에게 묻기를, “백성들이 나를 유사군(庾使君)과 비교하여 어떻다 하느냐.” 하니 아전이 대답하기를, “백성들이 유사군을 칭찬하고는 잠시 뒤에 수령님도 말합니다.” 하였다. 유저가 부끄러워하고 심복(心服)하였다. 이진(李瑱) 부사가 되어 민폐(民弊)를 제거하고 학교를 일으키는 것으로써 임무를 삼았다. 윤해(尹侅) 목사가 되었다. 처리하는 것이 법도가 있어서 백성들이 그의 혜택을 입었다.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난할 때에 수행하였다. 서울이 수복된 뒤에 이등공신(二等功臣)으로 녹훈(錄勳)되었다. 이인복(李仁復) 사록(司錄)이 되었다. 이곡(李穀) 사록참군(司錄參軍)으로 있었다. 정운경(鄭云敬) 판관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고을의 아전 권원(權援)이 일찍이 운경과 더불어 같이 향학(鄕學)에서 공부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뵈옵기를 청하니 운경이 불러들여 함께 술을 마시고 말하기를, “지금 자네와 더불어 술을 마시는 것은 옛정을 잊지 않기 때문이네. 내일이라도 범법(犯法)하는 일이 있으면 아마 판관(判官)이 자네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하였다. 이보림(李寶林) 부사(府使)가 되었을 때에 정치를 가장 잘 하였다고 하여 대사헌(大司憲)에 재배(除拜)되었다. 김봉환(金鳳還) 대사성(大司成)으로 있다가 목사가 되었다. 공민왕이 피란와서 여러 달을 이 고을에 머무를 때에 봉환이 힘을 다하여 대접하였다. 이 일로써 주(州)를 승격시켜 대도호부로 하였으며, 임금이 환도(還都)하여서 교서(敎書)를 내려 표창하였다. 박전지(朴全之) 나이 어리면서 벼슬이 높다고 하여 소장(疏章)을 올려 사임하고 나와서 이 고을의 수령이 되었다. 임금이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불러서 전중윤(殿中尹)에 임명하였다. 조운흘(趙云仡) 공민왕 때에 이 고을 서기(書記)가 되었다.본조 정진(鄭津) 판부사(判府事)가 되었다. 최관(崔關)ㆍ권담(權湛)ㆍ김담(金淡)ㆍ손소(孫昭) 모두 부사(府使)를 지냈다. 안초(安迢) 정치를 가장 잘 하였다고 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되고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다. 박시형(朴始亨)ㆍ김극검(金克儉) 모두 부사(府使)를 지냈다.『신증』 이우(李堣).
【인물】 고려 권행(權幸) 본성은 김씨(金氏)니 신라의 대성(大姓)이다. 신라의 말기에 고창 군수(古昌郡守)로 있었다. 그때에 견훤(甄萱)이 신라에 쳐들어와서 왕을 시해(弑害)하거늘, 행이 여러 사람들과 모의하여 말하기를, “견훤은, 사람의 도리로서 같이 한 하늘 밑에 살 수 없는 원수이다. 어찌 고려의 왕공(王公)에게 귀순하여 우리의 치욕을 씻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고려에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가 기뻐하여 말하기를, “행은 능히 일의 기틀을 밝게 살피고 권도(權道)를 적절하게 결정하였다.”고 하고 곧 그에게 권씨(權氏)의 성(姓)을 내렸으며 안동군을 승격시켜 부(府)로 하였다. 김선평(金宣評) 고려 태조의 공신. 벼슬이 아보(亞父)에 이르렀다. 장길(張吉) 고려 태조의 공신. 김부민(金富民) 옛 이름이 아조(我朝 이씨왕조(李氏王朝)) 문종(文宗)의 휘(諱)를 범하였으므로 고쳤다. 청렴하고 신중하게 일을 잘 처리하였다. 인종조(仁宗朝)에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지내다가 지경원군사(知慶源郡事)가 되었더니 염치와 근면을 숭상하는 정치를 하였다. 벼슬이 여러 번 옮겨서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다. 딸이 이자겸(李資謙)의 아들에게 시집갔다. 그러나 인척간이라고 하여 이자겸에게 아부하지 아니하고 드디어 척준경(拓俊京)과 더불어 꾀하여 자겸을 잡았다. 끝까지 자기의 공(功)을 말하지 아니하였다. 뒤에 검교사도 지문하성사(檢校司徒知門下省事)가 되었다. 김창(金敞) 처음 이름은 효공(孝恭)이다. 한림(翰林) 민성(敏成)의 아들로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14세손이다. 희종 조(熙宗朝)에 급제하여 벼슬이 태사 문하시랑 판이부사(太師門下侍郞判吏部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김시언(金時彦) 일직현(一直縣) 사람이다. 고종(高宗) 때에 과거에 뽑혀 여러 벼슬을 거쳐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이르렀다. 나이가 70이 되어서 국자 좨주(國子祭酒)로 치사(致仕)하였다. 권수평(權守平) 풍채는 풍신하고 아름다웠으며 성품은 순후하고 질박하고 정직하여 옛 사람의 풍모(風貌)가 있었다. 고종조(高宗朝)에 벼슬이 추밀부사(樞密副使)에 이르렀다. 김효인(金孝印) 창(敞)의 아우이다. 예자(隷字)를 잘 썼으며, 문장(文章)과 사업(事業)이 한 시대에 걸출하여 실력을 중외(中外)에 드날렸다. 벼슬이 병부상서 한림학사 지제고(兵部尙書翰林學士知制誥)에 이르렀다. 김방경(金方慶) 효인(孝印)의 아들이다. 예전에 방경의 어머니가 임신하였을 때에 꿈에 구름과 노을을 먹고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구름 기운이 아직도 나의 입과 코에 있다. 아기는 반드시 신선(神仙) 가운데서 왔을 것이다.” 하였다. 