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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 명시선’이라는 시리즈로 나온 이 시집은, 1991년에 이미 출간했던 시선집을 재출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1973년에 등단했던 시인의 20여 년 동안 발표했던 작품 가운데 선택된 시들이라고 하겠다. 물론 일부 작품은 재출간 과정에서 빠지거나 새로 채택되기도 했다는데, 나로서는 앞서 출간된 시집과 비교해 보지 못했기에 그 실상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시선집을 통해서 정호승 시인의 초기의 작품 경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전체 4개의 항목으로 이뤄진 장절의 제목은 시인이 출간했던 시집의 제목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해당 시집에서 고른 작품들로 구성된 것이라 이해된다. 시인의 첫 시집이기도 한 <슬픔이 기쁨에게>는 정호승의 문학 세계를 독자들에게 뚜렷하게 각인시킨 작품들로 기억되고 있다. 여기에는 표제작인 ‘슬픔이 기쁨에게’가 첫 작품으로 수록되어 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이 작품에서 시인은 우리가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유를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한다. 그의 다른 작품들에도 ‘슬픔’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은 대부분 우리 사회의 소외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감정 상태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살아가면서 우리가 간혹 잊고 사는 슬픔의 면모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기쁨은 단지 슬픔의 또 다른 한 형태일 뿐이라고 가르쳐 준다. 절절한 슬픔을 경험한 사람에게 진정으로 기쁨의 의미를 더 크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주위에서 누군가가 무슨 일을 성취하여 크게 기뻐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때로는 그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은 항상 자신을 뒤돌아보며 반성하게 한다. 그리하여 단지 내가 불행한 처지에 빠지지 않았다고 다행스럽게 여길 것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을 겪는 사람의 심정이 되어 울어줄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정호승은 우리가 잊기 쉬운 이웃에 존재하는 소외된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서울의 예수>라는 두 번째 시집은 정호승의 사회의식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1980년대 광주의 비극을 딛고 집권한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가 담겨있다고 하겠는데, 표제작인 ‘서울의 예수’는 그러한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시적으로 잘 형상화하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이 시집에 수록되었던 ‘이별노래’는 가수 이동원이 불러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기도 했고, 이후 많은 가수들에 의해 재해석되었던 작품이다. 세 번째 시집이었던 <새벽편지>는 시인의 감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정호승의 '새벽편지 1' 전문)
누구나 다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요즘, 편지를 쓰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이다. 그래서 '새벽편지'라는 이 시의 제목이 의미하는 것도 쉽게 알아챌 수가 없을 것이다. '새벽편지'는 단순히 새벽에 쓴 편지라는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슨 말을 쓸까 밤을 꼬박 새우면서 온갖 고민을 한 이후에 쓴 편지이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화자는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겪고 난 후에, 밤을 새우면서 고민한 끝에 이 편지를 썼을 것이다.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라고.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서 쓰는 이 편지는 화자에게 '사랑도 운명이라고 / 용기도 운명이라고' 하는 자각에 도달한 것이리라. '홀로 남아 있는 용기가 / 있어야 한다고' 자위를 해보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그래서 더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지 못하는 화자는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말았던 사실을 용기를 내어 편지에 고백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반늦게 쓸쓸히 돌아서는 화자에게 문득 강물에 비친 달을 보면서,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라고 느꼈을 것이다. 화자는 상대방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이처럼 '새벽편지'에 담아 써 내려갔던 것이다.
마지막 항목은 1990년에 출간된 <별들은 따뜻하다>에 수록된 작품들 가운데 선택된 시들이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은 아마도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탓인지, 사회 의식보타 개인적 감성이 두드러지게 표출되었다고 여겨진다. 이후에 출간된 시집들과 함께 읽으면서 비교하면, 시인의 감성은 그대로 묻어나면서 작품의 경향이 조금씩 달라졌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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