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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나는 뚝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인가?’
형제 중에 형기만 할머니 집에 혼자 남겨지자 어릴 때 자기를 놀리던 친척 아저씨 생각이 났다. 형기는 그 아저씨가 ‘주워온 아이’라고 놀릴 때마다 울면서 항변했으나 아버지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미소만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말썽을 피운 형진이를 데려간 것은 할머니 집에 그대로 두면 장래를 망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형기는 어린 마음에 자기는 주워온 아이이기 때문에 부모님이 형진이만 데려갔다고 생각했다. 친척 아저씨가 그렇게 놀려도 부모님이 ‘그렇지 않다’고 한마디도 말해주지 않은 것이 그것을 입증하는 것 같았다. 형기는 좀 더 자라서는 그 아저씨가 자기를 귀엽다고 놀리는 말이란 것을 알았다.
처음에 형기는 부모님이 어린 동생 하나만 데리고 떠난 뒤에 형과 함께 지내는 것이 참으로 좋았다. 형진은 심술궂은 친구들로부터 동생을 보호해주었기 때문에 형기에게는 든든한 의지가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형을 데리고 간 뒤부터 형기에게는 고아처럼 외로움이 몰려왔다. 형기도 형진이처럼 학교에도 잘 가지 않고 말썽을 피우면 어머니가 데려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심성이 점잖은 형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어머니가 몹시 보고 싶었다. 그때마다 형기는 어머니의 사진을 꺼내 보며 ‘엄마’를 불러보았다. 그러나 외로움은 더 크게 밀려왔고 입맛도 떨어지고 학교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형기는 온몸이 열에 펄펄 끓어 학교에 갈 수 없었다. 할머니는 형기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올려 열을 식혀주고 무엇이 먹고 싶으냐고 물었다. 형기는 아무것도 먹고 싶은 것이 없었다. 할머니는 전복죽을 만들어 간장에 찍은 김을 얹어 먹여주었다. 요즘은 어떤 김이라도 그때 먹었던 김만큼 맛이 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입맛이 떨어진 형기에게 감자떡을 만들어주고, 할아버지 밥상에만 주로 오르던 생선도 먹게 해주었다. 할머니는 참 솜씨가 좋았다. 밥을 찧어 콩고물을 묻혀 즉석 떡을 만들어주고 잔칫집에 다녀올 때는 봉지에 음식을 싸 와서 형기에게 내놓았다. 때로 형기가 좋아하는 단술과 함께 떡볶이와 김밥도 만들어주었다.
할아버지도 형기에게 많은 관심을 쏟았다. 여름방학 때는 수박밭에 형기를 데리고 가서 잘 익은 수박을 골라 따서 먹여주었다. 한동안 형기의 다리에 종기가 나서 잘 낫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따라 수박밭을 돌아보았는데 이상하게도 수박에 종기처럼 썩은 흠집이 많이 생겼다. 그래서 형기는 종기가 다 나을 때까지 수박밭에 갈 수 없었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농한기가 되면 할아버지는 물푸레나무 가지를 꺾어 와서 새총을 만들어주고 방패연과 얼레, 참나무를 깎아 팽이도 만들어주었다. 형기는 형진이와 함께 있을 때보다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장난감도 많이 생겼고 먹을 것도 풍성했다. 학교에 다녀오거나 친구들과 놀다 집에 들어올 때 “할머니, 뭐 좀−.” 말만 하면 어디서 꺼내오는지 할머니는 맛있는 것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리운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나려면 추석이나 설을 기다려야만 했다. 형기는 친구들과 노는 시간보다도 할머니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할머니가 절 뒤 밭에 갈 때는 꼭 따라갔다. 할머니는 절 앞을 지날 때는 정성스럽게 두 손을 모아 부처님께 기도를 올렸고 형기도 할머니를 따라 조그만 손을 합장했다. 두 손을 모으면 부처님 얼굴에 설자 모습이 겹쳐지곤 했다.
신설자는 승려의 무남독녀였다. 마을 뒤쪽에는 대처승이 주지인 사찰이 하나 있었다. 어릴 때 형기는 절 이름은 모두 ‘대웅전’으로 알았다. 사택으로 쓰는 요사채와 창고 하나가 부속 건물로 있을 뿐 사찰은 대웅전 하나밖에 없었다. 송림으로 둘린 절 뒤쪽에는 웬만한 농장 크기의 넓은 밭이 있고 형기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철 따라 밀보리와 채소를 재배하고, 여름철에는 수박과 참외를 심어 할아버지는 원두막에서 지냈다.