출생한 뒤에는 조금만 성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시가(市街)의 큰 길에 누워서 울었는데 소와 말이 피해 가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고종 조(高宗朝)에 처음으로 벼슬하였는데 진도(珍島)ㆍ탐라(眈羅)ㆍ일본(日本)을 정벌하여 다 전공(戰功)이 있었다. 벼슬이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충직하고 믿음직하고 관후(寬厚)하여 작은 절차에 구애되지 않았다. 전고(典故)를 많이 알았으며 자신을 근검하게 다루었다. 늙어서도 머리털이 희어지지 않았으며 추위나 더위에도 병드는 일이 없었다. 비록 치사(致仕)하고 한가하게 살 때일지라도 나라를 근심하는 것을 자기집안 일과 같이 하였다. 나라에 큰 의논이 있으면 임금이 반드시 그에게 자문(咨問)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김흔(金忻) 방경(方慶)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산정도감 판관(刪定都監判官)에 뽑히고, 세 번 영전(榮轉)하여 장군(將軍)이 되었다. 아버지를 따라 탐라를 쳐서 승첩(勝捷)하고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또 일본 정벌에 나가서 공을 세워 진국상장군(鎭國上將軍)에 임명되었다. 벼슬이 도첨의사사(都僉議司事)에 이르고, 삼중대광(三重大匡)에 가자(加資)되었으며, 승습하여 상락공(上洛公)에 봉직되었다. 김순(金恂) 방경(方慶)의 아들이다. 충렬왕조(忠烈王朝)에 급제하였다. 방경이 일본을 정벌할 때 순이 몰래 배에 올라서 좇아갔으며, 돌아와 전중(殿中)에 임명되었다. 벼슬이 중대광(重大匡)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권단(權㫜) 수평(守平)의 손자이다. 급제하여 중앙과 지방의 벼슬을 역임하면서 이름을 드날렸는데 모두 청렴하고 근면하며 순수하고 현명하다고 칭찬하였다. 일찍이 삼도안찰사(三道按察使)가 되었는데 공문서(公文書)의 시행에는 다만 영판(鈴板)을 사용할 뿐이고 일찍이 한 사람의 아전이라도 금령(禁令)을 시행하게 하기 위하여 파견한 일은 없었다. 벼슬이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이르렀다. 스스로 호(號)를 몽암거사(夢菴居士)라고 하였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김영돈(金永旽) 순(恂)의 아들이다. 충렬왕 조(忠烈王朝)에 급제하였다. 조적(曹頔)의 난리에 시종(侍從)한 공로가 있어서 일등(一等)에 책훈(策勳)되고 추성병의익찬 공신(推誠秉義翊贊功臣)의 호를 내리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충목왕(忠穆王) 때에 이르러 좌정승(左政丞)에 임명되었다. 아들 진(縝)은 벼슬이 중대광(重大匡) 상락백(上洛伯)에 이르렀다. 김영후(金永煦) 순(恂)의 아들이다. 성품이 엄숙하고 침중하였으며, 친척이나 친구 중에 빈곤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구휼해 주었다. 충혜왕(忠惠王)이 원 나라에 붙잡혔을 때에 모든 관원들은 다 달아나 숨었으나 홀로 영후만은 왕을 호위하다가 창에 찔리었다. 그의 손자는 사형(士衡)ㆍ사안(士安)이다. 나이가 20세를 넘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어째서 손자들을 위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손자들이 과연 현능(賢能)하다면 나라에서 알아서 등용할 것이며, 현능하지 않다면 비록 벼슬을 얻은들 그 벼슬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다 탄복하였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김이(金怡) 어머니의 꿈에 찬란한 하늘에 붉은 해가 붉은 햇무리를 띠고 품속으로 들어 왔는데, 곧 임신하고는 이를 낳았다. 얼굴이 크고 의젓하며 일찍부터 큰 뜻이 있었다. 벼슬이 계속 올라 중찬(中贊)에 이르렀다. 그때에 오잠(吳潛)ㆍ유청신(柳淸臣) 등이 우리나라에 행성(行省)을 세우고 나라 이름을 폐지하기를 원 나라 조정에 주청(奏請)하였다. 이(怡)가 최성지(崔誠之)ㆍ이제현(李齊賢) 등과 더불어 원 나라의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행성을 두는 일의 이해(利害)를 자세히 진술하여 그 옳지 못함을 주장하였더니 도당이 그 의견에 좇았다. 성질이 활달하여서 장자(長者)다운 풍도(風度)가 있었다. 오랫동안 충선왕(忠宣王)을 좇아 원 나라에 가서 임금을 호위하며 바로잡은 공로가 있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절개를 지켰다. 권부(權溥) 단(㫜)의 아들이다. 나이 18세 때에 급제하고 벼슬이 계속 올라 첨의정승(僉議政丞)에 이르렀다. 천성이 충효(忠孝)하고 글 읽기를 즐겨하였다. 일찍이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하기를 건의하였다. 우리나라의 성리학(性理學)이 부(溥)로부터 수창(首倡)되었다. 부와 아들, 사위 등 8명이 모두 봉군(封君)되었으므로 세상에서 일가구봉군(一家九封君)이라고 불렀다. 시호는 문정이다. 왕후(王煦) 권준(權準)의 아우로, 처음의 성명은 권재(權載)였다. 충선왕(忠宣王)이 원 나라에 있을 때에 불러다가 한 번 보고는 드디어 아들을 삼고 성명을 왕후(王煦)라고 하사하였다. 충선왕이 환국하여서는 출입할 때에 항상 수레를 같이 탔다. 충숙왕 조(忠肅王朝)에 계림부원대군(鷄林府院大君)을 봉하니 그때 세상에서 왕제(王弟)라고 일컬었고 원 나라에서도 계림군공(鷄林郡公)을 제수하였다. 충선왕이 토번(吐蕃)으로 귀양가니 후가 토번에 들어가서 임조(臨洮)에 이르러 왕을 뵙고, 시종(侍從)하여 경사(京師)로 돌아왔다. 충선왕이 훙(薨)하자 후가 최마복(衰麻服)을 입고 영구(靈柩)를 모시어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장사지낸 뒤에는 초하루와 보름마다 사사로이 능(陵) 아래에서 제사를 올렸는데,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다. 충목왕(忠穆王)이 훙하자 후가 정동성사(征東省事)를 섭행(攝行)하였다. 충정왕(忠定王) 때 봉명사신(奉命使臣)이 되어 원 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창의현(昌義縣)에 이르러 병으로 졸(卒)하였다. 영구가 돌아오니 역(驛)의 아전들이 영구를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제사지내기를 부모와 같이 하였다. 권준(權準) 부(溥)의 아들이다. 급제하여 발탁되어 대언(代言)이 되었으며 벼슬이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시호는 창화(昌和)이다. 권렴(權廉) 준(準)의 아들이다. 충숙왕 때에 삼사부사(三司副使)에 임명되었으며 벼슬이 첨의찬성(僉議贊成)에 이르렀다. 권적(權適) 염(廉)의 아우이다. 충혜왕 때에 길창군(吉昌君)에 봉작되었다. 시호는 원정(原靖)이다. 김구용(金九容) 방경(方慶)의 증손(曾孫)이며 상락군(上洛君) 묘(昴)의 아들이다. 급제하고 벼슬이 계속 올라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이르렀다. 힘써 후학(後學)들을 진학(進學)하게 하고 교훈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니 비록 휴가로 집에 있을 때라도 여러 생도들 가운데 질문하러 오는 자가 잇따랐다. 신우(辛禑) 때에 이인임(李仁任)이 북원(北元)의 사자(使者)를 맞아들이고자 하거늘 구용이 정도전(鄭道傳) 등과 더불어 글을 도당(都堂)에 올려 북원의 사자를 물리치려고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좇지 아니하였다. 이에 죽주(竹州)로 귀양갔다가 얼마 안 되어 여흥(驪興)으로 옮겨졌다. 시와 술로 스스로 즐기더니, 뒤에 명 나라에 가는 행례사(行禮使)가 되어 가다가 요동(遼東)에서 붙잡혀 경사(京師)로 옮겨졌다가 대리위(大理衛)로 귀양가 그곳에서 병졸(病卒)하였다. 척약재집《惕若齋集》이 세상에 전한다. 김제안(金齊顔) 구용(九容)의 아우이다. 공민왕 조에 급제하였다. 군부좌랑(軍簿佐郞)으로서 전록생(田祿生)을 좇아 하남왕(河南王) 확곽첩목아(擴廓帖木兒)에게 사신으로 가다가 연경(燕京)에 이르니 황태자가 그와 통신하는 것을 미워하여 저지시켰다. 녹생은 곧 우리나라로 돌아오고 제안이 홀로 연경에 머물러 있다가 마침내 국서(國書)를 하남왕에게 전달하였다. 뒤에 신돈(辛旽)을 죽이려고 꾀하다가 일이 누설되어서 죽었다. 김구덕(金九德) 제안(齊顔)의 아우이다.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서 숭정(崇政)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안정(安靖)이다. 여러 번 이름난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죽은 뒤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함이 있었다. 권화(權和) 신우(辛禑) 때에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되었다. 벼슬이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손홍량(孫洪亮) 일직현(一直縣) 사람이다. 벼슬이 계속 올라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공민왕이 친히 그의 초상(肖像)을 그려 하사하였다. 지금까지 부(府)의 임하사(臨河寺)에 보관되어 있다. 아들 득수(得壽)는 벼슬이 대언(代言)에 이르렀다. 홍지경(洪之慶) 풍산현(豐山縣)의 향공(鄕貢)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국학직학(國學直學)에 이르렀다. 홍간(洪侃) 지경(之慶)의 아들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도첨의사인(都僉議舍人)에 이르렀다. 뒤에 동래 현령(東萊縣令)으로 좌천되었다가 관(官)에서 졸(卒)하였다. 시(詩) 잘 짓는 것으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본조 김사형(金士衡) 영후(永煦)의 손자이다. 신우(辛禑) 때에 조준(趙浚) 등과 더불어 같이 대간(臺諫)으로 있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적임(適任)한 인재를 얻었다고 일컬었다. 벼슬이 삼사사(三司使)에 이르렀다. 우리 태조를 도와서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고 벼슬이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권근(權近) 부(溥)의 증손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다. 공민왕 때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밀직(密直)에 이르렀다. 