형기 할머니는 그 마을에서 ‘보살님’으로 통했다. 사월 초파일이나 동지가 되면 절에서 건대(시주봉투)를 한 아름 가져다 집집마다 돌렸다. 건대를 받은 집들은 쌀과 팥을 가득 담아 시주하여 행사를 치렀다. 형기 할머니가 설자네집과 특별히 가까이 지내는 것은 그 절에다 부모님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죽은 뒤에는 아들로부터 제삿밥을 얻어먹어야 한다는 관습이 지배하던 시대에 할머니 집엔 딸 다섯밖에 없었다. 장녀인 형기 할머니는 부모님의 기일이 돌아오면 손자를 데리고 절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형기야, 절을 많이 하면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도 기뻐하시겠지만 니 소원도 이루고 복을 많이 받는단다.”
할머니는 제사를 지낼 때마다 형기에게 말했다.
그때 형기와 설자는 둘 다 국민학교 3학년이었다. 형기는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의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보다는 객지에 계시는 어머니가 더 보고 싶었다. 또 한 가지 소원은 설자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었다. 한밤중 제사를 끝마치고는 설자네 식구와 함께 교자상에 둘러앉아 밤참을 먹었다. 설자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닮지 않고 부처님 식구처럼 얼굴이 하얗고 말씨는 그윽한 노랫소리 같았다. 달처럼 둥근 얼굴에 쌍까풀이 선명하고 형기 앞에서는 언제나 미소 짓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형기는 할머니와 함께 제사를 지내러 갈 때가 가장 즐거웠다. 사월 초파일에 할머니가 연등을 달러가거나 절에서 동지팥죽을 나눌 때도 꼭 할머니를 따라갔다. 사람들이 붐비면 형기는 설자 방에서 동화책을 읽으며 둘이서 재미있게 놀았다.
가을이 깊어지면 절 마당 한켠에 서 있는 감나무에서 홍시를 따서 나누어 먹었다. 설자가 오리나 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리 집에 또 홍시가 달렸다”고 자랑하면 형기가 가서 함께 따먹고 다음 홍시를 기다렸다. 할머니가 뒷밭에 콩잎을 따러 갈 때나 채소밭을 가꿀 때면 형기도 함께 가서 절 뒤의 굽어진 팽나무에 올라가 설자를 보려고 절 마당을 기웃거렸다. 형기는 절집에 가까이 가는 것이 좋았다. 절을 많이 하면 복 받고 소원을 이룬다는 말도 솔깃하지만 무엇보다 설자의 모습이 부처님을 닮은 것이 자랑스러웠다. 국민학교 저학년이면 남학생과 여학생이 까닭 없이 서로 다투고 해코지할 때도 많지만 형기와 설자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초파일이나 동지에 그들의 할머니나 어머니를 따라 오는 일이 없어서 형기 혼자 설자와 가까이 지내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친구들은 형기가 ‘설자를 좋아한다’는 말을 퍼뜨렸고 설자의 친구들도 그것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친구들은 ‘내가 못 먹는 포도는 시다’는 격으로 설자를 ‘중의 딸’이라고 놀려댈 때도 있었지만 형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둘이는 사랑한다는 말이나 편지 한 장 주고받은 적이 없으나 중학생·고등학생이 되면서 서로의 마음은 약속처럼 사랑으로 다져지고 있었다.
형기는 일찍부터 영검한 분에게 의지하는 것을 좋아했다. 다른 아이들은 부모님을 통해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지만 형기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부모님은 멀리 객지에 계시고, 그러다 보니 가슴 한쪽은 텅 비어 늘 허전했다. 형기는 부처님 앞에 절을 하면서 빈 가슴이 조금씩 채워졌고 그를 부처님께로 이끌어간 할머니가 어머니 대신 어린 가슴에 들어앉았다. 형기는 자라나면서 집에서도 할아버지로부터 제사상을 차리고 절을 하는 법도를 잘 배웠다. 부모님이 멀리 의성에서 설이나 추석 명절을 쇠러 와서 차례를 지낼 때 형기는 아버지로부터 늘 칭찬을 받았다.
“아버님, 형기는 저보다 제사법을 더 잘 아는데요!”
형기가 할아버지 앞에서 아버지의 칭찬을 들을 때는 세 살 위인 형보다 우쭐한 기분이 들었어도 가슴속의 외로움은 떨어버리지 못했다. 2~3일 명절 기간이 지나면 부모님과 형제들이 함께 떠나가고 형기만 할아버지 집에 혼자 남기 때문이었다. 외로움은 형기의 마음을 더욱 설자에게로 데려갔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