일찍이 어떤 일에 연루되어 충주(忠州)의 양촌(陽村)에 귀양가서 살았다. 태조(太祖)가 계룡산(鷄龍山)에 거둥하여 근을 행재(行在)에 불러다가 정릉비문(定陵碑文)을 찬술(撰述)하라고 명령하고 예문관학사(藝文館學士)에 임명하였다. 명 나라의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우리나라의 표전(表箋)의 말이 희롱하고 업신여기는 바가 있다고 하여 표문(表文)을 지은 자를 소환하였다. 정도전(鄭道傳)이 병을 칭탁하고 가지 아니하니 태조(太祖)가 난처하게 여기었다. 근이 계주(啓奏)하기를, “이 표(表)는 신이 정총(鄭摠)과 더불어 윤색(潤色)하였습니다. 신이 마땅히 가서 변명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경(卿)에게는 황제의 소환 명령이 없으니 갈 수 없다.” 하였다. 대답하기를, “신이 소환 없이 자진하여 가면 혹 죄가 용서될 수도 있을까 합니다.” 하니 태조가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금릉(金陵)에 도착하니 황제가 불러 보았다. 근이 아뢰기를, “우리나라가 사대(事大)하는데 있어서 표전(表箋)을 쓰지 않을 수 없는데, 신 등이 해외(海外)에 생장(生長)하여 배운 것이 표전 쓰는 방법에 능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 임금의 충성을 명백하게 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신들의 죄일 뿐, 우리 임금의 아는 바가 아닙니다.”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말이 옳다.” 하고 마침내 캐어 묻지 아니하였다. 황제가 근에게 명령하여 문연각(文淵閣)에 나가서 유(劉)ㆍ허(許) 제공(諸公)과 더불어 교유하게 하였다. 황제가 글제를 내어 주어 시를 짓게 하고 옷과 연회를 내려 주었으며, 이어 놀며 관광할 것을 허락하였다. 또 어제(御製)를 하사하고, 번번이 노숙하고 전실(典實)한 수재(秀才)라고 칭찬하였다. 이듬해 봄에 황제의 칙서(勅書)를 받들고 우리나라에 돌아왔다.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참렬(參列)하였으며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고, 길창군(吉昌君)에 봉작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덕업(德業)과 문장이 한 시대에 탁월하였다. 저술한 양촌집《陽村集》ㆍ입학도설《入學圖說》ㆍ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은 지극히 정밀하고 상세하며, 예경《禮經》을 고정(考定)한 것은 더욱 공(功)이 있다. 권우(權遇) 근(近)의 아우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예문 제학(藝文提學)에 이르렀다. 매헌집《梅軒集》이 있다. 심귀령(沈龜齡) 아조(我朝) 태종 조(太宗朝)에 무예(武藝)로 드러났다.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참렬하였으며 벼슬이 동지의흥삼군부사(同知義興三軍府事)에 이르렀고, 풍산군(豐山君)에 봉작되었다. 시호는 정양(靖襄)이다. 권담(權湛) 염(廉)의 손자이고 부(溥)의 증손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이르렀다. 괴정집《槐亭集》이 있다. 권제(權踶) 근(近)의 아들이다. 태종조(太宗朝)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국가의 문정(文政)을 잡고 있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지재집《止齋集》이 있다. 권채(權採) 우(遇)의 아들이다. 급제하였으며 문명(文名)이 있었다. 벼슬이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이르렀다. 심보(沈寶) 귀령(龜齡)의 아들이다. 벼슬이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에 이르렀다. 심치(沈寘) 보(寶)의 아우이다.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 상주목사(尙州牧使)에 이르렀다. 정헌대부(正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풍산군(豊山君)에 봉작되었다. 권람(權擥) 제(踶)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어서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문종조(文宗朝)에 과거의 삼장(三場) 시험에 잇따라 장원급제하였다. 세조(世祖)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비밀히 큰 계책을 도와 드디어 대난(大難)을 진정시켰다. 두 번 훈맹(勳盟)에 참여하여 삽혈하였으며, 벼슬이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이르고,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권반(權攀) 남(擥)의 아우이다. 기묘년의 과거에 급제하였다. 좌익공신(左翼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작되었다. 김익정(金益精) 태종조(太宗朝)에 장원급제하였다. 벼슬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김돈(金墩)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썼다. 세종(世宗)이 잠저에 있을 때에, 그의 이름을 듣고 불렀으나 돈이 사양하고 가지 않았더니, 과거에 급제하여 합격을 발표할 때,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위유(慰裕)하기를, “내가 경(卿)을 보고자 하였는데 경이 문득 나를 피하더니 이제 나의 신하가 되었구나.” 하고 뽑아서 집현전(集賢殿)에 들게 하고 항상 경연(經筵)을 겸직하게 하였다. 돈이 어머니가 강진(康津)에 있다고 하여 여러 번 지방관직으로 나가기를 요청하니, 임금이 특별히 역마(驛馬)를 내려주어서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와서 효도로 봉양하기에 편의하게 하였다. 사림(士林)에서 영광스럽게 여기었다. 돈이 의상(儀像)을 만드는데 정교하였다. 임금이 간의대(簡儀臺)ㆍ보루각(報漏閣)을 제작할 때에 돈이 김조(金銚)와 함께 참여하였다. 승지(承旨)로 있은 지 7년이나 되었는데, 병이 들자 승격시켜 인수 부윤(仁壽府尹)을 임명하였다. 얼마 안 되어서 졸(卒)하였다. 권극화(權克和)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김수녕(金壽寧) 익정(益精)의 손자이다. 나이 18세 때에 계유년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렬하였으며, 벼슬이 호조 참판에 이르고, 복창군(福昌君)에 봉작되었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날렸다. 김질(金礩) 사형(士衡)의 증손이다. 급제하고 벼슬이 누전(累轉)하여서 성균 사예(成均司藝)에 이르렀다. 세조(世祖) 초년에 성삼문(成三問) 등의 음모를 고변(告變)하여 그 공으로 좌익공신(左翼功臣)에 봉작되고 벼슬이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이르렀으며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작되었다. 김작(金碏) 질(礩)의 아우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권감(權瑊) 극화(克和)의 아들이다.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에 참렬하였으며 화천군(花川君)에 봉작되었다. 김뉴(金紐) 갑신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또 중시(重試)와 등준(登俊) 두 과거에 장원하였고 이조 참판을 지냈다. 시(詩)에 능(能)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음률(音律)에 통달하였다. 권정(權侹) 급제하여 벼슬이 영안도 관찰사(永安道觀察使)에 이르렀다.『신증』 권전(權專) 벼슬이 판윤(判尹)에 이르렀으며, 현덕왕후(顯德王后)를 낳았다. 권건(權健) 남(擥)의 아들이며, 젊어서 급제하였다. 단정하고 문장에 뛰어나 당시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충민(忠敏)이다. 심응(沈膺) 치(寘)의 아들이다.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참렬하였고 풍산군(豐山君)에 봉작되었다. 권주(權柱) 급제하여 벼슬이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연산군(燕山君) 때에 피살되었는데, 지금 임금[중종(中宗)]이 즉위하여 우참찬(右叅贊)을 추증하였다. 권경우(權景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김수동(金壽童) 사형(士衡)의 후손이다. 단중(端重)하고 온아하였다. 어려서 급제하였으며,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렬하였다.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권민수(權敏手)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권달수(權達手) 민수(敏手)의 아우이다. 기개와 절조가 있었다.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이르렀다. 연산 조에 언사(言事)로 연좌되어 피살되었다. 지금 임금[중종]이 즉위하여 도승지(都承旨)를 추증하였다. 권홍(權弘) 두 번이나 장원급제하였으며,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권균(權鈞) 급제하여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김희수(金希壽) 급제하여 맑은 벼슬과 높은 벼슬을 역임하여 이름을 드날렸다. 해서(楷書)를 잘 썼는데 글씨가 매우 법도가 있었다. 벼슬은 관찰사에 이르렀다.
【효자】 고려 권백종(權伯宗) 어머니의 무덤을 3년 동안 지켰다. 지정(至正) 5년(1345)에 정려(旌閭)하였다. 김문신(金文信) 벼슬하여 별장(別將)이 되었으며, 아버지 무덤을 3년 동안 지켰다. 홍무(洪武) 23년(1390)에 정려하였다. 김자수(金子粹) 어머니가 죽자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하였는데,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하였다.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도관찰사(都觀察使)에 이르렀다. 권여생(權呂生) 부(府)의 아전이다. 어머니가 죽자 3년을 여묘살이하였다. 홍무(洪武) 계축년(1373)에 정려(旌閭)하였다.본조 권질(權晊) 어머니가 죽자 3년을 여묘살이하였다. 건문(建文) 임오년(1402)에 정려하였다.
【열녀】 고려 김씨(金氏) 유천계(兪天桂)의 아내이다. 홍무(洪武) 신사년에 천계(天桂)가 수자리의 차례가 되었으므로 좋은 날을 가려 밖에 나가서 자고 아내는 방에 들어 가 식량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범이 남편을 물어갔다. 김씨가 나무 활을 잡고 소리쳐 부르짖으며 앞으로 달려 들어 왼손으로는 남편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범을 치면서 거의 60보(步)를 쫓아가니 범이 버리고 갔다. 김씨가 업고 집에 돌아왔더니, 날샐 무렵에 남편이 다시 살아났다. 그날 밤에 범이 또 와서 당돌하게 크게 으르렁거리므로 김씨가 문을 열고 나가 막대를 둘러메고 범에게 말하기를, “너도 또한 영성(靈性)을 지니고 있는 동물인데 어찌 이렇게 심하냐.” 하니 범이 집 옆에 있는 배나무를 물어 뜯고 가버렸다. 나무가 곧 말라서 죽었다.본조 김씨(金氏) 풍산(豐山) 사람으로 이강(李橿)의 아내이다. 강이 말에서 떨어져 길에 쓰러져 죽으니, 김씨가 울부짖으며 가슴을 두드리고 땅을 구르면서 밤ㆍ낮 3일 동안 시체를 안고 지냈다. 장사를 지낸 뒤에도 달이 넘도록 음식을 먹지 않다가 53일 만에 죽으니, 한 무덤에 합장하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하였다.
【제영】 영가산수호풍연(永嘉山水好風煙) 고려 때 홍간(洪侃)의 시(詩)에, “풀이 자라는 강남(江南) 삼월 철에, 영가의 산수는 좋은 경치.”라 하였다. 옥련행가혼작묘(玉輦行街渾作畝) 승[僧] 달전(達全)의 시에, “임금의 수레 다니던 거리는 모두 밭이랑이 되었고, 구슬발[珠簾] 깊던 가항(街巷)은 반은 못[池]을 이뤘구나.” 하였다. 산수무비구안청(山水無非舊眼靑) 고려 김방경(金方慶)의 시에, “산과 물은 어느 것이나 예대로 있어 반갑고, 누대(樓臺) 또한 소년 시절에 보던 것처럼 다정하구나. 슬프다, 고국의 유풍(遺風)으로 남아 있는, 거문고와 노래 소리를 수습(收拾)하여 나의 길 가는 심정을 위로하노라.” 하였다. 선개방초도(船開芳草渡) 이집(李集)의 시에, “늘어선 배 우거진 나루터, 술은 떨어진 석양(夕陽) 비낀 누대.” 하였다. 노목창연루각풍(老木蒼煙樓閣風) 정추(鄭樞)의 시에, “영가성(永嘉城) 가의 석양 속에, 노목(老木)은 푸른 안개에 잠기고 누각에는 바람이 부네.” 하였다. 인물천년성례속(人物千年成禮俗) 이원(李原)의 시에, “인물은 천년의 전통에서 예속을 이루었고, 물과 산 십리의 좋은 경치는 신선이 사는 집 같구나.”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선조 9년에 현감(縣監)으로 강등시켰다. 적변(賊變)으로 인해서 14년에 다시 승격시켰고, 정종(正宗)이 즉위한 병신년에 현감으로 내렸다가 다시 승격시켰다.
【고국】 창녕국(昌寧國) 일명 타야(陁耶)라고도 하는데 신라가 취하여 군을 두었다. 소라국(召羅國) 춘양(春陽) 고현(古縣)의 남쪽 10리에 있었다. 수구(水口)가 소라국 옛터에 있었다. 고려 때 소라의 부곡이 봉화현(奉化縣)의 동쪽 경계로 넘어 들어갔다. 구령국(駒令國) 지금의 춘양 고현인데, 북쪽으로 30여 리에 있었다. 관적령산(串赤嶺山) 위에 있었으며, 개곡(開谷) 삼면(三面)은 골짜기 어귀가 험준하고 성문에 두 개의 추춧돌이 있으며, 남쪽으로 15리에 가서 산 위에 작은 석성(石城)이 있는데, 성중에는 장군 단(壇)의 남은 터가 있다. 지금 봉화현의 각화사(覺華寺)의 동구(洞口) 석현(石峴)으로써 나라의 경계로 삼았다 하였다. 지금 구령방(駒令妨)이라고 한다. ○ 관적령은 영천군(榮川郡) 북쪽 33리에 있다.
【고읍】 임하(臨河) 동쪽으로 33리에 있는데, 본래 신라 굴화(屈火)읍이다. 일명 굴불(屈弗)이라고도 한다. 경덕왕 16년에 곡성군(曲城郡)이라 고쳤고, 명주(溟州) 영현(領縣) 일연무(一緣武)에 예속되었다. 고려 태조 23년에 임하라 고쳤고, 현종(顯宗) 9년에 와서 소속되었다. 풍산(豐山) 서쪽으로 35리에 있으며, 본래 신라의 하지(下枝)읍이다. 경덕왕 16년에 영안(永安)이라 고치고, 예천군(醴泉郡) 영현이 되었다. 고려 태조 6년에 현(縣) 사람 원봉(元逢)의 귀순(歸順)한 공이 있어서 순주(順州)로 승격하게 되었다. 13년에 원봉이 견훤(甄萱)에게 항복하자 다시 하지현이라고 내렸다가 후에 풍산이라 고쳤는데, 일명 풍악(豐岳)이라고도 한다. 현종 9년에 와서 합쳤다. 명종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후에 다시 합쳤다. 일직(一直) 남쪽으로 30리에 있는데 본래 신라의 일직이다. 경덕왕 16년에 직녕(直寧)이라 고쳐 고창군(古昌郡)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태조 때 다시 일직이라고 불렀다. 현종 9년에 와서 합쳤다. 감천(甘泉) 서쪽으로 1백 리에 있는데, 신라 때는 이름을 고쳐 예천군 영현이 되었다. 현종 9년에 와서 합쳤다. 춘양(春陽) 북쪽으로 1백 20리에 있는데, 본래 가야향(加也鄕)이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10년에 지방 사람인 호군(護軍) 김인궤(金仁軌)의 공이 있어 현으로 승격시켰다. 재산(才山) 동북쪽으로 75리이며, 본래 덕산부곡이다. 고려 충렬왕 때 경화옹주(敬和翁主)의 고향이라 하여 현으로 승격시켰다. 길안(吉安) 동쪽으로 50리이며, 본래 길안부곡이다.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 현으로 승격시켰다. 내성(奈城) 북쪽으로 90리이며, 본래 퇴관부곡이다. 고려 충혜왕 때 향(鄕)의 내시인 강금강(姜金剛)이 원 나라에 들어갔을 때 시위(侍衛)한 공으로 현으로 승격시켰다.
【방면】 동부(東部)ㆍ서부 모두 읍내에 있다. 동선(東先)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동후(東後) 위와 같다. 남선(南先) 처음은 7리, 끝은 20리이다. 남후(南後)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서선(西先) 처음은 15리, 끝은 25리이다. 서후(西後) 위와 같다. 북선(北先)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북후(北後) 처음은 20리, 끝은 50리이다. 임현내(臨縣內) 동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임동(臨東) 동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70리이다. 임서(臨西) 남쪽으로 처음은 25리, 끝은 80리이다. 임남(臨南) 동남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60리이다. 임북(臨北) 동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80리이다. 이상 다섯 면(面)은 임하 옛 군(郡)의 땅이다. 풍현내(豐縣內) 서쪽으로 처음은 35리, 끝은 40리이다. 풍남(豐南) 서남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70리이다. 풍서(豐西) 서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70리이다. 풍북(豐北) 서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60리이다. 이상 4면은 풍산(豐山) 옛 현의 땅이다. 일직(一直) 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60리이다. 감천(甘泉) 서쪽으로 처음은 90리, 끝은 1백 리이다. 예천 북쪽 영천(榮川) 남쪽, 풍기(豐基) 동남 경계로 넘어가 있다. 고안(告安) 동남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70리이다. 내성(奈城) 북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1백 10리이다. 봉화(奉化) 서쪽인 숭천(崇川)ㆍ순흥(順興)ㆍ동녕(東寧)에 넘어들어가 있다. 영춘(永春) 남쪽에 넘어가 있기도 하다. 춘양(春陽) 북쪽으로 처음은 1백 리, 끝은 2백 15리이며, 남쪽으로 재산(才山)에 연접해 있는데, 봉화 경계에 쑥 들어갔으며, 북쪽으로는 영월(寧越)의 동쪽 경계에 연접해 있다. 태백산(太白山) 남쪽에 위치해 있다. 재산(才山) 동북쪽으로 처음은 90리, 끝은 1백 20리이다. 이상 6면은 각각 그 옛 현이다. 소천(小川) 옛 소천부곡이다. 동북쪽으로 처음은 90리, 끝은 1백 30리이며, 서쪽으로 춘양에 연접해 있다. 이상 2면은 예안(禮安)ㆍ미양(美陽)의 북쪽에 넘어들어가 있는데, 서쪽으로는 봉화와 연접했고, 북쪽으로는 삼척(三陟), 동쪽으로는 울진(蔚珍)과 연접해 있으며, 태백산 남쪽에 위치해 있다. ○ 개단부곡은 내성의 옛 현이며, 북쪽으로 25리이다. 요촌부곡은 동쪽으로 35리이며, 신양부곡은 풍산현에 있다. 토탄부곡은 내성 옛 현의 북쪽이다. 하양부곡(河壤部曲).
【성지】 청량산고성(淸涼山古城) 둘레 1천 3백 50척, 우물 7, 개천 2개이다. 하지산(下枝山)고성 곧 풍산 옛 현의 성(城)인데, 흙으로 쌓았다. 둘레는 수천 척이다. 하가산(下柯山)고성 산 꼭대기에 옛터가 있다.
【영아】 전영(前營) 인조 조에 설치하였다. ○ 전영장(前營將) 1인이다. ○ 속읍(屬邑)은 안동ㆍ영해(寧海)ㆍ청송(靑松)ㆍ순흥(順興)ㆍ예천ㆍ풍기ㆍ영천(榮川)ㆍ의성(義城)ㆍ영덕(盈德)ㆍ용궁(龍宮)ㆍ예안(禮安)ㆍ봉화ㆍ진보(眞寶)ㆍ미양(美陽)ㆍ비안(比安)이다.
【창고】 읍창이 3개이다. 소천창(小川倉)ㆍ재산창(才山倉)ㆍ춘양창(春陽倉)ㆍ감천창(甘泉倉)ㆍ내성창(奈城倉)ㆍ풍산창(豐山倉) 이상 각 창은 그 옛 현에 있다. 금소창(琴召倉)ㆍ안기창(安奇倉) 이상 각 창은 그 역(驛)에 있다.
【진도】 견항진(犬項津) 동쪽으로 3리, 물야탄(勿野灘) 하류이다.
【토산】 감[枾], 벼룻돌[硯石] 구룡산(九龍山) 및 독천(禿川)에서 나는데, 물에 잠긴 것은 아름다우며 마간석(馬肝石)이라고 일컫는다.
【누정】 능초루(凌超樓)ㆍ제남루(濟南樓) 모두 읍내에 있다. 청암정(靑巖亭) 내성(奈城)에 있는 정자인데, 못 가운데 있는 큰 돌위에 지었으므로 섬과 같다.
【묘전】 관왕묘(關王廟) 서악(西岳) 동대(東臺)에 있다. 선조 무술년에 천장(天將) 설호신(薛虎臣)이 세웠다. 석상(石像)을 묘정비(廟庭碑)로 세웠다. 관우(關羽) 경도(京都) 조에 있다. ○ 삼공신묘(三功臣廟) 고려 초에 세웠다. 권행(權幸) 벼슬은 태사(太師)이며, 본성은 김(金)인데, 사성(賜姓)이 권(權)이다. 김선평(金宣平) 벼슬은 태사이다. 장정필(張貞弼) 처음 이름은 길(吉)이며, 벼슬은 태사이다.
【사원】 호계서원(虎溪書院) 선조 병자년에 세우고,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이황(李滉) 문묘 조에 보인다. 유성룡(柳成龍) 자는 이현(而見)이고, 호는 서애(西崖)이며, 풍산(豐山) 사람이다. 벼슬은 영의정,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김성일(金誠一) 자는 사순(士純)이고, 호는 학봉(鶴峯)이며, 의성(義城) 사람이다. 벼슬은 경상우도 관찰사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이다. ○ 삼계(三溪)서원 선조 무자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권벌(權撥) 자는 중허(重虛)이고, 호는 충재(冲齋)이며, 안동 사람이다. 벼슬은 좌찬성(左贊成)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 주계(周溪)서원 광해주 임자년에 세웠고, 순종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구봉령(具鳳齡) 자는 경서(景瑞)이고, 호는 백담(柏潭)이며, 능성(綾城)사람이다. 벼슬은 이조 참판이다. 권춘란(權春蘭) 자는 언회(彦晦)이고, 호는 회곡(晦谷)이며, 안동 사람이다. 벼슬은 사간(司諫)이다. ○ 고죽(孤竹)서원 정종(正宗) 경술년에 세우고, 무오년에 사액하였다. 김제(金濟) 호는 백암(白巖)이며, 선산(善山) 사람이다. 고려 평해군사(平海郡事)이고, 시호는 충개(忠介)이다. 김주(金澍) 자는 택부(澤夫)이고, 호는 농암(籠巖)이며, 김제의 아우이다. 공양왕(恭讓王) 때 예의판서(禮儀判書)로 중국 서울에 조회갔다가 돌아오는데, 압록강에 이르자, 본조(조선)가 개국(開國)했다는 소문을 듣고, 도로 중국으로 들어가버렸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 서간사(西磵祠) 숙종 기사년에 세우고, 정종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김상헌(金尙憲) 태묘(太廟) 조에 보인다.
【방면】 읍내(邑內) 끝이 5리이다. 남면 처음은 5리, 끝은 50리이다. 북면 처음은 5리, 끝은 50리이다. 묘곡(畝曲) 본래 묘곡부곡인데, 서남쪽으로 25리이다. 가을(加乙) 서쪽으로 25리이다. 석보(石保) 본래 석보부곡인데,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75리이다. 오오곡(烏於谷) 서북쪽으로 45리이다. 서면 처음은 8리, 끝은 40리이다. ○ 백석(白石)부곡은 북쪽으로 25리, 창숙(倉稤)부곡은 서쪽으로 30리, 가서향(加西鄕)은 서쪽으로 13리이다.
【성지】 고성(古城) 서쪽으로 15리이며, 산성(山城)이라 일컫는데, 산에는 흙으로 쌓은 터가 남아 있다.
【진보】 혁폐 축산포진(丑山浦鎭) 동남쪽으로 14리이며, 수군만호가 있다. 선조 25년에 동래부의 부산포로 옮겼다.
【창고】 읍창, 석보창(石保倉) 석보면에 있다.
【토산】 감[枾]
【누정】 임영루(臨瀛樓) 서쪽으로 5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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